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22/2024 | 성탄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2 어둠을 밝히는 빛 The Light that Shines in the Darkness
이사야 9:2-7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시는 26세의 요제프 모르(Joseph Mohr)라는 오스트리아의 사제가 1816년,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에서 쓴 시입니다. 당시 교회 오르간이 고장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마음속에 떠오른 멜로디를 바탕으로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성탄절에 부르는 평화롭고 따뜻한 찬양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 찬양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의 이프르 지역에서 평화의 메세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전쟁과 참호전의 일상에 병사들은 자연스레 지쳐갔고, 어느덧 1914년의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참호에서 대치 중이던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어둠속에 묻혀 있던 각자의 참호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는데, 상대방 참호에서도 캐럴이 들려오자 누군가가 참호 위에 촛불과 전등으로 장식된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양측의 수많은 병사들이 너도나도 참호 위로 올라왔고, 서로 포옹하고 담소를 나누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양측 참호 사이 버려져 있던 양군 시신들을 수습했고, 뒤이어 축구장을 급조해서 팀을 나눠 축구까지 했습니다. 밤이 되자 이들은 같이 캐럴을 부르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한 다음, 다시 각자의 참호로 돌아갔습니다. 이 기적을 이끌었던 노래가 바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라고 합니다.
찬양이 전해주는 힘은 이렇듯 음악이라는 경계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메세지가 됩니다. 두려움과 혼돈의 시간속에서 성탄의 기적은 서로의 마음에 평화와 어두운 곳을 밝히 비추는 사랑의 힘을 전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어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며 기쁨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한밤중에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과 일치할 때 기쁨으로 노래하지만, 그 뜻이 어긋날 때에는 실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내 뜻과 내 믿음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많은 예술 작품들이 고통의 밤을 지나며 후대에 걸쳐 위대한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에 시달리던 반 고흐의 작품들,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창조된 베토벤의 명곡들은 모두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 예술의 승화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은 ‘환희의 송가’로 불리며, 듣는 사람들에게 글자 그대로 환희와 감동을 줍니다. 그 가사 중 일부는 성탄의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만인이여, 엎드려 빌겠는가? 세계여, 창조주가 느껴지는가? 별이 빛나는 하늘 저편에서 아버지를 찾으라! 별의 저편에 주님께서 반드시 계실 것이다. 환희여, 아름다운 하나님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리라!"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현시대가 아닌 후대에 더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당시에도 마리아와 요셉은 호적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에 도착했으나, 출산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빈방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밤은 어둠에 묻힌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절망과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위로 그 영광의 빛이 비쳤도다. 농부들이 추수할 때 기뻐하듯이,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누듯이, 백성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이 예언은 구원의 빛이 백성들에게 비춰질 날이 올 것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6절은 더욱 자세히 말합니다. "보라,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났도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아들을 주셨도다." 여러분, 여기서 ‘태어난 아기’와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한 아들’이라는 두 표현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루터는 1531년 12월 24일, 종교개혁의 중심지인 비텐베르크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라는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한날 2번의 걸친 설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이 단지 역사적인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태어났다는 확신을 갖고 루터는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의 설교문을 보면 “이 아기는 내게 주어진 10굴덴 금화처럼,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며, 이 아기가 바로 우리의 구세주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당시 10굴덴는 독일에서 사용되던 금화로, 그만큼 확고하고 깊은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16세기 초 독일에서 노동자는 대개 한 달에 1에서 3 굴덴 정도를 벌었으므로, 10 굴덴은 한 사람의 수개월 또는 1년 치 급여에 해당할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하지만 주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의 수준이 아니라 그 보화를 온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태어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사야는 이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며 그에게 4가지 이름을 부여합니다.
그 아기가 장차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우리를 다스리실 것이니, 그분의 이름은 ‘기묘하신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불릴 것이다.
‘기묘하신 모사(Wonderful Counselor)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시는 신성의 표현입니다. 예수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주어진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삶의 순간에도 우리의 상담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가 확신한다고 여겼던 것들이 흔들릴 때에도 신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절실히 느낄수록, 주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기는 본래 연약한 존재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데,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라는 칭호는 한 아기로 오신 것과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탄의 신비 가운데 참사람이자 참하나님이신 그분의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친밀함과 훈계가 우리를 성숙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직접 찾아 오신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며 빛을 창조하셨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이 사실은 성탄에 담긴 가장 분명한 은혜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심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셨고, 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어깨 위에 세상의 죄와 고통을 모두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어깨 위에 놓인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을 치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은 모두가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분의 의의 옷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화려한 것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 빛을 잃고, 잠시의 치장에 불과합니다.
기드온이 살던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두운 암흑기였고, 고통과 고난이 가득한 시기였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전쟁을 위해 선발된 300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은 지극히 초라한 숫자였습니다. 13만 5천명의 미디안 군대를 상대하려면 한 명의 군사라도 더 있어야 할 텐데, 하나님은 불필요한 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오직 믿음으로 남은 300명만을 선발하셨습니다. 이 숫자는 세상의 방법과 승리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자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단단한 마음도 부드럽게 변화됩니다. 인생이 평생을 짊어지는 고통과 수고라면, 주 안에서 우리는 그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며,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내어주고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참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회복의 과정입니다.
오늘 성탄예배를 맞이하여, 5명의 아기들이 유아세례를 받게 됩니다. 유아세례는 부모와 교회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 아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할 것을 결단하며 책임을 지겠다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를 위한 준비를 하듯, 세례를 통해 이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로 자라도록 인도할 것을 다짐하게됩니다. 부모는 태어난 아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아이와 마주하는 순간 순간을 소중히 다루며 사랑을 전합니다. 아이가 아플 때에는 내 살이 아픈 듯 느끼고, 아이가 성장하여 마주할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부모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이를 맡기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 주신 선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불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빛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그 빛을 비추는 책임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성탄절은 단지 우리만의 기쁨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해져야 할 기쁜 소식이자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비추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어둠에 묻힌 밤에 있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십시요. 평화를 애쓰는 그곳에서 성탄의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12/15/2024 | (대림절 셋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1 "분주한 세상 속에서 찾는 기쁨과 너그러움" Finding Joy and Consideration in a Busy World
빌립보서 4:4~9
대림절 세 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잘 알면서도, 때때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상처로 인해 잠 못 자며 뒤척이기도 하고,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내면 깊은 곳을 밝혀 주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지난주 Emmanuel Gospel Center에서 열린 목회 연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인 2세 사역자가 북미 신앙 공동체를 연구하고 신앙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내용들을 의미있게 나누었습니다. 이민교회 안에서 1세대와 2세대가 동일한 말씀을 들음에도, 문화적 차이로 인해 동일한 단어 조차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어, ‘commitment’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한인 2세대는 개인의 의지적인 결정과 헌신, 자기결정을 중시하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반면, 1세대 들은 ‘commitment’가 공동체를 위한 희생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에 대한 이러한 이해 차이로 인해 공동체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서로 다른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열려진 복음, 즉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통해 구별됨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움을 보이면서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기독교적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며, 더 넓은 차원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첫째,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연결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참여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급변하는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세기를 살아 내시고 현재 100세를 넘기신 김형석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쓰신 '교회 밖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책의 일부입니다.
"1962년 봄학기에 하버드 대학에 가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 라인홀드 니버가 와 있었습니다. 그분의 강의를 들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선조나 선배들 덕분에 세계 최고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데, 그것을 다 우리 것이라 여기고 우리끼리만 행복하고 즐겁게 누린다면 미국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선조들이 물려 준 부를 못살고 힘없는 나라들에 나눠 주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 보내고 아시아에도 보내 그 나라들이 잘 살게 되면 미국은 더 잘살게 되어 있습니다. 나눠주지 않고 움켜 쥐려고 하면 위험합니다."
62년 전, 라인홀드 니버는 하버드 강의에서, 부유함을 독점하려는 위험성과 나눔의 가치를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현재 미국과 한국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너그러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 윤리학자로 신앙 공동체가 주변 환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탐구하면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을 구분하는 작업을 통해 후대에 탁월한 고전을 남겼습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너그러움은 너무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참된 기쁨이 있어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너그러운 태도가 흘러 나오게 됩니다. 너그러운 태도는 억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인식하고 있을 때 비롯되는 행동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의 기쁨과 너그러움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우리의 마음을 걱정거리에 두다 보면, 마음 안에 더 큰 염려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실의 어려운 문제 앞에서 주님의 기쁨을 잃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신앙 생활이 세상이 만들어낸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들에 영향을 받아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든 걱정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걱정과 근심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께 구하면, 모든 인간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1611-1691)가 쓴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그 당시 16세기 프랑스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엄청나게 불안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니콜라 에르망(Nicholas Herman)인데, 그가 어느날 수도원에서 평수사로 생활하며 '로렌스 형제'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주방 일과 신발 수선을 하던 그는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경건한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수도원에서 주방일은 가장 힘든 곳이었는데 그로 인해 수도원에서 주방이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깨졌습니다. 그는 부엌일이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될때에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름도 없이 평범한 일상에서 실천한 하나님의 임재 연습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뛰어난 글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실천했던 그의 연습들이 독자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당시 모든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의 영적침체의 책에 실린 구세군 교회의 대장으로 섬겼던 존 조지 카펜터(John George Carpente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과 아내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던 딸, 동양의 선교사로 청춘을 바친 사랑하는 딸을 어떻게 잃었는지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딸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부부는 당연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기도하면서도 '주님이 원하시면 이 아이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적극적으로 고쳐달라고 하지 못하고 원하시면 고치실 수 있습니다' 라고만 했습니다. 그 이상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는 6주동안 기도했고 어여쁜 딸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딸이 죽던 날 아침 존 카펜터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정말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하네. 아내는 자신도 그렇다고 하면서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평강이예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평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린 슬픔속에서 느껴지는 평강은 어떤 것일까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평강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이해를 넘어서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할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 이 부부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기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당시 헬라 문화에서 중요시되었던 덕목들을 생각하면서 배우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거룩한 것, 사랑스러운 것과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슨 덕이나 칭송이 있든지 모쪼록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영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도 칭송받는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우선시 하면서도 세상속에서 덕을 쌓는 삶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을 만한 가치를 염두 해 둔 표현입니다.
이러한 덕목들을 삶에 녹여내는 것은 세상 문화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삶의 간격을 줄여가는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이 아니라 평생 추구해야 할 거룩함입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 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더 귀하게 여기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속에서 만족을 누리며 자족하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있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9:22-23)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책임은 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여전히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십니다. 희망이 위태로워지는 사회 속에서, 교회는 등불을 밝혀 하나님의 빛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세상의 소망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사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일생을 바쳐 훈련해야 할 일입니다. 두려움과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에게 없는 평안과 기쁨을 가득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주의 깊게 보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과 너그러움을 실천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의 삶에 하나님의 평강이 풍성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축원합니다.
12/8/2024 | 대림절 둘째 주일
동역의 기쁨, 사랑의 힘 Joy of Partnership, Power of Love
빌 1:3-11
오늘은 대림절 둘째주일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마음 가운데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어릴 적, 거실에 걸려 있던 액자 속 말씀을 종종 읽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빌립보서의 구절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그중에서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는 문구가 제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가족과 형제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기쁨과 감사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함께 지내며 울고 웃고, 때로는 부족한 모습도 공유하며 사랑을 나누었던 소중한 관계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우들은 서로가 참 특별한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아시아를 떠나 유럽에 세운 최초의 교회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골로새 교회를 세우때에도 사랑이 담긴 물질을 후원하며 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심지어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는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로마 감옥까지 파송하는 헌신을 보였습니다. 이런 교우들을 향해서 바울은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편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첫째, 동역의 기쁨입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에 빌립보 교우들은 동역자(同役者, fellow worker) '였습니다. 동역자의 뜻은 기독교 선교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동역(同役)을 잘하려면, 서로가 연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한다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동역자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종과 같은 위치에서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자신을 낮추심으로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누군가의 곁에 있을 때 성령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환상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행 16:9). 이에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습니다. 선교 여행 중 바울은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지역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처를 찾아 강가로 나갔고, 그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님은 주의 일에 꼭 필요한 동역자를 만나게 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루디아는 옷감 장수로, 오늘날로 보면 성공한 사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로 이미 유명한 지역이었기에, 루디아가 빌립보에 온 이유는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또한 그녀는 이미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교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설교를 듣는데 성령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이후 그녀의 온 가족은 함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루디아의 집에서 드린 예배는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자 동역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초대 교회의 모범인 환대를 즉시 실천하며,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자신을 물질을 나누는 데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유럽에서의 복음 사역이 점차 확장되어 가는 데 있어 루디아는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로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1장부터 4장까지 곳곳에 바울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을 떠올리며 편지를 쓸 때마다 마음에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면서도,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목적이 분명한데서 얻게 된 기쁨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는 마음을 온전히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간절히 그리웠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빌립보 교우들은 바울에게 그런 위로와 사랑을 전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주님께서 바울을 자신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한때 기독교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바울을 찾아 가셔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았을까요? "사울아,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이제는 내 눈물과 피를 너가 알아 주어야 하지 않겠니?" 그의 이름을 부르신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이방인을 향한 선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바울을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는 지금도 여전히 주어지고 있으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유산을 상속받을 자들임을 성경이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복 받을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34 그리고 나는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아,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해 둔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와 주었다.’ 37 그러면,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의로운 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음식을 드렸으며, 주님이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저희가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주님을 도와 드렸으며, 주님이 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님께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또 저희가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주님을 찾아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주님은 자신과 고난 받는 형제들을 동일시하며, 주의 제자들을 환대하는 자는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책망하시며 핍박 받는 자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주 안에서 사랑을 경험한 일이 있다면, 곧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도왔다면, 그 섬김은 우리가 주님께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빌립보 교우들은 바울이 고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주님을 발견했을 것이고, 바울 역시 고난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빌립보 성도들을 보며 주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렸기에 주 안에서의 진정한 동역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은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성경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는다고 말씀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우리가 느끼게 되는 두려움을 평안한 마음으로 바꾸는 힘입니다.
1:8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얼마나 여러분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지는,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십니다." 1:9 "지금 내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모든 지식과 깊은 통찰력 속에서 더욱더 풍성해져서"
사랑은 깊은 통찰력을 가질 때 더욱더 풍성해집니다. 사람의 행동 속에 숨겨진 진심을 헤아리고 분별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은 더 깊고 넓어질 것입니다. 8절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를 사랑한 바울의 시선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교회와 지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일터와 학업의 현장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이 사랑은 아픔과 고난을 나누며 그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7에서 기록된 사랑의 특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변함없이 항상 믿어 주며, 언제 어디서나 소망을 품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사랑과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게 되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 사랑이 더욱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통찰력은 단지 학문적 깊이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나의 심장이 주님의 심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통찰력은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잘 분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시작할때에 사랑이 깊어집니다. 반면에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하라는 바울의 말씀은 대부분의 문제들이 사랑의 부족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울의 복음은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인 사랑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복음의 본질로 삼지 않았습니다.
AW 토저 목사님의 'GOD'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금하는 종교라고 믿는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스펄전을 찾아와 '나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담배도 피우지 않습니다. 욕을 하지도 않습니다. 극장에 가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가 나는 형제님이 무엇가를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금지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가치를 행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는 삶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에서 더욱 그 사랑을 친밀하게 경험하고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사랑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 받았으며, 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에는 '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거기서 바나바는 사울을 만나, 그를 데리고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내내 그곳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곳 안디옥에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행 11:26) 1년 동안 교회에 머물며 사람들을 가르친 바나바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습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고, 또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므로 많은 이들이 바나바를 통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바나바는 새신자들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격려했으며, 거기에 멈추지 않고 믿음 안에 더 굳게 서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성령의 열매 가운데 '친절'이 더 눈에 띄게 들어왔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주시는 친절함은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바나바는 친절함으로 사람들을 세워주고 믿음으로 기다려 주며 그들과 함께 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안디옥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인' 이라 불렀습니다.
“가슴으로 듣는 하나님의 음성, 심장이 뛴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수영 심장 전문의입니다. 그는 세계 누가선교회와 코스타, 미국 자마 등에서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분으로, 저는 코스타에서 그분을 처음 만나 그의 책을 받았습니다. 그의 고백의 글 가운데 보면,
“병원에서 의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직장 동료들을 섬기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 참아야 하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는지 헷갈릴 때, 직장 내에서만큼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한 번은 함께 일하는 4명의 외과 조수 중 유일하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성격이 좋지 않아서 간호사나 직원들로부터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당직을 서던 그가 자신에게 와서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썼는데도 오히려 자신 때문에 힘들었다고 따지며, 지난 일을 하나 하나 들춰내며 조목조목 따졌다고 합니다. 급기야 ‘나는 네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고, 내가 원하면 너를 여기서 쫓아낼 수 있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말해도 주님의 제자일 수 있겠느냐?’는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내뱉은 한 마디의 대가를 치르는데,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다시 얻기까지 걸린 시간이었습니다.”
직장과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친절을 실천할 때에 우리의 힘으로 안되는 도전에 직면할 때가 많을 겁니다. 관계속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마음의 불편함이 생기면 제자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수영이라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일하는 현장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끊임없이 그를 제자의 삶으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행동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고, 상대방이 친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사명감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사랑의 수고를 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비로소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는데 걸린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한 점 흠 없이 순결하게 지냄으로써, 여러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각양 의의 열매로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해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지난 시간에 마음이 머물지 않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에게 맡겨 주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인도하시고, 그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순결하게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1/2024 | 대강절 첫째 주일
일상의 믿음 Faith in Everyday Life
데살로니가 전서 3:9-13
교회력으로 대림절의 시작은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탄생과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이제 4주 동안 네개의 촛불이 차례대로 켜질텐데 첫번째 보라색의 촛불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촛불입니다. 설교자의 스톨도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잃어 버렸던 희망, 평화, 기쁨,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촛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치열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빛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어둠을 통과하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고통으로 지친 이들의 마음에 찾아가 십자가 사랑으로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성도들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며 한해의 열매를 기다리는 것처럼 믿음이 더 깊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군 생활을 해 보신 분들이라면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모든 과정이 다 지나가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할 당시에 마게도냐 지역에 빌립보 교회를 세운 이후 두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도시는 로마의 행정 구역으로 부유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보통 항구 도시는 여러 도시에서 이방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음행과 우상들이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도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이 만연했고, 여러 철학 사상들로 인해서 그릇된 사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도시에서 바울은 잠시 머무르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는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데살로니가 지역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합니다. 그 믿음의 현장에서 바울은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로 인해 생명의 위협 속에서 결국 베뢰아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그를 죽이려 하자 바울은 또 다시 아덴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바울의 형편은 누군가를 걱정할 상황이 못되었지만 그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복음사역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을 떠나 왔지만 갓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인이 갈수 있는 상황은 안되고 교우들의 믿음을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아들처럼 여겼던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게 됩니다.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3장 6절을 보시면, “6 그런데 지금은 디모데가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 언제나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고, 또 우리가 여러분을 보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여러분 역시 우리를 무척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교회 안에 새가족들의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6절에서 "지금은"이라는 단어를 보면, 디모데가 갖고 온 좋은 소식을 듣자마자 기쁨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됩니다. 또한 믿음 안에서 형제가 된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위로와 격려입니다.(2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을 지키는 일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겪게 될 것임을 미리 경고했습니다 (4절) 믿음의 고난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명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믿음을 전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섬기는 자는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믿음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5절) 바울 같은 경우에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이 믿음을 전파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9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기쁨, 곧 여러분이 우리에게 안겨 준 그 모든 기쁨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10 다만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기를, 또한 만나서 여러분의 믿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드릴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굳건히 서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자신의 고통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굳건히 서 있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훈련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믿음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기보다는, 아직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믿음이 확고히 서 있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믿음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기에 그들의 믿음을 위해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신앙을 오래 지켜온 사람이라도 믿음에서 완전한 성숙을 이루기까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도우심이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종종 믿음의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랜 신앙의 습관으로 자기 중심적인 믿음에 빠지거나, 신앙생활이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방향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삶 속에서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 1장 서두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1:5 그러기에 우리가 전한 복음이 여러분에게 단지 말로써만 아니라, 능력으로, 성령으로,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깊숙이 가 닿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있었을 때, 여러분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1:6 그래서 여러분은 모진 고난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우리가 전한 말씀을 잘 받아들여, 우리를 본받고 또 주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1:7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 중에도 삶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리적으로 아가야 지역은 데살로니가 지역의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가야 지역에 있는 믿는 이들까지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원동력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에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역사했다고 강조합니다.
1:13절 보시겠습니다. “1:13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그 말씀은 믿는 여러분 가운데서 지금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은 로마 황제를 '구원자와 주'로 칭하며, 황제가 군사적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오기 전에 성도들에게 고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니 고난 속에서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권면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일터나 세상속에서도 이어져야 한다는 메세지는 2000년대 초, 한국 교회 내에서도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믿음 생활은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사역에 집중되었고, 직장이나 일상생활에서의 신앙적 실천은 상대적으로 적게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의 신앙은 단순히 교회 밖의 삶만이 아닌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실천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삶으로 이어지는 실제적인 삶에 대해 2008년 국민일보 미션 라이프에 실린 기사를 스크랩하여 가지고 있는데, 한국 교회에 일터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진다는 글입니다. 기사의 글을 잠시 소개합니다.
"성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일터에서 드려지는 삶의 예배도 교회의 한 형태라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일터에 임하고 일터속에 크리스천들로 인해 그 직장은 물론 사회가 변혁될 수 있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이뤄지는 교회다. 토드 홉틴스와 레이 힐버트는 "모든 크리스천들은 일터의 변혁을 위해서 부름받은 사역자들" 이라고 말했다. 크리스천들에게 주일의 교회보다 더 중요한 교회는 주중의 일터에서 이뤄지는 교회라고 강조했다."
일터교회는 매일의 삶이 주일의 믿음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입니다. 일과 삶이 결국 사역이라는 것이지요.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삶으로 나아가는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믿음 생활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확장됩니다.
“11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속히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세상은 과거에 비해서 참 편리해 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좁은 길에 서야 하기도 하고, 불의에 맞서 저항하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려 할 때, 그 기준은 단순히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도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여도, 때로는 세상의 영광과 자기 자랑을 추구할 유혹을 받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의 사랑을 잃어 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연약함으로 인해 세속적 욕망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악함을 왜 그냥 두시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땅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 둘을 갈라 놓으려고 하면 알곡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로마 황제는 더 이상 인생의 길을 열어 주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믿고 주님이라 따르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제 서로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그 사랑 안에는 자신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몰랐던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만큼 깊고 크며, 그 사랑에 의해 우리는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의 노력을 통해서 복된 관계를 지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니까 수고로움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가 없다면 그 곳은 가정이든 교회이든 일터이든 사막과 같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므로 기꺼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섬김의 자리에서 묵묵히 수고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 볼 때마다 숨길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기쁨이 회복 되도록 애쓰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전도 사역의 피곤함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믿음의 소식을 듣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새 힘을 주었습니다. 참된 믿음의 공동체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서로가 세상속에서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며 용기를 얻고, 함께 모여 교제할 때는 세상에서 지친 마음을 주 안에서 위로 받으며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믿음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그리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 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한 길로 인도받으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11/24/2024 | 추수감사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8 하나님 나라 감사의 길을 걷다 Walking the Path of Gratitude in God's Kingdom
요한복음 18:33-37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매주 우리는 교회력의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는 길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외적인 감사를 찾기 보다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깊은 감사를 찾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걸으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단순한 고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사랑의 길이었고,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신 감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도 감사를 고백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막막한 광야의 순간을 만날 때가 있고 낙심과 고난의 길이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곳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세가지 질문을 합니다.
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2.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3. "그러면, 네가 왕이란 말이냐? 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은1.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소", 2. "그렇소, 당신의 말대로 나는 왕이오" 3.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 일을 하려고, 이 세상에 왔소,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리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을 듣소"
이 질문과 답변에 대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답변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본문과 이어지는 38절에서 빌라도는 "그러면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하는데 빌라도는 주님께서 자신 앞에 계셨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답변을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LT 성경은 이를 “My Kingdom is not an earthly kingdom.”이라고 번역했는데, “나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대로 왕이다.”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가 칼과 창으로 싸워서 이기는 세속적인 왕권과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 다른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감사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다른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통제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한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누가복음 23장 2절에 다음과 같은 고발 내용이 나옵니다. "2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우리 백성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하고, 또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를 고발한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사람은 우리 백성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라는 로마법을 위반한 죄명입니다. 셋째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죄명입니다. 이는 당시 로마 황제를 섬기는 유대 사회에서 정치적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 제국을 칼과 방패로 위협할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고발한 죄목으로 정치적 반란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후 죄가 없다고 선언하지만 산헤드린과 군중들의 압박을 고려하여 유대 사람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법을 위반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심문 후 유대 군중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관례를 이용해 예수를 석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를 석방하는 대신 바라바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로마 체제에 저항했던 바라바가 석방되었으며,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세상의 역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원한 생명과 진리임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첫째, 누가 당신의 왕입니까?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인간의 마음 속에 누가 왕이 되는지, 그리고 주님의 참된 권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은 권세와 총독의 자리, 그리고 유대인들의 민심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잘못된 판결을 내린 사람이 되었고,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우리는 매주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신앙의 고백을 통해 빌라도의 선택과 그 결과를 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의미심장한 답변을 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소. 만약 그랬다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지 않도록 능히 막았을 것이오." 예수님의 이 대답은 빌라도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그토록 위협적인 존재였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종이라 부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명예를 탐하는 이들에게는 섬김과 겸손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력을 유지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고, 결국 그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갈망하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통치가 드러납니다. 그 나라는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평안과 절대 감사로 채워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청교도들이 종교적 탄압과 억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여정을 돌아봅니다. 이는 복음이 증거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신실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길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좁은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새로운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청교도들을 통해 이땅에 복음을 전파하시고, 미국의 법과 정치에 기독교 정신의 기초를 세우셨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정신은 여전히 오늘날 신앙의 세대들에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각계 분야에서 기독교 신앙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돌봄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불평은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잊는데서 시작됩니다.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가 발표한 My way라는 노래를 잘 아실 겁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르기도 했는데요. 이 노래는 1969년, 프랭크가 54세였을 때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던 그의 인생에 전성기를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이 곡은 "내가 나의 길을 가겠다"는 인생관이 담겨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노래입니다.
가사의 일부분을 보면 "자, 이제 끝이 가까워졌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지/ 친구여, 분명히 말할게 내가 확신하는 나의 이야기를 말이야.... / 모든 시련에 맞서서 당당하게 섰어 / 내 방식대로 사랑을 했고, 웃고 울기도 했지 실패도 실컷 해봤어" (And now end is near So I face final curtain /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did it my way)
그런데 그의 딸이 한 인터뷰에서 정작 자신의 아빠는 이 곡이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노래라고 생각해서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내 뜻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는 참된 삶의 길을 찾을수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각자의 길을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일들이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죽음 이후에도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발견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형편에도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길은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현대 사회는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에 너무도 바쁜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누구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왕으로 믿고 따르는 삶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계십니다. "나에게 주님은 누구인가?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평생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어야 할 중요한 물음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일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할 때마다 다시 일으켜 주시고, 그 과정속에서 더 깊은 깨달음과 성장을 경험하게 하시며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그분을 믿는 사람들 삶 속에 존재합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을 부인하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지만, 결국 연약한 자신을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가셔서 그를 회복의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보면 “또한 ‘보라. 여기에 있다’, ‘보라.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들의 마음과 삶속에서 이뤄지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천성의 나라가 지금 여기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칼로 세우는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다르듯이 세상의 감사와 진리 안에서의 감사는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을 선택 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조건으로 감사의 이유를 찾을때가 있습니다.
어느날 장미꽃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원망했다고 합니다. “신이시여, 왜 가시를 주셔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가시를 준 적이 없다. 오히려 가시나무였던 너에게 장미를 주었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계획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려면, 세상의 사람들과 같은 기쁨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세상과 다른 이유는, 세상의 나라는 때로 잘 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압제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며, 절망 가운데에서도 감사와 소망으로 인도하는 나라입니다. 영적 고단함 속에서도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다스리십니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주님과 막히게 되면 우리 안에 기쁨과 감사는 사라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으니 흔들림 없이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골 2:6) 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은 인생의 광야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필요한 은혜와 힘을 주십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은 만나를 먹기 시작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돌보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헌금을 통해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며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감사의 폭을 넓혀서 더 많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가치는 크기나 분량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감사의 뿌리를 주께 두며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절반이 감사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감사는 단순히 외적인 조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믿음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대강절을 준비하며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며 언제나 다함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주도 우리를 굳게 세워 주시는 주안에서 감사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