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2

조롱 당하신 그리스도 Christ Mocked

마가복음 15:16-32

오늘 설교 말씀을 준비하면서 지금이 고난주간이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체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말씀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 가시 왕관을 씌웠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공관을 지키는 군인들 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에 갈대 막대기 (a reed stick)를 쥐어 줬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29).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경례를 하면서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조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갈대 막대기로 때리고, 침을 뱉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데요.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훨씬 더 심하게 예수님께서 조롱 당하신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누가 너를 때렸는지 맞춰 보아라!’ 하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6:67-6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체포한 사람들은 그 앞에서 말도 안 되는 만행과 폭행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23:34) 정말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인가 하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높고, 깊습니다.

1909년 4월 6일에 미국인 로버트 피어리 (Robert E. Peary 1856-1920)가 북극점 (북위 89도 57분)에 도달합니다. 몇 번의 도전 끝에 성공한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피어리가 메인 (Main)에 있는 보든대학을 나왔더라고요. 1986년 여름에 3개월 간의 휴가를 얻어 그린랜드 (Greenland)로 여행을 갔던 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23년 후에, 그의 나이 52세 때에, 드디어 피어리는 북극점에 도달합니다. 그 때 아내가 만들어 준 국기와 15년 동안이나 자기 가슴에 품고 다니던 국기를 그곳에 꽂았다고 합니다. 한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북극점의 바다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깊이를 재는데, 무려 30시간이나 얼음을 깼다고 합니다. 피어리 자신이 보든대학 (Bowdoin College)에서 지질학과 측량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지만, 깊이를 재기 위해서는 긴 줄 끝에 무거운 추를 달아 내리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끝이 없이 들어가는 바다의 깊을 재기 위해서 더 긴 줄이 필요했습니다. 피어리는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2,000m까지 줄을 내렸다. 아직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북극의 바다는 2,000m 보다 깊은가 보다. ” 이렇게 잰 북극의 바다의 깊이는 4,290m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에 “이만큼 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그보다 더 깊고, 그보다 더 높고, 그보다 더 넓어서 우리가 준비한 줄로 다 잴 수가 없습니다. 항상 그 줄의 길이보다 길기때문입니다. 결국 수십 차례의 노력 끝에 피어리는 북극의바다의깊이를 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공관에서, 그리고 빌라도 총독의 공관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을 당했지만, 모두 참으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조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런 말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홋날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죄패가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 사실을 빼놓지 않고 기록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십자가 아래의 군인들이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사형수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려는 마지막 인정으로 그렇게 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고통과 아픔을 그 무엇의 도움도 거절하고 모두 혼자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그 옷을 누가 가져갈지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아,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던 사람아, 당신 자신이나 구해 보시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마가복음 15:29-30)

십자가 아래서 이 광경을 지켜 보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고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겠다.” (마가복음 15:31-3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도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여라.” (누가복음 23:39)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듣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고 계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Hieronymus Bosch (1450-1516)라는 네델란드의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물론 다른 그림도 많이 그렸지만, 성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Christ Mocked (조롱 당하신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유명합니다. 이 그림은 ‘Crowning with Thorns (가시관을 쓰심)’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한번 이 그림을 보시지요.

네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에워싸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 을 고문하는 사람들 (torturers)입니다. 왼편 위에 있는 사람은 머리에 화살을 꽂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시관을 예수님께 씌워 주는 손은 그냥 손이 아니라 쇠로 무장한 손입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사람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 있는 사람 은 손에 고문 기구를 들고 있습니다. 목에는 가죽 벨트를 맸는데, 그 벨트에 날카로운 못이 박혀 있어서 이 사람의 잔인함을 극대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밑에 있는 사람은 막 예수님에게 입혔던 자주색 옷을 벗기고 원래 옷으로 갈아 입혀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면, 재미 있는 것은, 왼쪽 아래에 있는 사람인데요. 흰 염소 수염에 얼굴 표정이 아주 간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손에 무슨 막대기 같은 것을 쥐고 있는 것 같은데요. 확실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머리에 둘러 쓰고 있는 head-dress를 보면, 밑에 초승달 (a crescent moon)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이슬람교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잘 보면 초승달 위에 노란색의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별은 유대교의 상징입니다. 보쉬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반기독교적인 세력으로부터 고문을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잔인한 네 명의 고문자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창백하고 연약한 얼굴을 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시선(視線)이 고문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독자들을 바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여 “나는 너를 위해서 이런 조롱과 고난을 받고 있다. 너는 나와 고난에 참여하고, 나의 고난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해설이 저의 마음에 비수(匕首) 같이 꽂힙니다. 정말 우리가 성경 말씀처럼 살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성경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거절하고 편하고 안락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긍정하면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75세의 나이에 자기 고향을 떠나 식구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감동합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을 보면서 감동합니다. 하지만, 나도 주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 (cost)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사람은 절대 바보다 아니다"라는 짐 엘리엇 (Jim Elliot, 1927-1956)이 남긴 말을 읽으면서 감동합니다. 엘리엇이 시카고에 있는 휘튼 칼리지 (Wheaton College) 2학년 때 쓴 일기장에서 이 말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어린 나이에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감동합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영원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서 결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뭔가 우리의 가치 판단에 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난 주 설교에서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쓴 ‘제자직의 대가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 판단하는 우리의 가치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안전한 곳이 아니니까 그 자리를 따나 나를 따르는 안전한 삶을 선택하라는 그리스도의 초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내가 있는 자리가 안전한 자리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위험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도전적 (challenging)인 것은, 2,000전에 가난하고 무식했던 갈릴리의 어부들이 안전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안전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인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올바로 선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곧 교회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결단하지 못하고, 우리가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니까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합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가장 건강하게 부흥했을 때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했을 때입니다. 떳떳하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지하교회 (Catacomb)에서 예배를 드렸을 때, 교회가 가장 부흥했습니다. 교회가 가장 타락하고 약했을 때는, 교회가 정치와 결탁하고, 자본주의와 결탁해서 편하고 안락한 것을 추구했을 때입니다. 그 때부터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부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자의 편에 섰던 유럽의 기독교는 몰락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의 교회들이 쇠퇴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교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조롱 당하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고문자들에게 에워싸여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 보시면서 "너희도 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도 나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선택해야 하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삶 대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삶을 선택해야 하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려고 하는 대신 가시 면류관을 쓰는 삶을 선택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높은 곳을 향하여 살아 갈 때, 우리는 낮은 곳을 향하여 사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것을 결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세월호에 가라 앉을 때, 그 광경을 모두 TV로 지켜 봤습니다. 점점 배가 기울어 넘어가는데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았습니다. 누구 한 사람도 유리창을 깨고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그렇게 앉아 있으면 모두 죽는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기울어져 가는 세월호와 같습니다. 더 기울어지기 전에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결단하십시오. 편하고 안락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조롱 받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그렇게 살기 위해서 학위 받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결혼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아이를 기르고, 그렇게 살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결단하십시오.

 


7/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1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Crucify Him!"

마가복음 15:1-15

지난 몇 주 동안 성령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주일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마가복음 강해 설교를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른 아침에 대제사장들이 장로들, 율법학자, 그리고 모든 유대 의회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묶고,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1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른 아침'이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영어 성경에는 'very early in the morni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70명의 산헤드린 (유대의회) 위원들이 뭔가 중요한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에 모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유대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매우 조직적인 음모 (plot)가 진행되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plot'이라는 단어는 뭔가 합법적인 아닌 일을 비밀리에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장로들, 헤롯 당원들까지 이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계획이 실패하면 사두개 인들이 나서고, 사두개인들이 실패하면 율법학자들이 교대로 나서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긴박했던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말했습니다. '명절 동안에는 안 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킬 수 있어.'" (마가복음 14:1-2) 이 말씀에서 그 때의 긴박했던 상황이 느껴지시나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 때마침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습니다. 자기가 예수가 있는 곳까지 안내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제자의 이름이 가룟 사람 유다였고,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 주는 대가로 은 30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 26:14-16)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성공합니다. 예수님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든 공권력을 동원합니다. 유대의 왕까지, 유대의 총독까지 이 일에 가담합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일을 진행합니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는 이들의 조직적인 음모에 대항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런 상황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은 지금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아무 대책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신기하게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주요 교단들이 일제히 지난 수십년을 교권 싸움에 눈이 어두워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저출산이 추세여서 아이들을 적게 낳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부모들은 자기들의 노년의 삶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으면 교육비가 부담이 됩니다. 자녀를 적게 낳는 것이 한국, 중국, 미국,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초등학교들은 아이들이 없어서 통폐합을 계속하고 있고, 교회마다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들이 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몇 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없고요. 신학교는 미달 상태가 계속되고 있고, 정부로부터 부실 신학교로 평가 받은 신학교들은 문을 닫으라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발달은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젠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다른 것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길 거리를 지나면서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문자를 체크하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회 현상을 볼 때 뭔가 조직적인 힘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한꺼번에 맞 물려서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말살 시키려고 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이에 대항하는 교회들은 속수 무책으로 거대한 적그리스도의 세력 앞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인 저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크게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2,000년 전에 기능을 상실한 성전을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 무너뜨려 버리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 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무섭게 변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변하고 있는 세상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계십니다. 짧게 보면 10년, 길게 보면 20년 안에 그 때는 현재의 교회의 모습이 아닌, 전혀 새로운 모습의 교회들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 때는 교회들이 지금처럼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라고 하신 말씀처럼, 세상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들이 등장할 것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이 바뀌게 되는 이 전환기에,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우리교회는 이곳 케임 브리지에서 사역하고 있고, 여러분은 이 시기를 책임져야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책임이 크고, 여러분의 책임이 크지만,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축복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빌라도의 아내가 유대인이었다고 합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께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관례대로 감옥에 갇혀 있는 흉악범 바라바 (Barabbas)와 예수, 둘 중에 하나를 석방하겠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이 응당 흉악범 바라바보다는 예수님을 석방하라고 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바라바가 누구인지 그 정체가 궁금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폭동이 일어났을 때 살인을 저지른 폭도 들 중의 한 사람 (7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One of the prisoners at that time was Barabbas, a revolutionary who had committed murder in an upris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표현에 의하면, 바라바는 로마 정부를 타도하자고 주장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내버려 둘 수 없는 매우 위험 인물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상황은 빌라도가 바라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은 일제히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어도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고,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10절). 하지만, 성난 군중들 앞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빌라도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바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주었습니다 (15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조직적인 음모가 성공했습니다. 모든 일은 그들이 계획한대로 진행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모든 상황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천재 신학자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가 히틀러 암살 계획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 (This is the end-for me the beginning of life).” 본회퍼는 죽음을 끝이라고 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죽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그래서 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은 아주 구체적인 것까지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저께 새벽 기도 후에 청년부 여름팀 리더 성경공부가 있었습니다. 지금 에베소서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바울이 크리스천의 삶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면서 "우리는 사도와 예언자들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그 건물의 머릿돌이 되어 주십니다 (에베소서 2:20)"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We are God's house,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the prophets. And the cornerstone is Christ Jesus himself." 하나님의 집의 기초 (foundation)를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닦아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집의 모퉁이돌 (cornerstone)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들의 믿음생활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의 때부터 여러분의 믿음의 기초를 놓고 계셨고, 그의 아들을 여러분의 집의 귀한 모퉁이 돌로 예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여러분의 구원은 소중한 것입니다.

바라바가 석방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습니다. 바라바는 혁명가이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던 범죄자입니다. 이 사람이 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바보다 더 흉악한 범죄자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좌우에 강도들과 같이 못박히셨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 강도들 역시 바라바와 같은 'revolutionaries' 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바라바와 함께 체포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이사야 5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으며,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묻혔으며......" 예수님께서 악한 사람들과 함께 죽으셨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은 어쩌다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인들을 사형 시키는 제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님에게 지워진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의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은, 그들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의 계획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실패했고, 하나님의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는 악한 사람들의 계획을 통하여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몄던 사람들은 승리의 축배를 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승리의 잔이 아니라 패배의 쓴 잔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 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고린도전서 1:23-25)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함께 못박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지혜가 여지 없이 드러 났습니다. 인간의 음모가 아무리 조직적이고 치밀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도 이기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이 세상에 선포해야 할 죽음과 불의한 세력에 대한 영원한 하나님의 승리의 메시지입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03/2017070302901.html


6/25/2017 | 성령강림절 메시지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The Wonderful Things God Has Freely Given Us

고린도전서 2:9-14

성령강림절 (6월 4일) 후 오늘까지 세 번에 걸쳐 시리즈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이런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기 위하여 (To Know The Wonderful Things God has Freely Given Us)’ 이런 제목이 더 좋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믿음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크리스천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모두 ‘참된 예배 (the true worship)’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예배생활을 계속한다면,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터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Father is looking for those who will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in truth'라는 말은 비교적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진정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이렇게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in spirit'이란 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에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in spirit'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머리에 떠오르는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산 밑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조하게 모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던 사람들이 아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해 낸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시오.” (출애굽기 32:1) 백성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아론은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모아서 불이 녹여 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해 낸 신이다!”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삼천 명이 죽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참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God in spirit”이라는 말의 의미는 광야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금붙이를 모아서 송아지 상을 만들었던 사건을 반성해 보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그 답이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일, 지나치게 예배에 물질적인 것을 동원하는 일, 인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을 조작해 보려고 하는 일 등은 모두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막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in spirit'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드리기 전에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시도를 중단하게 하시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가게 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의 영이 깨닫는 예배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예배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진정한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예배 중에 찬송은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찬송을 부르는 방식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찬송을 불러야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여 드리는 찬송이 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16에 "시와 찬양과 신령한 노래로써 감사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ing spiritual songs to God with thankful hearts"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5:19에도 "Sing spiritual songs among yourselves, and making music to the Lord in your hearts"라고 나와 있습니다. 찬송의 가사와 곡조를 통해서 내 영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하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부르는 찬송을 'spiritual songs (영적인 노래 혹은 찬송)'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도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까? 기도할 때도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간구하십시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ay in the Spirit at all times and on every occasion.” "Pray in spirit." "Sing the spiritual Songs in spirit." "Worship God in spirit." 모두가 'in spirit'입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는 말씀 속에 기도 생활의 중요한 열쇠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이 말씀 속에 올바른 기도생활의 열쇠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어려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어디에도 기도가 힘든 일이라고 나와 있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는 그런 식으로 기도하셨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는 이른 아침에 성전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루에 한번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저녁 식사 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식사 후) 예수님께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 갔습니다." (누가복음 22:39) '늘 하시던 대로'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as usual'이란 뜻이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가 그렇게 힘든 일이었다면, 예수님도 기도를 힘들어 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예수님께는 기도가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제가 얻은 결론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하는 법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무엇이든지 제대로 알고 하면 훨씬 쉽습니다. 훨씬 힘이 덜 듭니다. 그런데, 제대로 하는 법을 모르고 하면 어럽고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도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기도가 응답되는 즐거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면 그런 기도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응답 받는 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4-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관심을 가지시고 귀를 기울여 들으십니다. 이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내 뜻을 내려 놓고,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시려고 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 아닙니까?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마무리 지으면서, 고린도전서 2장에 있는 말씀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조금 어려운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요점을 정리해 보면 아주 쉬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전에 들어 보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만 묵상해 보십시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십자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보십시오. 모두 인간으로부터 제물을 받고, 인간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달라요. 인간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희생합니다. 하나님께 아들이 여러 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 (only son or only begotten Son)'을 우리를 위해 내 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죄인인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the wonderful things)'을 누가 이해하고, 누가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나온 것처럼 '세상의 영 (the spirit of the world)'을 가지고는 죽었다 깨도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영'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왜 공부를 합니까? 모두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려고 합니까? 그 권력을 가지고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권력에서 내려 오기 전에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세상의 영'이라는 안경을 끼고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 (the spirit from God)'을 받은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이 편지를 쓴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과 '성령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을 같은 말로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잖아요? "어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각도 하나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1)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다시 기도의 문제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 뜻대로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 하나님의 목적이니, 하나님의 의도니,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들이 겪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난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영'을 가지고 나의 문제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답답합니다.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나의 고난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의 생각’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아빠의 자식이고, 엄마의 자식이니까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식이라도 철이 없을 때는 모릅니다. 철이 좀 들어야 엄마의 마음을 알고 아빠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이제 두 주 좀 넘었나요? 어제는 설교 준비를 하다가 머리를 좀 식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오랫만에 '불후의 명곡'을 보았습니다. 모두 여섯 명의 가수가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정동하라는 가수가 '섬집 아기'라는 동요를 불렀습니다. 보통 그런데서 그런 노래를 안 부르거든요? '보이스퍼'라는 아카펠라 중창단이 화음을 넣고 그 노래를 부르는데, 왜 그렇게 엄마 생각이 나지요? 혼자 엉엉 울었습니다. "아기는 곤히 잠을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아, 나의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기르셨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견딜 수 없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그 속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은 우리 믿음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우리의 믿음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올바른 예배생활이 불가능합니다. 형식적이거나 습관적이 아닌 참 예배는 'in spirit and in truth'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찬송도, 기도도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모든 일들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였다.” (고린도전서 2:9) 2,000년 전에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율법학자들이 그랬고, 제사장들이 그랬고, 사두개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소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성령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깨닫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6/18/2017 |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My Father is Always Working, And So Am I.

요한복음 5:11-18


6/11/2017 | 성령강림절 메시지 2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리라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People

사도행전 2:14-18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세례, 혹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오늘은 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성령의 사역과 결부 시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성령은 ‘진리의 영 (the spirit of truth)’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 14:17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진리로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 중에 인생을 올바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 뿐인 내 인생을 올바로 살고 싶고, 보람 있게 살고 싶고, 또 가치 있게 살고 싶고, 아름답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이곳 시간으로 어저께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한국에 계시는 형님으로부터 듣고 나니까 새삼스럽게 어머니께서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목회 열심히 해라. 너는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니까 목회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전번에 한국 가셨을 때 한가지 더 부탁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목사가 되라!”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는 큰 소리쳤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어머니 말씀처럼 목회 열심히 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임종은 지켜 보지 못했습니다만, 임종하기 몇 시간 전에 어머니를 바꿔 주셔서 간신히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숨이 차고 목이 막혀서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어머니, 제가 어머니 말씀처럼 잘 하고 있으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랬더니, “알아. 네 걱정은 안 한다” 그러셨습니다. 그 말씀은 똑똑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또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마음 평안히 가지시고요.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세요.”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전화상으로 똑똑히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기도야 늘 하지!”

저야 어머니 말씀처럼 다른 일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목회하고 싶지요. 그리고 어머니 말씀처럼 의로운 목사가 되고 싶지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그런 목사가 되겠습니까? 제가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겠습니까? 나의 마음대로, 나의 생각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 드린다면, 제가 보기에 정말 아니다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자기 자신은 올바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행하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성령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거든요? 성령께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고, 진리를 따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 속에서 내주(內住)해 계십니다. 우리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가 바른 길을 가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여러분, 로마서 말씀 읽다가 이런 말씀을 보셨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 2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groanings’라는 말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놓고 기도할 때, 우리가 바른 길을 따라 살지 않을 때, 우리가 불의한 일에 개입할 때, 성령께서 ‘with groanings’ 성령의 탄식 소리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보통 ‘groan’이라고 하면 ‘a deep inarticulate sound in response to pain or despair’를 말합니다. 고통이나 실망 때문에 내는 깊은 소리인데, 분명하지는 않은 소리입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은 내 안에서 신음하는 성령의 탄식 소리, 성령의 신음 소리를 듣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성령의 탄식소리가 내 속에서 들리기 때문에, 나의 길이 잘못되었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성령세례를 받도록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잘 몰라서 지금까지 성령세례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성령세례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제가 간절히 사모합니다. 내 안에 들어 오십시오.”

둘째로, 성경에 보면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은 ‘보호하고, 은혜를 주시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원어에는 ‘파라클레이토스 (παράκλητο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보혜사’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Helper’ ‘Counselor’ ‘Advocate’ ‘Comforter’ ‘Encourager’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4: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에 AI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말합니다. ‘인공지능’을 선보인 것이 꽤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에 휴대폰에 모두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아이폰에는 ‘시리 (Siri)’라는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어서 물어 보면 대답을 합니다. 음악을 들려 주고 이게 누가 작곡한 무슨 노래냐고 물으면 말해 줍니다. 운전하다가 차를 세우고 내비게이션을 입력하고 할 수 없을 때는 ‘시리’에게 물으면 바로 내비게이션으로 연결됩니다.

지금은 ‘시리’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구글의 ‘어시스턴트’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타나’ 아마존의 ‘알렉사’ 등이 각각 스마트 스피커를 달아서 출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만 해도 21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스마트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젠 개인 비서가 필요 없을 전망입니다. 웬만큼 유능하지 않으면 개인 비서를 두는 것보다 스마트 스피커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고 경제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알 수 없지만, ‘인공지능’의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실망하고 낙심했을 때 과연 ‘인공지능’이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고 나에게 맞는 카운셀링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입니다. 또 하나 이것은 늘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집에 놓고 오거나 했을 때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 없이 어떻게 일기 예보를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배터리가 없거나 전원이 없을 때는 또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은 ‘인공지능’의 약점들을 모두 보완하고도 남습니다. 나에게 최적화된 카운셀링을 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내주(內住)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만 없어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공지능’과 달리, 보혜사 성령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기능을 발휘합니다. 또 하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스마트 스피커’는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께서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이렇게 우리 크리스천의 삶을 유익하게 합니다.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즐겁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 성령은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을 때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낙심될 때 내 속에서 나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연약할 때 옆에서 나를 도와 줍니다. 나에게 최적화된 카운셀링을 줍니다.

셋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줍니다. ‘freedom (자유)’는 어디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기저기 매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인 것이 많이 있고요. 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도 우리가 매여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함’이 없습니다. 늘 무엇에 쫓기는 것 같은 삶을 삽니다. 늘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삽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매여 있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기분 좋은 말씀을 발견합니다. “바람은 제 맘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요한복음 3:8) 이 말씀은 사람이 성령으로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 그 과정을 모두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갈 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일일이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바람에 비유한 것은 아주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그리스 말로 ‘프뉴마 (πνεύμα)’라고 하는데요. ‘프뉴마’에는 ‘바람’ ‘숨’ ‘호흡’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은,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제멋대로 분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말고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면, 우리의 삶에 ‘자유함’을 줍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3:17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성령세례는 이처럼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세상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매이게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는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 믿음생활에 꿈과 비전을 줍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prophecy (예언)’ ‘vision (환상)’ ‘dream (꿈)’이라는 단어들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이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지 않으면 예언도 하지 못하고, 환상도 보지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예언과 환상과 꿈이 있습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꿈이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꿈이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두 사람이 얼마나 다릅니까? 꿈이 없는 믿음생활은 재미 없습니다. 지루합니다. 늘 똑 같습니다. 흥분될 것도, 기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있고, 꿈이 있고, 환상이 있는 믿음생활은 늘 흥분되고 기대됩니다.

몇 년 전에 ‘노아’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실망했습니다. 실망한 이유는 이 영화가 성경 내용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 개의 팔을 지닌 타락한 천사가 등장하고, 상상 속의 동물들이 등장하고, 폭력이 등장하는 것을 크리스천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영화를 감독한 아로노프스키 (Darren Aronofsk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노아에 대한 성경 말씀을 미드라쉬 (Midrash)의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이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구약을 읽으면서 이런 식의 토론을 해 왔다.” ‘미드라쉬’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성경 이야기를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가 아니라, 여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아로노프스키 자신이 유대인입니다. 그는 노아에 대한 성경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식으로 듣고 성장했습니다. 밋밋하고 건조한, 몇 줄 안 되는 노아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유대인들의 성경해석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이 없고, 환상이 없이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은 ‘노아’를 보고, 성경과 다르다고 분노하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밋밋한 믿음생활, 흥분되는 일도 없고, 기대되는 일도 없는 믿음생활에 꿈을 주고, 환상을 보게 합니다. 습관적인 믿음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줍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지금 하는 대로가 아니라 좀 더 창의적(創意的)인 믿음생활을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시면, 우리의 믿음생활에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 오시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성령이 나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