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2/16/2025 | (주현후 제 6주)
복 있는 사람은 The blessed person
시편 1:1-6
이번 주일 성서일과 본문이 시편 1편이었습니다.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 신천 장로님들의 장로고시 설교학 시험 역시 같은 본문이었습니다. 한주 동안 같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더욱 뜻깊고 감사했습니다.
시편 1편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복(אֶשֶׁר)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복(אֶשֶׁר) 있는 사람의 삶의 자세가 부정문으로 시작됩니다.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하나님을 비웃는 거만한 사람들과 함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이 결국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어린 자녀를 키울 때 '안돼'라는 말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아이에게는 거절로 느껴지지만, 부모는 아이가 바르게 자라도록 보호하고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가르치다 보면 어느새 아이는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스스로 구분하고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먼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복된 길로 가기 위해, 저는 다른 버전의 말씀도 살펴보았습니다. 쉬운성경에서는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복이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라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하지 않고"라고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시편의 복은 히브리어 에셰르(אֶשֶׁר)라는 단어인데 ‘곧다, 똑바로 가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바른 선택을 통해 우리는 큰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복(אֶשֶׁר)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이 충돌할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주의 교훈을 즐겁게 받으며 밤낮으로 묵상하고 깊이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은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르면서도 성공을 이루면 행복한 인생이라 생각됩니다. 선거철만 되면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험담을 해서라도 뜻을 이루려 하고, 이를 승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지 말라, 그 자리에서 떠나 돌아서라"고 교훈합니다. ‘복’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바라크(בָּרַךְ)는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복의 두 단어 바라크(בָּרַךְ)와 에셰르(אֶשֶׁר)가 주는 의미를 종합해 보면, 말씀에 순종함으로 바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주변에 복 있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도 복 있는 사람이 되어 그 복을 누군가에게 함께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시편은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동안 노래했는지를 모아 놓은 신앙시입니다. 복 받은 사람들의 이 노래는 몇천년의 시간속에서 드려졌고, 편집과 재편집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시편 150편을 5권로 나누며 완성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시편 1편은 전체 시편을 대표하는 말씀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많은 분들이 시편 1편을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익숙한 말씀일수록 내가 잘 알고 있는 길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한국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서는 일은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그 안에서 참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도 단단해질 것입니다. 말씀 안에 복(אֶשֶׁ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성경을 ‘펼치는’ 시대가 아닌 ‘켜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삶의 방식이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접하는 방법이 달라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 담긴 복(אֶשֶׁר)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매우 편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더 어려워 졌습니다.
건강과 행복, 평안한 삶과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복된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아야 합니다. 현재 내 삶이 부족하고 작다고 느껴질지라도, 여전히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복을 외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복을 단순히 결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복(אֶשֶׁר)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자, 삶의 태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오직 주의 교훈을 즐거워하면서, 그 교훈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의 교훈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기보다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밤낮으로 삶에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세상의 가치관과 흐름에 영향을 받기 쉬우므로, 주의 교훈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돌아보게 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의의 길로 인도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어도, 말씀 앞에 내 삶을 비추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성경 안에 그분의 뜻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즐거움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 곧 복된 삶입니다.
세상의 트랜드, SNS는 우리를 비교하게 하고 다양한 목소리들 듣게 합니다. 여러분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아시지요? 실제로 노이즈 캔슬링의 기능을 광고할때 주변의 소음과 세상의 간섭에서 바로 벗어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여 내가 듣고자 하는 음악을 더 명확하게 듣게 해주는 기능입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세상의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소리와 비교, 불안과 두려움이 더 작게 느껴지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때가 많습니다. 말씀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보다 내 삶의 행복을 추구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다 보면 내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게 되면서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직장과 학교에서의 압박, 그리고 삶에서 느끼는 불안은 원수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며, 자기 부인을 실천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듭니다. 세상은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39)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팔복도 이와 연결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마 5:3-10) 말씀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더해 주십니다.
말씀의 능력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그 뜻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의 교훈은 우리의 삶에서 살과 피가 됩니다. 때때로 말씀이 기쁘게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럽거나 소화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고 소중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수록,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이 기쁘고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때로는 아픔과 슬픔도 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1:3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모든 일에 대한 ‘형통’은 단순한 성공과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은 그분의 뜻 안에서 얻는 영적 열매이고 결실을 의미합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푸른 잎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1:4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하니, 그런 자들은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도다.
1:5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견딜 수 없을 것이며,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1:6 진실로 주께서는 의인의 길은 인정하고 지켜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시편 1편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분명하게 구분하며 결론짓습니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시들지 않으며,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고,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아, 하나님의 심판 때에 견디지 못할 것이고 사막의 떨기 나무 같아서 메마른 황야에 아무런 낙도 없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 걷는 길의 끝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는 복을 누리며,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는 길로 인도함 받습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지만 복 있는 사람이 반드시 가야 할 길입니다.
폴워셔 목사님의 '좁은 문, 좁은 길'에서 참된 신앙은 변화와 결단을 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며, 참된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한다고 가르칩니다.
"회개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함 가운데 성장하며, 세상의 우상과 헛된 가치관에 물들지 않으려는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과연 나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정한 복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형통한 삶을 누리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지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시편의 시작은 복 있는 사람의 삶에 대한 교훈을 주지만, 마지막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렐루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복 있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성도는 이미 죽음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미래의 승리를 보장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이 좁을 길이라도 이탈하지 않고 가면 됩니다. 능력의 차이에 따라 앞서 가는 사람도 있고 뒤쳐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좁은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입니다. 서로가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요한계시록 21:6-7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다. 내가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할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다 상속받게 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된 길, 곧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세상의 길과는 다른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결국 우리를 참된 생명과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이 길 끝에 영원한 대로가 펼쳐질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날을 기대합시다. 한주동안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믿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9/2025 | 주현후 제 5주
온 마음 다해 믿고 가자! Let's trust with all our heart and go!
시편 138:1-8
우리는 지금 교회력으로 주현절기(Epiphany)를 보내고 있습니다. "Epiphany"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것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갑자기 이해하거나 깨닫는 순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런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혹은 기도하는 중에, 그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우리의 삶을 비추고 역사하시는 증거입니다.
시편 138편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믿음의 고백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은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의지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했습니다. 다윗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138:1 주여,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찬양합니다. 내가 모든 신들 앞에서 주를 찬양합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NIV 성경에서는 이를 ‘전심으로’라고 번역했습니다. "All my heart"라는 표현은 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담고 있습니다. 유진피터슨 목사님은 메시지 성경에서 ‘내 안에 모든 것이 외칩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다윗의 찬양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간절한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화살과 창이 날아오는 전쟁터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하고,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으며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왕의 위치에서 백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고난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안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기도의 응답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에 기도의 힘을 불어 넣으시고 그가 이겨낼 용기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2 내가 주님의 성전을 향하여 엎드려 경배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때는 언제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과 목마름을 느꼈을 때였습니다. 그의 죄와 실수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다윗은 영적으로 갈급해졌고, 이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회개와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아주시고, 그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심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 안에 두려움과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올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길을 잃은 듯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매일 새로운 빛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고통의 순간에서도 우리를 담대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말씀 생활과 기도에서 멀어질수록 세상의 방법들이 더 안전하고 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실패와 고난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다하고 전심으로 주를 찾을 때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이유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된 본성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죄의 유혹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달려가 그 이름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전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3 내가 부르짖는 날에 주께서는 내게 응답해 주셨고, 내 영혼에 힘껏 힘을 불어넣어 주시어 나를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은 우리의 내면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소리까지 다 들으십니다. 이 간절한 부르짖음은 한나의 기도에서도 느낄수 있습니다. 한나는 자녀를 갖지 못한 고통 속에서 깊은 갈망을 담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허락하셨습니다.
미국 역사에 신앙의 영향을 미친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당시 유명한 부흥사처럼 우렁찬 음성이나 과장된 제스처 없이 원고를 읽곤 했습니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성경연구에 보내고, 2시간이 넘는 설교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한 거룩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삶으로 체험한 그가 남긴 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겠는가?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 하나님의 일을 위해 봉헌된 삶이 곧 거룩한 삶이다. 하지만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그런 삶을 살수 없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성령과 동행한다고 말할수 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 주장할수 있으랴?..." 지금도 기도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4절에서 다윗의 기도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 왕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4 주여, 온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 모두가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다윗의 이 기도의 성취를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볼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이방 나라의 왕도 이것을 깨닫고, 다니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을 합니다. 2:47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신이요, 모든 왕들의 주인이로다. 그대가 이처럼 비밀스러운 일을 다 드러낼 수 있었으니, 과연 그대의 하나님은 모든 비밀스러운 일들을 능히 드러내시는 분이시로다.”
다니엘은 노년의 때에도 기도의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총리로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고, 다리오 왕이 그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를 질투한 다른 고관들이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왕에게 30일 동안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게 만듭니다. 이 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는 다니엘은 기도의 방에 들어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다리오 왕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26 이제 나 다리오가 그대들에게 조서를 내려 명하노라. 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마땅하나니, 진실로 그분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요, 그분의 권세는 대대로 무궁할 것이기 때문이도다" (단 6:25-26)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의 기도의 습관이 세상의 왕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나면 원로 장로님에게 찾아오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있습니다. 장로님이 매주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따뜻한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큰 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장로님의 작은 사랑이 아이들에게 전해졌고, 이제는 아이들이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장로님을 찾아갑니다. 할아버지 장로님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뜻한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 참 흐뭇합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었지만, 점점 늘어나 이제는 2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흘러가며 감사가 확장되는 모습입니다. 감사와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흘러가며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5 진실로 주의 영광은 한없이 크시니, 그들 모두가 힘차게 주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 6 주께서는 지극히 높은 데 계셔도 이 땅의 낮은 자들 하나하나를 굽어 살피시고, 아주 멀고 먼 데서도 이 땅의 교만한 자들을 한눈에 다 알아보십니다. 7 내가 비록 고난의 한복판에 있을지라도, 주께서는 나를 건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강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분노하며 날뛰는 내 모든 원수들을 짓누르시고,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8 주여, 주께서는 내게 하신 모든 약속들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니, 진실로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부디, 주께서 손수 지으신 이 몸을 저버리지 마소서!
'모두가 힘차게 주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과 위대함을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고, 모든 입술이 주님을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던 다윗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은, 길을 잃고 방황하던 우리도 자녀 삼아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난의 한복판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때와 방식이 아닐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그의 뜻 가운데서 건지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고난의 의미를 로마서 5:3-4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손길은 희망의 꽃을 피우시고 우리의 삶속에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신앙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힘과 생각을 의지하게 되고 연약함에 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찬송가를 부를 때 성도들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아픔의 순간과 어려움의 과정을 지나는 성도들의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을 경험하는 모습이라 여겨집니다. 학업의 현장에서 끊임없는 도전과 고민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학업의 현장에서도 함께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단함과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는 일터의 현장에서도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의 연속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의 현장이라고 여기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터에서 찬양과 기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서로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대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단순한 관계를 넘어, 하나님을 만나는 치열한 폭풍 속에서 함께 헤쳐 나가는 믿음의 중심이자, 함께 신앙을 훈련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서로 믿음으로 고백하며 자녀들을 말씀으로 축복해 준다면 우리의 가정 안에 있는 고통과 아픔조차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을 경험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서로 돕고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신 시대적 사명을 기억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힘들어 하는 지체들이 옆에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낮은 자리에서 부터 드러나며 그곳에서 회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2/2/2025 | 주현후 제 4주
하나님은 여전히 좋으시다 God is Still Good
시편 147:1-11
지난 30일,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64명이 탑승한 여객기가 훈련 중인 헬기와 충돌하여 포토맥 강으로 추락했고, 그 중에는 보스턴에 거주하는 이웃교회의 집사님과 딸의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식은 단순히 먼 이야기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꿈을 향해 달려가던 딸과 그 딸의 삶을 동행하던 어머니의 소식이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이 소식을 접하며, 마음속에서 무력함과 슬픔이 밀려옵니다. 왜 우리의 믿음 안에서 이런 상실과 고통이 있을 수 있는지 깊은 기도와 고민을 하게 합니다. 슬픔속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편 147편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때때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 아프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는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3 마음이 상한 자들을 어루만져 고쳐주시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부드럽게 싸매주신다. 4 주께서는 별들의 수효를 일일이 헤아리시고, 하나하나의 별들마다에 이름을 지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주에 있는 셀 수 없는 별들을 기억하시고,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상처난 이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싸매 주십니다.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에는 삶의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탄식, 절규, 외침의 기도를 드린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각 시편이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최고의 표현으로, 절망과 탄식을 넘어 찬양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룹니다. 따라서 '할렐루야 시편'으로 불리는 본 시편은 전체 시편의 송영(Doxology) 역할을 합니다. 시편의 수많은 기도의 고백들이 마지막에는 '할렐루야'라는 하나님의 찬양으로 마치게 됩니다. 이 한 단어가 믿음의 성도들의 목적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들의 인생의 시작과 끝은 할렐루야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더 성숙한 자리로 초대합니다.
성경학자들은 2절을 근거로 본 시편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성전과 성벽재건 등 이스라엘의 회복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는데요. 포로기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폐허가 된 성전을 보며,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유배되어 70여 년간 나라와 주권을 잃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고향 땅에 돌아왔지만 경제, 사회, 정치적 모든 현실은 절망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래된 포로생활의 세월 만큼이나 회복에 대한 희망도 희미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외쳐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시편의 기자는 "우리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이 그 얼마나 좋은 일이며, 우리 주님께 찬양하는 일이 그 얼마나 기쁘고 마땅한 일인가!"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최고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좋은 일이며, 기쁜 일이고,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던 다윗은,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요셉은 자신을 해치려 하고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확신하며 고백하지 않습니까? 다윗과 요셉은 그들의 환경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중에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은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자 여종의 주인들은 수입을 잃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합니다. 감옥에 간 이들이 그날밤 무엇을 했는지 이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행 16:25 한밤중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주께 기도하면서 찬송을 불렀고, 다른 죄수들은 그 찬송 소리를 듣고 있었다. 16:26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듯 감옥이 밑바닥부터 심하게 흔들리더니, 감옥 문이 모두 열렸다. 그리고 죄수들을 묶어 두었던 쇠사슬이 스르르 다 풀렸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고 원망할 만한 상황에 처했지만 감옥에서도 찬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찬양을 통해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양이 시작되자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며, 죄수들을 묶어 두었던 쇠사슬이 풀어졌습니다. 모두가 찬양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절망감을 느끼고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우리는 다 여기 있다"고 말하며 그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 후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근심되는 일이 많지만 우리의 시선이 삶의 환경에 고정되면 찬양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다스리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로보면 찬양하게 됩니다. 이 찬양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합니다.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고, 구원의 사건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좋거나 나쁘거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선하신 분임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민족은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땅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재건하시고, 사로잡혀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아들이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주께서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시고,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아들이시며" (시 147:2)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재건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으시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성전을 재건하고 백성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느헤미야를 유다 총독으로 보내어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많은 방해와 저항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 안에서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셨습니다.
교회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참된 성도들을 불러 모으시는 데에도 항상 끊임없는 저항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부른 찬송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불려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환란과 역경 가운데서도, 최후의 승리를 믿고 드리는 곡조 붙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그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신뢰와 소망의 고백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어려움과 저항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교회를 통하여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을 불러 모으시며,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5 진실로 우리 주님은 지극히 위대하시고, 능력이 한량없이 크시며, 그 지혜는 측량할 수조차 없도다.
하나님은 그 능력과 지혜가 한없이 크시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배신자로 간주하고, 그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평생의 목적으로 삼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열정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약 132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찾아갑니다. 그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연행하려던 바로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삶의 방향이 완전히 전환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열심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믿었지만,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이 헛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바울이 주님께 한 일은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그 능력과 지혜는 우리가 측량할 수 조차 없습니다.
6 주께서는 마음이 낮은 겸손한 자들을 높이 세워주시지만, 마음이 높은 교만한 악인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변화된 바울의 고백 속에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고, 꿈을 향해 나아가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일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사람 만나면 인생의 힘을 얻게 되고, 좋은 스승을 만나면 인생의 길이 보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행하신 선한 일로 인해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7 주께 감사의 찬양을 부르라. 즐겁게 수금을 타면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8 주께서는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땅에는 비를 내려주시며, 언덕마다 푸른 풀이 자라나게 하신다. 9 배고픈 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울어대는 어린 까마귀에게도 먹을 것을 주신다. 10 주께서는 힘센 말이라고 기뻐하지 않으시고, 굳센 다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좋아하지 않으신다. 11 오직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과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바라는 이들을 기뻐하신다.
존 웨슬리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지아주로 떠나 굳센 의지로 선교했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혀 결국 실패했습니다. 선교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중요한 영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배에는 독일 모라비아 교도 2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 다가온 폭풍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었고, 웨슬리는 1736년 1월 23일 일기에서 "금요일 저녁, 두 번째 폭풍이 들이닥쳤을 때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믿음 없음을 어찌할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1월 25일, 그때의 상황을 웨슬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파도가 얼마나 세고 무서운지 마치 하늘에 닿았다가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 배가 앞 뒤로 심하게 흔들려...무엇을 붙들지 않으면 잠시라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맹렬한 파도는 10분 마다 배를 사방을 때려 산산조각 낼 것만 같았다." 공포의 상황이 오후 4시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침착하게 찬송을 부르던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다가가 "죽음의 공포를 몰고 온 폭풍이 무섭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모라비아 교도들의 대답은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웨슬리는 그들의 평온한 찬송을 보며 "이날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웨슬리에게 이 경험은 깊은 신앙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속에는 많은 거절감과 실패와 아픔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마주하는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고백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일상의 작은 고백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위로만이 아니라 삶속에서 개입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심방을 하고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찬양과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 가정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지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넘어 삶의 모든 자리에 함께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는 부부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며 자녀들과는 함께 찬양의 기쁨을 나누고 학업과 일터의 현장에서는 일에 대한 부담과 반복되는 업무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감사의 찬양을 드려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47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세밀히 돌보아 주심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민과 염려까지도 하나님이 주시는 찬양의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며 마음이 낮은 겸손한 자들을 높이 세워주십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황에 지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를 통하여 찬양의 능력이 우리의 마음까지도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좋으시며 우리의 모든 순간을 돌보아 주시며 함께 하십니다.
'광야를 지나며' 라는 찬양이 아픔과 고통 가운데에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기도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곳이지만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곳입니다. 광야를 경험하면 그 주변에 놓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26/2025 | (당회 주일)
새해 말씀 시리즈 4 새해 어떻게 살 것인가? How Should We Live in the New Year?
시편 111:1-10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만 결국 그 새로운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와 반대되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영생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우리의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 갈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를 통해 알게 되는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 한구절을 더 보시겠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영생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순종하지 않는자는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이 말씀의 구절들에서 영생이 예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순종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시편의 찬송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의로우심을 찬양하며, '영원'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3절에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5절에는 그들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신다. 8절에서는 주께서 정하신 법도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다. 9절에는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으니, 진실로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위대하도다. 10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은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니, 영원토록 주를 찬양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영생을 믿고, 영원한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끝없는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것,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 주어진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인생의 풍랑을 만나서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수 없는 불확실한 삶을 헤쳐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힘과 권세로 내몰고 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일으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와 신실한 언약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시편에서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라고 찬양하는 선언은, 그 의로움이 영원히 변함없음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은 우리 수준 이상의 위대한 일을 이룰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내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요? 고백만 하고 결단하지 않는다면, 정말 주님을 닮아가려는 길에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기 위한 선택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결정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향해 가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셔서 영원한 통치와 영원한 언약이 되셨습니다. 이 소망이 현실을 사는 성도들을 인내하게 합니다. 영생을 추구하는 삶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모호한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은 현재 우리가 겪는 고통과 대조가 되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영적인 체육관에서 믿음의 삶을 훈련받게 합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라고 선언했습니다. 고난속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고난도 믿음의 훈련의 길이었습니다.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의 아픔을 공동체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을 품고 찾아온 공동체에서도 많은 상처와 거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삶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서로의 약한 모습을 받아들이는 영성이 공동체의 제자도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괴롭게 덧없이 끝날 때가 많다. 세월이 갈수록 오래오래 공고해지는 관계가 아니라 불화와 결별로 치닫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인 친밀함을 채워줄 사람을 찾다가 우리는 점차 절망에 빠진다. 내 외로움을 없애줄 사람을 찾다 보면 ‘반짝반짝하던’ 기대가 하루아침에 ‘먹구름으로 잔뜩 흐려진’ 탈진과 우울로 변할 수 있다. 어디를 보나 외로운 사람들 천지다. 현대 서구사회에서 고난의 주된 원인은 아마 외로움일 것이다. ......공동체란 외로움이 외로움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공동체란 고독이 고독을 반기는 것이다. “나도 사랑 받는 자이고, 너도 사랑 받는 자다. 우리는 함께 집을 지을 수 있다.” 서로 가까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참 좋다. 사랑이 별로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힘들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우리는 충실할 수 있다. 함께 집을 지어서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위한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공동체의 훈련 속에 용서의 훈련과 기쁨의 훈련이 있다. 부부 사이, 친구 사이, 기타 모든 형태의 공동체는 용서와 기쁨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 삶의 영성)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오직 서로에게 친절히 대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용서를 베푸십시오."(엡 4:3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며, 단순히 우리의 고독과 외로움을 해결 받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 되시는 주님으로 부터 한줄기 빛을 찾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10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누구든지 주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은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니, 영원토록 주를 찬양하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원했고 노력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지혜를 말하지만, 실제로 명확한 해답을 찾지는 못합니다.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인생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1절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온 마음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라."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교회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교회에 모여서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정직함은 모든 행실의 청렴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자세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 드리고, 일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점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드러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만일 지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금 구해야 할 때입니다.
2절입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참으로 크고 놀라우시니, 그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 모두가 두고두고 그 일을 깊이 생각하고 또 연구하는구나!" 주께서 행하신 일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맡겨진 소명을 깊이 생각하며,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 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서 품고 추구하게 하십니다.
3절입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은 진실로 영광스럽고 장엄하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냅니다. 이 의로우심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씨앗의 비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씨앗은 땅에 묻혀 썩어져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하고, 그것이 열매를 맺는 과정은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우리의 삶의 목적과 가치가 변화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이나 가정, 사회에서 겪는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따라 정직하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의로우심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이 현실 속에서 우리의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4절 5절입니다. "주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사람들로 다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의 은혜와 자비가 가득 차고 넘치는구나. 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며, 그들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신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사건을 말하고 있고, 매일의 양식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주신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인듯 합니다. 6절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다수의 보고와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주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믿음으로 보고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자기백성들에게 그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이 일은 인간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6 주께서는 뭇 민족들의 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심으로써, 그 백성들에게 자신의 크신 권능을 보여주셨도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고, 배고픔과 목마름의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은 매일 양식을 공급하시며 자기백성에게 인내와 순종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광야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가 인내하고 견디는 힘이 됩니다. 믿음은 영생의 개념처럼 추상적이지만, 믿음 생활은 실제적입니다. 기도의 습관을 통해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매일 새벽마다 오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할때 광야에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양식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양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필요와 일상적인 삶의 어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와 자비는 영원한 약속입니다.
유진피터슨 목사(Eugene H. Peterson,1932-2018)는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의 책에서 충만한 삶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이며, 모든 상황과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살균처리가 된 신학 연구실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상황속에서 다루어져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7절과 8절입니다. "7 주께서 손수 하시는 일마다 한결같이 참되고 의로우시니, 주의 법도는 진실로 믿음직스럽도다. 8 그러므로 주께서 정하신 법도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으리니, 이는 그 법도가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이라." 오늘날 사람들은 욕망을 따라 나를 위한 삶을 위해 법을 무시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법은 시대가 변하면 변할 수 있습니다. 만일 법이 수시로 바뀐다면 삶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정하신 법은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습니다. 말씀의 법도를 따르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보호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계명을 따르는 자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며, 그들은 영원토록 나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깨달음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 그분의 지혜와 깨달음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며, 결국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하는 빛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상황에 맞춰 찾아오시고, 그 안에서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삶의 자리나 형편은 다를지라도, 우리가 걷는 믿음의 여정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보여줄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픔과 상처. 외면 당하고 고통 가운데서도 교회의 공동체에서 사랑 받고 위로 받아 하나님을 다시 붙들수 있도록 서로가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시길 바랍니다. 주의 법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단지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려는 헌신을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도 우리의 공동체도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사랑과 정의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 사랑과 정의를 통해 변화하게 됩니다. 이번 한 주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기를 축원합니다.
1/19/2025 | 주현 후 제 2주
새해 말씀 시리즈 3 시편 36편의 희망 Hope in Psalm 36
시편 36:5-10
이번 미서부 지역의 산불 피해는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이들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산불이었다고 합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곳도 있고, 평소에 장을 보던 마트도,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도, 평생을 살아온 자택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지고 재만 남았습니다. 뉴스를 듣는데 66세 한 사람이 56년 동안 살던 집을 지키려고 하다가 생명을 잃게 된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56년 동안 살았던 그 집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때로는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안식처였고, 고된 일을 마친 후 돌아오면 쉼을 주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어릴 때는 그 집에서 성장하며 꿈을 키웠을 것이고, 가족들과 함께하며 안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5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 집은 기쁨과 슬픔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켜켜이 쌓인 소중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불로 그 집이 불타는 순간, 그가 느꼈을 감정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이었겠지요.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상실감에 휩싸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피해 입은 이들을 돕기 위한 특별 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모아진 헌금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잘 쓰여질 수 있도록 전달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권면합니다.
오늘 시편 36편은 다윗의 찬양시입니다. 다윗은 절망과 고통의 현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다윗은 “그들은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실 것입니다.” 라고 찬송합니다.
여기서 ‘주의 집’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켰고,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는 언약궤를 안치한 성막이었습니다. 성막 안에 있던 언약궤는 하나님의 은혜와 속죄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신앙에서 언약궤는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뜻을 깨닫게 되는 계시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궤를 전쟁을 이기기 위한 마법상자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죄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할 것들인 돈이나 사람들, 우상들을 섬기고, 섬겨야 할 하나님을 우리의 수단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정확히 드러내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기심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죄가 감추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안에 담긴 세가지 성물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드러냅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주신 율법을 나타내지만 또한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죄를 지적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면서도, 당시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 아론을 선택하신 표적이기도 합니다.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기가 없음을 불평할 때 그들에게 베푸신 하늘의 양식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처럼 언약궤 안에 담긴 성물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의 집은 오늘날 교회이기도 합니다. 교회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 구속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4:1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또 때를 따라 도우시는 그분의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
구약시대의 ‘속죄소’가 신약에서는 ‘은혜의 보좌’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보좌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여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은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 있으며, 우리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됩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7 오 주여, 한결같은 주의 사랑이 어찌 그리 소중한지요!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학자들은 7절의 주의 날개를 언약궤의 속죄소를 덮은 그룹의 날개에 비유한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언약궤의 뚜껑에는 양 옆에 서로 마주보고 날개를 펼치고 있는 그룹이라고 불리는 두 천사가 마주보고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호하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는 보호받고 안전하게 숨을 수 있으며 그 은혜는 성도들의 삶을 온전히 감싸고 있습니다.
다윗의 바라본 주님의 은혜는 시편 36편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절에서 4절에서는 악한 자들의 마음이 드러나고,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8절에 이르러,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감싸고 보호하는지 고백합니다. 이 두 대조적인 부분을 교차하여 살펴보면, 다윗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악한 자의 마음속에는 온통 죄의 속삭임뿐이어서, 그의 눈에는 하나님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구나. 5 주여,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까지 닿았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까지 닿았습니다.
2 저들은 자만심에 가득 차서, 자기 죄를 찾아내어 버릴 생각일랑 전혀 하지 못하는구나.
3 저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모조리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지혜롭고 선하게 행동하기는 애당초 틀려버렸구나.
6 주의 의로우심은 웅장한 산줄기 같고, 주의 공평하심은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오 주여, 정녕 주께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한결같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4 저들은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악한 궁리를 꾸며내고, 스스로 죄의 길에 들어서며, 악한 짓 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구나.
7 오 주여, 한결같은 주의 사랑이 어찌 그리 소중한지요!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8 그들은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실 것입니다.
찬송가 ‘예수님은 누구신가’는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고백하는 찬송입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3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이 찬송가의 유래를 살펴보니까, 프레드릭 밀러(Miller, Frederick S.:1886-1937) 선교사가 찬송가를 작사하고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이름은 민노아 선교사입니다. 그가 지은 5곡의 찬송시가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1892년 조선에 도착합니다. 1898년 11월 첫 아들을 낳았으나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1902년 3월 태어난 둘째 아들도 하루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년 뒤에는 사랑하는 아내도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이기에 가족마저 잃으며 힘들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자 민노아 선교사는 응답 대신 찬송가를 지었는데, 그 찬양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입니다. 충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인생의 아픔속에서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노래했던 것입니다. 양화진에 안장된 그의 아내 안나 밀러의 묘지에는 ‘In Jesus’라고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이토록 절망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평안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복음의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삶과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두려움과 절망이 힘을 잃고, 오히려 그 흔적을 지닌채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77세의 일기로 고인이 된 영성학자 달라스 윌라드(Dallas Albert Willard, 1935 - 2013)는 "잊혀진 제자도: The Great Omission"라는 그의 책에서 천국 열쇠가 있다는 것은 천국 접근을 통제하는 의미가 아니라 천국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이며 즐거이 드나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천국 열쇠를 두고 교회는 오랜 논쟁을 벌여 왔으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믿는다면 천국의 부를 실제로 가져다 쓸수 있기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믿음으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 위에서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신 선한 일을 주목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인생을 살면서 예상치 못한 길에서도 꽃을 피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인자와 성실, 즉 자비로우심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거짓됨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의는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다른 이들을 살리고,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시는 것은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9절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9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샘물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주의 환한 빛 가운데서 광명을 봅니다. 10 오 주여, 주께서는 주를 섬기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마음이 올바른 이들에게 주의 변함없는 의를 베풀어 주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빌립보 교우들의 사랑과 헌금으로 한 개인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는 사랑과 복을 다시 빌립보 교우들에게 흘려 보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 19)
하나님의 구원의 빛 가운데서만 성도는 참된 삶 ,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 냅니다. 주께 속죄함을 받는 빛의 자녀들은 어둠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 빛은 우리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직접 이 땅에 와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하나님은 참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는 실패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바라 보며 우리를 희망찬 빛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주여,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까지 닿았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까지 닿았습니다. 주의 의로우심은 웅장한 산줄기 같고, 주의 공평하심은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오 주여, 정녕 주께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한결같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인생은 아픔과 기쁨이 고스란히 쌓여가는 과정입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나무가 자라온 환경과 시간을 보여줍니다. 비가 많이 오고 햇빛이 잘 드는 때에는 나무가 빠르게 성장하여 나이테 간격이 넓어지고, 가뭄이나 햇빛 부족으로 성장이 느려지면 나이테 간격이 좁아집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어려운 시간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도, 그 시간들이 쌓여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고, 뿌리가 깊은 나무가 됩니다. 빛의 자녀는 절망하는 이들에게 새 힘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의 삶을 나누며 그 은혜가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때에 성도의 삶속에 귀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