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9/2017 |


11/12/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6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I The Christian Way To Live

베드로전서 2:18-25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시리즈 설교 두 번째 시간으로 ‘고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 ‘고난’이라는 말이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 여러가지 말로 나와 있습니다. ‘시련’ ‘시험’ ‘핍박’ ‘박해’ 같은 말들이 ‘고난’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로도 ‘suffering’ ‘trials’ ‘trouble’ ‘persecution’ 등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제 머리에는 네 사람이 떠 오릅니다. 욥, 요셉, 다윗,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네 사람입니다. 욥은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대명사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받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죽고, 그 많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모두 잃어버립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1:21) 욥의 친구들이 찾아 와서 욥을 위로한답시고 오히려 욥에게 상처를 안겨 줍니다. 그 때도 욥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where I am going. And when he tests me, I will come out as pure as gold)!” (욥기 23:10) 욥이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을 때, 욥은 그가 받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의 말에 충분히 공감(共感)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을 단련하십니다. 잠언 17: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도가니가 은을, 풀무가 금을 녹이듯, 여호와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신다 (Fire tests the purity of silver and gold, but the Lord tests the heart).” 또, 이사야 48:11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I have refined you, but not as silver is refined. Rather, I have refined you in the furnace of suffering.” ‘refine’이라는 말이 ‘불순문을 제거한다’는 뜻이 잖아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불순문이 모두 제거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고난의 용광로 (the furnace of suffering)’ 속에 그의 자녀들을 집어 넣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 “아, 하나님께서 내 속에 있는 불순물들을 없애려고 하시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칼 메닝거 (Karl Menninger, 1893-1990)라는 탁월한 미국의 정신과 의사 (psychiatrist)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s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대하는 태도이다).” 내가 받는 ‘고난’ 속에 나를 pure gold로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 태도가 나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요셉이 받은 ‘고난’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위로 열 명의 형들이 있었습니다. 그 형들은 모두 야곱의 첫 째 아내인 레아가 낳았습니다. 야곱의 둘째 아내인 라헬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야곱과 그 동생 베냐민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레아와 라헬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싸웠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도 나옵니다. 어느 날, 레아의 아들 루우벤이 ‘합환채 (mandrakes)’ 구해다가 어머니에게 줍니다 (창세기 30:14). 이 ‘합환채’라는 것이 마약 성분이 들어 있rh, 성적 흥분제가 들어 있는 식물입니다. 언니 레아가 ‘합환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안 라헬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자기 손에 넣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야곱의 집안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기와 질투, 불화, 이런 것까지도 그의 뜻을 이루는 도구(道具)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의 시기와 질투를 사용하셔서 경쟁적으로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렇게 해서 야곱의 열 두 지파(支派)를 완성하시고, 국가의 기초를 만드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열 일곱살의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불행도 이런 불행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불행과 고난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들과 아무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요셉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집트에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요셉은 자기의 고난의 삶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가서야 깨닫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형님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가 50:20) 이 말씀을 읽을 때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다윗의 삶 속에도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왕 사울로부터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다윗의 삶은 그가 어린 나이에 전쟁에 나가 있던 형들을 찾아가면서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바뀝니다. 그 전쟁터에서 다윗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이기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는 이런 드라마틱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다윗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다윗은 단숨에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게 된 이유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해서 뒤를 쫓는 사울을 피해서 다윗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별 짓을 다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침을 흘리면서 미친 척도 해야 했고, 때로는 적장(敵將)에게 투항하여 목숨을 구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다윗은 수많은 시를 씁니다. 때로는 자기의 원수를 원망하는 시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기의 비참한 상황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은 이런 다윗의 시 속에 하나님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보시지요. 다윗에게 사울이 없었더라면,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지 않았더라면, 다윗과 사울이 불편한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그래도 다윗은 시를 썼을까요? 만일 그랬더라면 오늘 우리가 가진 성경에 시편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시편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은 그 많은 메시야의 비밀을 성경 어디에 숨겨 놓으셨을까요?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2장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2:21)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비록 고난을 받게 된다고 해도 여러분은 선한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신앙의 박해를 피해서 소아시아 지방에 피신해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들과 동족(同族)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족으로부터 받는 핍박이 아니라,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example’로 삼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24절) 이 말씀은 이사야 53:4-5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상처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By His wounds, we are healed!”라는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 오스트리아)가 쓴 시 중에 ‘엄숙한 시간 (Solemn Hour)’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지금 까닭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 /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지금 까닭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다. /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걷고 있다. 지금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 지금 까닭없이 죽어가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제가 릴케의 시에 대하여 조예(造詣)가 없습니다만, 릴케가 이 시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시의 모티브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이것을 단순히 ‘이기적인 삶’이라고 비난할 수 없는 시대의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직하게 읽는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게 되고, 다른 사람을 바라 보게 된다고요. 자기 중심적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으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By His wounds, we are healed!”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받고, 그리스도께서 채찍질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example’입니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으시고, 거짓말을 한 적도 없으시지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우리가 따라 걸을 수 있도록 큰 발자국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걸으신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하여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1세기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단련을 받아, 하나님을 믿는 정금 같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참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똑 같이 고난의 용광로를 통하여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지금 시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아무 이유 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욥도 그랬고, 요셉도 처음에는 자기가 고난 받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예수님도 이유 없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 속에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의 목자 (the Shepherd of souls)’가 되셨습니다.

고난은 설교자인 저에게도 모두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제가 고난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제 삶에 대한 고난의 의미를 깨우치고,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고난에 대하여 발견한 것들, 그리고 고난에 대해 읽어 왔던 성경 말씀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쓴 글을 읽었습니다. “Be patient. God isn’t finished with you yet (인내하라. 참고 기다리라. 하나님은 아직 당신을 통해 하시려고 하는 일을 끝내지 않으셨다).” 이 말 끝에 Philippinas 1:6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은 성경을 찾아 봤더니, 그런 말씀은 없고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빌립보서 1:6 말씀을 읽다가 그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그렇게 쓴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두고 계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진행형입니다. 자신의 삶이 실망된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려고 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Don’t be ashamed of your story. It will inspire others.” 누가 이런 말을 했는지 author unknown이라고 되어 있네요. 지금 나의 이야기가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11/5/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5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 The Christian Way To Live

베드로전서 2:13-17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계속해서 저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비난 받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좋다고 칭찬을 받는데, 세상에 나가서는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이 그런 사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교회 돈을 잘못 사용하고,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문제에 연루되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서도 교회에 돌아와서는 사탄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고,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고 있다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한 사람들은 ‘표절 (plagiarism)’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 잘 압니다. 자신의 학위 논문을 자신이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썼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이고, 수치스러운 일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를 보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지도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비행이 일간 신문에 게재될 때마다 얼마나 교회가 비난을 받겠습니까? 저는 목사들이 모이는 한 모임에 갔다가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들이 모여서 한다는 말이 지금 한국에서 정부와 언론이 작심하고 개신교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천주교나 불교가 잘못한 기사는 신문에 싣지 않고 교회가 잘못한 일만 집중적으로 보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가 잘못했으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목사들이 더욱 조심을 해야 하는데,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들은 낯선 나라, 낯선 문화권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삶을 사는지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을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 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 하고 다른 습관과 행동들을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읽었던 베드로전서 2:12 말씀이 바로 그런 상황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선한 행동’이라는 말은 ‘good deeds (착한 행동, NIV, NASB, NKJV)’ 혹은 ‘honorable behavior (칭찬 받을만한 행동, NLT)’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 속에서도 ‘good deeds’를 계속하고, ‘honorable behavior’를 계속하면 결국 비난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비난을 하지 않게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New Living Trnanslation으로 성경을 읽다가 에베소서 2:10 말씀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아, 이 말씀이 그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 ‘masterpiece’라고 합니다. ‘masterpiece’는 한 작가의 대표작을 말합니다. 헨델의 masterpiece는 오라토리오 ‘메시야 (Messiah)’입니다. 르네상스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masterpiece는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입니다. 미켈란젤로의 masterpiece는 시스티나 성당 (Aedicula Sixtina)의 천정에 그린 ‘최후의 심판’입니다. 1508-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게 한 ‘다윗 상’ 등입니다. ‘다윗 상’는 3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masterpiece’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공들여 창조하셨으니까 ‘masterpiece’라는 말을 썼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에베소서 말씀을 잘 보면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masterpiece’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는,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이 선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쓴 두 번째 편지에 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죄에 물든 옛 생활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But those who fail to develop in this way are shortsighted or blind, forgetting that they have been cleansed from their old sins).” (베드로후서 1:5-9)

저는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크리스천의 선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크리스천의 삶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삶입니다. 17절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하십시오 (Respect everyone, and love you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Fear God, and respect the king).” 또 13-14절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께 복종하십시오. 또한 왕이 보낸 관리에게도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잘못된 사람을 벌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게 크리스천의 삶 맞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불의에 항거하고, 복종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말씀에 그런 구절이 한 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행간(行間)을 잘 읽어 보면 아무 조건 없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잘 사용할 때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14절).

성경 어디에도 폭력을 정당화 한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이 하게도 이 사람은 ‘열심당 (the zealot)’ 출신입니다 (누가복음 6:15). 우리 개념으로 하면 과격한 애국 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은 폭력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인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열심당 출신의 시몬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행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열 두 제자의 명단에 이름만 나올 뿐, 별 다른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동행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 가져왔던 자신의 신념이 옳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성경에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Mahatma)’로 칭송을 받는 간디 (Manilal Gandhi, 1869-1948)가 성경에서 배운 것은 ‘비폭력 무저항’이었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즈 (1999년 4월 18일 자)는 지난 1천 년 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하였습니다. 간디에게서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은 결국 흑인들이 차별 받고 있는 사회를 개선하고,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 시키는데 공헌했습니다.

영화 ‘Amazing Grace’로 유명한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영국에서 노예무역법을 폐지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드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 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정치인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21살의 나이에 하원 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1787년에 처음으로 의회에 노예무역폐지법을 제출합니다. 그 때는 18세기 영국은 수입의 1/3을 노예 무역으로 벌어 들였다고 합니다. 의회는 그가 제출한 법안을 보기 좋게 부결시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만나 설득해 갑니다. 그리고 지지자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1807년에 영국에서 노예무역법이 폐지 됩니다. 무려 20년만에 그가 의회에 제출한 법안이 통과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디를 가든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폭력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성경에 나와 있는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한번도 폭력으로 세상을 바꾼 역사는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은 사랑으로 악을 이긴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6: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Do everything in love.” (NIV) “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 (NASB) “Do everything with love.” (NLT) 크리스천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시작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진행해야 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2:20-21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인데, 여러분들은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에 숯불을 쌓은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악으로 악을 이긴 경험이 더 많습니까?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던 기독교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국교로 공인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 이전까지 그렇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로마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가 되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콘스탄틴 황제 바로 직전의 황제가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us, 284-305) 황제였습니다. 이 때가 가장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을 때입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아예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합니다. 이 때는 로마가 내부에서부터 분열되어 통치 기반이 제일 허약했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306-337) 황제는 분열된 로마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기독교를 공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때는 로마의 궁중에까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극심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결국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선한 행동으로 험담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15절), 선으로 악을 이기며,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악을 행하는 구실로 삼지는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생활하십시오 (For you are free, yet you are God's slaves, so don't use your freedom as an excuse to do evil).” 크리스천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지만, 하나님께 얽매인 ‘God’s slaves’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악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 배경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로마서 12:19).

오늘 말씀에 비추어 지금의 우리의 삶을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말고 꾸준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2,000년 전에,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제시했던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그곳에 살아가면서 이 삶의 방식대로 살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결국 이 삶의 방식이 옳고, 결국 이 삶의 방식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명심해야 할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으로 이기고,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10/29/2017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 설교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로마서 1:13-17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가 95개 조항 (theses)을 제시하면서 당시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토론을 제의했던 것이 1517년입니다. 올해로 꼭 5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얼마나 바뀌었는가 하고 질문해 보면 교회는 다시 한번 개혁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 보면,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586년에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서기 70년에 다시 한번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번에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합니다. 신기하게도 두 번 모두 미리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586년의 성전 파괴는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언이 되었고, 서기 70년의 성전 파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은 유대나라를 떠나 전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유럽이 기독교화 되고, 교황은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카톨릭의 수도사였던 루터의 눈에 가장 “이건 말도 안 돼!” 이렇게 보였던 95개 조항의 토의 제목 중에 ‘면죄부 (indulgence)’에 대한 조항이 있습니다. 돈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죄를 면제 받을 수 있는 증서를 돈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면죄부에도 종류 별로 싼 것이 있고, 비싼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황들이 자기의 이름을 걸고 경쟁적으로 교회를 건축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지난 주에 한국의 어느 일간 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버터와 종교개혁’이라는 매우 흥미 있는 기사였습니다. 15세기와 16세기의 유럽인들은 버터 맛에 흠뻑 빠졌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버터의 부드럽과 풍성한 맛은, 당시 유럽인들의 입 맛을 사로 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에서는 버터를 먹는 것을 제한했다고 합니다. 버터는 동물성 지방에서 뺀 것기 때문에, 동물성 기름이 인간의 성욕을 부추긴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카톨릭 교회에서는 사순절 때 육식을 피하고 생선 종류만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라면 참을 수도 있겠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사순절을 비롯해 매주 금요일은 고기를 먹을 수 없었고, 각종 성인축일에도 고기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카톨릭교회 교인들은 동물성 지방을 섭취할 수 없는 날이 일년의 절반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하게도 남부의 유럽 사람들은 평소 버터 대신 올리브 오일이나 생선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버터를 먹지 말라는 제재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유럽에는 버터가 나병을 발병시킨다는 속설이 돌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프랑스나 루터가 살던 독일 등 버터를 많이 먹던 지역이었습니다. 금식 기간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버터에 길들여져 있던 부자들이나 귀족들은 특혜를 누렸습니다. 돈을 주고 버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산 것입니다. 돈 많은 귀족들은 막대한 돈을 교회에 기부하고 대신 ‘버터섭취권’을 얻얼 수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돈을 주고 버터를 먹을 권리를 살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 때를 틈 타 악덕상인들 중에는 남유럽에서 저질 식물성 오일을 수입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싸게 파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16세기초 루터가 독일 지역의 귀족들에게 쓴 공개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엉터리 금식을 하면서 우리들에게는 싸구려 기름을 먹이고 있다. 그들이 저지르는 신성모독이나 거짓말보다 더 큰 죄는 바로 버터를 먹는 것에 대한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이다.”

정말 우연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16세기에 버터를 많이 먹던 국가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해 해서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버터와 종교개혁이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올리브 기름을 많이 먹었던 이탈리아나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유럽은 가톨릭 교세가 강하고,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버터를 많이 먹는 지역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강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마틴 루터를 통해서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또 한번의 개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두 번의 성전 파괴,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판을 짜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또 한번 하나님께서 새로운 판을 계획하고 계시는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상황이 그런 예측을 하게 합니다. 인구의 감소, 교회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 축소, 기독교 인구의 급감, 청년들의 교회에 대한 무관심 등 현재의 상황을 주시해 보면 하나님은 지금의 교회가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의 교회를 계획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우리교회의 청년들이 정말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청년들은 이사야가 생각했던 ‘거룩한 씨앗들 (Holy Seeds, 이사야 6:13)’이고 ‘남은 자들 (The Remnants, 이사야 1:9, 열왕기상 19:18, 로마서 9:27-29, 11:4-5)’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프로젝트에 동원될 사람들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교회의 사명은 이들을 잘 양육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은 ‘Three Solas’라는 말로 잘 표현됩니다. ‘Sola Fide (Faith Alone 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 (Grace Alone, 오직 은혜로)’ 'Sola Scriptura (Scripture Alone, 오직 성경으로)', 이 세가지가 종교개혁의 정신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종교개혁의 정신이라고 말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루터 자신이 이 세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믿음생활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세 가지 관점을 가지고 그 당시의 카톨릭 교회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잘못된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95 Theses (95개 조항)’에 담았던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세계적인 위조 지폐 (counterfeit) 감별사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심지어 기계가 놓치는 것도 잡아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이 재미 있습니다. 위조 지폐를 감별하기 위해서 자신은 진짜 지폐에 대한 소리와 느낌, 감각을 집중적으로 훈련한다고 합니다. 진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면 위조 지폐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정말 그 사람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이 세 가지에 집중하는 것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진짜 지폐가 어떻개 생겼는지 배우는 훈련과 같습니다. 이 세 가지를 잘 알면, 이 사람은 바른 믿음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생활에서 오는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루터가 생각했고, 루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이미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루터가 성경에서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면, 루터가 제시한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첫째로,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가 복음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믿음으로 인하여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is Good News tells us how God makes us right in his sight. This is accomplished from start to finish by faith. As the Scriptures say, "It is through faith that a righteous person has life."① / ①Or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Hab 2.4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우리 말 성경에서 잘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 (righteousness)’라는 개념입니다. 이 말이 일반적으로 쓰는 개념과 성경에서 쓰는 개념이 아주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의’라는 개념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단순히 착한 사람, 올바르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올바르게 만드셨는지 보여 줍니다. 이것은 처음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믿음을 통하여 되는 일입니다. 구약 하박국 2:4에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 받는 길은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루터가 살던 당시 카톨릭 교회는 이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루터의 눈에 보였습니다. 이것이 루터의 다음 주장 ‘Sola Gratia’가 나오게 된 이유입니다.

‘오직 은혜로’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구원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가 볼 때, 당시의 카톨릭 교회 가장 잘못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카톨릭 교회가 ‘선행 (good works)’을 강조하면서 선행을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이런 카톨릭의 주장이,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 시킨다고 보았습니다. 루터가 볼 때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헌금을 많이 거두고, ‘면죄부 (Indulgence)’를 많이 팔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과 선행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많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도 교회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을 많이 듣다 보니까 ‘선행’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틴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Luther’s Commentary on Romans)을 읽어 보았습니다. 서문 (preface)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Faith is a work of God in us, which changes us and brings us to birth anew from God (cf. John 1). It kills the old Adam, makes us completely different people in heart, mind, senses, and all our powers, and brings the Holy Spirit with it. What a living, creative, active powerful thing is faith! It is impossible that faith ever stop doing good. Faith doesn’t ask whether good works are to be done, but, before it is asked, it has done them. It is always active. Whoever doesn’t do such works is without faith; he gropes and searches about him for faith and good works but doesn’t know what faith or good works are (믿음이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곧 우리를 변화 시키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마음과 생각과 감각과 능력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게 한다. 그리고 믿음과 함께 성령이 온다. 믿음이란 얼마나 생동감 있고, 창의적이고, 활동적이고 강력한 일인가? 믿음이 선행을 중단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선행을 하라는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선행을 실천한다. 믿음은 항상 활동적인 것이다.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믿음과 선행을 위해 하나님을 찾겠지만 정말 믿음이 무엇이고 선행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은 ‘active’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선행이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선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6). 루터의 글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선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이 말은 우리 믿음생활의 최종 권위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Bible alone is the ultimate authority and standard (성경만이 우리의 최종 권위와 기준이 된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믿음생활의 기준이 됩니다.

루터는 교황의 ‘무오설 (inerrancy)’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95 Theses에 포함 시켰습니다. 그 때는 그 누구도 교황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교황이 정치까지 관여했습니다. 국왕도 교황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교황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루터가 국회에 소환되었을 때도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교황도 잘못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성경은 여전히 우리의 삶의 ‘기준 (standard)’가 되고 있습니까?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500년 전과 지금의 세상을 비교해 보면,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성경은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많은 이슈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이슈들에 대하여 교회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매우 혼동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을 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한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유일단 기준이다!” 그러나, 이렇게 믿고 주장만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일에 교회들이 힘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서, 공동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10/22/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4

에클레시아 Ecclesia, God’s Chosen People

베드로전서 2:1-12

베드로전서 1장이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이제 여러분은 과거의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시 태어난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들의 권력도 들에 핀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전해진 말씀이 바로 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2장으로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과 거짓을 버리십시오. 위선자가 되지 말고, 시기하며 험담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없애십시오.” (1절) 여러분, 이 말씀에서 동사로 된 말씀들을 찾아 보십시오. “위선자가 되지 마라.” “시기하지 마라.” “험담하지 마라.”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것들을 제거하라.” ‘위선’ ‘시기’ ‘험담’ 이런 것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들입니다. 이제 이런 것들과 관계를 끊고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제가 말씀 드렸던 기억이 압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후에는 내가 건너온 다리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요. 왜냐하면, 이 다리가 남아 있으면 언제라도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빌립보서 3장에 나와 있는 바울의 결단이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과거의 삶을 ‘쓰레기 (rubbish)’ ‘잡동사니 (garbage)’ ‘배설물 (dung, KJV)’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일을 보고 나서 미련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flush해 버리지 않습니까? 과거의 삶은 아무 가치 없는 rubbish와 같고, garbage와 같고, dung과 같습니다. 미련 갖지 말고 flush해 버려야 합니다. 내가 건너온 다리를 불태워야 합니다.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차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편지에 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방 (지금의 터키 영역)으로 피신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지역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게다가 항구 도시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는 ‘위선’ ‘시기’ ‘험담’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렇게 세속 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착하게 사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12절)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나요? 세속문화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세속문화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지켜 나가겠습니까? 무조건 하지 마라고, 단절하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New Age 음악이나 책들은 좋지 않으니까 듣지 말고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한계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더 우수하고, 크리스천의 문화가 더 탁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한 세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계속 예수님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갓난 아기가 젖을 찾듯이 순결한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지 않습니까?” “Like newborn babies, you must crave pure spiritual milk so that you will grow into a full experience of salvation. Cry out for this nourishment, now that you have had a taste of the Lord's kindness.”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은 뒤에서부터 해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선하심’을 ‘goodness’라고 번역한 곳도 있고, ‘grace’라고 번역한 곳도 있고, ‘kindness’라고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찬송가 405장 1절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마음이 평안 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님의 팔이 친절한 팔이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누구나 받아 주시잖아요?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도 팔에 안아 주시고 기도해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국적을 따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온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피곤한 영혼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상처 받은 영혼도, 예수님의 친절한 팔에 안기면 모두 고침을 받습니다.  그 예수님의 마음이 ‘Lord’s kindness’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여러분들은 ‘주님의 선하심’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기서 머물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갓난 아기가 어머니 젖을 언제까지 먹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우유를 먹어야 더 잘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경험하기 위하여 ‘spiritual milk’를 사모해야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Cry out for this nourishment (이 음식을 간절히 사모하라, 구하라)”라고 합니다.

제가 어디서 성인들이 하루에 우유를 한 컵씩 꾸준하게 먹으면 각종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우유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읽고 난 후에 우유를 한 컵씩 꾸준하게 마시고 있습니다. 아직 크게 달라진 것은 못느끼고 있습니다만, 우유가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지금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권면하는 ‘spiritual milk’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nourishment (음식, 영양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우리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예수님께 나오라고 초청하면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the living corner¬stone of God's temple (하나님의 성전의 모퉁이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 (God’s spiritual temple)’을 짓는 일에 귀하게 사용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를 믿고, 신뢰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사람, 예수님이 자기 삶의 중심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에 ‘산 돌 (living stone)’같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산 돌’은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돌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막은 이동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곳에 머물 때는 성막을 설치하고 그 안에 법궤를 놓습니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신속하게 성막을 접어서 레위인들이 운반했습니다. 모세는 성막을 지으면서 필요한 것들을 백성들이 자원해서 내도록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자기들이 낼 수 있는 만큼 내도록 했고,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자기들이 낼 수 있는 만큼 내도록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있는 천 (cloth)을 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있는 색실 (colorful thread)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색실이 장막 입구에 화려한 수를 놓는데도 사용되고, 제사장들이 입는 옷에 수를 놓을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내가 낸 것들이 장막을 짓는 일에 귀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 1:2)”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삶이 그렇게 덧없고 헛된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이 잊어 버립니다. 나중에는 이름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메싸추세츠 서쪽에 Northhampton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유명한 Smith College가 있고,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목회했던 교회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미국의 영적 부흥을 이끌었던 탁월한 설교자이고 학자입니다. 제가 Northhampton에 가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목회했던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주소를 찾아 갔는데도 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봤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 봤는데도 아무도 모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이름도 모릅니다. 나중에 그 교회를 찾았습니다만, 심지어 그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마저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이렇게 덧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가치 있고, 보람있는 삶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에 필요한 ‘living stone (산 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의 모퉁이 돌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 성전을 짓는 일에 필요한 돌들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친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그들에게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격려합니다. 그 말씀이 9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나는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 9절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나를 통해서 보여 주시려고 나를 크리스천으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오고, 내가 선택해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계획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셔서, 나를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called you out”이란 말입니다. “너를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희랍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원 (origin)’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생활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이 ‘origin’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입니다. 케임브리지교회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에 속한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케임브리지교회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서, 믿음으로 새롭게 무장하여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여러분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곧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가 이 일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에클레시아’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올바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교회가 어려움에 빠진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번 2017 ReNEW Conference의 주제가 ‘에클레시아’입니다. ReNEW는 ‘복음과 개인’ ‘교회와 공동체’ ‘선교와 세상’이라는 주제를 돌아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두 번째 주제를 다루는 해입니다. 하나님의 불러냄을 받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명은 확인하고, 이 시대가 요청하는 크리스천의 삶은 어떤 것인지 말씀을 듣고 결단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위켄드를 맞이해서 한국과 미국의 훌륭한 목사님들이 강사로 오십니다.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보스턴에 있는 청년들이 한 곳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자고 결단하는, 이 모임이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2017 ReNEW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에 ‘living stone’처럼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