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2024 | (성령강림후 제 12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5 새사람의 평화 Peace of the New Nature

에베소서 4:25~5:2

오늘은 성령강림절 열두번째 주일입니다. 매주 교회력의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는데요. 이번주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주일입니다. 우리나라는 벌써 광복의 기쁨을 누린지 79년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인 광복절은 光 (빛 광) , (돌아올 복)으로 '빛을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잠시 평화로운 땅이 되었지만 한반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분단된 조국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음 아픈 기도제목 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역사적으로 서로의 땅을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테러와 전쟁을 겪어왔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함을 느낍니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이 언급하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단순히 사회적 갈등에만 국한되지 않고, 개인의 삶에서도 평화로운 마음의 질서가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약의 주요 용어 가운데 샬롬은 평화입니다. 대략 350번 정도 나오는데, 신약에서 평화의 복음은 구약의 샬롬의 약속들을 토대로 평화를 소개합니다. 한가지 예가 로마서 1417절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중심부에 평화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켜서 새창조의 상태 즉 새사람을 입게 될때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린다고 보았습니다. 구약의 이사야가 예언한 평강의 왕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평화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강입니다.

첫째, 새사람에게 주시는 증거가 평화입니다.

찰스 버틀러(Charles F Butler:1804–1892)'내 영혼이 은총'입어' 찬송가는 한사람의 마음의 고백이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찬송가가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은 마음의 평화로 임하게 됩니다.

이 찬양은 버틀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후 그의 삶의 변화를 고백한 것인데 가사를 한번 보실까요?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그는 찬양을 통해 천국과 하늘나라를 고백합니다. 천국하면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고 내세로 생각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의미로 전달이 됩니다. 신약에서도 보면 천국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로 번역을 했습니다. 바울서신도 보면 천국대신 하나님 나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만 천국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을까요?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1차 독자인 유대인들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도 안된다는 율법의 기록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늘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서 하늘 나라 하면 하나님을 가르키는 것이었습니다. 천국과 하늘나라는 같은 뜻입니다. 새사람을 입는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다가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의 통치에 삶을 맡기며 약속 믿고 굳게 서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옛본성을 버리고 주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새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25 ○ 그러므로 새 사람을 입은 여러분은 무엇보다 거짓을 버리고, 각자 이웃에게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26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마십시오.” 아무리 분한 일이 있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다 풀어 버리십시오. 27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을 해왔던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땀 흘려 자기 손으로 힘껏 벌이를 해서, 도리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뭔가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29 남을 헐뜯는 나쁜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기회가 닿는 대로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는 선한 말을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하십시오.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적인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사람이 된 성도들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으니 거짓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웃에게 진실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거짓은 평화의 공동체를 깨트리는 바이러스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부당하게 나의 이득만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하는 삶입니다. 남을 헐뜯고 나쁜 마음을 품는 일도 다른 이의 삶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을 입은 성도는 기회가 닿는 대로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워 선한 말로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분한 일이 있어도 해가 지기전에 풀고,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서로가 한 몸의 지체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도는 매일 새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말을 하고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새옷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평강의 주님이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실 것 이라는 약속을 믿고 그 위에 서는 것이 새옷을 입는 것입니다. 평화의 공동체에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거짓, 분노, 죄를 짓는 것, 분한 일, 도둑질, 남을 헐뜯는 말, 나쁜말이 있을 자리가 없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평화의 증언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둘째, 평화는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향기입니다.

30 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신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십니다. 31 모든 독설과 분노와 성내는 버릇과 말다툼과 비방하는 말을 삼가고, 모든 악의도 함께 던져 버리십시오. 32 오직 서로에게 친절히 대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용서를 베푸십시오.

일평생 교회를 뜨겁게 사랑한 존스토트 목사님은 교회론을 분명히 하라고 말씀합니다. 요즘은 대중적인 교회론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인데 그 이유는 현대 문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1921-2011) 목사님은 '살아있는 교회'라는 그의 책에서 교회의 본질을 네가지로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배우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사도들을 교사로 부르신 것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학교에도 임명한 교사가 있듯이 예수님은 성령학교를 세우시고, 훈련시킨 사도들을 통해 3천명의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고 알아가야 합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주님을 배울때 성령께서 이해되도록 도우십니다.

 

둘째는 돌보는 교회입니다. 돌봄은 주안에서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는 서로의 물건을 통용했습니다. 물론 현대사회에 옆집의 물건을 편하게 빌려 쓰고 빌려주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개인생활이 침해당하거나 무례하게 침범하는 것에 대해 민감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주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따라 재산과 소유를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셋째는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모여서 예배하는 제도적 교회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완성시키 위해 오셨고 주 안에서의 예배를 통해 평화의 공동체는 끊임없이 새로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교회는 살아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예배를 드려 보면 알수 있습니다. 예배에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임합니다. 반면에 건강하지 않는 교회는 모이면 분쟁하고 다투고, 의심하고, 서로의 힘을 모으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계하는데 그 힘을 다 쏟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예배 드리고 나면 우리에게는 삶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흩어진 삶의 자리에서 전도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예배하고 그 예배가 확장되어 전도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세상의 소리에 귀가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지만 세상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받은 사랑으로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을 돌보고, 모이기에 힘쓰며 예배 드린 후에는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성령의 탄식 소리는 말할수 없는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마음에 독설과 분노와 화내는 버릇, 말다툼하고 비방하는 말을 그치게 합니다. 바울은 마음을 정결하도록 하고 모든 악의와 함께 던져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좋은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고 좋지 않는 말은 상한 음식에 비유 할 수 있습니다. 비방하는 말은 사람들의 영혼을 쪼그라들게 하고, 평화를 사라지게 하지만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성도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향기를 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좋은 말을 아낌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모델이 되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인류의 모델이 되어 새로운 옷을 선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옷을 입었으니 그리스도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런웨이를 걷는 모델은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주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삶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 받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의 무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드러내는 삶은 좁은 길일지라도 반드시 그 길 위에서 생명의 향기가 날 것입니다.

셋째, 평화의 주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5: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답게,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는 자들이 되십시오.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살면서 평화에 관한 일을 얼마나 생각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다면, 말씀을 절실하게 사모하기 보다는 세상의 다른 일들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평화를 원하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정작 가정과 직장의 현장에서 평화의 주님을 기대하기 보다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들에 더 집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듣게 되는 원망의 말들에 집중합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이 멈추지 않는 세상이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원망과 정죄하는 말들을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하루 한순간도 갈등과 죄악이 멈추지 않는 세상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 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고 새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예수는 죄의 권세를 이기셨고, 교회는 이 믿음의 고백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덮기에 충분하십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질문하고 그 평화의 길이 되신 주님 앞에 마음의 상처, 죄책감, 배신감, 원망하는 마음으로 인한 마음의 풍랑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한시도 기도할 수 없느냐고 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육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를 따를 힘이 없음을 아시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집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는 길은 성도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평화의 주님을 믿고 더욱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참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평화가 있는 그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울고 있는 자, 지극히 작은 자 가운데 복음을 전하자는 가운데 주님이 계십니다. 누가 주님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작은 자에게 친절을 베풀며, 주의 복음을 함께 전하시겠습니까?

 

세상은 늘 우리를 갈등과 불안으로 살아가게 하지만 믿음의 성도들은 그 안에서도 평화의 도구가 되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믿음의 성도들의 삶에 깊이 자리잡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평안이 영혼까지도 덮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8/4/2024 | 성령강림후 제 11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4 그러므로, 하나됨의 신비를 풀다 Therefore, The Mystery of Unity Was Solved

에베소서 4:1-10

1985년에 발표된 "We Are the World"는 천재지변과 기아로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만든 노래입니다. 2차 대전 이후에 1990년 초까지 전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로 국제 질서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무렵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6.25 전쟁 이후 분단된 조국땅에서는 올림픽 개최식 때 손에 손잡고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이 노래는 이념과 민족의 장벽을 넘어 하나됨을 위한 갈망의 노래였습니다. 이번 프랑스 파리 올림픽에서는 희소병을 겪고 있는 캐나다 퀘벡 출신의 셀린 디옹이 1 7개월 만에 불굴의 의지를 보이며 개막식때에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국제 대회인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서, 인류의 통합과 평화, 그리고 희망을 상징하는 플랫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 간의 지나친 경쟁심은 하나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경기를 보는 국민들도 민족주의적으로는 하나가 되는 시간이지만 세계인들의 하나됨을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올림픽은 고대 세계에서 힘과 용맹을 과시하는 의식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축제는 종종 종교적 행사와 결합되었고, 그리스에서는 그들의 신이던 제우스를 기리기 위해 종교적 축제를 벌이며 더 강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가나안에서는 풍요와 다산의 신과 관련된 종교적 축제를 열었고, 남성의 힘을 과시하는 종교 의식을 갖었습니다. 로마시대에 로마가 추구하던 코스모 폴리탄(cosmopolitan) 즉 세계시민의식과 바울이 추구하던 코스모폴리탄은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는 헬라 문화권인 다소라는 도시에서 성장하며 나는 유대인인가? 아니면 헬라인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외국에서 이방인 유대인으로 생활하면서 외국인로서의 경험을 직접 피부로 겪었습니다. 오늘날의 이민 2세대가 부모의 문화와 새로운 문화 사이에서 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새로운 시각이 열렸습니다. 유대의 종교관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가 군사적 힘으로 '하나의 도시'를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그의 삶을 헌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복음의 연결 다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두 문화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고,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구약 성경의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에게 성경의 전통적인 관점을 배웠고, 이후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그러므로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1장부터 3장까지 기독교 믿음의 교리, 즉 믿음의 이론에 대해서 서술했다면 4장 부터는 믿음의 실천편을 기록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한 하나의 공동체는 다원주의나 종교적, 사회적 통합, 전인류적인 사랑 차원의 하나됨이 아닙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구별됨에서 시작을 합니다. 출발점이 한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예수의 마음에서 확장되어 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까지도 감수하며 기뻐했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예수의 마음으로 연대했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하나됨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에 담긴 하나됨의 신비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1절에서 주를 위해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몸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한다고 말합니다. 순교를 앞둔 바울의 이 권면은 힘이 있었고,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빚진자들입니다. 죄사함의 은혜가 깊어질수록 누군가를 환대하고, 용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누구나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뜻대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아들의 결말이 어땠습니까? 모든 재산을 잃고, 그 삶이 궁핍해 졌습니다. 결국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를 먹는 지경에 이르러 비로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은 내면의 결핍감이 있습니다.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나를 증명하는 일,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 게다가 소비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족함을 주입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유대교적 성전의 의미를 뛰어 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종교적 형식 안에 갇혀 있다가 성령 안에서 내면의 충만함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변화가 됩니다. 그 새생명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일치와 하나됨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며, 하나됨을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되게 하신 것을 믿고 지켜 나가게 됩니다.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믿음을 통해서 하나됨을 경험하고 연습하며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므로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4:2 ,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시고, 많이 참으십시오.
4:3
평강의 띠를 매고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바울의 권면들은 그리스도의 집을 튼튼하게 세우는데 필요한 재료들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새 사람이 된 성도는 겸손과 온유함의 모델이신 그리스도께 길들여 져야합니다. 멍에를 매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께 배워 나가야 합니다. 배우라는 것은 훈련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의 기질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고유한 것이기에 상대방을 변화시킬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용납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변화가 됩니다.

모세는 불평하는 백성들을 인내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을 돌이키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했던 모세는 이땅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3) 성도는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겨질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내 것을 위해서 상대방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용납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희생시키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한 뿌리가 됨을 증거하십니다. 우리의 내면에서는 인간의 욕구와 하나님의 성품이 충돌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되게 하시는 평강의 띠가 되십니다.

계속되는 권면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4절로 6절입니다.  4 여러분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여러분 모두는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5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천지 만물의 아버지이십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해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몸은 참 신비롭습니다. 우리의 눈이 하루에 몇 번이나 깜빡일까요? 인간의 뇌의 저장용량은 얼마나 될까요? 몸속의 세포는 몇 개나 되며, 피를 생성하는 심장은 하루에 몇 번이나 뛸까요? 물론 기본적인 지식은 검색하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몸의 신비로움입니다. 우리의 몸은 유기체적으로 여러 기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생각하며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는지를 말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가 한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이를 위해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한소망 안에서 부르십니다. 성령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천지 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도 한분이십니다.

우리교회는 지역 특성상 신앙생활을 하다가 공부를 마치고 나면 보스턴을 떠나게 되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보여지는 지역 교회 안에서 한몸이 되려고만 한다면 시간이 흐르고 떠나는 교우들을 볼 때마다 허전한 마음이 들고 지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교우들이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례가 하나라는 것은 한번 세례를 받음으로 일생동안 교회의 일원으로, 세상속에서 한 사람의 교회로 살아가게 됩니다. 날마다 자아가 죽어지고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믿음이 다르고, 예배하는 방법이 달라도 한 분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또한 몸은 시간이 흐르면 녹슬게 됩니다. 어느 한 기능이 약해지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모든 부서의 지체들이 함께 이루어 나갈 때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고, 한몸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연약한 지체들을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그러므로' 교회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4:7 그러나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께서 나눠주신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4:8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기를 "그가 높은 보좌로 올라가실 때 포로들을 사로잡고,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4:9 이처럼 그가 "올라가셨다."라고 하셨으니, 이 말은 곧 그가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4:10 또한 이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던 그 자신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니, 그것은 그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Dietrich Bonhoeffer, 1906~1945)'성도의 공동생활'의 책에서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몸과 몸을 부대끼며 함께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은 죽음이 임박하여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찾아와 달라고 부탁까지 했습니다. 다시 보길 원했으며 디모데를 보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사귐을 갖는 것이 육신적이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도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축복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각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눠 주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은사를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서로의 다름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손과 발의 역할이 다르고, 눈과 귀의 역할이 다르듯이, 교회 안에서도 각자가 맡은 역할과 은사가 다를 뿐입니다.

교회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나치게 한 사람이 많은 짐을 지고 섬기다 보면 지치게 되고, 섬기는 사람들은 번아웃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며 맡겨진 분량에 따라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3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하며 사역 중 갈등이나 위기를 극복하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샐러드는 다양한 재료들이 각각의 맛을 내지만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요리가 됩니다. 서로 달라도 조화를 이루며 영혼을 살리는 일에 힘을 모을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부족하고 연약한 지체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은 서로의 다름이 기쁨이 될 것이며, 상대방의 부족함은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신비를 경험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7/28/2024 | (성령강림후 제 10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3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기도 Finding Light in the Darkness through Prayer

에베소서 3:14-21

팀켈러 목사 (Timothy J. Keller, 1950~2023)20019.11사태로 인해 뉴욕 도시 전체가 어둠의 그림자로 몇주간 뉴욕을 짓눌렀다고 고백합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크론병 증세로 씨름하고 있었으며, 그해 본인도 갑상선 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외적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어둔 그림자가 드리운 것입니다. 기도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던 때에 기도를 깊이 묵상하며 세상에 나온 책이 우리가 잘 아는 "팀켈러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3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이라고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일로 죄수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투옥된 지 4년 남짓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몸은 감옥에 있었지만 옥중에서 성경의 많은 서신서들을 남겼습니다. 외적인 환경이 바울의 마음 안에 있는 복음을 향한 열정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둠속에서 빛을 찾는 시간을 통해 바울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우리는 바울의 옥중서신들을 읽으며 하나님의 깊고 넓은 영적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 절실한 기도를 합니다. 당시 서서 기도하던 풍습속에서 무릎 꿇고 하는 기도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마치 예술가들이 처해진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처럼 바울의 기도에서 창조의 힘으로 그를 깨우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보게 됩니다 옥중에서 드리는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의 기도였습니다. 바울의 기도를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느껴집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사명감과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드리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어진 현실로 인해 감사의 마음을 잃어가고, 마음이 불안하고 즐겁지 않다면, 어둠속에서도 빛 가운데로 초대하는 바울의 기도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기도가 언제 시작될까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인식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며 그의 마음을 닮아가는 시간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대부분은 중요한 사람과의 만남을 앞두고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점검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첫째, 바울은 기도하는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15)

3:15 정녕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주신 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주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의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다른 집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는 않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은 아빠와 같이 친밀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아버지로 인식하고 친밀감을 지니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이가 다가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를 향한 갈망과 주어진 현실 사이에서 주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방향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정말 주님이 함께 해 주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실수가 없는 분이 맞는 것일까? 의심하고 낙심하기 충분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바울은 어둠속에서도 빛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어둔 골방의 감옥에 있었지만 바울의 마음만큼은 하늘과 땅과 모든 족속들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향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바다의 세계가 펼쳐지듯이 기도는 우리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알게 해줍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잠잠히 구하면 구원의 기쁨을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62:1)  오히려 고난속에서도 우리를 깊은 기도속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깊은 기도속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해 질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기도하는 내용이 분명했습니다. (16-19)

16 그분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굳세게 해 주시고,

바울은 성령 안에서 속사람을 굳세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기도의 힘이 바로 성령에 힘입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몸은 갇혀 있지만 그의 영혼이 억눌리지 않았던 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겉모습은 웃고 있으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속사람은 참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사연들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힘들어 하면서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잘 가고 있다고 믿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들을 통해 용기를 지니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지만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사람은 억압받고 고통 받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데 불행함을 느끼고, 경제적 억압에서 벗아나기 위해 열심히 살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무지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배우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학문의 깊이 가운데 스스로의 존재가 주눅 들게 됩니다.

영성가인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고,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힘은 바울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역사하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으니라"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치유할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3:17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여러분이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공동번역의 성경으로 보면,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번역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마음의 집 주인으로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의 집에 들어와 사실 수 있도록 믿는자의 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사는 것이 어떤 삶일까요?

마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고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계시면 여러분이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게 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마음 안에 두고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이 사랑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미워하는 방식에 더 익숙합니다. 시대정신이 경쟁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마음에는 미움이 자리하게 됩니다. 사회에서는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불편하면 만나지 않으면 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귐을 갖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3:18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크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3:19 나아가 모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우쳐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의 정도까지 여러분이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 사랑과 신뢰는 돈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가치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교육도 돈을 주고 배우고 사랑도 돈의 가치로 평가되는 시대입니다. 사제 관계도 돈을 주고 배운 선생이고, 돈을 받고 가르치는 제자가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관계 보다 세상의 가치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대부분의 시간들을 그 안에서 보내게 됩니다.

우리의 죄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워가야 합니다. 모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깊이와 넓이, 높이와 길이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랑의 빚진자임을 기억할때에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셋째,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으로 마칩니다.

3:20 진실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3:21 교회 안에서와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빕니다. 아멘!

바울은 이전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안에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막힌 담이 허물어 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모든 성도들이 연합되고 관계 맺을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교회 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넓은 사랑, 끝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측량할수 없는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냉냉한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 같을지라도 옥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바울의 얼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일상 가운데 발견될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이전세대로 부터 지금의 세대들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광의 중심에 교회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영광이 나타나는 영역들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간구합니다.

1995년에 개봉한 영화 스모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폴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벌어진 깡패들의 총격전으로 임신 중이던 아내를 잃게 됩니다. 그는 깊은 슬픔에 빠져 불행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작가였던 폴은 펜을 내려놓으며 슬픔에 잠깁니다. 그러던 중 담배를 사러 동네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14년 동안 그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은 매일 아침 8시에 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어 스크랩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계산대 위에 있는 카메라를 보고 대화 하다가, 폴은 가게 주인이 찍은 4000장이 넘는 앨범들을 보게 됩니다. 가게 주인은 매일 아침에 찍었던 사진들을 폴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폴은 매일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의 비슷한 장면들을 보면서 황당해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담배 가게 주인은 다른 앨범들도 볼 수 있게 가져다 주며 이것이 내 인생의 프로젝트라고 말합니다. 사진 속에는 여름날의 밝은 빛, 가을날의 은은한 빛, 환했던 아침과 어두웠던 아침의 사진들, 주말과 주중에 찍은 사진들, 분주하게 지나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진속에 지나가는 계절이 담겨있었고 서로 다른 표정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담겨있었습니다. 같은 앵글 속에 담긴 사진들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앨범을 보던 폴은 갑자기 동작을 멈췄습니다. 그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온 것입니다. 바로 임신 중이던 자신의 아내였습니다. 매일 출근을 하는 아내의 일상의 모습이 사진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폴은 그리워하던 아내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며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내입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참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눈물과 함께 내면의 슬픔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영화의 장면을 보면서 매일 반복되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때로는 지루하고 사소한 것이라 여겨질때가 있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의 의미가 초라해 보일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 특별한 것을 구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함께하시며, 우리의 처해진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속에 우리는 관객이 아닙니다. 세상이 무대라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각본 가운데 인생의 한장 한장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언제나 우릴 향해 있음을 믿고, 흔들리는 마음까지도 주님께 드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기도로 나만의 공간을 채워나갈때 주님과 더 깊이 연결될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기도로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한주간도 교우들의 일상과 모든 만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넘치길 축복합니다.


7/21/2024 | (성령강림후 제 9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2 쉼이 필요한 당신에게 For Those Who Need Rest

마가복음 6:30~34

'Retreat'이라는 단어는후퇴하다’, ‘물러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Retreat 피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침묵기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몇년전 목회자 영성 수련회를 위한 리트릿에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회장에 도착해서 보니 모든 일정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며 기도하는 수련회였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식사하며, 서로가 대화도 하지 않고 침묵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날에는 답답함도 있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가 되자 분위기를 위해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사라지고 말을 해야한다는 책임감도 내려놓으니 오히려 리트릿 기간 동안 내면의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수많은 말들과 생각들을 듣고 살아가다가 반드시 침묵해야만 하는 시간속에 있으니 평소에 말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던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말을 줄이며 마음의 쉼을 갖게 되니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어색하고 답답했지만,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우는 나의 이야기가 차오를 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침묵이 더욱 어렵습니다. 인정과 내 생각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사람을 만나 말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할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 와서는 두가지를 보고합니다. (6:30) 한가지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했던 일들이고, 또 한가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권세를 주셨으니 얼마나 많은 믿음의 경험들을 하고 돌아왔을까요?

첫째,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신 것이 어떤 뜻일까요? (31)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행간에 담긴 주님의 생각을 묵상하며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역 후에 느끼는 내면의 감정들을 아셨을것입니다. 가르치고 치유하느라 육신이 피곤하고 지쳐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도록 하자"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리더십 분야에서 40년이 넘는 경력을 지닌 게리 매킨토시(Gary L. McIntosh, 1947-present) 교수가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킨토시는 영적 리더들이 실패 앞에 무너지는 이유를 성공에 대한 강박적 집념, 인정 받으려는 욕구, 열등감 다양한 형태로 설명합니다. 그는 그림자가 탁월한 성과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지만,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요인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흔한 예로 유명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추락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마음의 균열을 감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그림자의 악영향에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는 내면의 그림자를 인정해야 하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다스림 받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 선지자와의 영적 승리를 경험했지만, 이세벨의 말에 의해 두려움에 휩싸여 광야로 도망쳤고, 광야에서도 하루를 더 걸어서 로뎀나무 아래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40 밤낮으로 먹이시며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한바람과 지진, 불 같은 힘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종교적 열심으로 가득했던 엘리야에게 세미한 소리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명의 사람들을 남겨 두셨음을 알려 주십니다. 엘리야의 모습은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숨겨져 있지만 내면의 강한 자아들이 어떻게 깨어지고 그 틈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엘리야를 영적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 기준과 판단을 내려놓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잠시 동안 침묵의 자리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초대 교부들은 침묵을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침묵하는 시간은 분주한 일상 속에서 영적인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침묵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내면의 많은 소음이 들려옵니다. 내면의 결핍감, 분노, 잊고 있던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깊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지니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 영적인 침체 속에서도 그분을 믿고 갈망해야 합니다.

태초의 시간은 깊은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영혼의 고통과 괴로움을 통과하며 깨어짐을 통해 만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영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을 아껴야 합니다. 대부분의 분열과 갈등은 말로 인해 일어납니다.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 말보다는 부정적인 소리, 실패의 속삭임, 완벽주의로 인한 강박적인 요구들, 지나친 책임감으로 인한 부담감, 관계의 경계선이 무너져 생기는 오해의 말들이 세상에 넘쳐 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자라는 표현은 그만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된 쉼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사건과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날이 저물어 갈때, 빈들에서 양식 다 떨어졌을때 모인 무리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십니다. 인생의 밤이 오고 마음이 허전할때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가의 표현을 보며 다윗의 고백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가복음 638절과 시편 23장의 구절이 오버랩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6: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푸른 잔디는 목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다윗은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심을 노래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양떼 가운데 어린 아이가 드린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는 교회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눔 가운데 나타난 은혜의 사건입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속에서 쉼없이 달려가는 우리에게 참된 쉼은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데리고 온 사람들, 예수의 소문을 확인하려고 온 사람, 기적을 바라고 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34 배에서 내린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셔서, 여러 가지로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언제나 치유와 가르침에 있었습니다.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 위를 걸으신 일들, 게네사렛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병자들의 회복 사건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장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자는 회복을 얻으니라라고 마칩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만족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됩니다. 우리가 구원이라고 여기며 움켜진 손을 펴면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움켜쥔 손에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과 내가 경험했던 것, 나의 것들이 가득합니다. 믿음생활을 해도 나의 방법으로 주님을 움켜 쥐려고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내 경험과 방식으로 주님을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을 펴야합니다. 실패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아서 힘을 주어 잡고 있었던 것들이 내려 놓아질 때 우리 앞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깨어진 인생의 조각들을 맞추시고 예수로 사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게 해 주십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그분의 품에서 참된 평안을 쉼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주님 안에는 긍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목자가 없어서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 다녔지만 여전히 강한 자아를 지닌채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께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앞에 계시지만 여전히 허전함과 공허함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목자가 없는 양이라 여기며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노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은 고난 가운데 로마 감옥에서 인내하고 있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디모데 후서 310절입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첫째는, 믿지 않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였으며, 두번째 이유는 주어질 영원한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제주도는 한세기 전만해도 왜적의 침입이 끊이질 않는 섬이었고 정치범들의 마지막 유배지였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시로 변모했지만 제주의 역사에는 선교사들의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때 예수를 믿고 회심하고 난 후 긍휼한 마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딘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기풍 선교사 (1865- 1942) 입니다. 그는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나 대부흥 운동때 회개하며 영혼을 향한 마음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는 당시 제주는 천대 받던 지역이고, 어둠의 땅이며 우상들이 가득한 땅이었던 제주로 들어가 7년 동안 그 땅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그곳에 최초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기풍 선교사는 주님을 만나고 정치적 유배지에 온 사람들이나 자신이 별반 다를게 없는 불쌍한 존재임을 깨달았을때, 긍휼한 마음을 지녔을 것입니다. 어둠속을 헤매던 자신에게 긍휼함을 베풀어 주신 주님이 살아 계시니까 유배지들이 살던 땅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곡이 완성되려면 음과 음 사이에 쉼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고난은 아름다운 삶의 노래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주기의 반복적 과정들 보다 영적으로 주어진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성도들도 죄로 부터 해방시킨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뿌리를 두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8장으로 가면 예수께서 맹인 한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냐고 묻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는것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또 한번 그의 눈에 안수하시니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어도 자신의 실존을 걸어 다니는 나무 정도로 밖에 볼 수 없어서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말씀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 들이고 다시 눈을 떠야 합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실존을 정확히 바라볼때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참된 본질을 본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수 없고, 새로운 삶은 하나님께서 긍휼의 마음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8:25 예수께서 다시 한 번 그 맹인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마땅이 보여야 할 만큼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최종적 쉼의 때를 향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회복과 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아픔과 외로움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면 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치유와 가르침의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배움을 통해 너희가 마음의 쉼을 얻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깊이 알고 배우고 계십니까?

복음이 깊어 질수록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고 변화되고 있으신가요? 우리의 신실한 기도와 신실한 행위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이정표를 바라보시며 주어진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길 축복합니다. 삶에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뜻이 우리의 삶속에 임하는, 그 거룩한 힘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21/2024 | (성령강림후 제 9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2 쉼이 필요한 당신에게 For Those Who Need Rest

마가복음 6:30~34

'Retreat'이라는 단어는후퇴하다’, ‘물러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Retreat 피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침묵기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몇년전 목회자 영성 수련회를 위한 리트릿에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회장에 도착해서 보니 모든 일정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며 기도하는 수련회였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식사하며, 서로가 대화도 하지 않고 침묵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날에는 답답함도 있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가 되자 분위기를 위해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사라지고 말을 해야한다는 책임감도 내려놓으니 오히려 리트릿 기간 동안 내면의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수많은 말들과 생각들을 듣고 살아가다가 반드시 침묵해야만 하는 시간속에 있으니 평소에 말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던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말을 줄이며 마음의 쉼을 갖게 되니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어색하고 답답했지만,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우는 나의 이야기가 차오를 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침묵이 더욱 어렵습니다. 인정과 내 생각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사람을 만나 말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할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 와서는 두가지를 보고합니다. (6:30) 한가지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했던 일들이고, 또 한가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권세를 주셨으니 얼마나 많은 믿음의 경험들을 하고 돌아왔을까요?

첫째,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신 것이 어떤 뜻일까요? (31)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행간에 담긴 주님의 생각을 묵상하며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역 후에 느끼는 내면의 감정들을 아셨을것입니다. 가르치고 치유하느라 육신이 피곤하고 지쳐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도록 하자"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리더십 분야에서 40년이 넘는 경력을 지닌 게리 매킨토시(Gary L. McIntosh, 1947-present) 교수가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킨토시는 영적 리더들이 실패 앞에 무너지는 이유를 성공에 대한 강박적 집념, 인정 받으려는 욕구, 열등감 다양한 형태로 설명합니다. 그는 그림자가 탁월한 성과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지만,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요인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흔한 예로 유명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추락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마음의 균열을 감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그림자의 악영향에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는 내면의 그림자를 인정해야 하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다스림 받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 선지자와의 영적 승리를 경험했지만, 이세벨의 말에 의해 두려움에 휩싸여 광야로 도망쳤고, 광야에서도 하루를 더 걸어서 로뎀나무 아래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40 밤낮으로 먹이시며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한바람과 지진, 불 같은 힘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종교적 열심으로 가득했던 엘리야에게 세미한 소리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명의 사람들을 남겨 두셨음을 알려 주십니다. 엘리야의 모습은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숨겨져 있지만 내면의 강한 자아들이 어떻게 깨어지고 그 틈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엘리야를 영적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 기준과 판단을 내려놓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잠시 동안 침묵의 자리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초대 교부들은 침묵을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침묵하는 시간은 분주한 일상 속에서 영적인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침묵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내면의 많은 소음이 들려옵니다. 내면의 결핍감, 분노, 잊고 있던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깊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지니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 영적인 침체 속에서도 그분을 믿고 갈망해야 합니다.

태초의 시간은 깊은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영혼의 고통과 괴로움을 통과하며 깨어짐을 통해 만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영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을 아껴야 합니다. 대부분의 분열과 갈등은 말로 인해 일어납니다.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 말보다는 부정적인 소리, 실패의 속삭임, 완벽주의로 인한 강박적인 요구들, 지나친 책임감으로 인한 부담감, 관계의 경계선이 무너져 생기는 오해의 말들이 세상에 넘쳐 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자라는 표현은 그만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된 쉼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사건과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날이 저물어 갈때, 빈들에서 양식 다 떨어졌을때 모인 무리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십니다. 인생의 밤이 오고 마음이 허전할때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가의 표현을 보며 다윗의 고백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가복음 638절과 시편 23장의 구절이 오버랩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6: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푸른 잔디는 목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다윗은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심을 노래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양떼 가운데 어린 아이가 드린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는 교회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눔 가운데 나타난 은혜의 사건입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속에서 쉼없이 달려가는 우리에게 참된 쉼은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데리고 온 사람들, 예수의 소문을 확인하려고 온 사람, 기적을 바라고 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34 배에서 내린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셔서, 여러 가지로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언제나 치유와 가르침에 있었습니다.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 위를 걸으신 일들, 게네사렛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병자들의 회복 사건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장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자는 회복을 얻으니라라고 마칩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만족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됩니다. 우리가 구원이라고 여기며 움켜진 손을 펴면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움켜쥔 손에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과 내가 경험했던 것, 나의 것들이 가득합니다. 믿음생활을 해도 나의 방법으로 주님을 움켜 쥐려고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내 경험과 방식으로 주님을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을 펴야합니다. 실패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아서 힘을 주어 잡고 있었던 것들이 내려 놓아질 때 우리 앞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깨어진 인생의 조각들을 맞추시고 예수로 사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게 해 주십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그분의 품에서 참된 평안을 쉼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주님 안에는 긍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목자가 없어서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 다녔지만 여전히 강한 자아를 지닌채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께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앞에 계시지만 여전히 허전함과 공허함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목자가 없는 양이라 여기며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노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은 고난 가운데 로마 감옥에서 인내하고 있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디모데 후서 310절입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첫째는, 믿지 않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였으며, 두번째 이유는 주어질 영원한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제주도는 과거에 왜적의 침입이 끊이질 않는 섬이었고 정치범들의 마지막 유배지였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시로 변모했지만 제주의 역사에는 선교사들의 헌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때 예수를 믿고 회심하고 난 후 긍휼한 마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딘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기풍 선교사 (1865- 1942) 입니다. 그는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나 대부흥 운동때 회개하며 영혼을 향한 마음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는 당시 우상들이 가득한 어둠의 땅, 제주도로 들어가 7년 동안 그 땅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최초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기풍 선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경험합니다. 어둠속을 헤매던 자신에게 긍휼함을 베풀어 주신 주님이 살아 계시니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선할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이기에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성경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 구원의 신비로 부터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하나의 곡이 완성되려면 음과 음 사이에 쉼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고난은 아름다운 삶의 노래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주기의 반복적 과정들 보다 영적으로 주어진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성도들도 죄로 부터 해방시킨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뿌리를 두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8장으로 가면 예수께서 맹인 한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냐고 묻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는것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또 한번 그의 눈에 안수하시니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어도 자신의 실존을 걸어 다니는 나무 정도로 밖에 볼 수 없어서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말씀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 들이고 다시 눈을 떠야 합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실존을 정확히 바라볼때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참된 본질을 본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수 없고, 새로운 삶은 하나님께서 긍휼의 마음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8:25 예수께서 다시 한 번 그 맹인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마땅이 보여야 할 만큼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최종적 쉼의 때를 향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회복과 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아픔과 외로움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면 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치유와 가르침의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배움을 통해 너희가 마음의 쉼을 얻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깊이 알고 배우고 계십니까?

복음이 깊어 질수록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고 변화되고 있으신가요? 우리의 신실한 기도와 신실한 행위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이정표를 바라보시며 주어진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길 축복합니다. 삶에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뜻이 우리의 삶속에 임하는, 그 거룩한 힘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