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2024 | (성령강림후 제 22주 예배)

건강한 교회 시리즈 34 영광의 자리를 위한 준비 Preparation for the Place of Glory

마가복음 10:35~45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영광의 자리를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을 때, 자신들도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요청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일한 기사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한 아들은 주님의 오른편에 다른 아들은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마태복음의 기사에서는 진한 모성애로 느껴지겠지만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영광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출세 (出世) 하다'를 직역하면 '세상에 나온다'라는 뜻입니다. 숨어 살던 사람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해 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청탁하던 영광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을 받고, 주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이 잔은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수 있는지 되물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이 당할 고난을 언급하며,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넘겨지며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침을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난 후에 전한 말씀입니다. (33-34)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언하는 마지막 단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례자가 걸어야 할 마지막 발걸음이었지만, 그 길은 단순히 유대인의 결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이해하고 있던 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으며, 그 핵심이 바로 거룩성과 섬김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세상에서 출세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의 구원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복 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알면서도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이방나라로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섬기던 주인의 아내가 유혹을 하자 이를 거절하고, 성결한 삶을 선택했는데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에서 수많은 고난을 선으로 바꾸시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선한 결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거룩한 삶을 선택한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걸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출세란 세상의 기준에 따라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출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삶을 부여 받도록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예상치 못한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세상의 성공의 기준으로 보면 더딘 것 같고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 삶이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욥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대로 모든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 다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은 세상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알려 주고 싶었던 교훈입니다.

첫째, 지위가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과거에 기독청년들에게 '고지론'을 외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영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취지였습니다. 그 후, 다른 한쪽에서는 '미답지론'을 외쳤습니다. 답이 없는 낮은 자리, 세상의 변두리로 가서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은 곳을 지향하는 믿음과 낮은 자리로 가라는 믿음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리며 모든 계층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고 화해하는 사역을 실천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정체성은 예수님처럼 밀알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자리에서 나오게 됩니다. 지위가 있는 자리나 낮은 자리나 주어진 환경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개혁과 변화를 이끌고, 동시에 소외된 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역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어머니는 당시 수도였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눈에 보이는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왕좌에 앉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다윗 성전의 보좌가 아니라 내가 마셔야 할 잔과 세례(38)을 받을 수 있느냐였습니다.

본문에서 표현한 잔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고통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슬픔과 관련된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와 출애굽 당시 애굽 군대가 물에 수장되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죽음을 상징하는 물의 이미지입니다. 이해가 달랐던 세베대의 아들들은 ', 저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14:50 참조),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 앞에서 그들은 그 잔을 피했습니다. 이후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성령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부활의 영광으로 드러난 것을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깨달은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순교한 첫 번째 사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2) 야고보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유진피터슨 목사님은 한길 가는 순례자라는 책에서 한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순례자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과 그 길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면서 깊은 기도가 없이는 긴 순종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도마는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해 그 길을 좀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가야 할 방향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 길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달리는 경주자는 무거운 짐이 되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인가요? 외국생활에서 잠시 여행을 온 관광객과 현실을 살아내는 이민자들의 삶의 시선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관광객은 잠시 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 땅을 바라보고 떠나지만, 이민자는 그 땅에서 살아가며 그곳의 목적과 의미를 깊이 생각합니다. 순례자도 이와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잠시 깨닫고 머물다 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살아가는 순례자의 마음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똑같이 이 땅을 밟고 있어도 향하는 시선과 마음이 달라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영원한 소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표를 향해 매일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믿음의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자기 목자의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상 17:40) 다윗은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고 선언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으로 사명의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둘째,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44 , 너희 중에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고 온 것이다.

어떤 자리에 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제로 내 손에 든 것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위대함이 권력이나 영광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마음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이나 선행을 피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6:3) 는 말씀은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한 일을 다 보신다고 기록합니다. 잠언 19 17절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리라" 말씀합니다. 선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이기에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행위를 기억하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신뢰 관계 속에서 우리의 선행의 힘은 더욱 더 커질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가던 가을이었습니다. 미국의 오리건주 유게네 마을 회관에는 종교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붙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즐겁게 인사를 나누며 영화를 관람합니다. 내용은 한국 전쟁이 낳은 고아들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가 끝나자 한 농부 부부는 그 아이들을 잊을 수 없었고, 영화를 잊으려 해도 영화가 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와보니까 6.25 전쟁 직후의 한국은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대로 전쟁 고아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전쟁 고아 8명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나자 여러 단체에서 이들을 돕겠다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농부 부부는 전쟁 고아들을 돕는 기관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관이 홀트 아동 복지재단입니다. 홀트씨는 선한 씨앗을 심은 것 뿐인데, 홀트 아동복지재단이라는 열매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1955년 해리 홀트(Harry Holt, 1905 ~ 1964)와 그의 부인 버다 메리언 홀트(Bertha M. Holt, 1904 ~ 2000)가 전쟁으로 인해 고통속에 있는 한국의 고아 8명을 입양한 것이 홀트아동복지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노부부는 현재 한국에 묻혀 있지만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이 프로그램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지만 이 땅의 영광의 자리를 거부하고 섬기는 자의 본이 되셨습니다. 순례자의 길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영광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영광의 보좌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우리에게 영원한 상을 예비해 주십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고 말씀하며, 성도들의 삶에 상급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현실속에서 뜻을 분명히 알 수 없는 모호한 문제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홍해 바다가 앞을 가로 막기도 하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을 떠난 온 것을 후회하기도 하며, 기본적인 생존권에 대한 위협과 어려움이 있는 광야의 한복판에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한주 동안도 섬김을 통해 우리 모두 영광의 자리를 준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10/13/2024 | (케임브리지한인교회 창립 46주년 기념예배)

제자도 The Discipleship

마태복음 4:18-20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6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저와 함께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6년이면 청년의 나이를 지나 장년의 나이입니다. 그만큼 우리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나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우리의 나이에 비교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생명을 가지 유기체(有機體, organism)이기 때문에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교회는 과연 나이에 걸맞게 성숙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교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를 누군가에게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은 아직 어린 아기이기 때문에 옳은 말씀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어른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훈련을 통해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압니다.” (히브리서 5:12-14)

 

히브리서는 누가 기록했는지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모두 정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큰 구원(the great salvation, 히브리서 2:3)’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는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데서 생긴 말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큰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한 믿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기준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진실하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분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갓난아기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의 제목은 제자도입니다. 말그대로 풀이하면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교회에 한동안 제자 교육이 유행했었습니다. 제자 교육으로 유명했던 사랑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자 교육을 열심히 받았지만 그 교회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또 시카고에 빌 하이벨스 목사가 시무하는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가 있습니다. 이 교회 역시 제자교육에 열심이었습니다.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이 교회에서 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입니다. 이 교회가 2007년에, 지난 32년 동안 추진했던 목회의 결과를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책 제목이 ‘Reveal’입니다. 그리고, “Where Are You?” 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밝힌다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10,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3년간 조사했고, 120명을 일대일로 인터뷰를 해서 그 결과를 그 책에 담은 것입니다. 그 책에서 내린 결론은 우리는 숫자로는 성공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도 이 결론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제자도에 대한 좋은 책이 있어서 소개 드립니다. 두 권 모두 좀 오래된 책입니다만, 이 책을 능가할만한 책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 1934-2021, 아르헨티나)가 쓴 제자입니까(DISCIPLE, 김성웅 역, 1975)?’ 라는 책입니다. 아주 쉽게 쓴 책이어서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 내용이 참신합니다. 또 하나는, 데이빗 왓슨(David Watson, 1933-1984, 영국)이 쓴 제자도(DISCIOLESHIP, 문동학 역, 1987)’ 라는 책입니다. 조금 내용이 빡빡하고 전문적이지만, 내용이 좋아 추천할만한 책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갓난아기 같은 교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첫째는, 그 교회가 드리는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은 듯한 기도를 하는 교회는 갓난아기 같은 교회이다. 성장하는 교회는 항상 똑 같은 기도를 반복하지 않는다. 둘째로, 그 교회가 분열되어 있는지 일치되어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이 분열되어 있는 교회는 영적으로 갓난아기 같은 교회라고 지적한 대로이다(고린도전서 3:1). 셋째로, 그 교회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갓난아기들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 갓난아기 같은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도 받으려고만 하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넷째로, 갓난아기 같은 교회에는 늘 일꾼이 부족하다. 당신의 교회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소수의 몇 사람들이 그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일꾼이 부족하지 않은가? 여러분의 교회에 이상과 같은 증상들이 있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갓난아기 같은 교회이다.”

 

저는 창립 46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를 보면서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가 아니라 미성숙한 교회라면, 그래서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미성숙한 증상들이 보인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한번의 설교를 듣고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 시간에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제자도(disciple-ship)’에 대한 모든 내용들이 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는 어촌(漁村)입니다. 어느날, 호숫가를 걸으시던 예수님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셨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베드로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들겠다(Follow Me, and I will show you how to fish for peopl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콜링(calling)’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부르심혹은 한자로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콜링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콜링은 특별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도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절반 정도가 어부들이었고, 세무서 직원이 있었고, ‘열심당(the zealot)’ 당원이 있었습니다. 열심당 사람들은 과격한 애국주의자로 필요하다면 살인도, 방화도도 폭력도 서슴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도 있었습니다. 12명 중에는 정체가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콜링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도 지금, 여기서 콜링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콜링에 응답하느냐, 응답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콜링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콜링에 응답했습니다. 성경은 시몬과 안드레는 그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콜링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포기와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예수님의 콜링에 응답하기 위하여 그들의 전 재산인 그물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콜링에 응답하기 위해 유대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을 버렸습니다(빌립보서 3:7-9).

 

여러분 중에 누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면 자연히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콜링에 응답하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희생했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구원은 대가 없이 얻을 수 있지만, 제자가 되는 일은 당신의 생명을 요구할 것이다(Salvation is free, but discipleship will cost you your life).”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신다(When Christ calls a man, he bids him come to die).”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말입니다. ‘콜링을 들은 사람이 죽지 않고서야 어찌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콜링에 응답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지 배우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인지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배우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서 삽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제자도는 안정된 삶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훗날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선을 행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비록 그것이 고난을 의미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본이시니, 여러분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NLT)

 

끝으로, ‘콜링에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명(使命)’이라고 합니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사명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마가복음 16:15, NIV) 이 말씀에 나오는 ‘into’라는 전치사는 희랍어 원문에 ες(eis)’라고 나와 있습니다. ‘ες’는 장소나 시간,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세상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매일 만나는 학교 친구나 회사의 동료들 간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고, 그들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섬기는 삶이 아닙니까? 이것이 세상을 치유하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까? 다시 본회퍼의 말을 들어볼까요? 제자도가 없는 기독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이다(Christianity without discipleship is always Christianity without Christ).” 오직 제자도를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갓난아기처럼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천편일률적인 기도를 하고,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분열하고,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일꾼이 없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앞에서 소개했던 후안 카롤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독자들에게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그 교회의 회원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시대를 책임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 제목입니다. 특별한 생각 없이 주일 예배에 모였다 흩어지는 교회가 아니라 모일 때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 듣고 용기를 얻고 격려를 받아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여러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콜링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콜링앞에서 이 교회의 회원이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겠다는 결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야 이 시대를 책임지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10/6/2024 | 세계성만찬 주일, 장학헌금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3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약속 Our Promises We Must Not Forget

고린도 전서 11: 23~29

이 시간 예배 드리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세계성만찬 주일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지역과 신앙 안에서 하나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은 하나인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된 교회, 사도적 교회입니다. 이 속성 가운데 “보편적”교회는 모든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매주 사도신경으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바로 보편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바울의 교회론을 보면 유대 민족주의를 벗어나 이방인들을 향한 환대, 세상을 향해 열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대문화, 헬라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던 사도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 편지를 통해 성찬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교회가 주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며 하나님의 동등한 백성임을 고백하며 성만찬을 지켜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 은혜의 자리에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있습니다.

첫째, 성찬의 정신은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 갑부였던 록펠러는 55세에 불치병 진단을 받으며 1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고, 그로 인해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들어가던 , 로비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20:35)라는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말씀을 읽는 순간, 그는 마음에 전율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잠시 병원 한쪽에서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병원측에서는 병원비가 없어서 입원이 안된다고 했고, 환자의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며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비서에게 아무도 모르게 지불을 하도록 했습니다. 치료를 받았던 소녀가 회복이 되었고 록펠러는 자신의 자서전에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록펠러는 나눔의 삶을 작정하고 제단을 세워 미국을 넘어 세계 각 지역에 도서관을 세우고,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선한 일에 더욱 힘을 쓰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선한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 거하시며 나누고 베풀 힘을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며 제자들에게 이 떡과 잔을 마실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기억하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정신은 내것을 나누는 삶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전하고,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계성만찬 주일을 장학헌금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 공부하는 다음 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눔을 통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되어 줄 수 있고, 포기하려던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장학헌금 주일을 통하여 미국에 와서 학업을 이어가는 세대들이 꿈을 이루는데 귀한 씨앗이 되리라 믿습니다.

초대교회는 매일 함께 공동의 식사를 나누고 그 끝에 성찬을 행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필요한 음식을 각자가 집에서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자나 노예의 신분인 성도들은 집에서 음식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마음과 뜻이 주안에서 서로 통했습니다. 당시 생명을 주는 삶의 이야기가 외부 사람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시선에 그들의 삶의 양식이 너무 차이가 났기에 궁금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교회사 교수인 알렌크라이더(Alan Kreider,1941-2017)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4세기 전까지 설교에 대한 어떠한 글도 쓰지 않고 기도와 성만찬 세례에 대한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4세기 전 남아 있는 설교문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관해 나누고 성경대로 살지 못한 죄를 고백하며, 내것을 내어주며 서로를 용서하고, 다름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말씀을 서로가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 성찬은 세상과 교회를 구별되게 하는 의식입니다.

바울은 성찬의 기원이 그가 만든 것이 아니며, 교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전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한 이유는 당시 고린도 교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주의 만찬이 일반 식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행하는 성찬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 가운데 애찬(Love Feast) 성찬(Eucharist)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함께 모여 애찬을 나누며 성찬을 진행했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다리거나 배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어 버렸습니다. 대개 공동 식사에 늦게 참석하는 이들은 노예와 노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주의 만찬을 하면서도 배고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성찬의 본질이 그들만의 잔치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성찬의 정신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 책망합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유익을 추구하다 보면 갈등과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땅의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인해 때때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찬의식은 그러한 갈등을 넘어 세상과 교회의 목적이 다름을 분명히 구별하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식사후에 제자들에게 잔을 드시며 이것을 행하여 마실때마다 자신을 기념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기념물을 구입합니다. 특별한 순간과 장소를 기억하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피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겼고, 이를 기억할때마다 주님과의 관계를 깊어 지게 합니다.  

25절입니다. 11:25 또 식사 후에 포도주 잔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성찬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성찬에 참예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회복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약속 안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 받고 가장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약속이 지니고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본훼퍼 목사님은 “혼인이 언약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언약이 혼인을 보전하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언약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언약 안에 있을 , 언약은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26절입니다.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의미를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찬 예식을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은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신앙 여정에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시선에는 모두가 사랑 받기에 합당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랑은 서로를 더 가까이 연결해 주고, 하나가 되기 위해 실천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떡을 떼고 마시는 것은 말로 만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27 ○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그 사람은 주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29 만일 누군가가 그 빵과 잔이 주의 몸임을 분별하지 못한 채 먹고 마신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찬에 임하기 전에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경우, 사람은 주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므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시간 주님과 하나가 되어진 성도들은 성찬을 준비하며 스스로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자기 점검 없이 형식적으로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가 됩니다. 성찬의 떡을 나눌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찬의 잔을 마실 , 보혈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주님을 더 닮는 것 뿐입니다.

셋째, 성찬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은혜의 통로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특별한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DMZ 민간인 통제구역에 있는 임진강 '독개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한국전쟁때에 파괴되어 현재는 다리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전쟁으로 끊겨진 2개의 다리 가운데 한개의 다리는 복구되었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 복원된 다리를 통해 유엔군 포로들이 귀환해 왔다고 해서 자유의 다리로 불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의 흔적으로 파괴된 독개 다리는 70년 세월동안 더 이상 사람도 기차도 달릴수 없는 다리로 남아있습니다. 과거에 이 다리는 서로의 소식을 나누고,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며,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현재 끊겨진 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지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건널수 없는 위험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은혜의 통로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끊어지지 않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 우리에게 깊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서로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이임을 다시 깨닫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주님에 의해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성찰해 보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을 어떻게 실현할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찬을 마친 후에는 삶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둔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한주도 성도들의 삶을 통해 주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소망합니다.


9/29/2024 | 성령강림후 제 19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2 고난 가운데 기도하라 Pray in the Midst of Suffering

야고보서 5:13~20

성령강림 열아홉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니까 나무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자신의 몸을 변화시켜 겨울을 맞이하는 모습은 수분 손실을 막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나무는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앙상한 가지만 남겨둡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보며 영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성도도 인생의 겨울, 고난의 시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을 돌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하실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성숙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집중될 , 세상의 관심이 시들어지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기도라는 단어가 무려 8번이나 언급됩니다.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를 받으십시오,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경건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큰 효력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본문을 통해 고난 중에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겨울철 감기부터 심각한 질병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황들을 고난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기도를 하게 될까요? 삶이 즐거울 때일까요, 아니면 크고 작은 고난을 겪을 때일까요? 본질적으로 인간은 고난이 닥칠 기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모든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하지만,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고난이 닥쳤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성화를 이루기 위해 고난의 경험을 사용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고난과 기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고난과 기도의 관계입니다.

 

고난을 겪고 있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고난 당한 자의 대표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전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실패의 사건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판결은 율법주의자들의 입장에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패의 자리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새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고난이 주는 영적 교훈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고난을 이길 힘을 주님으로 부터 얻게 됩니다. 고난 자체에 집중하면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이 커질 수 있지만, 고난을 이기신 주님을 기억하면 그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고,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찾아 오면 불행의 원인을 찾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고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회복하기 위해 주신 시간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부모를 원망하며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장애가 죄의 결과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장애 보다 사람들의 시선도 큰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평생 앞을 보지 못했던 그를 회복되어지는 것에 있었습니다그리스도께서 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저항할 수 없는 우리의 상태를 건져 내시기 위해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죄의 마지막 결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5-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고난이라면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말씀합니다. 인생의 어둠의 터널을 지나갈 때에 희망이 사라진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신 주님께 희망을 두십시오. 우리는 온전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둘째, 치유와 기도와의 관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5:14 혹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십시오.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병든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찾아가 기도 받으라고 합니다. 당시 장로들은 교회의 양떼를 돌보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병이 들면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1세기 예수의 제자들은 병자의 치료를 위해 기름을 바르는 것이 일반적인 행위였습니다( 6:13).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간호할 때도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한 것을 있습니다( 10:34). 이는 치유를 위한 적절한 조치로, 기도와 함께 신체적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기도와 의학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 기도 속에 의사의 처방이나 치료가 포함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라고 권장하십니다.

주님은 3 동안 지속적으로 병든 자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하신 말씀에서 '건강한 '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말입니다. 그들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했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유대 사회에서 병든 자들은 죄인으로 취급받았고, 이로 인해 그들은 더욱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든 자와 죄인들에게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병든자를 위한 치유기도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질병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는 형제의 아픔을 나의 고통처럼 여기며 주님의 마음을 품는 기도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이미 주어진 것들을 감사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믿음의 병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먼저는 영적인 치유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통해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봄의 꽃향기,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 숨쉬는 순간 조차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의 병이 들면 우리는 은혜를 기계적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치유 받으면 은혜는 값비싼 은혜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안에 어둠을 몰아내시고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류에게 주시는 치유의 사건입니다.

 

5:17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무려 3년 반 동안이나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았지 않습니까? 18 그런데 그가 다시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주룩주룩 쏟아져 땅에서 곡식들이 다시 자라나지 않았습니까?

엘리야는 우리의 같은 본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엘리야가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까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고 말씀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불꽃은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에는 꺼지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꽃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때 모세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떨기나무 가운데 신비로운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불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으며, 애굽의 포로로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마시지 않으면 갈증을 느끼며, 어려움에 처하면 두려워하고, 위협을 받으면 불안해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낙심하고 좌절하며 실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우리가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바로가 두렵고 자신은 말이 어눌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고, " 입에 말을 가르쳐 주겠다" 약속도 하셨습니다. 끈질기게 거절하는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백성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를 회복시킨 하나님은 애굽에서 백성들을 구출하심으로써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셨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셨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고 새사람이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9 ○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미혹을 받아 진리에서 돌이켜 그릇된 길로 떠나갔을 때, 누구든지 그 사람을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면, 20 여러분은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 죄인을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게 한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낸 큰일을 한 것이고, 그 결과로 그 죄인의 많은 죄를 덮어 준 셈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편지를 마치며 진리 안에서 바로 서 있으라고 합니다. 미혹된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미혹하여'라는 플라나오(πλαναω)는  '옆길로 빗나가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목표에서 시선이 벗어났거나, 갈망하는 시선을 다른 대상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벗어난 자가 살 수 있는 길은 생명되신 주님께로 돌이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길은 셀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길을 잃어 버리거나 다른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들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우리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환자가 의사의 지침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 바른 길로 걸아가야 합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것은 다시 회복하기 위한 수술과도 같습니다. 수술을 받는 것은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병든 부위를 치료하고 회복시킵니다.

미혹의 길에 빠진 형제들이 진리의 길로 어떻게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바로 기도와 사랑입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형제를 공동체 안에 품어 안아서 회복할 수 있도록 함께 도와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미혹된 형제가 있다면,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사랑으로 품어 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이전에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잃은 양에게 다가오는 것은 이리떼입니다. 인생의 어둠이 찾아온다면 잃은 양은 목자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잃은 마리의 양을 끝까지 찾아오신 목자가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길을 잃은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 주십니다.

야고보는 편지를 마치며 인생의 고난이 오면 목자 되시는 주님께 기도할 때이며, 기쁠 때에는 주님을 찬송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상처받는 자에게 희망을 주는 자에게 함께 계시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뤄주십니다. 한주도 믿음의 길에서 상처를 별로 만드는 선한 일에 동참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9/22/2024 | (성령강림후 제 18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1 지혜의 출처를 확인하라 Verify the Source of Wisdom

야고보서 3:13~4:3

성령강림후 열여덟번째 주일입니다. 이 시간 새마음을 주시는 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함께하시길 소망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하늘에 속한 지혜와 육신에 속한 지혜를 대조합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의 출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원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읽을때에 지혜가 임하게 됩니다.

 

잠언 1:7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니,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잠언 3:7에서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당시 교회 내에서 스스로 지혜와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이기적인 세속적 욕망에 따라 성도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정보와 같이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 지혜는 시기심을 낳고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깁니다. 세상에는 뛰어난 머리로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으로 인해 다툼이 발생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만이 아닙니다. 더 가까이 가정과 일터, 교회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이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과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 하늘에 속한 지혜의 특성은 무엇입니까?(3:13-18)

 

13 ○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진정으로 지혜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입니까? 지혜에서 나오는 온유함으로,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그런 사람입니다. 14 여러분의 마음속에 강렬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을 품고 있다면, 그런 것들을 자랑하지도 마시고, 또한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도 마십시오. 15 그런 지혜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요, 육신에 속한 것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이 들끓는 곳에는 온갖 혼란과 악행이 차고 넘칩니다. 17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무엇보다 순결하고, 또한 화평하고, 너그럽고, 양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이 없고, 위선적이지 않습니다. 18 참으로 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화평의 씨를 뿌릴 때 거둘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는 온유함과 선한 행실로 나타난나고 말씀합니다. 대학 시절에 묵상했던 말씀 중에서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 37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는 세속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로 가는 일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럴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는 세속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믿음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죄된 마음, 시기심으로 인해 다툼과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야고보는 하늘에 속한 지혜의 열매를 열거하는데, 이 열매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성령의 열매와 유사합니다. 지혜의 열매는 순결함, 화평함, 너그러움, 양순함, 자비, 그리고 편견이 없고 위선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참으로 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화평의 씨를 뿌릴 때 거둘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모두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17) 우리는 바울이 전한 성령의 열매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지혜의 열매가 가르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이방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결함을 지켰더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가 있을때에도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죄가 다가올때에 바울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6 11) 예수와 함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성결함은 죄의 유혹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화평함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성도는 너그러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 12:18)고 권면합니다. 우리 안에 화평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다면, 이는 분명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증거입니다. 또 다른 열매는 양순함입니다. "어질 량, 순할 순"이라는 한자어인데 , 바른 몸가짐과 순종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바른 마음으로 서 있게 되면,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도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편견을 없애야 합니다. 편견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진실한 성도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말과 태도를 바르게 하고, 형제를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형제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갈등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4:1-2)

 

4:1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다툼이 생겨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4:2 여러분이 욕심을 부려 무엇인가를 원했는데도 그것을 얻을 수 없으면, 살인을 저지릅니다. 무엇인가 탐내어도 그것을 갖지 못하면,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만일 여러분이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갈등의 원인이 욕망과 욕심에 있음을 언급합니다. 쉬운말 성경은 탐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시기하여도"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시기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루테, ζηλοτε "라는 단어는 '악의를 지니고 바라보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시기심은 상대방에 대해서 집요하게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쟁 사회 속에서 시기심을 품고 상대방에게 악의적인 마음을 가지면 갈등과 다툼이 발생합니다. '살인을 저지릅니다'라는 이 표현은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살인을 말합니다. 예수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서 지속적으로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을 끊어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살인 사건들은 인간의 시기심으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한 사건은 첫 번째 인류 간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시기심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알게 해 줍니다. 야고보는 이는 육신에 속한 것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시기와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온갖 악행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이 들끓는 곳에는 온갖 혼란과 악행이 차고 넘친다고 야고보는 경고합니다.

 

잠언은 "마음이 평안하면 몸도 생기가 돌지만, 마음에 시기심을 품으면 뼈까지 썩는다."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전서 11-3절을 보면 2:1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기만과 위선과 시기 및 온갖 헐뜯고 비난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2:2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그 젖을 먹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 복음을 듣고서 여러분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꼭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합니다.

 

번은 목회자 컨퍼런스가 끝난 서로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리에는 몸이 조금 불편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시며 장애인 사역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고백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지금 삶이 가장 행복합니다. 이미 천국을 살아가고 있어요. 삶속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고백이지만 그분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고백했습니다. 삶이 시들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목적이 일상의 행복을 빼앗아 가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 세상의 지혜 너머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4:3)

 

4:3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구했는데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육신적인 쾌락을 누리는 데 쓰려고 잘못된 동기에서 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탁월해지기 위해서는 일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고 오랜 시간 동안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당장 변화가 느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결단하면 그분의 일하심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의 자녀들은 모두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의 지혜 너머를 바라 보며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계획을 지니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믿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깊이 있는 연습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다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모습 너머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고 읽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이웃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지혜의 출처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논문을 쓰는 학생이 그 출처를 정확하게 기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랜 전통과 역사속에서 수용된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경험하지 못한 지난 역사속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 온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 낮은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해 주시고 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지혜는 정욕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뒤에 통회하고 자복하며 하나님께 정결한 마음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다윗의 영혼을 새롭게 해주셨고 그에게 그 은혜를 주셨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새로운 논문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예술적 작품을 선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지혜의 말씀에 대한 출처를 밝히고자 한다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하늘이 속한 지혜의 출발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춰 행하도록 도우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1 1초가 주님께서 새롭게 주신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되는 주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인류에게 주어진 삶의 지침서인 지혜의 말씀을 구하고 찾으며, 두드림으로써 세상의 지혜 너머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날마다 풍성히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