로마서 11:15-18

15 내 동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어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16 처음 떼내어 드린 반죽의 일부분이 거룩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고,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한 법입니다.
17 참올리브 나무의 가지 중에서 얼마를 잘라 낸 뒤,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인 여러분을 원가지에 접붙이면, 접붙여진 가지는 참올리브 나무로부터 올라오는 양분을 받게 됩니다.
18 그러니 여러분은 잘려 나간 가지를 향해 자랑하지 마십시오. 자랑하더라도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사실입니다.

15 For since their rejection meant that God offered salvation to the rest of the world, their acceptance will be even more wonderful. It will be life for those who were dead!
16 And since Abraham and the other patriarchs were holy, their descendants will also be holy- just as the entire batch of dough is holy because the portion given as an offering is holy. For if the roots of the tree are holy, the branches will be, too.
17 But some of these branches from Abraham's tree- some of the people of Israel- have been broken off. And you Gentiles, who were branches from a wild olive tree, have been grafted in. So now you also receive the blessing God has promised Abraham and his children, sharing in the rich nourishment from the root of God's special olive tree.
18 But you must not brag about being grafted in to replace the branches that were broken off. You are just a branch, not the root.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넌 크리스천의 삶과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성경에 보면 우리 크리스천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데살로니카전서 4:7),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2)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레위기 19:2, 베드로전서 1:1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로마서 12:2)”라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가 성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그렇게 살아야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다른 무엇보다 먼저 구해야 합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넌 크리스천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5)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삶이 거룩해 집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Sovereign Lord has given me his words of wisdom, so that I know how to comfort the weary. Morning by morning he wakens me and opens my understanding to his will.”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지친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지 지혜의 말씀을 주셨다. 주께서 아침마다 나를 깨우시고 나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개역성경에는 ‘understanding’이 ‘명철(明哲)’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뜻입니다.

조금 신학적인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성서 학자들은 이 말씀의 배경이 바빌로니아 포로시대라고 합니다. 그 때 포로로 잡혀 간 유다 백성들이 가장 절망했던 것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절망을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절망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에 ‘이사야’라는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서 학자들은 그 때 하나님께서 사용한 사람은 이사야가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제 2 이사야’  혹은 ‘제 3 이사야’라는 말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야는 기원전 약 6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였거든요. 유대 민족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간 것은 이사야가 죽은 지 약 100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침마다 말씀의 지혜를 주셨고, 그는 절망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위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아침마다 (morning by morning)’라는 말씀입니다. 아침 혹은 새벽은 조용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에 좋고, 하나님과 소통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헤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사물을 잘 이해할 수 있는 ‘understanding’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딱 필요한 것들이 바로 ‘wisdom (knowledge) and understanding’ 이 두가지 아닙니까?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으니까, 때와 장소가 기도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기도 역시 사방이 고요한 새벽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새벽에 하나님 말씀 듣고, 새벽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새벽 시간을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마가복음에 1장에 나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35절)

시편 저자들 (psalmists)이 일제히 ‘아침’ 혹은 ‘새벽’을 주목하는 이유는 아침이 말씀을 묵상하는 데 좋고, 하나님과 기도하기에 좋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오직 주께 기도 드립니다. 아침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주께서 들으시는 줄 압니다.” (시편 88:13) 아침에 나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말은 아침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효과적으로 잘 된다는 뜻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변함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며 즐겁게 노래하겠습니다 (Satisfy us each morning with your unfailing love, so we may sing for joy to the end of our lives).” (시편 90:14) 무슨 말씀인가요? 아침 시간이야 말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 (unfailing love)’을 느끼고,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30: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영원합니다. 밤새 울었더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his anger lasts only a moment, but his favor lasts a lifetime! Weeping may last through the night, but joy comes in the morning.”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외에 어디서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밤새 울고, 잠을 못 잤습니다. 하지만 (but)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새벽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새 날과 함께 기쁨을 주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새벽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는 시간입니다. 새벽에 주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새벽에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벽의 유익 (profits)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유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가 길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녁 늦게 오랫동안 하는 일보다 이른 아침에 잠깐 하는 일이 더 성과가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아침이 저녁보다 집중력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침 (새벽)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해 놓으셨고, 그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는 시간으로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제 경우를 말한다면, 새벽 기도 시간은 저에게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입니다. 다른 아무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궁금한 말씀들, 난해한 말씀들을 묵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제가 새벽 기도 시간을 통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동안 ‘아침형 인간 (morning person)’이니, ‘저녁형 인간 (evening person)’ 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했습니다. ‘아침형 인간’이 되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Google에 들어가서 ‘아침 형 인간’, 혹은 ‘새벽 형 인간’을 찾아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론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책들도 많이 나와 있고요. 또 어떻게 하면 새벽 형 인간으로 내 삶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지 수많은 얘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밤이 즐거워도 아침과 맞바꾸지 말라.” “저녁에 할 일과 아침에 할 일이 다르다.” “수면시간은 오후 11시부터 오전 5시까지를 원칙으로 하라.”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제 공격은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아침의 1시간은 낮의 3시간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도 아침 형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런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1:15-18 말씀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새벽기도의 유익함을 말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인가?” 이 신학적인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땅 속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나무에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은 뿌리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생각했고, 그 나무의 가지는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가고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이 뿌리로부터 수액(樹液, sap)을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는 ‘접붙임의 원리 (The Principle of grafting)’에 주목했습니다. 바울이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처음 떼 내어 드린 반죽의 일부분이 거룩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고,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로마서 11:16),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도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뿌리로부터 수액을 공급 받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시나요? 어떤 사람이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얼마를 떼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반죽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조상들이 거룩하니까 그 조상들에게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도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된다는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삶의 곳곳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새벽 시간은 하루의 첫 시간입니다. 이 첫 시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시간이 모두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 떠서 다른 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자신의 삶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떼어 드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 됩니다. 첫 시간, 첫 수확, 첫 아들, 이렇게 ‘첫’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처음 난 것은 ‘firstfruits (첫 열매)’라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의 ‘첫 시간’이 언제 입니까? 잠에서 일어난 새벽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 간을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시려고, 이 시간에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unfailing love’를 경험하게 하시려고, 그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려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시간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귀한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그 때가 ‘청년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때’는 여러분의 ‘라이프 스팬 (life span)’에서 가장 귀한 가운데 토막입니다. 이 귀한 때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반죽을 만들어서 제일 먼저 한 부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한 반죽이 되는 것처럼, ‘청년의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 사람의 전체 삶이 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솔로몬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한 말입니다. 솔로몬이 왜 ‘청년의 때’를 강조해서 말했을까요? 이 귀한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이 사람 인생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변화 되기 때문에 ‘청년의 때’를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십시오. 시간도 하루의 첫 시간을 구별해서 주님께 드리고, 여러분의 삶에서도 가장 귀한 ‘청년의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변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