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2019 |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If God Is For Me

창세기 39:1-6

여러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들어 보셨습니까? 영어로 ‘조셉 (Joseph)’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에 “May God add or increase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기를)”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들 이름을 ‘요셉’ (Joseph)’이라고 지은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 아들이 성경에 나오는 ‘요셉’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축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Genesis)에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30장부터 50장까지, 무려 21장이 한 사람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기록한 분량이 많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요셉’의 경우는 그에 대한 기록의 분량도 많고, 또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성장기를 매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위로 형이 열 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라헬 (Rachel)과 그 언니 레아 (Leah)라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언니 레아는 남편 야곱 (Jacob)이 라헬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아기라도 많이 낳아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레아는 열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도 자식을 낳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릴 거예요 (창세기 30:1)” 하면서 남편을 졸랐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해서 라헬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요셉’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끔찍하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급기야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요셉’은 은 20세겔 (shekels) (8 ounces에 해당, 140불 정도)에 팔렸다고 합니다 (창세기 37:28).

그 때 ‘요셉’의 나이가 열 일곱 살이었습니다. 열 일곱 살이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생 정도 되었을 나이입니다. 아직도 부모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때인데,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 것입니다. ‘요셉 사건’으로 야곱의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날마다 슬픔에 잠겨 살았습니다. 형들은 형들 대로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 역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요셉’에게 맞춰진다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어린 ‘요셉’이 이집트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 왔으니 남들처럼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말이 다른 이집트에서 ‘요셉’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나오는 사실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을 하거나, 아니면 통역(通譯, interpreter)을 세워야 의사 소통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42:23).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노예로 팔려 온 ‘요셉’의 고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때 ‘요셉’의 고생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성경에는 ‘요셉’의 고생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주인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모든 일에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His master saw that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the Lord gave him success in everything he did).” (창세기 39:2-3) ‘his master (그의 주인)’는 ‘보디발 (Potiphar)’이라는 이집트 사람을 말합니다. 보디발은 ‘an Egyptian officer, the captain of the guard for Pharaoh (이집트의 관리, 이집트 왕 바로의 경호실장)’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보디발이라는 사람이 괜히 바로의 경호실장이 아니구나! 보디발에게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또 하나는 “도대체 ‘요셉’의 이야기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끝이 날 것인가?” 하는 기대감입니다.

요즘에 ‘소향’이라는 한국 가수의 노래를 많이 듣습니다. 특히 ‘소향’이 부른 노래들에 대한 외국 vocal coaches (노래 코치들)의 분석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소향’이 휘트니 휴스턴 (Whitney Elizabeth Houston, 1963-2012)이 부른 ‘I Have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을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 보컬 코치들에게 소향의 ‘I Have Nothing’을 분석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컬 코치들은 이 노래는 휘트니 휴스턴 말고는 부를 사람이 없는 노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가 어렵기도 하지만 휘트니 휴스턴 보다 더 잘 부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노래를 터키의 ‘엠레 (Yücelen)’라는 보컬 코치가 분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와, 처음 시작이 잔잔하게 나가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완벽한 두성 (head voice)입니다. 마치 이제 곧 일어날 엄청난 일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파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연 소향이 그 부분을 휘트니 휴스턴 보다 더 잘 부를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실력자 보디발의 집에 팔려 온 것은 앞으로 일어날 엄청난 일들의 서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디발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자기 집에 팔려 온 히브리 노예 소년 ‘요셉’이라는 사람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야, 요 녀석,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보디발은 ‘요셉’에게 이 일 저 일을 시켜 봅니다. 집안 일도 시켜 보고, 농사 일도 시켜 보고, 가축을 돌보는 일도 시켜 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시킨 일마다 다 잘 되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들었는데, 요 녀석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분명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의 집안 일을 모두 맡겨버립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하여 보디발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보디발은 자기가 먹는 음식 말고는 ‘요셉’이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았습니다.” (6절) 여러분,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히브리 노예 소년 ‘요셉’에게 그 엄청난 재산, 그의 집안 일을 완전히 맡겨 버리고 일체 참견하지 않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 때 ‘요셉’의 나이가 겨우 스무 살 안팎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십시오. 지금 성경은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 옴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요셉’에게 이집트로 팔려 오는 불행한 일이 없었더라면 성경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편안한 삶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비록 그것이 편안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누가 그런 드라마를 보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루브 (groov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홈’ 혹은 ‘골’이라는 뜻입니다. “그 음악에 그루브가 있다, 없다”이런 말들을 하거든요? 아무리 박자와 리듬을 잘 맞춰서 정확하게 연주해도 박자와 리듬에 변화를 주는 그루브가 없으면 재미 없고 지루한 음악이 되고 맙니다. 골프 클럽에도 ‘groove’가 있거든요? 골프 클럽 헤드에 길게 옆으로 패인 홈들이 있는데, 이 홈들을 ‘groove’라고 합니다. ‘groove’ 덕분에 공을 때리는 순간 마찰력이 생겨 그린 위에 멋지게 공을 세우거나 백스핀을 넣어서 공을 딸려오게 만드는 묘기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삶은 ‘groove’가 많은 삶입니다. 고난과 우여곡절이 많은 삶입니다. 여기 저기 패인 ‘홈’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요셉’의 삶 속에 개입해 들어오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The Lord was with Joseph)”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까 ‘요셉’의 삶 속에 난 그 수많은 ‘grooves’는 오히려 ‘요셉’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보스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여러분의 앞날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힘든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여러분이 보스턴에 왔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보스턴에 오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삶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쓰시는데 ‘groove’가 꼭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겪게 되는 ‘groove’ 속에 여러분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요?” 하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They are plans for good and not for disaster, to give you a hopeful future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을 알고 있다. 그 계획은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는 좋은 계획이다).” (예레미야 29:11) 이 말씀에 나오는 ‘너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the people of God)’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이 사람들은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을 보스턴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보스턴 생활에서 겪게 될 수많은 ‘grooves’는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를 드라마틱 하게 만들어 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일들이 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은 7년 기근 (famine)으로 고통을 받던 식량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합니다. 모든 나라들이 양식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이집트로 돈을 싸 들고 몰려 옵니다. ‘요셉’ 덕분에 엄청난 부가 이집트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의 손을 거쳐 막대한 돈이 들어오고 양식이 나갔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하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중에 찰스 스윈돌 (Charles R. Swindoll) 목사님이 쓴 ‘Joseph: A Man of Integrity and Forgiveness (순전한 믿음으로 꿈을 이룬 사람, 1998)’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감동을 받았던 책입니다. 스윈돌 목사님이 그 책 거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끝까지 요셉답게 살아야 했다. 그는 끝까지 그가 믿었던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살았다. 식량을 분배하는 일은 공정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 모든 돈은 합법적인 구좌에 입금 되었다. 아무런 뇌물도, 상납금도 없었다. 그는 해외에 비밀 구좌를 만들어 돈을 빼돌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은밀한 비자금이 없었다. ‘요셉’은 순전한 인격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였고, 이집트 사람, 가나안 사람, 히브리 사람, 기타 다른 민족들의 생존을 보장하였다. 그가 수년 전에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했을 때도, 그는 지금과 같은 성실함을 보여 주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신분과 역할은 크게 바뀌었지만, 그의 성품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p. 243)

왜 우리에게 ‘요셉’ 같은 인물이 없습니까? 안타깝습니다. 그가 받은 학위를 발판으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많은데, 왜 ‘요셉’ 같은 큰 인물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요셉’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는 우리 조국을 위해서 ‘요셉’ 같은 인물이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곳 보스턴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겪게 될 ‘groove’를 탓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grooves’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grooves’를 주목하지 말고,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9/8/2019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II) If God Is For Me

출애굽기 14:5-14

보스턴에 학업을 위해서, 혹은 직장 때문에 처음 오신 분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환영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도시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교들이 있고, 병원들이 있습니다. 보스턴의 사계절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중에 가을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 찰스 강변을 한번 걸어 보십시오. 메모리얼 드라이브에서 보스턴 다운 타운을 바라보며 한번 걸어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요?

저는 주일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이런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두 번째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뭔가 쉽게 일이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읽은 출애굽기 말씀 속에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13-14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두려워 하지 마시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시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워 주실 것이오 (Do not be afraid. The LORD will fight for you; you need only to be still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유명한 ‘십계 (The Ten Commandments, 1956)’입니다. 찰튼 헤스튼 (Charlton Heston)이 모세 역으로 나온 명화(名畵)입니다. 찰튼 헤스튼은 영화 ‘벤허 (Ben-Hur, 1959)에도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배우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의 왕 바로 (Pharaoh)의 특별 전차 (the best chariots) 600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왔습니다. 각 전차에는 전쟁 경험이 많은 장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60만이었다고 합니다.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합하면 200만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보지만, 모두 전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비무장(非武裝)이었습니다. 손에 싸울 무기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쩌다가 이런 막다른 길로 쫓기게 되었습니까? 그 때 백성들을 인도한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모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나면서부터 이집트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모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모세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이나 행동에서 뛰어난 능력을 드러냈다 (Moses was taught all the wisdom of the Egyptians, and he was powerful in both speech and action, 사도행전 7:22)”고 했습니다. 그가 배운 이집트의 학문 중에 분명히 전쟁에 필요한 ‘전술학 (Tactics)’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왕자가 이런 것을 배우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이상한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뒤로 돌아서 비하히롯 앞에서 진을 치라고 말하여라. 그 곳은 믹돌과 홍해 사이이며, 바알스본 맞은편의 바닷가이다 (Order the Israelites to turn back and camp by Pi-hahiroth between Migdol and the sea. Camp there along the shore, across from Baal-zephon).” (출애굽기 14: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전술학적으로, 바다를 앞에 놓고 캠프를 치는 법은 없습니다. 적이 기습해 올 경우 피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도저히 전술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절망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고난과 절망 속에 우리가 당장에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이 크리스천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가지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노력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 (test)이 그런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작전을 세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운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훈련도 안 된 사람들이, 손에 무기도 없이, 바로의 전차 부대를 어떻게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You need only to be still). 그리고 내가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는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Be still"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뭔가 하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Be still!”이라는 말은 네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하나님만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즐겨 부르는 찬양 중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이시니, 오직 주만이 나의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My soul desires only God. My salvation comes from him. Only the LORD is my rock and my salvation. Only LORD is my fortress, so I will not shake)” 이런 찬양이 있잖아요? 시편 62:1-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잠깐 보류하고 다음 말씀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워 주시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시는 싸움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간의 싸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어린 나이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전쟁이 나면 성인들은 모두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법이 있는데, 성인의 기준이 20세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형들은 모두 전쟁이 나갔지만, 다윗은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싸웠을 때 20살이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구약시험에 골리앗이 들고 있었던 창 날 (iron spearhead)의 무게가 얼마냐 하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600세겔, 6.8kg입니다. 골리앗이 입었던 갑옷의 무게는 5,000세겔, 57kg입니다. 이런 골리앗을 상대로 소년 다윗이 싸웠습니다. 아무 무장도 없이, 그가 가진 것이라곤 주머니 속에 넣은 조약돌 5개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전혀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 때 다윗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he LORD rescues his people, but not with sword and spear. This is the LORD's battle, and he will give you to us (주께서 칼이나 창을 가지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지 않는다. 이 싸움은 주님의 싸움이다! 그가 너를 우리에게 넘겨 주실 것이다)” (사무엘상 17:47)

“이 싸움은 주님의 싸움이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라고 나와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싸움에 나갔으면 내가 싸우는 것이지, 하나님의 싸움이라니, 내 대신 하나님께서 싸워 주신다는,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법이 있습니다.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만히 하나님만 바라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홍해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거인 골리앗이 다윗이 던진 조약돌을 맞고 맥 없이 쓰러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 (인간의 극한 상황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존 플레이벌 (John Flavel, 1628-1691)이라는 영국의 청교도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1992년에 우리 교회가 현재의 교회 건물과 목사관을 구입하고 이사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 건물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어 하나님만 바라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 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교회 형편이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교인 수도 적었지만, 교회 일년 예산이 만 불이 조금 넘는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정도도 안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는 하바드 스퀘어에 있는 UCC 교회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현재의 건물을 구입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때 이 교회는 ‘Pilgrim Congregational Church (필그림회중교회)’라는 미국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교회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그 때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이 교회 건물이 필요하다는 한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때 토요일 새벽 기도를 마치고 이곳 필그림 교회의 문고리를 잡고 “하나님, 우리에게 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 때 ‘문고리 기도’라는 제목으로 주일에 설교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런 과정의 일부가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앨범’에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셔서 드디어 우리 교회에게 교회 건물을 구입하도록 한다는 결정이 났습니다. 협상 결과, 교회 건물과 목사관을 30만 불에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그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은행에서는 교회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건물 구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때가 저의 목회 중에 가장 힘든 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흥분되고, 뭔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차 있었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외에, 달리 제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외국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너희 한국인 교회가 필그림 교회 건물을 구입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려움은 없느냐? 내가 도와 줄 일이 없겠느냐?” 이런 전화였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시드니 닐 (Sydney Neal), 우리교회가 소속해 있던 UCC 교단 Massachusetts Conference의 재정부장 (treasurer)이었습니다. 전 지금도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Cambridge Savings Bank에서 필요한 돈을 대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아름다운 예배당은 그 때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입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그 때의 교인들은 정말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아,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희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도우시는구나!” 하는 것을 실감(實感)했습니다.

큰 꿈을 가지고 보스턴을 찾아 온 여러분, 여러분의 앞날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 중에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홍해 바다 앞에 캠프를 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일을 겪게 하시고,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겪는 고난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로마서 8:28)’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맞는 어떤 고난과 절망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주어진 일이 힘에 겨울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The LORD will fight for me; I need only to be still (주님이 나를 위해 싸워 주신다. 이 싸움은 내가 싸울 싸움이 아니라 주님의 싸움이다. 나는 가만히 하나님만 바라보면 된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기회이다!”


9/1/2019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I) If God Is For Me

시편 46:1-7

오늘 아직 Boston의 Commonwealth Avenue나 Allston의 Harvard Avenue에 나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사 나가고 들어오는 차들로 붐빌 것입니다. 매년 이 때가 그렇습니다. 오늘은 9월 1일이니까 딱 이사 나가고 들어오는 날이네요. 여기 저기 이삿짐을 실은 유 홀 (U haul) 차들이 돌아다닙니다. 운전자들이 운전이 서툴고, 또 길을 잘 모르니까 차가 많이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986년에 보스턴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그 전에 LA에서 2년 반 정도 살았습니다. 클레아몬트 신학교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에서 공부하다가 보스턴 신학학교로 transfer해서 왔습니다. 클레아몬트에서 아직 석사 과정을 다 마치지 않았지만, 바로 박사과정으로 받아 주고, 학점도 인정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보스턴 신학교로 온 것입니다. 그 때가 8월 중순이 조금 넘은 때였습니다. 제 시계를 보니 아직 낮인데, 보스턴은 벌써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제 시계가 LA 시간으로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던지 모릅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보스턴 사람들은 날이 추운지 벌써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보스턴 시간으로 오후 6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선 내가 공부할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학교부터 가봤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스턴대학 정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보스턴 대학은 정문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학교 캠퍼스도 딱히 캠퍼스라고 할 게 없고 길 가에 있는 우중충한 건물들이 학교 건물이고 강의실들이었습니다. “야, 보스턴대학은 정문도 없는 학교로 구나. 클레아몬트 신학교는 정문도 있고, 캠퍼스도 아름다운데, 아무래도 학교를 잘못 온 것 같다. 그냥 클레아몬트에 있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보스턴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타주에서 온 학생들은 33년 전에 제가 생각했던 같이 벌써 보스턴에 잘못 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배를 마치면 제 사무실에서 그 날 새로 교회에 오신 분들을 환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교회를 소개해 드리고, 새로 오신 분들과 기념 사진도 찍습니다. 그 방에서 저와 함께 교회 새로 오신 분들을 영접하는 일을 맡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이 그 집사님에게 보스턴 생활에 대하여 여러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습니다. 한달에 아파트 렌트비는 얼마나 되고, 생활비는 얼마나 드는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고, 어쩌다가 보스턴으로 오셨어요? 보스턴은 렌트비가 비싸고, 물가는 아마 미국에서 제일 비쌀 겁니다. 또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고 굉장히 춥습니다. 잘못 오셨어요.”

오늘 보스턴에 새로 오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보스턴에 정말 잘 오셨습니다. 누가 보스턴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말 듣지 마십시오. 비록 학교  정문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학교들입니다. 그리고, 렌트비가 좀 비싸고, 물가가 싸지는 않지만, 살아보면 다 살아집니다. 보스턴이 처음에는 정이 안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드는 도시가 보스턴입니다. 제가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뷰엔나 팍 (Buena Park)에도 잠깐 살았고, 대부분은 클레아몬트 (Claremont)에서 살았습니다. 모두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지금은 보스턴이 훨씬 좋습니다. 보스턴 사람들을 ‘보스토니안 (Bostonian)’이라고 부르는데, 여러분도 곧 보스턴을 사랑하는 ‘보스토니안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꿈을 가지고 보스턴에 왔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보스턴에 왔든지, 또 새로운 직장을 찾아 보스턴에 왔든지 모두 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보스턴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을까? 보스턴 사람들은 다 똑똑하다는데 당해낼 수 있을까? 지도 교수는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을까? 이곳의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이런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온 사람들에게만 불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을 경험합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입니다. 시편 사미스트 (psalmist)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42:5, 11, 43:5)”하고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싸인 얼굴로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것 같구나. 여기 머물러 있으라.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태복음 26:37-38)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까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 독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교수가 되었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 당했습니다. 다행이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Union Theological Seminary)로부터 교수직을 제의 받고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 후 하바드 신학교와 시카고 신학교에서 강의했습니다. 하바드 신학교 도서관에 가면 폴 틸리히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폴 틸리히는 영향력이 있는 신학자입니다. 저는 이런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불안에 대하여 매우 의미 있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The basic anxiety, the anxiety of a finite being about the threat of non-being, cannot be eliminated. It belongs to existence itself.” “기본적인 불안 즉 비 존재의 위협으로부터 오는 제한된 존재로서 느끼는 불안은 제거될 수 없다. 이런 불안은 존재 자체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non-being (비 존재)’이라는 것은 존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은 비존재의 위협입니다. 죽으면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거나 실패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절망하고 삶이 망가지는 것도 비존재의 위협입니다. 그렇게 망가진 나는 원래 되려고 했던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스턴에 꿈을 가지고 찾아 왔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한 구석에 있는 불안의 이유는 틸리히가 말하는 ‘비 존재의 위협’ 아닐까요? “내가 실패해서 내 인생이 여기서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은 아닐까? 이 낯선 곳에서 내가 가졌던 꿈이 산산조각이 나지는 않을까?” 이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비 존재의 위협 (the threat of non-being)’입니다.

틸리히는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The courage to be is rooted in the God who appears when God has disappeared in the anxiety of doubt.” “존재에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 마치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 아들이 낯선 땅에서 실패하여 철저하게 곤두박질 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용기를 낸 것은 틸리히의 말에 의하면 ‘존재에의 용기 (the courage to be)’입니다. ‘존재에의 용기’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Why am I discouraged? Why is my heart so sad? I will put my hope in God!” (5절, New Living Translation) “Why am I so sad? Why am I so troubled? I will put my hope in God.” (Good News Translation) 이 말씀과 오늘 본문 말씀 시편 46편은 같은 저자가 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려도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지키실 것입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God dwells in that city.”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면 “God dwells in me”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It cannot be destroyed”라고 했습니다. 결코 내 삶은 망가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 젊은 수도사가 나이 많은 스승을 찾아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많은 시간 명상도 하고, 고행도 하고, 수도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네 옆에 계시는구나!” “예?” 깜짝 놀란 젊은 수도사는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다가 물었습니다. “제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젊은 수도사의 말에 스승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네 술 취한 사람이 왜 자기 집을 못 찾고 헤매는 지 아는가? 왜 술 취한 사람이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지 아는가?” 젊은 수도사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스승이 다시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먼저 무엇이 너를 취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어라. 취하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느니라!”

선문답(禪問答) 같기도 하고, 우스운 말 같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취하다’는 말은 어디에 빠져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빠져 있다고 할 때 ‘-aholic’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alcoholic’은 술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workaholic’은 일에 빠져 일 밖에 모르는, 일에 중독된 사람을 말합니다. ‘shopaholic’은 물건을 마구 사 들이면서 돈을 낭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공부에 빠진 사람은 뭐라고 하나요? ‘공부홀릭’이라고 하나요?

저는 우리교회가 여러분 모두에게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유학생이나 여기 거주해서 사시는 분들이나,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디아스포라 (diaspora)’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저도 클레아몬트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주말이면 주로 밤 시간에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작은 폭포가 있어서 큰 소리로 기도해도 괜찮았습니다. 운전하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찬송을 부르다 보면 어느 새 찬송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 도와 주세요!”

공부요?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부에 빠지지는 않아야 합니다. ‘공부홀릭’이 되면 하나님 잃어버립니다. 교회에 안 가고 그 시간에 공부하고, 예배 드리야 하는 시간에 페이퍼 쓰고 이러다가는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브로니 웨어 (Bronnie Ware)라는 연명 치료사가 ‘죽기 전에 하는 후회 5가지’라는 책을 냈습니다. 연명 치료사는 생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 5가지 중에 하나가 “그렇게 너무 열심히 살 필요는 없었다 (I wish I didn't work so hard)”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 일에 매달렸는데, 그러다가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훗날 유학생활을 회상하면서 똑 같은 말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죽자고 공부에 매달릴 필요 없었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더 중요한 하나님을 잃어버렸거든요.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6편 말씀을 여러분의 책상 머리에 써 붙여 두고 힘들 때마다 읽으세요. 이 말씀을 읽고 힘을 얻으세요. 원래 이 말씀은 ‘A song to be sung by soprano voices (소프라노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힘들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여러분의 귓전에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를 듣고 힘을 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항상 도와 주시니, 땅이 마구 뒤흔들려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 산 저 산이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바다에 마구 폭풍이 몰아치고 미친 듯이 날뛴다 해도, 그 물이 넘쳐 언덕들이 마구 요동을 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하나도 무섭지 않아.” (셀라) (현대어 성경)


8/25/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II) To Live As A Christian

마태복음 4:17-22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과 두 번째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런 설교 말씀을 하게 된 배경에는 설교자인 제 마음 속에 절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종을 앞둔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뭔가 소중한 교훈을 듣기 위해서 후배 목사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다른 말씀은 하지 않고 딱 한마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 목사님의 눈에는 목사들이 예수를 안 믿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목사들이 거짓말을 일쑤로 하고, 이리저리 몰려 다니면서 못된 짓을 하고, 어디 한 자리 없나 하고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것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목사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크리스천다운 믿음과 말과 행동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언제부터인지 제 마음 속에 불안감과 위기감이 생겼습니다. 요즘 와서 그 위기감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Then you will be blameless and innocent. You will be God's children without any faults among people who are crooked and corrupt. You will shine like stars among them in the world (그러면 여러분들은 흠 없고 순결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구부러지고 타락한 사람들 속에서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2:15, GOD'S WORD Translation) 이 말씀이 맞지 않습니까? 우리가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을 산다면 우리는 밤 하늘에 빛나는 별 같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늘이 깜깜하면 깜깜할수록 별은 더욱 환하게 빛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크리스천들 때문에 밝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크리스천의 정체성 (identity)이 무엇인지 올바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 4:17-22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지나 가시다가 어부 두 사람이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은 시몬 (Simon)과 안드레 (Andrew)였습니다. 두 사람은 형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Come,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Come, follow me, and I will show you how to fish for people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사람을 낚는 법을 보여 주겠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즉시 (at once)’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또 두 사람이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수선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야고보 (James)와 그 동생 요한 (John)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세베대 (Zebedee)였습니다. 이 두 사람도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즉시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둔 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볼 시간도 없이,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즉시’라는 말은 ‘at once’ ‘immediately’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할 시간을 가졌거나, 시간을 끌었더라면 이런 말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제 머리 속에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26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상식이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면 이런 일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을 부르실 때, ‘God’s divine intervention (하나님의 신성한 개입)’이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네 사람의 삶 속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 갈릴리의 어부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만 살던 어부들에게 사명 (使命, mission)이 생기고,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참여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 (1898-1963, 영국)가 ‘Mere Christianity’라는 책을 출판했을 때 루이스는 기독교란 무엇인지 핵심적인 내용을 순수하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말로 ‘단순한 기독교’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단순한’이란 말은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기독교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걷는 길과 같은 길을 걸으면서 그분의 삶과 인격과 사상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Christian)’은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천에 대한 6개의 정의를 모아 봤습니다.
(1) a person who believes in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2)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라고 보여 줄 수 있는 사람)
(3) a person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
(4) a person who lives according to the teachings of Jesus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
(5) a person who possesses Christian virtues (크리스천의 덕목을 소유한 사람)
(6) a person who exhibiting a spirit proper to a follower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올바른 정신을 보여 주는 사람)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래 이런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전서 2:21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여러분, 아시지요?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것이 서기 62-64년 경입니다. 로마에 대 화재가 난 것이 서기 64년이고, 네로가 황제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부터 크리스천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박해를 받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고난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 부끄럽지 않습니까?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인데,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교회생활이 하나의 교양 (敎養)이 되고 있습니다. 예의 있고, 품위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교양이라고 합니다. 교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라 살기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점점 다른 수단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면 마음이 평안하다든지, 교회가면 친구를 사귈 수 있다든지, 교회가면 좋은 말을 많이 듣는다든지, 이런 것들이 교회 생활의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과연 우리 중에 몇 사람이나 믿음을 버리지 않고 고난을 받겠다고 하겠습니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Mere Christian Faith (단순한 크리스천 믿음)’을 갖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요즘에 ‘선한 영향력 (good influence)’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고 말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말만 해서는 백 년이 가도 하나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사도행전 24:5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For we have found this man a plague, one who stirs up riots among all the Jews throughout the world and is a ringleader of the sect of the Nazarenes.” 공동번역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본 결과, 이자는 몹쓸 전염병 같은 놈으로서,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자렛 도당의 괴수입니다.” 이 말은 더둘로 (Tertullus)라는 변호사가 재판장에서 사도 바울을 가리키면서 한 말입니다. 더둘로는 아나니아 (Ananias)라는 제사장이 고용한 변호사였습니다. 아나니아가 벨릭스 (Felix)라는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면서 변호사를 시켜 바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게 했던 것입니다.

변호사 더둘로는 바울을 ‘몹쓸 전염병 같은 놈’이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this man a plague (전염병 같은 사람, ESV)’라고 나와 있습니다. NASB에는 이 말이 ‘this man a real pest (페스트 같은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페스트’는 전염성이 강한 병입니다. 예전에는 ‘흑사병 (黑死病)’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이 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이라는 사람은 ‘pest’와 같은 사람이어서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단숨에 그 도시를 전염 시켜 버리는 요 주의 인물이라고 재판장에서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한 사람 바울 때문에 한 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전염되어 버립니다. 재미 있는 것은 바울을 심문하던 벨릭스 총독과 그의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 (Drusilla)도 바울에게 전염됩니다. 사도행전 25장에는 바울을 심문하던 벨릭스의 후임으로 유대 총독이 된 베스도 (Festus)와 유대왕 아그립바 왕 (King Agrippa)과 그의 여동생 베니게 (Bernice)가 바울에게 전염되어 버립니다. 누구나 바울과 대화를 하다 보면, 사적인 자리든지, 재판장이든지 사람들은 바울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선한 영향력’입니다.

우리가 정말 세상에서 이런 ‘선한 영향력’을 갖기 원한다면, 먼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이렇게 설교해도, 여러분 속에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진 크리스천으로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냥 그럭저럭 믿음생활을 교양으로 알고 지금처럼 계속 교회생활 하겠습니까? 아니면, 정말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결정해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점점 식어가고 있고, 우리 속에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밤 하늘은 깜깜한데, 별들은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You were called to follow Jesus Christ in His steps (그의 발자국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네가 그리스도를 올바로 따르라고, 그의 남긴 발자국을 따라 살라고, 네가 먼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확립하라고, 네가 깜깜한 밤 하늘을 밝히는 별이 되라고, 그래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8/18/2019 |

하나님의 아름다움 The Beauty of God's Glory

이사야 35:1-10

복음은 좁은 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다움의 길은 깨끗하고 거룩한 길이며 가장 쉽고 편안하고 안전한 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길을 대로라고 소개합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읽을수록 자신이 살아가는 세대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본 장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밝은 곳으로 나오는 장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부름을 받아 60년간 활동한 남쪽 유다의 예언자였습니다. 이사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메시아에 대한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예언서의 특성이 인생의 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본서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고, 유다를 향하여 예언하며 더 나아가 다음 세대를 향한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시대와 다시 오실 재림의 시대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 장에 앞서 이사야 34장은 에돔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일을 나타냈지만 본문 35장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을 향한 회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 장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선지자의 선포로 인하여 주눅이 들어 있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희망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라.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을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27:4)"고 노래합니다. 여호와께 구하는 한 가지가 명예도, 부도,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여호와의 은총과 사랑을 구하며 주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로 살아가길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와 사막 같은 인생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은 광야와 사막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비참함이라 선포하였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땅, 광야와 사막과 같이 메마른 땅은 고통과 죽음뿐입니다. 성도들이 심판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하시는 일을 발견하게 되면 세상에 사는 자들과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본서 기자가 노래한 것처럼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1절)" 희망을 발견할 때 환란과 고통가운데서 견디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소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는 영광을 누립니다. 소망이 없던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영광을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 끝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를 향한 사랑이 끝이 나면서 고통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은 바 된 사랑 안에 있기에 십년을 견디고도 사랑이 끝나지 않고 이 십년을 견디고 삼 십년을 견딥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은 풍성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과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최후까지 견딜 때 더욱 찬란해집니다. 주님과 함께 잘 견딘 자가 승리의 깃발을 꽂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기적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레바논의 영광,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 은 인간의 힘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와 사막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땅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곳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3절)"라고하신 것처럼 구약의 요셉은 종으로 팔렸고 종살이하는 중에 주인의 눈에 형통한 자로 보인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요셉은 원망하지 않았고 견디는 영광과 기쁨을 노래하며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담을 넘어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끝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들은 요셉처럼 견뎌야 합니다. 배반도 견디고, 종살이도 견디고, 감옥 생활도 견디고 총리의 삶에서도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으니 (창 50:20)” 하며 도리어 형제들과 그들의 자녀를 기르겠다고 위로합니다.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는 이와 같은 일들의 연속입니다. 어떤 상황, 환경이 펼쳐진다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의 현장을 만들어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기쁨을 주십니다. 교회 안에 기쁨이 가득하면 온 성도들은 즐거워집니다. 전도 받아온 사람이 처음 교회 와서 예배하고 난 후에 “난 하나도 안 기쁜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행복해 하지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광을 누리는 곳입니다. 영적전투에서 승리하는 교회는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집니다.

2.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라.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은 성도들을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성도들은 말씀 따라 살아 갈 때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고 참된 신앙인이 됩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4절) 주님의 권세 아래 살아갈 때 가장 존귀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은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과 같은 비참한 인생에게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하신 것에 대한 확신과 신뢰와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명감을 갖게 되면 세상에서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살며 하늘나라의 존귀함과 가장 가까이 머무르며 여호와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사명자들은 겁내는 자들에게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4절)” 하시는 희망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고 갚아 주신다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 영광이며 승리인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가 필수적입니다. 저는 청년 때부터 개척 초창기에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읽은 성경이 밤에 환상으로 보일 정도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말씀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나야 하고 기도를 통해 이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단과의 전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도발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담대함을 얻기까지 기도하십시오. 당대에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면 자녀들이 깨어지지 않도록 자녀를 향한 보호 기도로 다음세대를 지키십시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가득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본 절에서 여호와가 오시면 이루어질 구원의 현상을 생생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회복과 그 자녀들이 거하는 땅이 회복되는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복음은 과거로부터의 단절이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구원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임하기 전 인간은 비정상적이고 부패한상태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소경이며 못 듣고 벙어리이며 못 걷고 소망이 없고 절망적인 영적 상태인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은 사망에서 들은 생명의 소식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복음은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요.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가 노래하며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 년 전에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과거와 단절된 구원의 기쁨은 새 시대를 향한 빛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5)"고 하셨습니다. 사막에 연못이 생기고 메마른 땅은 물들의 못이 되고, 시랑의 눕는 곳이 갈대와 부들과 풀들이 나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 안에서 살아가는 영광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갈대와 부들과 풀은 물가에서 자랍니다. 땅 끝까지 증거 되는 선교는 생명이 없는 곳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바뀌게 되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으로 생명이 번성하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면 모든 종교는 통합되어가며 착하게 살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성령을 의지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함을 누려야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응답 받는 교회로 서야합니다. 성경은 성경을 통해 증언하며 예언을 성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8)" 하심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려라.
하나님을 떠나 악하여져 가는 세상이 스스로 악한 줄을 모르는 시대는 마지막 때입니다. 세상이 죄로 더러워져 가는데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오직 교회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합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세워지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며 복음의 증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많아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거룩한 길을 만나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8절)” 하였습니다. 거룩한 길은 마귀에게 포로 된 자들이 부패한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야 하는 길입니다. 거룩한 길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 길을 대로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우매한 자들은 걷지 못하는 길입니다.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이 걷는 길입니다. 그 길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하셨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의 문이 열려지지 않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깨끗하여 지는 길이기에 좁은 길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보혈 안으로 들어설 때 그곳은 거룩한 길, 대로가 펼쳐집니다. 성경은 이 길을 깨끗한 길 시온의 대로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사단의 덫에 걸리면 불결해지고 더럽게 살기로 결단해 버립니다. 죄인의 길은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픈 길입니다. 부정한 자들이 들어가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이 들어가며 죄를 짓는 상태에서 깨끗하지 못한 자들에게 열려진 길입니다. 그 길에는 사자가 있고 사나운 짐승이 생명을 위협하여 두렵고 무섭고 불안한 길입니다. 사람들은 길에 사자가 있어 움츠리고 고립되고 갇혀서 살게 됩니다. 사나운 세력을 가진 마귀들이기에 사람들을 파괴시키는 존재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거룩한 길을 만들어 악한 마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성도들의 생명을 보존 시켜야 합니다. 성도들이 거룩한 길을 걷게 되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을 위하여 있는 길이니 은총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사 35:10)"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복음의 소식을 듣고 노래하며 교회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온 자들은 영원한 희락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예수 안에서 영육 간에 깨끗하도록 쓸고 닦아야 합니다. 이 길에 서기위해서는 눈물의 기도 자리에 앉아야 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로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거룩하게 할 때 대로로 행하며 영광의 길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니 그들을 살리기 위해 복음 들고 나가십시오.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살려내는 빛과 소금의 소명을 감당합시다. 이 거룩한 일에 부르심을 입었으니 빛으로 살아내는 기적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슬픔과 탄식이 교회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달아나게 하는 능력이 케임브리지 한인 교회에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