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55-58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죽음이 찌르는 것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5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쉬운성경)

여러분은 오늘 말씀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아가 8:6)”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강합니까? 죽음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결국 죽음 앞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쓴 솔로몬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강하긴 하지만, 사랑 역시 죽음처럼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사랑의 불길은 바닷물로도 끌 수 없고, 강물로도 끌 수 없고, 남자가 자기 재산을 다 바쳐도 한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사랑은 여기까지 였습니다. 바닷물로도 끌 수 없는 사랑의 열기(熱氣), 자기 재산을 다 바쳐도 얻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이 솔로몬이 알고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으면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 그 사랑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 (55절)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죽음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어디, 죽음아, 네가 그렇게 강하다지? 네 앞에 쓰러지 않는 사람이 없다지? 그래 네 무기가 있으면 한번 사용해 봐!” 이런 말씀 아닙니까? 세상에! 죽음을 놀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씀이 정말 무슨 말씀인지, 조금 더 자세하게 읽어 볼까요? “죽음이 찌르는 것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6절) 정말 알쏭달쏭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죄란 죽음을 가져 오는 독침입니다. 죄라는 독침을 맞으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죄가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율법이 존재하는 한 죄는 계속해서 막강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독침을 가지고 사람을 쏠 것입니다. 그 독침을 맞으면 그 누구도 살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요? 여기에 두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죄]→ [죽음]의 공식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율법]→[죄]→[죽음]의 공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부활하심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공식이 깨지고, 새로운 공식이 생겼습니다. [율법]→[죄]→[죽음]→[부활], 이런 공식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0:4). 예수님을 율법의 ‘끝판 왕’ 혹은 ‘종결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모든 benefits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두 주어지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된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율법]→[죄]→[죽음]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 (55절) 이렇게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 of Resurrection)’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 또 누가 죽음을 그렇게 조롱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들 중에 처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계속해서 다음 열매가 열립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해서 드디어 첫 열매가 어렵게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쉽게 계속해서 열매가 열립니다. 이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입니다.

크리스천의 가장 큰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우리 주님, ‘부활의 첫 열매’이신 우리 주님께 배웠습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우습게 봅니다. 죽음을 조롱합니다.

제가 1979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제 결혼식 주례를 서 주신 분이 제 모교인 감리교 신학대학의 학장이셨던 윤성범 목사님이십니다. 정확하게 결혼식 1주년이 되었을 때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허전했던 마음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장례식이 학교 강당에서 있었습니다. 저도 물론 장례식에 참석했었습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설교 전에, 다음 학장이 되신 변선환 목사님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51-58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보다 조금 더 긴 말씀입니다. 변선환 목사님이 특유의 목소리로 이 말씀을 또박또박 읽어가시는데, 전 그 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전 성경 말씀이 그렇게 파워풀 (powerful)하다는 것을 그 때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powerful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씀의 강력한 능력을 체험한 것은 그 때 그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이 끝이 나는데, ‘정말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그 때 느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참으로 풍성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 중의 은혜는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1)” 이렇게 말했을 때, 그가 그토록 체험하기를 원했던 ‘부활의 능력 (the mighty power that raised Jesus from the dead)’ 그리고 ‘부활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조롱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설교 처음 시작하면서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의 소망을 붙잡고 사는 우리가, 죽음을 이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동안 누구도 풀 수 없었던 난제 (難題)를 푼 것과 같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인류가 풀지 못한 난제가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998년에 보스턴의 부호 랜던 클레이 (Landon D. Clay)가 기금을 내고, 하바드 대학교의 수학자 아더 재피 (Arthur Machael Jaffe)가 ‘Clay Mathematics Institute’를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풀지 못했던 7가지 난제가 있는데, 이 중 하나를 푸는 사람에게 100불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그 연구소 본부가 피터보로 (Peterborough, NH 03458)에 있다고 하는데, 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 방문해 보시지요. 한국에도 KAIST 안에 ‘수학난제연구센터’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7가지 난제들 제목들만 훝어 봤는데, 제가 감히 풀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누가 이 중 한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은 틀림없이 굉장한 실력자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등학교 일반 수학 문제를 줘 보세요. 아마 쉽게 풀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아주 어렵다는 문제도 그런 사람에게 주면 아마 쉽게 풀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 같습니다.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별 것 아닙니다. 작은 문제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이기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멋모르고 ‘부활신앙’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신앙’을 알고 있다면, 정말 겁날 것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보다 더 큰 자산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부활의 능력’을 알고 싶다고 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라는 이름을 들어 봤을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 시대가 낳은 대단한 신학자였습니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1943년에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다가, 2차 대전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신학계로 보면 대단한 손실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형을 당하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This is the end–for me, the beginning of life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의 말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본회퍼에게도 죽음은 끝이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부활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의외로, 성경에는 ‘부활신앙’에 대하여 아주 쉽게 나옵니다. 이런 면에서도 성경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 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those who are Christ's)’,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all who belong to Christ)’,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 (all who cling to Christ)’이라고 합니다.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게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요한복음 15:5)”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remain’이라는 말이 ‘머물러 있다’ ‘.......안에 거하다’ 이런 뜻 아닙니까? 무슨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성실하게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꾸준하게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예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삶의 비결입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 이 이상 축복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개인의 얘기를 해서요. 그래도 이런 때에 한번이라도 칭찬을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벌써 10년 이상 되었을 것입니다. 꾸준하게 교회 꽃꽂이를 하시는 권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군지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처음에 배수찬 권사님 내외가 우리교회에 나왔습니다. 어느 날, 부인 고은경 집사님이 교회 꽃꽂이를 자기가 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게 쉬운 것 같지만 힘든 일이거든요. 그래 제가 그랬어요.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요. 주님의 일은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야 하는데, 중간에 힘들다고 그만 둘 것이면 아예 시작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해줬습니다. 며칠 후에 고 집사님이 자기가 한번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이후에 지금까지 교회 꽃꽂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57절) 이 말씀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앞 뒤를 잘 살펴 보세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인류의 난제를 풀어낸 탁월한 수학자와 같습니다. 죽음을 해결한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승리를 쟁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우리도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Let nothing move you”라고 했네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이 새롭게 들립니다. 우리를 흔드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너 교회에 나가니?”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신기한 듯이 묻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점점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처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이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입에서 조차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발언들이 나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경이 말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금 네가 믿고 있는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라!”

오늘 말씀은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8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NIV)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 속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말씀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고, 예수님께 붙어 있는 우리의 영성(靈性)은 그 뒤에 나오는 ‘the work of the Lord (주님의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영성은 증명되지 않은 영성입니다. 그런 영성은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영성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감히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부활신앙이란 다른 것 아니다. 주님의 일에 우리 자신들을 온전히 헌신하는 믿음이다.” 누가 주님의 일에 온전히 (fully)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믿는 사람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 아닙니까? 주 안에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온전히 자신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