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4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요한복음 11:28-44

오늘 말씀은 어제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는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 그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요. 이 사람들을 이 집 식구들을 위로하려고 온 마을 사람들입니다. 나사로의 dead body는 이미 굴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좀 어수선한 분위기가 읽혀 집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을 밖에서 먼저 마르다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마리아를 불러냅니다.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그 때까지 줄곧 마르다를 만났던 곳에 계셨습니다.” (30절)

예수님의 전갈을 받고 마리아가 ‘황급히 (hastily)’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마리아가 너무 슬퍼서 무덤에 가서 울려고 나가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가 확실하게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뒤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 오빠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사 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39절) 예수님께서 그 집에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많이 아파서 거의 죽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황급하게 나간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 지 보여 줍니다. 오빠가 죽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마리아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저의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2절)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도 예수님에게 똑 같은 말을 했었습니다. 오빠가 아프다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했는데, 무슨 일인지 이렇게 늦게 오신 예수님께 대한 원망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원망의 마음보다 더 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Love never gives up, never loses faith, is always hopeful, and endures through every circumstance.” (고린도전서 13:7, NLT) 이 말씀이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ve is always supportive, loyal, hopeful, and trusting.”

마리아의 뒤를 따라 온 마을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도 격한 감정이 들면서 몹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When Jesus saw her weeping and saw the other people wailing with her, a deep anger welled up within him①, and he was deeply troubled. /①Or he was angry in his spirit 다른 번역 성경들을 보면 “His heart was touched, and he was deeply moved (Good News Translation)” 이렇게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7:16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온 도시가 우상들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He was deeply troubled by all the idols he saw everywhere in the city).”

그 때 예수님이 화가 났다는 표현도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지금 자기 오빠가 죽었다고 마리아는 슬피 울고 있고, 마을 사람들은 마리아를 위로하고 슬픔을 같이 나누는 마음에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 여러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지요? 저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전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이것이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화가 나신 것입니다. 왜? “부활이요, 생명인 내가 그들 앞에 있는데, 왜 나를 믿지 않고 이 사람들은 슬피 우는가?” 이것이 예수님께서 화가 나신 이유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화가 난 이유도 그렇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왜 자기들이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서 철학적인 토론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들에게 빠져 있는가?”

끝내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은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같이 느끼는, ‘compassion’ ‘sympathy’에서 오는 눈물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몹시 아픈 마음으로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 무덤은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아 놓은 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오빠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사 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주님, 이젠 아무 소용 없어요. 너무 늦었어요.) 이 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생각을 읽으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Didn't I tell you that you would see God's glory if you believe)?” (40절)

여러분, 우리 믿음생활이 이 말씀처럼 중요한 말씀이 있을까요?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So he did only a few miracles there because of their unbelief).” (마태복음 13:58)

또 하나 더 봐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And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without faith. Anyone who wants to come to him must believe that God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 (히브리서 11:6) 그 어느 누구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 가지를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일에 관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관계하신다는 것입니다. “God is in control!”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물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상을 받는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스스로 있으시는 분, ‘I AM’이십니다. 그분이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 Everyone who lives in me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ever die”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말하려면 “I AM is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절망 속에서, 우리의 모든 계획이 무산되는 절망 속에서, 나의 삶의 계획들이 모두 무너지는 절망 속에서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도 유효합니다. 평생 이 말씀을 붙들고 사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도 이 말씀을 믿고 받아 들이십시오. 믿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동일하신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4/3/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3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1:1-27

오늘 말씀은 ‘베다니 (Bethany)’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일어난 표적 (sign)입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조금 못되는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 오빠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좋아했다는 표현이 좋을까요? 그리고, 예수님도 이 세 사람을 아꼈고, 그 집을 편안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오실 때는 자주 이 집을 들렀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는 매일 이 집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고난주간에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는 사건도 이 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18). 마침 저만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뭐 좀 열매가 있으려나 하고 가 봤더니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집에 예수님을 접대하기를 좋아하는 마르다라는 언니가 있는데, 왜 이른 아침에 예수님 아침 식사를 대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생각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는 생각이고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날 아침에 예수님은 배가 고프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찾으시다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셔야 했고, 열매가 없자 그 무화과나무를 반드시 저주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예배의 기능을 상실한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사건이었거든요. 성경을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날 아침 베다니에 있는 그 집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못할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예수님은 빈 속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은요. 베다니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것입니다. 나사로가 몹시 아픈 것입니다.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요. 성경에는 그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이 병이 들었습니다.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라는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 주었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든 것입니다.” (1-3절) 마리아와 마르다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몹시 위독합니다.” (3절) 예수님께서 평소에 그렇게 사랑하는 집 사람들이니까 열일 제쳐 놓고 베다니로 가야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좀 달랐습니다. “이 병은 죽게 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것이다.” (4절)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씀이지요? 나면서부터 앞으로 보지 못했던 사람, 그 사람의 불행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이 사람에게서 일어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은 다시 한번 이렇게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셨습니다.” (5-6절) 요한이 보기에도 그 때 예수님의 그런 행동은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틀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땅으로 가자! 우리 친구 나사로가 깊이 잠들었으니, 그를 깨우러 가야겠다 (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나사로가 잠들었다면 곧 낫게 되겠네요” 하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다시 그 때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사로가 정말로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3-14절)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매우 혼란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뭐지?” “내가 너희를 위해서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것이 기쁘다. 이것은 너희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제 나사로에게 가자.” (15절)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혼란해 하면서 나사로의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이틀이나 시간을 끌었고, 결국 그런 사이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뭔가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인류가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과제입니다. 의술이 발달함에 따라 과거에는 불치의 병으로 알았던 병들이 속속 치유되고 있습니다만, 죽음의 문제는 인류가 손을 대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도 백신만 개발이 되면, 우리가 플루가 유행할 때 백신을 맞으면 크게 감염을 염려하지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지금처럼 불안에 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금방 나올 것 같던 백신이 1년도 넘게 걸려야 맞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잘못된 백신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합니다. 아무튼, 과거에 고칠 수 없었던 질병들을 많이 고칠 수 있게 되어 병으로 죽는 사람들의 줄어들고, 인간의 수명은 길어졌습니다. 이젠 특별한 고질병만 없으면 80세, 90세가 되도록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80세, 90세가 되면서 노인 인구가 많아졌습니다. 노인들에게 찾아 오는 ‘치매’가 찾아와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치매가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 문제로 부상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질병을 퇴치해서 인간의 수명은 길어졌지만, 여전히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뭔가 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 나머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도 많지 않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께서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가사가 생각납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 드리세 (후렴)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될 줄을 모를까.” 오늘 성경 말씀은 이 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왜 너희의 죄의 짐을, 걱정과 근심을, 너희의 괴로움을 너희의 낙심을 주께 맡기지 않느냐?”

뒤늦게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그 집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있었고, 죽은 지 4일이나 되었습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 오빠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사 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21-22, 39절) 마르다의 말은 그냥 예수님께 대한 예의 바른 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5-26절)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 Everyone who lives in me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이 말씀 속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 모두 드러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선언하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도구로 이용하신 것입니다. 어저께, 그저께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 선언을 하기 위해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한 남자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불행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니요?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없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고요.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심으로 이 말씀이 맞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立證)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미스터리한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anyone who believes in me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처음 나온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요한복음 3:16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For God loved the world so much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이 말씀에도 ‘everyone who believes in Him’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똑 같이,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인 것처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나와 똑 같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엄청난 말씀이 나의 삶과 관계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교회에게 적용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한번 보실까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 온 것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먼저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23) 마지막 23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ut there is an order to this resurrection: Christ was raised as the first of the harvest; then all who belong to Christ will be raised when he comes back.” (NLT)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순서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이지 아시지요? 우리가 정말 부활을 믿는다면 말씀입니다. 이 말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부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부활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바뀌어야 맞습니다.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이 뒤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 때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고, 이 지식이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부활이 있다는 메시지가 성경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2020년 4월 3일 사순절 새벽기도에서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이런 말을 들었지만 진지하게 듣지 않았거든요? 이 날 새벽에 우리는 처음으로 이 말씀을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이 메시지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아야 맞습니다. 이것은 ‘지동설’이나 ‘지구가 둥글다’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소식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소식을 듣고도 마치 부활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4/2/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2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명한다

요한복음 10:19-42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사건 (기적)은 오랫동안 유대 사회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이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가짜 뉴스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말도 유대 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태복음 12:24).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돼. 귀신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21절)?” 하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를 애태우게 할 작정입니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터놓고 그렇다고 말해 주십시오.” (24절)

예수님은 이 질문에 “내가 전에도 여러 번 말했는데,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듣고, 나도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나를 따른다.” (27절)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The proof is the work I do in my Father's name)”는 말씀입니다. 그 뒤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나를 믿지 마라. 하지만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37-38절) “Don't believe me unless I carry out my Father's work. But if I do his work, believe in the evidence of the miraculous works I have done, even if you don't believe me. Then you will know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이 말씀의 의미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정직하게, 성실하게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잖아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고요.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요한이 세례에 관해 설교한 이후,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 땅에 걸쳐 발생한 큰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인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셨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목격한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10:37-39)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설교 속에 나오는 말씀이어서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줍니다. 베드로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섬기는 사역이지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료 사역이지요? 이 치료 사역의 의미가 큽니다. 지금 미국에 뒤늦게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져서 전문가들의 말이 10만, 20만명이 죽는다고 하잖아요? 큰 소리 치던 트럼프 대통령이 맥이 빠졌습니다. 며칠 전까지도 이번 부활절에는 사태가 해결된다고 큰 소리 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병고치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은 그 때 사람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을 예수님께서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눈에는 이런 예수님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을 부으신 분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말씀 사역이지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니까 제자의 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 것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한번 적용을 해 보세요.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들, 그 일들이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합니다. 저는 분명히 믿기를 이 간단한 생각이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일들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과 관계되어야 하고, 여러분이 받은 은사 (gifts)와 관계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여러분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를 증명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연변 용정에 가면 명동촌에 명동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김약연 목사님 (1868-1942)입니다. ‘간도 대통령’으로 불릴만큼 훌륭한 분입니다. 당시에 크고 굵직한 모든 애국 운동에 김약연 목사님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 옆에 시인 윤동주 (1917-1945)와 문익환 목사님 (1918-1994)의 생가(生家)가 있습니다. 둘 모두 명동교회를 다니면서 김약연 목사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의 신조는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잖아요? 유언 속에 그 사람의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나의 유언과 같다고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진실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웬만큼 진실하게 산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북간도의 십자가’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습니다. 유튜브에서도 웬만큼 이 다큐멘터리의 스토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큐에 김약연 목사님과 윤동주, 문익환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그 시절 북간도에서 그렇게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쏟아져 나왔느냐 하는 것이 그 다큐멘터리의 내용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명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더욱 더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삶으로) 표현하는 일을 훈련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믿음생활의 문제는 뭘 잘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그 사람들과 오늘 우리를 비교해 보면, 우리가 훨씬 더 성경 지식이 많을걸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들과 우리를 비교해 보면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생활을 지식으로 배우지 않고 행동으로 배웠습니다. 그들은 아는 것보다 행동이 앞섰습니다. 기독교인은 이렇게 산다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지식은 많은데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초대 교회 사람들은 행동으로 믿음생활을 배웠지만, 그들의 믿음은 견고했습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저는 터키 성지순례를 하면서 ‘카타콤 (catacomb)’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무엇이 이들의 믿음을 이렇게 견고하게 만들었을까 하고요.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7: 24-27 말씀이었습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집은 바위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쳤을 때, 그 집은 쉽게 무너졌는데, 그 무너진 정도가 심하였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견고한 믿음생활의 비결은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기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믿음생활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고, 쉽게 흔들리고, 견고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명한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나를 믿지 마라. 하지만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0:25, 37-38)


4/1/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1

요한복음 10:1-18

어저께 ‘apologist’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Samuel Greeleaf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사람이 한 말 중에 꼭 보여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그가 한 말을 보실까요? “A person who rejects Christ may choose to say that I do not accept it, he may not choose to say there is not enough evidence (어떤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들어갈까요? 오늘 말씀도 긴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내 양 (my own sheep, 14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고 우리는 그 목자를 따르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생각 속에 다윗이 쓴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이 들어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있을 법한 생각 아닙니까?

많은 화가들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그림은 Warner Sallman (1892-1968, 미국)이 그린 ‘The Good Shepherd (선한 목자)’입니다. 그 그림 한번 보실까요? 오늘 읽은 말씀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다” 이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Warner Sallman이 그린 또 하나의 명작이 있는데, 그 그림 제목이 ‘The Head of Christ’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The Head of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이마)’인 것이 참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이마가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Sallman이 그린 예수님의 이마를 한번 보십시오. 빛이 나면서 강인한 인상을 주지 않습니까? 전체적으로는 온유한 예수님의 모습이지만, 강인한 의지를 가진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이 그림에 우리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다시 Sallman이 그린 ‘선한 목자’ 그림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 (누가복음 15:4-6) ’가 생각이 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뒤로 잔잔한 강이 흐르고 있고, 양들 앞에는 풀밭이 있습니다. 양들의 표정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표정들입니다. 양 가운데 서 계시는 예수님 역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양과 목자이신 예수님의 관계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가관인 것은 많은 목사들이 자기들을 목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에게 ‘pastor’라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런데, 이 ‘pastor’라는 말이 ‘a person who leads to pasture (초장으로 인도하는 사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pastor’는 목장에서 ‘양을 치는 사람 (shepherd)’을 말합니다. 목사들의 모임에 가 보면 회장이라는 사람이 나가서 “여러분, 각자의 목장에서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합니다. 또 대표 기도하는 사람은 그런 기도를 합니다. 정말 가관입니다. 제가 여러 번 목사들 앞에서 설교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무슨 목자냐? 당신들이 양들을 인도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금의 교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도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목사들은 목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 역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양들 중에 하나이다” 이렇게 열변을 여러 번 토했지만 소용 없습니다. 여전히 자기들이 목자인 줄 압니다. 그런 생각들이 몸에 뱄습니다. 목사들은 지금보다 한 없이 더 낮아지고 겸손해 져야 합니다. 목사가 무슨 특권일 줄 아는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프랜시스 교황이 신부들 (막사들)에게 이렇게 말해서 그 말이 화제가 되었었잖아요? “여러분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여전히 교황도 목사와 양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목사들이 양 무리 속으로 들어가야 한 것은 퍽 인상적입니다. 목사가 무슨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목사는 사역자에 불과합니다 (고린도전서 3:22-23).

제가 클레아몬트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신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한 과목을 들었는데, 그 과목이 목회학에 해당하는 과목이었습니다. 거기서 한 책을 소개 받았는데, 리차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라는, 영국의 청교도 목사님이 쓴 ‘The Reformed Pastor’라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구구절절이 목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를 깨우쳐 주는 책이었습니다. 정말 양들을 위해서 깨어 있고, 돌보고, 자신을 모두 희생해야 하는 사람이 목사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어떻게 자기 관리를 하고, 자기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애써야 하는지, 목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목사라면 목자라는 타이틀을 가질 자격이 있겠다고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0-11절) 양들의 생명을 훔치고, 죽이고, 빼앗고, 파괴하는 사람은 목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버젓이 목자의 자리에 앉아 있고, 그 보다 더 한 명칭을 자기에게 갖다 붙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처럼 목자가 아니라 삯꾼입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돈이 탐나서 일하는 사람이지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의 삶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그렇게 안 읽어서 그렇지 한번 보세요.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뭡니까? 가슴이 섬칫하지 않습니까? 정말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이 남긴 유서와 같은 말씀을 지금 읽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도 목자를 안다고 했습니다 (14절).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음성을 안다고 했습니다 (3-4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완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안다 (1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목자는 양들을 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의 전부를, 양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아는 것입니다. 양들의 필요가 무엇이지 알고, 또 때를 따라 양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완전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목자라는 것입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가는 것은 이런 목자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분을 따라가면 나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풀을 뜯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저 분의 보호 아래서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분의 인도 아래서 나의 생명이 더 풍성해 질 것이다.” 목자에 대한 이런 신뢰가 없으면 어떻게 목자를 따라 가겠습니까?  “하지만 양들은 낯선 사람을 절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5, 8절)”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또 자기를 ‘문 (the gate)’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9절)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출입 (出入)’이라고 합니다. ‘출입’은 우리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집을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쉬고 잠을 잡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오고 나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들어오고 나가면서 ‘문’이신 예수님을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정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적절하게 자기 자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표현하셨습니다.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7-8)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사방을 찾던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발견한다는 시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을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길 잃은 양처럼 잘못된 길로 갔지만, 이제는 영혼을 살피시는 목자와 보호자의 품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베드로전서 2:21-25)

마지막 절 25절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the Guardian of your souls.”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모두 양 같이 방황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목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목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시고, 영혼의 가디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가디언’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가디언’는 부모를 대신해서 그 아이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가디언’은 부모를 대신하기 때문에 법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책임 있게 관리하고 돌보시는 ‘가디언’과 같은 분이라고 합니다. Guardian이라고 할 때 ‘G’자로 대문자로 썼지요?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이분을 신뢰하고, 이분을 믿고, 이분을 따라가는 이상 우리의 삶은 안전합니다. 그리고 만족한 삶이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목자로 삼고, 여러분의 영혼의 ‘가디언’으로 삼는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양이 할 수 있는 것은 목자를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목자가 해야 하는 것은 양을 돌보고,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양들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여러분의 인생을 ‘선한 목자 (The Good Shepherd)’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가디언 (The Guardian of our souls)’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는 결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행복하고 만족한 삶이 됩니다.


3/31/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0

THE FIRST APOLOGIST

요한복음 9:18-41

오늘 말씀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사건의 여파(餘波)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3절)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언제,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의 불행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이 이 문제가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 고난, 절망, 이런 것들이 아무 뜻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면, 그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언제,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제가 길고 복잡한 문제를 몇 가지 이슈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이 사건은 유대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실 성경을 읽어보면 이 사건 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라는 사람은 죽은 지 4일이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 사건이 유대 사회에 주었을 충격은 이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인파가 모여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수많은 인파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요? 이 성경 말씀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께 가서 그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유월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함께 있던 많은 군중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언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0-13, 17-18) 사실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 내신 이야기가 성경에 또 한번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데요.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에 가셨을 때 이미 죽어서 관 속에 들어 있는 한 청년을 살려 내신 말씀입니다. 이 청년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아들이 죽자 모든 희망이 끊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아들을 살려내서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11-15).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이 사건은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오늘날에도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에 대한 사건은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습니다. 지금 같으면 ‘실검 순위 1위’로 떠 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이 맞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하고 비슷하기는 한데 그 사람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9:8-9).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앞을 못보고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던 사람이 두 눈을 뜨고 있으니,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둘째로, 유대 지도자들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이 사람의 사건을 자세하게 조사했습니다. 조사한 이유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면밀하게 조사해서 사건의 진상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사건이 사람들에게 큰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사건이 진실이 아니라, 잘못 알려진 사건임을 입증해서 예수님에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본인을 두 차례나 심문했고, 그 부모까지 찾아가서 이 사람이 당신 아들이 맞는지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남자에게 묻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남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의 부모에게 사람들을 보내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 맞습니까?” “그 아이가 우리 아들 맞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그 아이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 우리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는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가 대답을 할 만큼 나이도 먹었으니,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요한복음 9:23)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의 부모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쫓아 내기로 이미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22)

여러분, 이 말씀에서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적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인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회당에서 쫓아낸다고 했는데, 이것을 영어 단어로 ‘excommunication’이라고 합니다. 동사는 ‘excommunicate’입니다. 위의 말씀을 이렇게 잘 번역했습니다. “His parents said these things because they feared the Jews, for the Jews had already agreed that if anyone confessed him [to be the] Christ, he should be excommunicated from the synagogue.” (Darby Bible Translation) 한국 말로 번역한다면 ‘파문(破門)’입니다. 그 뜻은 ‘the ecclesiastical sentence by which a person is excommunicated’입니다. 유대사회 같은 종교사회에서는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이 사람 간의 대화를 한번 들어 보시지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 우리는 그 사람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있소.”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한 가지는 전에 제가 앞을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9:24-25) “흠, 그래? 그 예수라는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시 말해 보시오.” “내가 이미 여러 번 말했는데, 무엇을 다시 듣고 싶으십니까? 혹시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그의 제자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들이오. 우리는 모세는 잘 알지만, 예수라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릅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눈을 고쳐 주었는데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다니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에 화가 난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놈이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해?’ 하면서 그 사람을 쫓아 내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9:25-34)

여러분, 이 사람이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이 사람은 온갖 위험과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불행을 통하여 이런 식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최초의 ‘apologist’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사로 같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훌륭한 ‘apologist’로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사람은 적극적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람보다 뒤의 사람인데,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apologist’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큼 장시간에, 열정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호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대표적인 ‘apologist’는 제가 지난 해 부활절 예배에서 소개했던 Simon Greenleaf (1783-1853)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바드 법대를 창설한 사람입니다. ‘전도자의 증언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1846)’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의 전공은 법정에서 어떤 증거가 실효성 있는지에 대한 연구입니다. 이 사람은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무 증거 없는 사건이라는 결론을 얻을 줄 알았습니다. 그는 사복음서에서 부활의 증거를 수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얻은 결론은 “부활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건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스스로 얻은 결론을 부인할 수 없어서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었고, 유력한 apologist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최고의 ‘apologist’는 C. S. Lewis (1898-1963)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Screwtape Letters, 1942)’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 1950-1956)’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1952)’ 같은 수많은 기독교를 옹호하는 책들을 썼습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그가 쓴 최대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신학적인 입장이나 전통의 차이점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시각에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요소들을 배제한, 순수한 기독교란 어떤 것인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번역이 잘된 번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불행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의 불행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경우 이 사람의 불행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불행을 통해서 이 사람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절망과 불행이 있습니까? 문제는 나의 불행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결국 회당에서 쫓아냈습니다 (34절). 다시 이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그는 회당에서 쫓겨나는 불이익을 받았지만, 이제 이 사람은 이런 일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는 사람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를 만나러 오신 것은 감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겁니다. “너는 인자를 믿느냐?” “선생님, 인자가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너는 이미 그분을 보았다. 지금 너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39절) “Then Jesus told him, ‘I entered this world to render judgment--to give sight to the blind and to show those who think they see that they are blind.’” 마침 옆에서 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그럼 우리가 앞을 보지 못한단 말이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those who think they see (자기들은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는 시각장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잘 봅니다. 우리가 blind라고요?” 예, 이런 사람들이 blind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영적 시각장애자 (spiritual blind)’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장애자가 아니고요. 눈은 잘 보이고 좋은 시력을 가졌으나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장애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든지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장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장애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이런 예수님의 생각과 관점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자유함을 얻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