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020 | In Times Of Trouble 9

앞서 가시는 하나님 The Lord goes Ahead Of You

신명기 31:1-8

오늘 말씀의 배경을 잠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의 나이가 120살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생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이 여기까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조상들의 땅 가나안 땅의 입구에까지 와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일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여호수아에게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세가 부탁한 말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afraid or discouraged, for the Lord will personally go ahead of you. He will be with you; he will neither fail you nor abandon you.” (7-8절) 그냥 단순히 용기를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보다 앞서 가실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3절에도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시고, 그곳의 나라들을 물리칠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시혼과 옥에게 하신 일들을 이 나라들에게도 하실 것이오.” (4절) 시혼과 옥은 아모리 족속들의 왕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싸우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또 다시 너희보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고, 너희를 위해 싸워 주실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John Newton (1725-1807, 영국)이 가사를 쓴 ‘어메이징 그레이스 (찬송가 305장)’ 모두 좋아하시지요? 저는 그 찬송 가사 중에 3절 가사가 제일 좋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Through many dangers, toils and snares I have already come: 'tis grace has brought me safe thus far, and grace will lead me home).”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천국에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찬양 가사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지금 모세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생활의 온갖 어려움과 고난 중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은혜로 지키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그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게 할 것이고, 적들을 물리칠 것이고, 조상들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 제목이 ‘앞서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설교 제목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정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는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서 ‘앞서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왜 우리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화면에 나오는 대로 따라가면 되니까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비게이션에 비할 바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앞서 가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세요? “네가 깊은 물속으로 지나갈 때 내가 너를 데리고 함께 건너가겠다. 네가 고난의 강을 건널 때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고난의 불을 통과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삼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며 너희를 구원할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When you go through deep waters, I will be with you. When you go through rivers of difficulty, you will not drown. When you walk through the fire of oppression, you will not be burned up; the flames will not consume you. For I am the Lord, your God, the Holy One of Israel, your Savior).” (이사야 43:2)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위험하고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아무 것도 나를 위해서 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교육하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통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광야생활 내내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가면서 길을 인도했습니다. 밤에는 구름 기둥이 불 기둥처럼 보였습니다 (민수기 9:16).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으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3:21).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는데, 무려 40년을 구름 기둥을 따라 길을 가는 훈련을 받았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성경에서 재미있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민수기 9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구름 기둥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가 있고, 성막 위에 머무는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성막 위에서 걷혀 올라가는 때는 길을 갔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때에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구름이 성막 위에서 이틀을 머물기도 하고, 한 달을 머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년을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9:22).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규정을 지키면서 길을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 규정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 규정을 잘 따를 수 있을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 규정을 잘 지켰는데, 우리는 이 규정을 지킬 수 없을까요? 그 이유는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 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디가 어딘지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방향도 알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대안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야 하는데, 대안들이 많은 것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신뢰하는 것들을 모두 내려 놓고,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하나님 외에 내가 신뢰하는 것들을 내려 놓을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9:23)”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가 신뢰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아바 (Abba)’라고 부르셨습니다 (마가복음 14:36). 예수님에게 배웠겠지요? 바울도 그의 편지에서 ‘아바’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 (father)’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아바’라는 말이 사용된 세 차례의 경우를 살펴보면 모두 이 ‘아바’라는 말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친밀한 말로 (as an intimate term to characterize their personal relation-ships with God)’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아바’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게 친밀한 (intimate) 분입니까? 며칠 전 한국에서 나온 뉴스를 보니까 앞으로 ‘외국인 등록증 (Alien Registration Card)’에 ‘에일리언 (alien)’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에일리언 (alien)’이란 말이 E. T.같은 ‘외계인’을 뜻하는 말이잖아요? 미국에서도 지금은 ‘영주권자’를 ‘Permanent Resident’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Resident Alien’이라고 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씌어진 카드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었던 말인데, 지금은 이런 말이 외국인들을 차별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혹시라도 우리 중에 하나님을 ‘에일리언 (alien)’처럼 낯선 분으로, 외계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로 알까 봐 경계하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이런 걱정은 이방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줄을 아신다.” (마태복음 6:30-32)

문제는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버지처럼 친밀하게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먼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사전 이해 (preunderstanding)를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편견 (prejudice)’이 있으면 하나님의 인격적으로 경험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꼭 붙들고 있으면 진정 나의 제자이다. 그 때에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이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47)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다고 할 때 우리는 쉽게 ‘belong to’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번역성경들이 ‘whoever is of God’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지 아닌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성경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씀이 디모데후서 3:16 말씀이었습니다.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이라는 구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말씀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혹은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out”이라고 번역한 성경들이 많이 있습니다 (NIV, ESV, Berean Study Bible, International Standard Version, New Heart English Bible, Young's Literal Translation).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을 때 성경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그 속에 좋은 말씀이 많이 들어 있는 고전(古典, classics)이 아닙니다. 고전을 읽고 사람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의 삶이 변화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렵고 힘든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읽으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내 삶에 대한 insight를 주고, perception을 줍니다. 왜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해 줍니다. 마치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광야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보다 앞서 가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5/31/2020 | In Times Of Trouble 8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II) The Joy Of The Lord Is My Strength!

느헤미야 8:1-10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는 운동을 벌였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에스라는 탁월한 율법학자이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가 임명한 총독입니다. 에스라는 학문과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느헤미야는 열정이 넘치고 추진력이 있는 행정가 (정치가)였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두 사람 모두 바빌로니아 포로 시기에 바빌로니아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 때, 2차 귀환자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에스라 7:8).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 3차 귀환 때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 2:1). 단순하게 귀국 연대만 본다면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약 13살 정도 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에스라, 느헤미야 두 사람을 보면서 바울과 바나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동역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초대교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나바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의 회심 (conversion)을 의심하고 있을 때, 사울의 회심의 진정성을 인정했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하고 있던 사울을 불러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리아 안디옥 (Antioch of Syria)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에서 일년을 같이 사역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가 파견한 선교사로서 1차 선교여행을 같이 합니다.

‘동시대(同時代)’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시대’라는 말입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을 영어로 ‘contemporaries’라고 합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했던 류성룡과 이순신이 동시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당파싸움으로 기진해 있던 조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고, 일본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축복을 받고, 이 시대가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산다는 일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에 에스라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사마리아의 관리들은 끊임없이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처음에 이들은 절대로 성벽 재건 공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성벽을 쌓아봐야 그까짓 성벽은 여우 한 마리만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 공사가 반이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이들은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 당신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당신이 성벽 공사를 마치고 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페르시아의 왕이 이 소문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만나서 얘기합시다. 몇 시까지 ‘오노 평야 (the plain of Ono)’에 있는 한 집에서 만납시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것이 그들의 술책인 것을 알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들은 느헤미야를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한번은 예언자들을 매수해서 “오늘 저녁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으니 오늘 저녁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도 당신과 함께 있겠습니다 (느헤미야 6:10).”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자기를 함정에 빠뜨릴 음모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 말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스마야의 말을 들으면서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아니라 뇌물을 받고 나에게 이런 예언을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I perceived that God had not spoken to him, but that he had uttered this prophecy against me because To-biah and Sanballat had hired him).” (느헤미야 6:12, NASB, NKJV)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어떤 성경에는 “I realized that.......”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지만, 많은 성경들이 “I perceived that.....”이라고 했습니다. ‘perceive’의 명사형이 ‘perception’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을 하자면 ‘지각(知覺)’이라고 할까요? 사전에 ‘perception’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act or faculty of perceiving, or apprehending by means of the senses or of the mind (생각이나 감각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나 행위)’ ‘immediate or intuitive recognition or appreciation; insight; intuition; discernment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인식 능력)’ 제가 이렇게 이 구절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느헤미야가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솔로몬이 쓴 잠언 말씀에 ‘discernment’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네가 은이나 숨은 보물을 찾는 것처럼 지혜를 찾는다면, 네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If you seek her as silver, and search for her as for hidden treasures; Then you will discern the fear of the LORD, and discover the knowledge of God).” (잠언 2:4-5, NASB) ‘perception’ ‘discernment’ ‘intuition’ 이것은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insight (통찰력)’를 얻도록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17-18).

이제 오늘 저의 설교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고, 이제 나라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공동의 비전을 가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음료수를 드십시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입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곧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Go and celebrate with a feast of rich foods and sweet drinks, and share gifts of food with people who have nothing prepared. This is a sacred day before our Lord. Don’t be dejected and sad,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느헤미야 8:10)

이 말씀을 직역하면, “주님의 기쁨이 여러분의 힘입니다” 이런 말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곧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of’라는 전치사가 주로 소유를 나타내는 전치사이지만, 때로는 원인, 이유, 기원 (origin)을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하여 오는 기쁨이 곧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는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Delight in Jehovah is a strong refuge for you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너희에게 강력한 피난처가 됩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입니까? 바로 지금과 같은 때, 답답하고, 우울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우리를 억누를 때, 경제적인 문제를 염려해야 할 때, 직장을 염려해야 하고, 비즈니스를 염려해야 할 때, 모든 활동이 중지되었을 때, 오늘 읽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잘 몰라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된다는 말씀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 (the joy of the Lord)’이라는 말은 매우 광범위한 말이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 앞에 모인 때가 바로 ‘속죄의 날 (The Day of Atonement)’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일곱째 달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자기 마을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물 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1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곱째 달 10일을 ‘Yom Kippur (욤 키퍼)’라는 이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 백성들은 자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줬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회개의 울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atonement’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at onement in harmony’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다른 어떤 일보다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할 것이다.” (누가복음 15:7) 이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어느 글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메모해 놓았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 32편에 대한 말씀입니다. “From David’s experience, we know that he is not talking about sinless perfection. Rather, he means the righteousness that God confers on the repentant believer and the uprightness of the one who confesses and forsakes his sins (다윗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죄 없는 완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올바름에 대한 것이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The children of Israel were never known for their perfect behavior. They were known for being the peo-ple of God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한 번도 완전한 행동으로 알려진 적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사람들로 알려졌다).” 이런 하나님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나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음료수를 드십시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 느헤미야는 계속 금식하고 슬퍼하지 말고 집에 가서 이 날을 축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 혼자만 축하하지 말고 축하하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그냥 아무 뜻없이 성경에 쓰여진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느헤미야가 이 말을 한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代辨)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믿음생활은 항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라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한 개인을 말하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한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말씀이 없습니다. 항상 공동체의 구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This will continue until we all come to such unity in our faith and knowledge of God's Son that we will be mature in the Lord, measuring up to the full and complete standard of Christ).” (에베소서 4:13)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5/24/2020 | In Times Of Trouble 7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 (I) The Joy Of The Lord Is My Strength!

느헤미야 8:1-10

오늘 말씀을 처음 읽으신 분들은 이 말씀의 배경이 무척 궁금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두 사람, 에스라(Ezra)와 느헤미야(Nehemiah)는 바벨론 포로시대에 태어난 2세들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 집안의 학자 (scribe)였습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 I)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셨으므로, 그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왕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 7:6)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은 영성이 좀 떨어지기 쉽습니다. 책만 읽고 페이퍼 쓰고, 강의하다 보면 영성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학문과 영성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같이 학문에 정진하는 청년들이 많은 곳에서는 에스라를 더욱 관심 있게 봐야 합니다. 담임목사로서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 교회가 에스라와 같은 학문과 영성을 겸비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에 얽인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에스라가 왕 아닥사스다의 호의로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왕이 귀국하도록 허락한 이유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잘 지켜지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에스라, 당신을 그 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에스라 7:14)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일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말 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귀환하는 길에 온갖 보물과 또 필요한 물자를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다가 도둑떼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왕에게 군대를 요청할까 하다가 군대를 요청하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에 그가 왕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순조롭게 도와주십니다.” (에스라 8:22) 에스라는 군대를 요청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기 위해서 같이 귀국하는 사람들에게 금식을 시키고 여행하는 동안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귀환자들과 함께 네 달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에스라 8:23).” “길을 가는 동안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와 도적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에스라 8:31)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실에서 왕이 마시는 술을 관리하는 사람(the king's cup-bearer)이었습니다. 그 자리는 왕이 신임하는 사람만 올라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포로 2세 유대 사람으로 그 자리에까지 올라 간 것을 보면 느헤미야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느 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그 성문들이 불타 버렸다는 (느헤미야 1:3) 조국의 소식을 듣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기를 조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하지만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소? 그대가 여행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느헤미야 2:6) 우리는 이 말 속에서 왕이 느헤미야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왕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다시 허락을 받아 조국으로 돌아왔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느헤미아 13:6).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요셉도 그렇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왕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성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탁월함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필요한 때에 불러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여러분은 모든 말과 행동을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17)”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이 하는 일 속에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느헤미야 8장 말씀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같이 등장합니다. 그 때의 상황은 성전은 1차 귀환자들로 말미암아 재건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침체되고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에스라가 귀국하여 백성들의 영적부흥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부흥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성벽 재건을 하려고 했지만 이 일 역시 반대에 부딪쳐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가 귀국하여 마침내 성벽 쌓는 일을 마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느헤미야는 그가 페르시야 왕실에서 누리고 있던 모든 지위와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느헤미야가 네 달이나 하나님께 기도하며 (느헤미야 2:1) 응답을 기다렸을까요?

고대 사회에서 성벽을 튼튼히 하는 것은 곧 나라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가능한 높고 두껍게 쌓아서 적들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 때 쌓은 바빌로니아의 성은 높이가 22.86m, 두께가 9.7m로 성벽 위로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그런 목적으로 쌓은 것인데, 높이가 평균 7.3m, 폭은 5.8m라고 합니다. 에스라도 나라를 지킬 목적으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고 했고,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응답을 얻기 위하여 무려 네 달을 기도합니다 (느헤미야 2:1). 그리고, 마침내 귀국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돈을 많이 가진 귀족들에게 성전 재건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정부 관리들은 적극적으로 성전 재건을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 사람들이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해에도 느헤미야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성벽을 쌓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손에 힘을 주십시오 (Lord, strengthen my hands).” (느헤미야 6:9)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엄청난 공사가 52일만에 완성이 됩니다 (느헤미야 6:15). 성벽 공사를 반대하던 사람들마저 이 사실을 믿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느헤미야 2-7장에 성벽 재건의 긴박했던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려고 할 때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어려움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사명은 쉽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고,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고 하신 예수님의 사명은 온갖 반대에 부딪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가 있었고, 제자들 안에서도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어려움을 이겨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이 사명을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어려움과 고난이 없을 때 “왜 이 과정에 어려움이 없지? 이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맞는가?” 하고 의심해 봐야 합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수문 (The Water Gate)’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이 모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 등장합니다. ‘수문’ 앞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장 속에서 성벽을 쌓느라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습니다. 두 지도자는 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치유해야 할 필요성을 공감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이제 조국을 새롭게 건설해야 할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성벽재건 공사가 끝났습니다. 이제 조국을 새롭게 재건해야 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 일은 성전재건보다 더 어렵고, 성벽을 쌓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두 지도자는 이제 이 일에 착수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몇 년 전에 ‘징비록 (懲毖錄)’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도 재미있게 그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이 조선의 선조 때에 일어납니다. 그 때 영의정으로 있었던 사람이 류성룡(柳成龍)이라는 사람인데, 뛰어난 경세가(經世家)였다고 합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예감하고 미리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여 수군을 지휘하게 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임진왜란 후에 벼슬을 잃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임진왜란의 전모를 기록한 책이 ‘징비록’입니다. ‘징비’라는 말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라는 뜻입니다. 삼 년 선배인 류성룡과 이순신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류성룡은 일찍이 이순신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순신이 전사한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징비록’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류성룡과 이순신이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이순신이 실의에 빠진 류성룡에게 ‘재조산하(再造山河)’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라를 다시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류성룡이 영의정에서 파직되던 바로 그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합니다. 이순신과 류성룡이 그랬던 것처럼,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많은 계획들이 있지만, 그 계획들이 모두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계획들이 성취된다 (잠언 19:21)”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의 삶은 길이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한정된 삶을 어떻게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기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합니다. 한 사람은 인생의 정도(正道)가 무엇인지 알고 살고, 한 사람은 바른 길을 찾지 못해 먼 길을 돌아돌아 갑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수문’ 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에스라에게 “우리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단상에 올라가서 모세의 율법책을 읽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낮 12시까지 읽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면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이 계획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까? 에스라가 그렇게 백성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서 애썼지만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까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는지, 비로소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5/17/2020 | In Times Of Trouble 6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Take Off Your Sandals!

여호수아 5:13-15

성경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셉, 모세,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은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 (Joshua)는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젊었을 때는 모세 옆에서 모세를 도왔던 ‘조력자 (assistant)’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랜 기간 모세의 후광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탐했던 12명의 스파이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대표로 정탐에 참가했었습니다. 가나안 정탐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유다 지파 대표로 정탐에 참가했던 갈렙 (Caleb)을 눈여겨 보셨습니다. “내 종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른 마음을 가졌다. 그들은 나를 온전히 따르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이미 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겠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But my servant Caleb and Joshua have a different attitude than the others have. They have remained loyal to me, so I will bring them into the land they explored. Their descendants will possess their full share of that land).” (민수기 14:24)

그때부터 여호수아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보통 말씀이 아닙니다. 이전까지는 아주 평범했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도 모른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갖게 됩니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보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에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Montgomery, Alabama)에 있는 평범한 작은 교회의 담임 목사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평생 작은 교회의 목회자로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몽고메리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자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 (Rosa Louise McCauley Parks, 1913-2005)라는 한 흑인 여자가 버스를 탔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때는 이런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가라앉지 않고 무려 382일 동안이나 흑인들 사이에서 ‘버스 타기 거부 운동 (Montgomery Bus Boycott, 1955)’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우연히 마틴 루터 킹 Jr. 목사가 개입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가 흑인 인권운동가가 된 계기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정탐 사건이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람이 여러가지 일을 계획해도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You can make many plans, but the Lord’s purpose will prevail) (잠언 19:21)”는 성경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은 쉽게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 성경 말씀에서 여호수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말씀이 출애굽기 17장에 나옵니다.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이라는 사나운 부족들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 전쟁을 여호수아에게 맡깁니다. 모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 (Hur)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전쟁에서 이기는 이상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모세가 지쳐서 팔을 들지 못하게 되자 아론와 훌은 큰 돌을 가져다 그 위에 모세를 앉히고 두 사람이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모세도 몰랐고, 여호수아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여호수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 이후를 준비할 시간도 없이 모세가 죽습니다. 그 누구도 모세의 자리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모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 이후를 치밀하게 대비하고 계셨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 세계와 분명히 같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학교라는 시스템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회사 시스템도 많은 부분 재택 근무형식으로 바뀔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사회 전반이 다 바뀌는데, 교회만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교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회’라는 곳에서 5월 31일을 ‘예배 회복의 날’로 정한답니다. 이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표성이 있는 단체도 아닌데, 마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지금 다시 집단 감염자가 나오고 있는 비상 시국에 왜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지하고, 성급하고, 판단력이 부족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교회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를 어떻게 계획하고 계시는지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목사도 학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첫 번 과제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훈련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대단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굳게 닫힌 견고한 여리고 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호수아는 자기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군이요? 적군이요?” 이 사람은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이오 (Neither one! I am the commander of the LORD's army)!” (14절)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 편도 아니라니요?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이라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감히 하나님은 나의 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여러 번 지적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너희는‘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썩 물러나라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 (마태복음 7:21-23)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의 말은 “나는 지금 어느 편도 아닌 중립(中立)이다. 앞으로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너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말로 들립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Joshua fell with his face to the ground in reverence) 그에게 묻습니다. “주의 종인 저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I am at your command. What do you want your servant to do)?” (14절) “너의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여호수아는 그의 말 대로 했습니다.” (15절)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세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는 ‘다른 것과 구별되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재 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길에서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났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방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선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무슨 행동을 할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순간 “난 더러운 죄인인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뵈었구나.” (이사야 6:5) 이렇게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누가복음 5:8)”라고 고백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worthless)’ 존재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둘째로, “신을 벗어라!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어라”는 말을 요즘처럼 잘 지키는 때가 과거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신을 벗고 집에만 있습니다. 어디를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요. 그냥 말로해서는 신발을 벗지 않으니까 신발을 벗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내몬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 동안 참 바쁘게 살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번은 아침에 센트럴 스퀘어를 지나가면서 바쁜 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버스를 타려고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일 저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먹고 산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당연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 생각입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은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일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인데, 그것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번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깊이 성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해서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넌 지금 여리고 성과 전쟁을 앞두고 부하들과 상의하고, 작전을 짜고, 마음이 분주하겠지만 이런 모든 활동을 중단할 수 있겠느냐? 네가 내 앞에서 신을 벗는다면 나는 이번 전쟁에서 너의 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여호수아는 그의 말 대로 했습니다 (15절)”라는 말씀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5장 말씀이 15절로 끝이 납니다. 꼭 뒤에 무슨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여리고 성과의 싸움은 안 되는 싸움이니까! 아무리 작전을 짜도 이건 안 되는 싸움이니까!” 하면서 신발을 벗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는 동시에 여리고 성과의 전쟁은 여호수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워주시는 전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전 명령은 절대로 사람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작전대로 실천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눈 앞에서 벌어졌고, 견고했던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메시지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가 가진 자원들 (resources)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밀알 하나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가 하신 말씀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한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돌아섰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인리히 호프만 (Heinrich Hofmann, 1824-1911)은 이 말씀을 모티브로 해서 ‘그리스도와 부자 청년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1889)’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안타까운 눈으로 이 청년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록 펠러 (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가 이 그림을 사서 자신이 지은 뉴욕 맨해튼의 ‘리버사이드 교회 (Riverside Church)’에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자 청년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5/10/2020 | 어버이주일/졸업예배/In Times Of Trouble 5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God Will Renew Your Strength

이사야 40:25-31

오늘은 어버이주일과 졸업예배를 같이 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번에 우리교회 졸업생들이 모두 47명입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학사가 19명, 석사가 15명, 박사가 13명입니다. 예전에는 졸업생들을 격려할 때 “형설의 공을 쌓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형설의 공(螢雪之功)’이라는 말은 ‘반딧불’과 ‘눈’으로 책을 읽는 노력을 했다는 말입니다. 예전 가난했던 시절에는 촛불이나 석유 등을 마음대로 켤 수 없어서 밤에는 일찍 불을 끄고 잤습니다. 책을 읽고 싶어도 깜깜해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여름에는 ‘반딧불이 (firefly)’를 잡아서 수건에 싸서 그 빛으로 책을 잃었고, 겨울에는 방문을 열고 ‘눈 빛’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한 마리가 3 룩스 (lux)의 빛을 낸다고 합니다. 책을 잃으려면 적어도 ‘반딧불이’를 150마리는 잡아야 한다고 하네요. 이렇게 공부해서 학교를 마치고 졸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형설의 공을 쌓았다’라고 격려해 주곤 했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루드야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은 ‘나의 어머니 (Mother o’ Mine)’라는 시에서 어머니를 사랑과 눈물과 기도, 세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내가 어떤 극한 상황에 있어도 나에게 흘러 온다고 했고, 어머니의 눈물은 내가 깊은 바다에 빠져도 나에게 흘러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는 내 몸과 영이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God could not be everywhere , and therefore he made mothers (하나님은 어디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드셨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道理)를 ‘효도(孝道)’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자로 ‘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나이 많아 노인이 되신 부모님을 자식이 밑에서 떠받치는 모양입니다. 공자는 효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父母唯其疾之憂(부모유기질지우)”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그저 (자식이) 병들까 걱정할 따름이라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부모에게 무슨 좋은 것을 사 드리면 그것에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진정한 효도는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부모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크리스천이시라면, 우리가 부모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우리가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줄 알고,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면, 그것이 부모에게 드리는 최고의 효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이사야 40장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 하던 당시의 삶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체성 (identity)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우리가 포로생활을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성전이 무너졌을까?” 이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Covid-19’으로 죽은 사람이 277,061명입니다. 미국은 78,335이고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도록 내버려 두실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일까?”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예언자를 일으키십니다. 신학자들은 이 예언자를 ‘제 2 이사야’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겠느냐? 누구를 나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느냐?” (25-26절) “‘왜 너희는 여호와께서는 나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신다. 내 하나님께서는 나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무시하신다’라고 하느냐 (How can you say the Lord does not see your troubles? How can you say God ignores your rights)?” (27절) “아무도 주의 크신 지혜를 알지 못한다 (No one can measure the depths of his understanding).” (28절)

로버트 피어리 (Robert Edwin Peary, 1856-1920)라는 미국의 탐험가가 1909년에 개썰매를타고 북극점에 도착합니다. 피어리는 북극의 날씨를 측량하고 북극해의 깊이를 재고 싶었습니다. 30시간이나 두꺼운 얼음을 깨고 줄에 무거운 추를 달아내렸습니다. 북극해의 깊이는 생각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피어리는 날마다 줄을 더 이어가면서 깊이를 쟀지만 줄은 바닥에 닿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기에 “북극해의 깊이는 이보다 더 깊었다”라는 식으로 기록했습니다. 훗날 첨단 장비로 재 보았더니 북극해의 깊이는 최고 4,087m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지혜의 깊이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똑 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How unsearchable and unfathomable is the depth of the riches of the wisdom of God!” (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는 깊은 바다와 같아서 바닥을 알 수 없어 측량을 할 수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제가 올해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축하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 잠언 3:5-6 말씀을 썼습니다.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주님의 길을 찾도록 해라. 그리하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주님이 보여 주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Pride goes before destruction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다).” (잠언 16:18, 18:12)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이 겸손한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혼란하고,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나의 정체성이 흔들립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오늘 우리가 느끼는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너희는 왜 하나님은 나의 어려움을 모르신다고, 하나님은 나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느냐? 너희 중 아무도 나의 지혜가 얼마나 깊은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지금 당장에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계획하신 대로 일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기택 (송강호)은 가짜 재학 증명서를 들고 과외 알바를 하러 가는 기우 (최우식)를 보면서 대견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무리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렵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쎄서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이유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별들을 하나씩 이끌어 내시며 각각 그 이름대로 부르신다. 그분은 매우 강하시고 능력이 많으셔서 그 이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신다 (26절)”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별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을 잊으시는 일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Behold, I have in-scribed you on the palms of My hands; Your walls are continually before Me.” (이사야 49:16)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다”는 것은 나의 이름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Your walls are continually before Me”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walls’는 무너진 성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너진 성벽은 정말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느헤미야 같은 사람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으려고 귀국을 결심하지 않았습니까?

챨스 스펄전 (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설교자의 왕자 (The Prince of Preachers)’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목사입니다. 그는 매우 절망적인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독실한 청교도 신앙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그는 존 번연 (John Bunyan, 1628-1688, 영국)이 쓴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을 100번도 넘게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열심히 성경을 읽었지만 구원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았고, 자녀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던 스펄전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인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850년 1월 6일, 그 날 아침에 눈이 너무 와서 모든 길이 막혔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평소에 나가던 교회를 가지 못하고 집에서 가까운 작은 감리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이십 명이 채 못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눈이 많이 와서 목사도 오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한 초라한 옷을 입은 사람이 강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읽은 본문 말씀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Look to me, and be saved, all the ends of the earth) (이사야 45:22)”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바라보는 일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들만 바라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바라보십시오. 어떤 이는 성령이 역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이 사람은 강당 바로 밑에 앉아 있던 스펄젼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펄젼을 향해, “당신이 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일생 동안 힘든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청년이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지금 바라보시오!” 스펄젼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스펄젼은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에 꽉 차 있던 구름이 걷히고, 내 영혼에 구원의 빛이 비치었다. 아! 나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 왔던 죄의 무거운 짐이 나의 어깨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나는 존 번연이 넓은 대지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고 외쳤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서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둔다는 말입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2,500년 전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절망적인 청년 시절을 보냈던 스펄전도 새 힘을 얻었고, 새로운 기회을 얻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사로서 여러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앞날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때로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당황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faint).” (3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