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2020 | In Times Of Trouble 14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고린도후서 12:7-10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눈에 띄는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꼭 짚고 가야 할 말씀이 있는데, ‘내가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to keep me from becoming conceited) (7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의 내용은 오늘 본문 말씀 앞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셋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갔는데,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나의 ‘종교적인 체험’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니던 때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현신애 권사’가 화제였습니다. 마침 그분이 병을 고치는 장소가 서대문에 있어서 저희 집과 가까웠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평생 다리가 불편하셨는데, 어느 날 ‘현신애 권사’에게 가서 다리에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안수받고 어떠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글쎄, 좀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하시면서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다른 사람들도 다리에 안수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짧은 한쪽 다리가 길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무튼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때여서 그런지 ‘현신애 권사’의 신유집회는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의 이름이 차츰 사람들에게 잊혀졌습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한다는 말들이 들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죽었다가 천국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본 천국에 대해서 간증 집회들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을 보았다고 합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보았던 셋째 하늘이 ‘낙원 (paradise, 고린도후서 12:4)’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체험을 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체험 이야기를 하는지 그가 처했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이란 사람 말만 뻔지르하지 내 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그가 체험했던 일을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십 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사람 (I know a man in Christ who was caught up to the third heaven fourteen years ago)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린도후서 12:2) 이것이 고린도후서 12장이 써진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때부터 바울의 몸에 심한 고통을 느끼는 증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내 몸 속에 있는 사탄의 가시 (a thorn in my flesh, a messenger of Satan, 7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Three times I pleaded with the Lord to take it away from me.” (8절) ‘three times’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세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는 관용적인 표현 (idiomatic expression)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참고 견디며 꾸준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백의의 천사’로 알고 있는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1820-1910, 영국)’은 1837년 17살 때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간호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 가족들의 온갖 반대를 이겨냅니다. 그녀가 정식으로 간호사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은 것은 1851년 그녀의 나이 31살 때였습니다. 무려 14년 동안 나이팅게일은 간호가가 되기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이팅게일’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도해서 얻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네가 지금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 때도 너는 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응답을 들은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과 아픔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구나! 나는 그것을 모르고 이 고통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구나! 내가 받는 이 고통 속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자신이 고난 속에 있을 때, 아픔과 고통 속에 있을 때,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에게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주어집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크리스천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마터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 바울을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잠언을 쓴 솔로몬도, 또 야고보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잠언 3:34, 야고보서 4:6) 또 잠언 6:16-19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한 눈 (haughty eyes)’입니다. 남을 무시하고, 남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고, 내려다보는 ‘교만한 눈’을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빌립보서 2: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개역성경) “무슨 일을 할 때, 이기적이거나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해 주십시오.” (쉬운성경) 이 말씀이 대부분의 영어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 nothing out of selfish ambition or vain conceit, but in humility consider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 (NIV) 무슨 일이든지 이기적인 욕망이나 헛된 자만심에서 나온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계획하는 일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것이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추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들을 추진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의 경고를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뒤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중국의 갑부 중에 ‘마윈 (Jack Ma, 1964)’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갑부 순위 1위이고요. 세계 갑부 순위는 18위라고 합니다. ‘알리바바 (Alibaba Group)’라는 회사를 차려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 회사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담 제가 본 기사에서는 ‘지금은 물러날 때’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주 패기만만한 사람이고, 그의 말에 거침이 없습니다. 우연히 ‘마윈의 명언’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보았습니다. 제목은 “가난한 사람과 일하지 마라”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용기도 없고 패기도 없고, 부정적이고, 그들은 기다리다가 인생이 끝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강연 밑에 여러 개의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역시 마윈!”이라는 댓글도 있었고, “아니 자기도 예전에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이런 댓글도 있었고, “마윈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런 댓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어보니까 마윈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칫 용기가 부족하고, 무슨 일을 시작할 때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보는 관점에서 “가난한 사람과 일하지 마라”는 그의 말은 명언이 아닙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성경의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는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知彼知己百戰不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적을 깔보니까 적을 모릅니다. 또 교만한 사람은 자기 분수를 모르니까 자기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백 번 싸우면 백 번 다 집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 not think of yourself more highly than you ought, but rather think of yourself with sober judgment, in accordance with the measure of faith God has given you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 준 믿음의 척도를 가지고 자신을 진지하게 혹은 냉철하게 평가하라.” (로마서 12:3)

오늘 성경 말씀을 잘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종 바울이 교만한 사람이 될까 염려해서 바울에게 교만한 생각이 들 때마다 가시가 그의 몸을 찌르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겸손하게 남을 배려할 때는 아무 고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생각이 들 때는 예외 없이 가시가 몸을 찌르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말씀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계십니다. 감동입니다. 어찌 바울 한 사람에게만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I am glad to boast about my weaknesses, so that the power of Christ can work through me)”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약할 때나 모욕을 받을 때나, 궁핍하게 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할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10절)

청년들이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의 찬양이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나의 보배가 되신 주/주 나의 모든 것/주 안에 있는 보물을/나는 포기할 수 없네/주 나의 모든 것(You are my strength when I am weak/You are the treasure that I seek/You are my all in all/I'm seeking You like a precious jewel/Lord, to give up I'd be a fool/You are my all in all) 이 찬양 가사처럼 정말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힘이 되시는 분 맞습니까? 그런데, 이 찬양을 부르면서도 모두들 강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이지 성경이 보여주는 논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아침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세상 논리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논리, 성경의 논리를 따를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의 논리를 따르겠다는 결단에서부터 나와야 합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모세가 팔십 세가 되어 힘이 빠지고 약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잘 가고 있던 출애굽 행렬의 방향을 바꾸어 홍해 바다를 마주 보고 캠프를 치게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대와 홍해 바다 사이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군사의 수가 너무 많다고 모두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시고, 삼 백 명만 가지고 사나운 아말렉 군대와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 힘이 강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선교 사역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약하고, 힘 없고, 내 놓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모두 내가 약할 때가 가장 강한 때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FKCC 교우 여러분들, 지금 무슨 일 때문에 걱정하고 있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절망하고 있습니까? 모든 일이 나의 계획대로 잘 되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내가 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오히려 내가 약할 때, 나의 계획대로 일이 풀려지지 않을 때,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내가 약할 때, 그 때가 내가 강한 때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논리입니다. 내가 약한 사람인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God’s grace is sufficient for me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7/5/2020 | In Times Of Trouble 1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I Will Give You Rest

마태복음 11:25-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모두에게 아주 친숙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구약성경 이사야 55:1-2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포도주와 우유를 마시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이 400년이 지나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사야 두루마리 속에 있는 말씀을 떠올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those who are weary and carry heavy burdens’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쉼 (rest)’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신다면 예수님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요? 2,000년 전과 지금은 세상이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엄청나게 확장되었고, 인간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편리해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본질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쉼이 필요한 사람들은 다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길을 잃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하게 여기셨다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confu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마태복음 9:36, 마가복음 6:34) ‘confused’ ‘helples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자가 없는 양들이 어떻게 길을 알겠습니까? 목자가 없는 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인류 역사 속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나에게 오라고, 내가 안식을 준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도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무슨 근거로 나에게 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I have been given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마태복음 28:18) 또 요한복음 12:49에는 “I don't speak on my own authority. The Father who sent me has commanded me what to say and how to say it (나는 나의 권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말씀해 주신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초대에 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초대를 거절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큰 잔치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Great Banquet)’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받은 사람들이 일제히 핑계를 대면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내가 밭을 샀는데, 급히 가 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소를 열 마리 샀는데, 소를 잘 샀는지 테스트를 해봐야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집을 비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이것들을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보여주셨으니 감사합니다." (25절) 모든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자신이 똑똑하고 잘 났다고 자신한 사람들은 모두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같은 사람들은 초대에 응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 (the childlike)’이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성경에는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나타내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 (27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초대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 (쉼)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평생 교회생활은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지난 주에 ‘마음으로 믿는다 (believe in your heart, 로마서 10:9)’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머리로는 예수님을 믿지만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commit (의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까?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 (29-30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내게 와서 배우고, 내가 지워주는 짐을 지고, 내가 주는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humble and gentle at heart)’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마음은 이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humble and gentle’이 말과 반대되는 말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아마 ‘harsh’라는 말일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은 종이 나옵니다. 이 종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Master, I knew you were a harsh man, harvesting crops you didn't plant and gathering crops you didn't cultivate.” (마태복음 25:24) 이 말 속에 나오는 ‘harsh’라는 말은 ‘혹독한’ ‘가혹한’ 이런 뜻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가 지워주는 짐을 지고,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을 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힘들어 멜 수 없는, 우리가 지쳐서 질 수 없는, 그리고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마음이 ‘harsh’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많이 읽은 주석책이 ‘윌리엄 버클리 주석 (The Commentary of New Testament by William Barclay)’이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윌리엄 버클리라는 분의 해박한 인문학적인 지식에 놀라게 됩니다. 그분이 쓴 마태복음 주석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해오는 전설이라고 하는데요.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멍에’를 제일 잘 만드는 기술자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처럼 가게에 간판을 달았다고 하는데요. 예수님의 목공소 간판에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My yokes fit well (내가 만든 멍에는 잘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목공소에는 항상 손님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멍에 (yokes)’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멍에’ 사진 한번 볼까요? 소 한 마리가 혼자 메는 ‘멍에’도 있고, 소 두 마리가 같이 메는 ‘멍에’도 있습니다. 이 ‘멍에’가 소에게 잘 맞지 않으면 소의 목덜미가 벗겨져 상처가 나고 소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소를 목공소에 데려가서 먼저 치수를 재고 제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멍에’가 다 만들어지면 또 소를 데리고 가서 소의 몸에 잘 맞는지 메워본다고 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멍에’를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예수님께서 지워 주시는 짐도 우리에게 알맞은 짐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는 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 속에 엄청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맡기신 책임과 사명이 힘들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의 생명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책임을 지워 주시고, 사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관점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의 삶이 완전히 다른 색깔의 삶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게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William Barclay의 말입니다. “Whatever God sends to us is made to fit our needs and our abilities exactly; God has a task for every one of us, which is made to measure for us. Jesus said ‘my burden is light.’ It is not that the burden is easy to carry; but it is laid on us to love; it is mean to be carried to love; and love makes even the heaviest burden light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위해서 우리를 보내시든지 그 일은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능력에 정확하게 맞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일이 있다. 그 일은 우리에게 잘 맞도록 잰 (measure)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지워 주시는 짐이 지기 쉽다는 말이 아니라 그 짐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지워졌기 때문에 사랑으로 그 짐을 지라는 말이다. 사랑은 무거운 짐을 가볍게 만든다).” 

어떤 여행사가 런던에서 에든버러 (Edinburgh)까지 약 400마일 되는 거리를 가장 빨리, 지루하지 않게 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상품을 준다는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비행기로 가는 것이 제일 빠르다, 기차로 가야한다, 아니다. 길이 막히니 버스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 등의 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사에서 1등으로 뽑은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먼 길을 가장 빨리 가는 길,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Sarah F. Adams (1805-1848)는 빼어난 미모에 연기력까지 겸비한 당시 영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여배우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그만 폐결핵에 걸려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날로 수척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마음의 위로를 받으려고 성경을 읽다가 여행에 지친 야곱이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그 자리에 돌 단을 쌓고 감사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는 창세기 28장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녀는 그동안 헛된 꿈을 붙들고 살아왔던 자신의 지난 삶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병으로 인해 육신의 아름다움과 세상을 향한 꿈은 사라졌지만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그녀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은 것입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야곱이 기도했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Nearer, My God, to Thee)’입니다. 

이제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나에게 오라고요. 내가 너에게 쉼을 주겠다고요.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우리의 꿈이 사라지고, 우리의 영혼이 지치고 피폐해졌을 때,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revive), 우리에게 새로운 꿈과 용기를 심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여러분의 눈을 돌리십시오. 그분을 진심으로 믿으십시오. 그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안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6/28/2020 | In Times Of Trouble 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시편 23편

오늘은 시편 23편을 함께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이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다윗이 이 시편을 언제 썼을까?” 하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한 때는 “그가 어렸을 때, 초원에서 양을 치면서 이 시편을 썼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다윗이 이 시편을 쓴 것은 그의 삶이 가장 어렵고 힘든 때였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일이 잘 되고, 아무 걱정이 없을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 않나요? 어렵고, 힘들고,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더 큰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크리스천의 삶에 ‘고난’이라는 주제는 ‘필요악(必要惡)’과 같습니다. 누가 ‘고난’를 좋아합니까? 누가 ‘고난’을 환영합니까? 모두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천의 삶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가 고백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고난이 나에겐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71절) 다시 야고보서 5: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받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만약 ‘suffering’이 없었더라면, 만약 나에게 ‘affliction’이 없고, ‘hardship’이 없고, ‘trouble’이 없었더라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시간이 있었을까요? 내가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실어 나르듯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지도 보았다 (You have seen what I did to the Egyptians. You know how I carried you on eagles' wings and brought you to myself).” (출애굽기 19:4)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목자와 양’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sacrifices his life for the sheep).” (요한복음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는데요. 다윗이 고백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말씀을 보실까요? 1절에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빌립보서 4:11-13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만족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 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압니다. 배가 부르거나 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게 힘을 주시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에 간섭하시면서 항상 나에게 최선의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고난도, 가난도 모두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바울이 발견한 ‘the secret of living in every situation (빌립보서 4:12)’입니다. 

둘째로, 목자이신 하나님은 그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위험한 길’을 통과해 봐야 합니다. 그 ‘위험한 길’을 통과해 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안전하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지만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우리 말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나와 있고, NLT 성경에는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라고 시제 (tense)가 ‘미래형’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나니까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삶을 이렇게 인도하시겠구나!” 하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the dark valley of death)’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메타포 (metaphor)’입니다. 그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언제 생명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순간들이 있었나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유일한 사람 다윗의 삶에 이런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참 크다고 생각합니다.

캘리포니아 동부 북쪽에 네바다 주 접경 지역에 ‘Death Valley (죽음의 골짜기)’라는 곳이 있습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 중 하나로 섭씨 56.7도까지 기록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화씨로 134도입니다.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사진을 찍다가 전화기가 녹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합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생물과 식물들이 자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이 이런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 아니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 죽음의 골짜기에 있지만,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이런 믿음 아니겠습니까? 이 때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엄마와 아들이 기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5살 정도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는 지루했는지 자기 자리에 계속 앉아 있지 못하고 기차 안을 여기 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저쪽에 물먹는 곳이 있는 것을 안 이 꼬마는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물을 마십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금방 또 가서 컵에 물을 따라옵니다. 옆 좌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이 꼬마에게 말을 건넵니다. “얘야, 옷이 참 멋있구나. 해군 아저씨들이 입는 옷하고 똑같네!” 이 꼬마가 신이 나서 말합니다. “맞아요! 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거예요.” “정말? 직접 만들어 주신 거야? 네 엄마는 정말 좋으신 분이구나!” “우리 엄마가 이 단추도 달아 주셨어요!” “그 멋있는 줄무늬도?” “예, 그 것도 우리 엄마가요!” 꼬마는 신이 나서 자기 엄마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차가 터널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방이 깜깜해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이 아이는 자기 엄마 다리를 꼭 붙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엄마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죠? 무섭지 않죠?”

다윗이 쓴 시편 23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1-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He’라고 3인칭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4절 말씀에서 ‘음침한 죽음의 골짜기’를 말할 때는 하나님을 ‘He’라고 3인칭으로 말하지 않고 ‘You’라고 2인칭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잘 나와있지 않습니다. 보세요.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 valley of death,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Your rod and your staff protect and comfort me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나는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 옆에 계시고 당신의 지팡이가 나를 지키고 위로할 것이 때문입니다).” 마치 엄마와 함께 기차 여행을 하던 꼬마가 자기 엄마 자랑을 한창 늘어 놓더니 막상 깜깜한 터널을 지나갈 때는 엄마 달려와서 엄마 무릎을 꼭 잡았듯이, 다윗이 어렵고 힘들었을 때 그를 지켜 준 것은 하나님을 붙들었던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다윗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 앞에서 그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니, 그의 잔이 넘쳤다고 합니다 (5절). 사방에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적들이 우글거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먹이시고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목자가 양들을 돌보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Why do shepherds put oil on sheep (왜 목자는 양들에게 기름을 바르는가)?” 이런 제목의 매우 흥미 있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 보면, 목자는 3가지 경우에 양들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첫째는, 숫양 (rams)들이 암양들 (ewes)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울 때입니다. 이 때를 대비해서 목자는 숫양의 뿔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그러면 치명적인 부상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양의 코에 기름을 발라 준다고 합니다. 양의 코에 알을 낳으려는 파리들이 꾄다고 합니다. 이걸 그냥 방치하면 양이 병이 들거나 치명적인 병에 옮기도 하고 아픔으로 앙들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목자는 양들의 코에 올리브 오일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셋째는, 목자는 양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기름을 바르면 ‘scab disease’라는 전염병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병은 양의 머리에 기생충이 서식하는 병인데, 양들이 서로 머리를 비비거나 할 때 다른 양들에게 전염된다고 합니다.

다윗은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신다고 했습니다. 목자가 양들의 사정을 잘 알고 세심하게 양들을 돌보는 것처럼, 다윗은 자기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와 축복을 “나의 잔이 넘친다”는 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And this same God who takes care of me will supply all your needs from his glorious riches.” (빌립보서 4:19)

우리가 이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는구나!” 하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로마서 5:8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말씀을 머리로 읽으면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슴으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 이 말씀에 ‘마음으로 믿으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If you believe in your heart’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만 믿지 말고 가슴으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5:8 말씀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머리로 읽으면 큰 감동이 없지만, 가슴으로 읽으면 큰 울림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로마서 5:8 말씀을 가슴으로 읽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I loved you at your darkest (나는 네가 어둠 속에 있을 때 너를 사랑했다)!” 

구약 말라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너희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너희를 좋아하겠느냐?” (1:8) 하나님을 총독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함이 있는 제물들을 바칩니다. 바치는 시늉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내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6/21/2020 | In Times Of Trouble 11

나의 마음이 주의 말씀을 향하게 하소서 Give Me An Eagerness For Your Laws

시편 119:24-37

얼마 전에 재미있는 보고서를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이 보고서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1938년에 시작한 ‘The 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 (성인 발달에 대한 하버드 연구)’에 대한 보고서였습니다. 이 연구는 1938년에 724명을 대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지금은 그들의 후손들 2000명을 대상으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본 보고서의 제목은 “What makes a good life (무엇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가)?”였습니다. 

보고서의 내용이 궁금하시지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명해지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거나,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면서 살아갑니다. 하버드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아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724명의 사람들도 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던 그 당시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습니다. 그 중 미국 대통령이 한 명 나왔고, 현재 60명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자기들이 바라던 것들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자기가 good life를 살았다, 자기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자기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Good relationships keep them happier and healthier (좋은 관계가 그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었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 ‘social connection (사회적인 연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외로움 (loneliness)’은 사람을 죽이는 병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도 외로움을 경험하고, 심지어 결혼을 해서도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보고서에 의하면 ‘관계의 질 (quality)’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Good relationships don't just protect our bodies, they protect our brains (좋은 관계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두뇌도 보호한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공통점은 그들에게 의지할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가 있었고, 이들은 모두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 내용을 보면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모두 ‘인간 중심적인 (human centered)’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할 또 하나의 관계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버드의 보고서 내용 대로 건강한 ‘인간 관계’가 중요하지만, 이 못지않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평안을 가지고 우리는 삶의 모든 문제들을 이겨 나갑니다. 이 문제에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아닙니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정복자 이상입니다).” (로마서 8:37)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라는 말은 그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시편 119편 말씀을 한번 보시지요. 제가 이 말씀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말씀 속에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형편이 잘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속에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잘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가 처한 상황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습니다 (I lie in the dust).” (25절) 개역성경에는 이 말씀이 “내 영혼이 진토(塵土)에 붙었사오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혹은 ‘진토에 붙어 있다’는 말은 “완전히 낙심하여 죽게 되었다”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 있었다 (욥기 2:8)”는 말씀이 있는데, 재 가운데 있다는 말은 욥의 슬픔을 말하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때로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요나 3:6).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낙심하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지금 사미스트가 처한 상황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절망 상태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이렇게 길어질지 누가 알았습니까? 그리고 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지 누가 알았습니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겸손한 태도를 갖습니다. 내 삶을 내 마음대로 경영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사미스트가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 보십시오. 저는 이 사미스트의 말 속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세 단계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것처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해야 합니다. 하버드 보고서에서 내린 결론처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산 사람들은 모두 인간관계에 공을 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도 공을 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Come close to God, and God will come close to you).” (야고보서 4:8) 성경 말씀 하나 더 볼까요? 예레미야 29:13 말씀입니다. “If you look for me wholeheartedly, you will find me (네가 전심으로 나를 찾는다면 나를 찾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첫 번 단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Wash your hands, you sinners; purify your hearts, for your loyalty is divided between God and the world (죄로부터 손을 씻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너희의 충성심을 나누지 마라).” (야고보서 4:8)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두 번째 단계는 지금의 삶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손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죄된 생활과 단절하라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사미스트가 고백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나의 행위를 고백했더니 주는 내게 대답하셨습니다 (I recounted my ways and you answered me).” (26절) Good News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confessed all I have done, and you answered me (내가 지금껏 해 왔던 모든 일들을 고백했더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주께서 응답하셨다는 말은 비로소 주님과 소통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원하지만 그 일에 진전이 없는 것은 이 두 번째 단계를 간과하거나 소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이 지금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없이 다짜고짜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When times are good, be happy; but when times are bad, consider this: God has made the one as well as the other.” (전도서 7:14)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야고보서 5:13) 내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고난의 시간들을 보낼 때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반성이 아니라 지금의 내 삶이 올바른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반성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이 무슨 일들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께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복음 6:29) 이 질문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What God wants you to do is to believe in the one he sent., Good News Translation)." 

이 말씀에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그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과 예수님의 삶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 지 알게 되고, 그 일을 하게 됩니다. 마치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You are truly my disciples if you remain faithful to my teaching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요한복음 8:31-32) 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교훈을 잘 따르고 실천하는 일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사미스트는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나로 주의 교훈들과 가르침들을 이해하게 (to understand) 해 주소서.” (27절) “나의 마음을 주의 말씀 (법도들)에 맞추어 놓았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법규들을 단단히 붙들고 있습니다 (I have determined to live by your regulations. I cling to your laws).” (30-31절) “나에게 깨달음 (understanding)을 주소서.” (34절) “나의 마음이 주의 말씀들 (법규들)로 향하게 하시고, 이기적인 이익들로 향하지 않게 해 주소서. 내가 무가치한 것들에게서 눈을 떼게 해 주시고, 주의 말씀으로 나를 보호해 주소서 (Give me an eagerness for your laws rather than a love for money! Turn my eyes from worthless things, and give me life through your word①. / ①Some manuscripts read in your ways).” (36-37절) 그가 ‘깨달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기 위하여 무슨 공을 들이고 있습니까? 무슨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어렵고 힘든 때를 그냥 걱정과 불안으로 보내거나, 허송 세월로 무기력하게 보내거나, 그냥 의기소침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내 마음이 ‘이기적인 일들’을 추구하고 있지 않았는지, 내 마음이 무가치한 일들을 좇고 있지 않았는지,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쫓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껏 이렇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오는 평안과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도, 예수님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이제 우리도 같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6/14/2020 | In Times Of Trouble 10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I Give My Peace To You

요한복음 14:23-28

지금은 불안한 시대입니다. 1977년에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갤브레이스 (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가 ‘The Age of Uncertainty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BBC 방송의 제안으로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송된 것을 후에 책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갤브레이스는 아담 스미스, 리카도, 맬서스, 스펜서, 베브렌, 마르크스, 레닌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년 간의 ‘경제 사상사’를 소개하면서 앞으로의 세계 경제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이 책에서 지금은 과거처럼 확신에 찬 경제학자도, 자본가도, 사회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가 사용했던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은 이 시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로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갤브레이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미래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지금 세 가지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미국은COVID 19에 대한 안일한 대처로 사망자가 현재 무려 118,00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세계 사망자의 거의 1/3이 미국인인 셈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뒤늦은 대처로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고 있고, 연일 코로나바이러스에 무슨 약이 좋다는 둥 이상한 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 내의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입니다. 

둘째로, 지금 미국은 전에 없는 경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신규 실업자가 4,000만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미국 전체 노동력의 1/4에 이르는 숫자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1930년대의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 때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거기다 미국과 중국 간의 COVID 19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와 무역 패권 경쟁으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셋째로, 미국은 인종 간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가 백인 경찰에 의하여 8분 46초 동안 목이 눌려 있다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국 전국에서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흑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경찰의 총격으로 죽은 사건이 많이 있었지만, 이번에 일어난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SNS를 통하여 생생하게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이 공개되면서 들불처럼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이 항의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55년 앨라배마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 (Rosa Parks)라는 흑인 여자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건과 흡사합니다. 그 때는 그런 일들이 늘 있는 일이었지만, 로사 파크스 사건은 그냥 묻히지 않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하여 마틴 루터 킹이라는 흑인 민권운동가가 나오게 되고, 이 사건은 흑인 민권 운동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난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가 전세계로 확산되어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라는 시위의 도화선이 되고 있습니다. 플로이드의 장례식 소식을 전한 AP 통신은 프로이드의 죽음이 온 세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면서 ‘빅 플로이드 (Big Floyd)’라는 말로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 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이 둘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이 둘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찾아오셨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찾아오셔서, 평화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에베소서 2:16-17) 

차별이 없는 세상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 비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차별의 장벽을 몸으로 없앴던 것처럼, 우리도 차별을 없애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우리 속에 많은 차별 의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 못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 의식, 못 배운 사람에 대한 차별 의식,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있습니다. 이번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지켜본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차별 의식부터 없애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항의 시위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피켓에 “Black Lives Matter”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되어야 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은 마땅히 철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율법보다 위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시각입니다.

정치적인 발언이 될까 봐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플로이드 사건을 보면서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머리 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미국에서 사망자가 만명을 넘고 있을 때, 트럼프는 자화자찬을 늘어 놓았습니다. “전문가들은 모두 10만명 이상 죽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우리가 대처를 잘 하는 바람에 사망자가 5만명 밑으로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플로이드 사건 때도 트럼프는 연방군을 투입해서 사태를 진압하겠다고 시위자들을 협박했습니다. 그 선언을 하고 나서 손에 성경책을 들고 백악관 근처에 있는 한 성공회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바이블 벨트 (The Bible Belt)’에 있는 지지층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인명을 경시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트럼프는 실제로 군대를 동원해서 시위를 진압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선거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정은이라는 한국의 소설가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 요즈음에 ‘임계장’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임시 계약자 노인장’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또 ‘고다자’라는 말도 있는데,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큰사람인지도 알고 그 안에 얼마나 거대한 세계가 있는지도 잘 안다. 아마 다른 노인들도 그럴 것이다. 아마 다른 젊은이들도 그럴 것이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전율할 때가 있다. 오랫동안 들여다봐야 잘 알 수 있는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그 사람들 안에 있는 것이다. 도구로 쉽게 쓰이고 버려질 수 없는, 모든 사람이 각각 한 명의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큰 꿈인가.” 

미국이 이렇게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정책을 표방하면서 그동안 미국이 참여했던 일에서 속속 손을 빼고 있고, 스스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습니다. 독일이 미국 편을 안 들어준다고 금방 독일 안에 있는 미군을 대거 철수시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미국에 사는 것이 무섭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I am leaving you with a gift-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27절) 

걱정과 근심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 살아!” 이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걱정하지 않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평안을 줄 테니까 그 평안으로 걱정과 두려움을 충분히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자’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 9:6)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 ①Or Wonderful, Counselor ‘Prince of Peace’라는 말은 평화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Prince of Peace’로 태어나셨습니다. ‘Prince of Peace’가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Prince of Peace’이신 예수님은 평화에 대하여 제일 잘 아시는,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분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의 평안 (my peace)’을 제자들에게 주신하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그 ‘평안’은 어떤 ‘평안’인가?” “도대체 그 ‘평안’은 어디서 온 ‘평안’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비로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이해할 수 있고, 그 ‘평안’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그냥 물건을 주고받는 것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온 ‘평안’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I pray that they will all be one, just as you and I are one-as you are in me, Father, and I am in you.” (요한복음 17: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You move us to delight in praising You; for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and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You.”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이 없었다는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평안 (안식)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고, 교회 분위기가 좋으면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됨의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됨 (oneness)’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한 ‘하나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중단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이 ‘하나됨 (oneness)’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my peace (나의 평안)’는 아들이 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들과 ‘하나됨’에서 오는 ‘평안’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My soul is crushed with grief to the point of death. Stay here and keep watch with me).” (마태복음 26:38) 말씀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의 평안’을 말씀하신 예수님께 걱정도, 불안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런 ‘평안’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걱정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평안’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속에 걱정과 불안이 생길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심으로 하나님과 소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마음에 걱정과 불안이 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고, 거기에서 오는 ‘평안’으로 모든 불안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perception을 주고, insight를 주고, understanding을 주고, discernment를 줍니다. 지혜가 있으신 분들은 “아,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을 소유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이미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신 ‘나의 평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불안할 때마다, 걱정이 있을 때마다 조용히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나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이 우리의 마음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평안’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요한복음 16:33), 우리도 이 ‘평안’을 가지고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