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I) Season’s Blessing Of God

예레미야 17:5-10

지난 주일에 ‘계절이 주는 축복’ 설교에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탐스러운 과일들을 보면서 “나는 한 해 동안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반성(反省)하는 것이 계절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구약성경 예레미야 17:5-10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을 의지하며 육체를 자기 힘으로 삼고 여호와께 마음을 돌린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읽지 않기 때문에 왜 이런 말씀이 나오는지, 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16대 요시야 왕 때부터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예언자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언자로 살았던 시기는 기원전 627년부터 586년까지 41년 간입니다. 조국 유다 왕국이 기울어가던 때였습니다. 그 때의 국제 정세는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 제국의 힘이 약화되고, 신흥 제국 바빌로니아의 힘이 날로 강해지던 때였습니다. 바빌로니아는 계속 유다 왕국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나라를 지키려고 외교전을 펴고 있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 왕국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예언자들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렇게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는 쇠로 만든 연필로 적혀 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마음 판에 뾰족한 쇠 끝으로 새겨져 있고, 그들의 제단 모퉁이에도 새겨져 있다.” (예레미야 17:1)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예레미야 1:10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려고 한다(I appoint you over nations to uproot and tear down, to destroy and overthrow, to build and to plant).” 하나님은 자기 백성 유다 왕국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죄로 물든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고 의인 노아의 후손들을 데리고 새로운 자기 백성들을 만드시려고 했던 때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배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두 종류의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별로 큰 차이점이 없는 것 같지요? 하지만, 결과는 아주 다르거든요? 마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차이점과 같습니다.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거든요? 넓은 문으로 들어간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멸망합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열매라는 메타포(metaphor, 은유)가 등장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메타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막에서 자라고 있는 볼품없는 떨기나무가 보여주는 메타포입니다. 저는 예루살렘과 터키 성지 순례를 하면서 광야에서 자라는 떨기나무들을 많이 봤습니다. 화면을 보십시오, 이런 나무들이 히브리 말로 ‘세네(seneh)’라는 ‘떨기나무’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봤던 불타는 떨기나무가 바로 이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떨기나무는 히브리 말로 ‘아르아르(ar‘ar)’라는 나무인데 ‘소돔의 사과(Apple of Sodom)’라고 불리는 나무입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함께 저주를 받은 나무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세요. 이 나무가 예레미야 17장에 나오는 ‘소돔의 사과’입니다. 

‘소돔의 사과’는 제법 크고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 열매는 안이 텅 비어 있고 솜처럼 하얀 실 같은 것들이 엉켜 있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지를 자르면 우유처럼 희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독(毒)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할 때 화살촉에 이 액체를 바르거나 적(敵)의 우물에 이 액체를 탄다고 합니다. 마치 옻나무처럼, 예민한 사람은 이 나무 옆에만 가도 이 나무의 독성(毒性)에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소돔의 사과’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런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입니다. “Cursed is the one who trusts in man, who depends on flesh for his strength and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5절) “그들은 사막의 키 작은 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찾아와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 황무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6절)

끔찍하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찾아와도 보지 못한다”는 말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에서 황폐한 살기 때문에,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독성이 있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또 하나의 메타포가 나옵니다. 6절에 나오는 ‘물가에 심은 나무(a tree planted by the water)’라는 메타포입니다. 이 나무는 뿌리를 물(stream)에 대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지 않아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뜨거운 햇빛 속에서도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잎이 마르는 일이 없고 늘 잎이 푸르고 무성합니다. 뿌리가 물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항상 열매를 맺습니다(It never fails to bear fruit). 

이런 사람은 ‘여호와를 믿고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사람(the man who trusts in the LORD, whose confidence is in him, 7절)’이라고 했습니다. ‘trust’ ‘confidenc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갖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118:8-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 ‘피난처(refuge)’를 둔다는 뜻입니다. 내 삶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내 삶이 위험에 빠졌을 때, 내 삶이 불안할 때, 내 삶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 달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가끔 제 아내와 함께 찰스 강변을 산책합니다. 며칠 전에 하바드 쪽으로 강변을 걷다가 유난히 반듯하고 예쁘게 자란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나무들이 예쁘게, 균형 있게 자랐을까?” 하면서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얘기의 결론은 찰스강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모자라고, 성장 조건이 좋지 않으면 그렇게 반듯하고 균형 있게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한국에 경기도 양평에 가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하는데요. 이 나무는 높이 50미터, 굵기 14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굉장하지요? 그런데, 매년 이 나무에서 120말(약 2,160리터)의 열매를 거둔다고 합니다. 이 은행나무가 그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이유는 나무에서 뻗어 나간 뿌리가 근처 시냇가에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이 유다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히브리 말로 죄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마르타노(hamartano)’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요. 이 말은 본래 활을 쏘는 사람들이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을 말할 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죄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하는데, 하나님 대신 사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앗시리아를 찾습니까? 왜 앗시리아가 우리를 도와서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까? 이것이 과녁이 빗나간 삶이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떨기나무 같은 삶, ‘소돔의 사과’같은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삶을 살 것이냐?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안에 하얀 실 같은 것이 얽혀 있어서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것이냐?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앗시리아를 피난처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것이냐?” 결정해야 합니다. “앗시리아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앗시리아(사람의 힘)를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앗시리아를 의지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런 설교를 할 때 늘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하면 무슨 일이든지 어려움 없이 잘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라는 메타포가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세요. 물가에 심은 나무도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을 겪습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도 한 낮의 뜨거운 햇볕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물가에 심은 나무’는 그 뿌리를 물에 대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도 견딜 수 있고, 가물어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그렇거든요? 뿌리를 물에 대고 있는 나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견딥니다. 견고합니다. 

누가 사람을 신뢰하고 사람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누가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누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 어느 것보다도 비뚤어진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악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속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사람의 속을 살필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볼 수 있다.” (9-10절)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라고 합니다. ‘deceitful’이라는 말은 ‘남을 속이는’ ‘사기를 치는’ 이런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남을 잘 속이고, 사기를 잘 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하는 척을 잘합니까?  그래서 잠깐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영원히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I the LORD search the heart and examine the mind”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을이 주는 계절의 축복은 우리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인지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seasons change and you change, but the Lord abides evermore the same, and the streams of His love are as deep, as broad and as full as ever(계절은 변하고 당신도 변하지만 주님은 영원히 동일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넓고 풍부합니다).” 기가 막힌 명언 아닙니까? “계절도 변하고 당신도 변하지만.....” 제가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가 34살 때였습니다.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사랑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 계절에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 이 또한 계절이 주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10/17/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 Season’s Blessing Of God

요한복음 15:5-10

요즘 좋은 가을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늘이 어찌나 맑고 높은 지,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많습니다. 예로부터 가을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인데요. 가을은 곡식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계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을을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고도 합니다. 가을 밤은 기온이 선선하기 때문에 등불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기에 좋은 계절이라는 뜻입니다. 이 좋은 계절에 좋은 책을 가까이해 보시지요. 인문학적인 소양을 기를 수 있는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읽으면 모든 면에서 유익한 점들이 많습니다. ‘천고마비’ 외에도 가을을 가리키는 말로 ‘만추가경(晩秋佳景)’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늦가을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한 두주만 지나면 메모리얼 드라이브와 찰스 강변이 아름답게 물들 것 같습니다. 한번 Route 2를 타고 ‘모학 트레일(Mohawk Trail)’을 드라이브해 보시지요. ‘모학(Mohawk)이라는 인디언 부족들의 이동(移動) 루트인데, 단풍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말 그대로 ‘만추가경’입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고, 시기가 있는 법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There is a season (a time appointed) for everything and a time for every delight and event or purpose under heaven”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시기(a time appointed)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기쁨(delight)과 사건(event)과 목적(purpose)을 위한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조바심을 내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가 있다고 믿으니까요. 

솔로몬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으며(A time to be born and a time to die. A time to plant and a time to harvest)......” (전도서 3:2) 이 말씀처럼 우리 인생에는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씨앗을 심는 농부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봄이 지나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 곡식이 익고 열매가 열립니다. 농부는 심고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을 알기에 수확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감내(堪耐)합니다.

몇 주 전에 애플 피킹을 가셨던 분들이 저희 집에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많이 주셨습니다. 먹어보았더니 안에 주스가 많아서 시원하고 달았습니다. 제가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이 주셨는데, 몇 개를 먹고 남은 것을 찍었습니다. 정말 색깔도 곱고 맛있게 익었지요? 

열매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20)”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Yes, just as you can identify a tree by its fruit, so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actions” 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열매’라는 말은 우리의 ‘행동’을 나타내는 메타포(metaphor)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매’가 우리의 삶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탐스러운 열매들을 보면서 “나는 과연 한 해 동안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고 반성(反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계절이 주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전략을 세우고, 목표를 세워 그 일을 추진합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그만큼 애를 쓰고, 마음을 들이면 수고한만큼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편 127: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 그만한 대가가 주어지고, 수고에 맞는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얼마나 낙심 됩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열매 맺는 삶의 비결(秘訣)이 나와 있습니다. 이 비결은, 내가 수고한 만큼, 내가 애쓴 만큼, 내가 투자한 만큼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애쓰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 삶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이 열매 맺는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경험해 봐야 합니다. 시편 127편에 나오는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로 열매 맺는 삶에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 비결을 알기 쉽게 포도나무를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나무 가지에 열매가 열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포도나무 가지에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달리려면 가지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 말도 안 되는 질문 아닙니까? 가지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포도나무에 건강하게 잘 붙어 있으면 됩니다. 잘 붙어 있기만 하면 때가 되면 열매가 저절로 열립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가지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지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포도나무로부터 ‘수액(樹液, tree sap)’을 공급받는 일입니다. 최근에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나무의 수액을 채취해서 먹습니다. 심지어 상품으로 팔기도 합니다. 고로쇠나무나 박달나무의 수액에는 각종 몸에 좋은 미네랄(mineral)이 많이 들어 있어서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우리가 많이 먹는 ‘메이플 시럽(maple syrup)’도 단풍나무의 수액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지에 포도가 열리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에서 가지로 ‘수액’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잘려진 가지나 부러진 가지에는 ‘수액’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열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원리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a branch cannot produce fruit if it is severed from the vine, 4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나무를 많이 재배합니다. 포도 열매를 따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가 일상적인 음료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을 봐. 저 사람은 술꾼이야. 세리와 죄인의 친구야(마태복음 11:19)” 라고 비난했습니다. 평범한 식탁에 나오는 포도주 잔이지만 예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술꾼’이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 재배에 익숙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에,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에,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1, 5절).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이 원리를 제자들의 삶에 적용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곧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Remain in Jesus). 나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나누는 친밀한 교제(a close fellowship with Jesus)’의 삶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고 “예수님과 어떻게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지?” 하고 질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you may ask for anything you want, and it will be granted).” (7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My Father is glorified and honored by this, when you bear much fruit, and prove yourselves to be My [true] disciples, Amplified Bible).” (8절) 크리스천의 삶에서 열매 맺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어도 되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열매를 안 맺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열매’는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ID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열매’만 있으면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맺는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명서(證明書, identification card)’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운전 면허증’을 꼭 가지고 다닙니다. 미국에서는 ‘운전 면허증’이 곧 ‘신분증(ID)’이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에서 ‘열매’가 꼭 그렇습니다. ‘열매’를 맺는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 영국)’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선교의 문을 연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의 ‘내지 선교(內地宣敎, Inland Mission)’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이전에 중국에 온 선교사들이 주로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교통과 통신 시설이 없는 깊숙한 오지(奧地)로 들어가 선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아니, 해안 지역에도 할 일이 많은데, 왜 굳이 내륙으로 들어가려고 하는가?” 하면서 그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가 중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무릎을 꿇지 않은 채 태양이 떠오르는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영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내지 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테일러가 처음부터 선교사로서 성공했던 것은 아닙니다. 테일러 역시 초기에는 선교의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불현듯이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5) 허드슨 테일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주님께 고백했다고 합니다. “The branch of the vine does not worry, and toil, and rush here to seek for sunshine, and there to find rain. No; it rests in union and communion with the vine...Let us so abide in the Lord Jesus(포도나무 가지는 걱정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햇볕을 찾거나 비를 맞으려고 달려가지도 않는다. 포도나무 가지는 다만 포도나무와 연합하고 교통하면서 온전하게 붙어 있을 뿐이다. 우리도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자).” 허드슨 테일러는 그 때부터 선교 전략을 수정하고 주님과의 교제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때부터 그의 선교에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크리스천의 삶은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지만, 나의 노력과 열심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두가지 삶의 모드(modes)가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삶의 모드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하는 삶의 모드가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두 가지 모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신명기 8:3)”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빵만 가지고는 결코 만족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는 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나의 삶에 풍성한 열매가 있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열매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나의 믿음생활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열매 맺는 삶의 비결’에 대한 말씀을 읽고, 주님과의 교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나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닌, 내가 애써 수고하고 대가로 열매를 얻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 새로운 크리스천의 삶, 새로운 제자의 삶에 눈을 뜨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0/10/2021 | 창립 43주년 기념 예배

증언 공동체로서의 교회 The Church As A Witnessing Community

마태복음 16:13-20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1978년에 우리 교회를 창립했던 분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권위주의나 교권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세우고, 다음 세대를 기르자는 목적을 가지고 하바드 스퀘어에 있는 11 Garden Street, Cambridge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2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2,000년 전에 말했던 ‘이 세대’는 어떤 세대였을까요? ‘세대(世代, generation)’라는 말은 그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2,000년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살았던 시대 정신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본받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시대 정신이 하나님을 믿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 정신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요? 2,000년에 밀레니엄을 시작되면서 많이 나왔던 말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모더니즘’이 끝난 ‘후기 모더니즘 시대’라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볼까요? “The postmodern worldview denies that there is such a thing as truth: historical, moral, or otherwise. It denies that truth exists independently of our perspectives and interests(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은 역사적, 도덕적 또는 그 밖의 진리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우리의 관점이나 관심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 Mark Earley(정치인) "Postmodernism was a reaction to modernism. Where modernism was about objectivity, postmodernism was about subjectivity. Where modernism sought a singular truth, postmodernism sought the multiplicity of truths(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이 객관성에 관한 것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주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모더니즘이 하나의 진리를 추구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다양성을 추구했습니다)." — Miguel Syjuco (작가) “We live in the postmodern world, where everything is possible and almost nothing is certain(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한 곳에, 하지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Václav Havel (Former President of the Czech Republic)

시대 정신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 시대 정신의 영향을 받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정신으로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전통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고, 형식이 파괴됩니다. 여러분, MIT 건물 중에 ‘스타타 센터(Stata Center)를 보셨습니까? Frank Gehry라는 건축가가 2004년에 완성한 32 Vassar Street, Cambridge에 있는 건물입니다. $283.5 million이 들었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이 건물의 형식은 ‘Deconstructivism(해체주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건물의 형식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같은 사람이 ‘해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 보스턴 글러브에서 이런 기사를 실었습니다. “Stata’s appearance is a metaphor for the freedom, daring, and creativity of the research that occurs inside it(스타타의 모습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구의 자유, 대담함, 그리고 창의성에 대한 은유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뿐만 아니라 음악, 그림, 조각 등 전 예술 분야에, 그리고 문학, 철학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고 있는 대로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상대적인 가치만을 갖는다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온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는 그동안 기독교에서 믿고 있던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가치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크리스천들의 존재 기반을 흔들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No Other Name(다른 이름은 없다, Paul Knitter, 1985)?” 이런 제목의 책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설교자들 중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겼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여 2년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전처럼 모일 수 없게 되었고, 온라인 예배라는 형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이 지역의 교회들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들이 대면예배를 하고 있지만, 교인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의 1/3 정도가 대면예배에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이 나도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전문가들의 말이 맞았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시대의 정신(흐름)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을 알아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벌써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거의 다 지나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서 13:11-12) 2,000년 전에 바울은 이 말씀으로 잠자고 있는 크리스천들을 깨웠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읽는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올해로 우리 교회는 창립 43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창립 예배이지만 예전과 같은 축하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 창립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때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팬데믹 사태까지, 이 시대의 흐름을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흐름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탄이 교회를 말살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은, 비록 교회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에 ‘가이사 (Caesar,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이름)’를 숭배하는 신전(神殿)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Who do you say I am)?” 이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6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대답을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너에게 알려 준 것이다. 너는 어느 누구에게 이 사실을 배운 것이 아니다(Because my Father in heaven has revealed this to you. You did not learn this from any human being).” (17절)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지옥의 권세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You are Peter (which means `rock'),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all the powers of hell will not conquer it).” (1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기를 주신 이유는 교회가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를 통하여 우리 교회가 ‘증언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신앙 고백이 있는 교회는 ‘지옥의 권세(all the powers of hell)’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고난을 이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처음 생겼을 때부터 교회는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공의회는 다시 사도들을 안으로 불러들여서 매질을 한 후에,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고 놓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오히려 기뻐하면서 공의회를 나왔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 뜰에서,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내용을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5:40-42)

이 말씀이 시대착오적인 말씀으로 들립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the Lord)’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라는 말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Mary sat at the Lord’s feet and listened to his teaching)." (누가복음 10:39, ESV). 우리는 다시 겸손하게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신앙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복음 전파의 현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은 우리의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1806년에 Williams College의 다섯 청년들이 기도했습니다. 이 청년들의 기도 제목은 놀랍게도 “The Field Is The World(세계가 우리의 사역지이다)!”였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한 이 청년들의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이 곧 우리의 사역지입니다. 내가 일하고, 연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돈을 버는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들이 우리의 사역지입니다. 

보세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가 사는 곳을 중심으로 점점 더 확장되어 나가는 이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들입니다. 지금은 어디든지 우리의 일터가 되고 삶의 현장들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의 증인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이 사명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으로 주신 말씀은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마가복음 16:15)” 이 말씀이라고 합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everyone.” 이 말씀에서 ‘go into’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누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to start working in a particular type of job or business.”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일하고, 활동하고, 얘기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이 주 안에서 올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도록 하십시오(에베소서 4:15)”라고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려운 시대를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팬데믹 시기에 우리가 세울 수 있는 대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 대안들은 모두 우리가 무관심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 있고, 형식적인 믿음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이 교회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고,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성장하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결단한다면, 우리는 이 변화하는 시대를 책임질 수 있습니다. 이 위기를 교회가 새로워지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10/3/2021 | 세계 성만찬 주일

팬데믹에 받는 성만찬의 의미 The Lord’s Supper In The Pandemic Times

고린도전서 11:23-26

오늘 말씀은 성만찬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 공관복음서(the Synoptic Gospels)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마가복음 14장에, 누가복음 22장에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는 13장에 충분히 성만찬에 대한 말씀으로 추정할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공관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서기 65-7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으로 그 시기를 대략 서기 55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1장에 기록된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 가장 원형(original)에 가까운 말씀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 말씀을 읽어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하셨던 말씀의 분위기를 더욱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입니다(For I pass on to you what I received from the Lord himself) (23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들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주님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할 때도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I passed on to you what was most important and what had also been passed on to me) (고린도전서 15:3)”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복음이 막 전파되고 있을 무렵, 1세기 초에 입에서 입으로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사도들과 전도자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케리그마(kerygma)’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나누셨던 그날, 다락방의 식탁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바울은 그 때 있었던 일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on the night when he was betrayed)’ 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날 밤’에 대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시지요? 예수님은 그 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해야 되겠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음모(conspiracy)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음모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를 알고 있었고, 유다가 그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마지막 만찬을 먹는 그 자리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찢어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들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나를 배반할 사람이다(요한복음 13:26)” 라고 하시면서 빵을 접시에 담긴 소스에 찍어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여라(요한복음 13: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엄청난 말씀을 그리 심각하게 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자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유다를 붙잡고 말렸더라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 밤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된 일들이었습니다. 사람이 말리고 변경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 날 밤에 있었던 일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고린도전서 11:23-24) 똑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은 식사 후에 잔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25절) 이 때는 이미 유다가 밖으로 나간 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 날 저녁에 나눈 만찬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저녁 식사였습니다. 같은 시간에 다른 유대인들의 집에서도 모두 유월절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대략 이런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포도주 첫 잔을 따르고 축복문을 읽습니다. 그리고, 손을 씻는 예식이 있고, 식구들은 쓴 나물을 소금물에 찍어 먹습니다. 만찬 인도자는 대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마짜(matzah)’라는 납작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세 개를 포개서 가운데를 자른 후, 접시에 올려 놓습니다. 이 때 만찬에 참석한 제일 나이가 어린 자녀가 유월절에 얽힌 네 개의 질문을 합니다. 예를 들면, “왜 이 밤에는 ‘마짜’를 먹어요?”“왜 이 밤에는 쓴 나물을 먹어야 해요?” 이런 질문들입니다. 그러면 인도자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십니다. 다음은, ‘마짜’를 먹기 위한 축복문을 읽습니다. 아마도 이 때 예수님은 ‘마짜’를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쓴 나물을 마짜 사이에 넣어 ‘할렐 샌드위치’를 만들어 ‘하로셋’이라는 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습니다. 바로 이 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마짜’를 소스에 찍어 유다에게 준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 다음에, 유월절 식사의 메인 디쉬가 나옵니다. 양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포도주 잔이 나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25절)” 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할렐송’인 시편 113-118편, 136편을 불렀습니다. 각 집마다 지붕에 올라가 ‘할렐송’을 부르는 그 시간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고 합니다. ‘할렐송’을 마치고 마지막 포도주 잔을 마시면 유월절 만찬이 끝나게 되는데 그 때가 대략 밤 12시쯤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만나요!” 하면서 헤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은 ‘마짜’를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앞으로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가정마다 유월절 만찬이 있었고, 인도자가 ‘마짜’를 찢어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아무도 예수님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모두 네 잔의 포도주가 나왔지만 어느 가정에서도 예수님처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이렇게 말하면서 포도주를 마신 가정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행하던 유월절 만찬은 내가 앞으로 너희를 위해 행할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 아십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이탈리아)가 그린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입니다. 이 그림은 다빈치가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에 있는 수도원 식당 벽면에, 1495-1498년까지, 3년에 걸쳐 그린 그림입니다. 가로 8.8m, 세로 4.6.m로 상당히 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요한복음 13:21)”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그림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여러 번 복구 작업을 했던 것이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의 NHK 방송에서 첨단 컴퓨터 기법을 동원하여 이 그림을 복원했습니다. 막상 그림을 복원해 보니 전에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선 이 그림에 나온 제자들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 옆에 있던 요한에게 누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인지 물어보라고 합니다. 다빈치는 베드로가 손에 칼을 쥐고 뒤로 감추고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빵들은 유태인들이 식탁에 올리는 ‘마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먹는 보통 빵들입니다. 그리고 식탁에 양고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접시에 물고기가 놓여 있습니다. 다빈치는 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식탁을 그리지 않았을까요? 

다빈치가 유대인들의 ‘마짜’ 대신 보통 빵을 그린 것은, 이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 때만 이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양고기 대신 물고기를 접시에 그려 놓은 것은, 더욱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양고기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에 나오는 메인 디쉬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고기를 희랍어로 ‘익투스’라고 하는데, ‘익투스’라는 말은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오 휘오스, 소테르(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의 첫 글자만 따면 ‘익투스(물고기)’라는 말이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에서 물고기로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크리스천들은 물고기 형상을 만들어 서로 은밀하게 보여줌으로써 서로 자기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을 따라 다빈치가 창의적으로 양고기 대신 물고기를 그렸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식탁을 그리는 대신 보통 식탁을 그림으로써 유대교의 색채를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성만찬에 나누는 빵에 대해 이런 해석을 했습니다. “우리가 나누어 먹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빵을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은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하나의 몸인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6-17)

거의 2년이 되도록 인류는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삶이 제한을 받고,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온라인 수업을 받아야 했습니다. 비즈니스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고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계속 변이(variant)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중에, 인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류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공동의 운명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네 문제, 내 문제가 따로 없습니다. 내 문제는 너의 문제가 되고, 너의 문제는 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류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면서 이 교훈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도에서 발생한 ‘델타변이(Delta Variant)’가 미국에서도 발견되고, 영국에서도 발견되고,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고, 그렇게 폐쇄적으로 나라의 국경을 봉쇄하고 있는 북한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겠습니까? 성만찬에 참여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나로 연결된 사람들은 아니지만, 나와 연결된 사람들을 증오하기 보다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나의 형제들이 되도록,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언약에 들어올 수 있도록, 크리스천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오늘 말씀을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십시오.” (26절) 바울은 성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 이 메시지가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난 2년 가까이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힘들어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메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을 가지려고 해도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려고 해도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모두가 무기력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세상에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데, 교회 마저도 무기력하게 침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교회의 사명을 다시 인식해야 합니다. 과거 코로나바이러스를 몰랐을 때는 편안하게 믿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힘든 시기에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더 커지고, 교회의 사명은 더 막중해졌습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가장 힘든 시기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가장 힘든 시기에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은혜가 참 크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9/26/2021 |

들꽃이 주는 교훈 Lessons From Wildflowers

마태복음 6:25-33

오늘로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설교 시리즈 마지막 설교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Sermon of the mountain)’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매슬로우(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1951년에서 1969까지 브랜다이스(Brandeis)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인간의 ‘욕구의 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지금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맨 밑에 생리적인 욕구(physiological)가 있고, 그 위에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가 있고, 그 위에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love/belonging)가 있고, 존중을 받고자 하는 욕구(esteem)가 있고, 맨 위에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self-actualization)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맨 아래 단계가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로, 그 단계가 충족되면 또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맨 밑에 있는 ‘생리적 단계’가 바로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합니다. 염려와 걱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두 가지 삶의 양식(modes)을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삶의 양식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살기 위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늘 불안하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떠나지 않는 삶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Isn't life more important than food, and your body more important than clothing)?” (25절) 누가 이걸 모르겠습니까? 음식이나 옷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목숨(생명)이 먹는 것이나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면 자신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맞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6:26, 마가복음 8:36, 누가복음 9:25)”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Life is not measured by how much you own, 누가복음 12: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유를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의 양식은 결국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0-32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들(those who have little faith)’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믿음이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 번째 삶의 양식은 삶의 목적을 잘못 설정하고 소유를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두 번째 삶의 양식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나 들에 피어 있는 꽃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새들은 씨앗을 심지도 않고, 먹을 것을 거둬들이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두지도 않습니다. 들에 핀 백합꽃은 옷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습니다. 랍비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사슴이 무화과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고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 없이 먹고 산다.” 

예수님은 백합꽃이 입은 옷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새나 꽃들은 그들의 목숨(생명)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依存)하고 살아갑니다. 새나 꽃은 그들의 생명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살기 때문에, 먹을 것이나 입을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와 꽃들은 소유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나무에 열매들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오는 대로, 비가 적게 오면 적게 오는 대로, 날씨가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들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갑니다. 백합꽃이 입은 옷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는, 백합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옷을 입고 있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어 주신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와 명예와 지위를 자랑하는 사람이 만든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삶의 양식에 대하여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Chitrangada Sharan이라는 분이 ‘들꽃(wildflowers)’에 대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정원에서 잘 가꿔진 꽃의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런데 가끔은 들꽃들이 눈길을 끈다. 돌보는 사람도 없고, 물을 주는 사람도 없고, 관리를 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저런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저런 예쁜 꽃들을 피우는지, 들꽃들의 자태와 아름다운 색깔을 볼 때마다 경이(驚異)롭기만 하다. 들꽃처럼 우리도 스스로 어떤 환경에서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하겠지만......” 이 글을 쓰신 분은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들꽃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경이롭게 느껴진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들꽃의 아름다움은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살아가는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이름 없는 새들과 이름 없는 들꽃이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참새와 물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새야, 저 아래 땅 위에서 힘없이 걷고 있는 인간들을 좀 봐. 인간들은 왜 저렇게 염려하고 근심하는지 모르겠어. 참 이상하지 않니?”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참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우리처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가 봐!” 비록 어린 아이들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 감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0, 32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말이 26절에는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 때에 공급해 주십니다. 창세기 22:14에 나오는 ‘여호와이레(Yahweh-Yireh’라는 말이 이 말 아닙니까? “The LORD will provide(주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Where God guides, He provides(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그곳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광야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었습니까? 물과 옷과 신발과 음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생활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지난 사십 년 동안, 우리들의 옷은 해어지지 않았고, 발도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8: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양식의 삶에 대해서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삶의 양식은 삶의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는 삶의 방식입니다. 보세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이 말씀이 English Standard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하여 질 것이다).” 이 말씀에서 가장 강조되는 말은 ‘먼저(first)’라는 말과 “더하여 질 것이다(will be added)”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 줄 알고 그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매달리는 삶에는 항상 염려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은 곧 우리의 생명을 위하는 일입니다. 이런 삶에는 걱정과 근심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렇게 우선 순위를 정해 놓고 이 우선 순위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이 모든 것들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하면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하면서 테이블 밑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꺼내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항아리 안에 주먹 만한 돌을 하나씩 넣었습니다. 돌이 가득 차자,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일제히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강사는 “정말입니까?”라고 되묻고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작은 자갈을 한 움큼 꺼내어 항아리에 집어넣고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자갈이 큰 돌멩이 사이에 난 틈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자갈이 가득 차자 강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그러자 학생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그러자 강사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를 한 움큼 집어 항아리 위에 놓고 항아리를 흔들었더니 돌멩이와 자갈 사이의 빈틈으로 모래가 들어갔습니다. “이제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학생들이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강사는 웃으면서 물 주전자를 꺼내어 물을 항아리에 붓자 항아리에 물이 스며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 학생이 번쩍 손을 들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삶이 아무리 바빠도 사이사이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실험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선 순위에 대한 중요성입니다. 만약 맨 처음에 큰 돌을 넣지 않고 먼저 자갈이나 모래를 넣었다면, 큰 돌은 넣지 못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일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바로 잡히면 염려와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은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이 삶의 우선 순서가 뒤바뀌면 우리는 다시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싸이게 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크리스천의 삶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유명하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사무엘하 7:8-9). 다윗도 그렇고 요셉도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게 해 주셨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이삭이 부자가 되려고 애쓴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거부(巨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창세기 26:12-14, 열왕기상 3:12-13). 크리스천은 높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낮은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마태복음 20:26-27, 마가복음 10:43-44).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양식을 여러분의 삶의 방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