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1/17/2024 | 성령강림후 제 26주
주님이 찾으시는 거룩한 성전 The Holy Temple That the Lord Seeks
마가복음 13:1-8
한 방송인이 유럽을 방문 중, 중세 시대의 화려한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정교한 조각들과 천장의 그림들에 압도되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눈물의 의미를 묻는 PD의 질문에 그녀는 자리에 앉아 기도하며 당시 성전을 건축하던 이들의 신앙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고 답했습니다. 시대마다 지어진 건축물은 종교와 문화, 사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나오실 때 한 제자가 성전을 보며 감탄합니다. '선생님, 얼마나 굉장한 돌들입니까! 참으로 멋진 건물이지 않습니까!' 당시 성전의 주춧돌 크기가 가로가 7.3m, 세로가 1.2m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크기만으로도 성전의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정교함과 화려함에 압도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 건축이 5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니, 제자가 헤롯 성전을 보고 감탄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시골 출신이었기에, 그 웅장함에 감탄한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이 조금 이상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제자에게 “이 건물들이 그렇게도 멋져 보이느냐? 그러나 장차 이 건물의 돌 하나도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 구원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성전이 무너진다는 예언은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성전이 보이면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성전을 향해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성전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예언은 성전에 흠을 내는 것조차 불경스럽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의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실제로 A.D.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헤롯 성전이 파괴되어 잿더미로 변했으며, 예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이 헤롯성전의 파괴만 두고 하신 교훈일까요?
성전을 우상시 하고 진정한 신앙을 잃버버린 것에 대한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라고 여겨집니다. 학자들은 제자들의 이 질문과 예수의 대답에서 성전 파괴와 세상 끝이라는 두 사건이 신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의 사역을 완성하는 측면들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심판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시사합니다.
첫째,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의 파괴는 외식과 화려함을 간직한 유대교의 심판적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르시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 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성도들 안에는 성령께서 함께 거하십니다.
다니엘서 7장 14절에서 인자의 오심은 예수의 권위와 왕권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4 그러자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께서는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들을 주시고, 또한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과 각기 언어가 다른 온 땅의 뭇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경배하게 하셨으므로, 진실로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의 나라 역시 영원한 나라여서 결코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쉬운말 성경) 주의 다스림과 권위의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로버트 멍어(Robert Munger, 1911-2001) 목사의 책인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은 우리의 마음을 집에 비유하여 , 어떻게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어 변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마음의 공간들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게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곳은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은 나만이 아는 공간이 됩니다. 누구나 내면의 깊은 곳과 죄성을 가진 연약함은 들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서재, 인간적인 욕구로 가득차 있는 주방, 오랜 시간 동안 주님만 홀로 기다리게 했던 거실, 세상의 기쁨으로 가득했던 오락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드릴 수 없다고 낙심하던 그래서 자기의 노력만이 남아있는 작업실, 이러한 마음의 공간을 주님과 함께 둘러보고 난 후에 그는 자기의 힘를 의지하며 살아 온 인생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비밀 공간인 벽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들키고 맙니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모습들과 감추고 싶던 모든 것들을 주님께 드리며 항복했습니다. “주님 당신께 이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벽장을 여셔야 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십시오. 제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재산과 가옥과 부지의 집문서를 꺼냅니다. 내 삶이라 여겼던 그곳 그 자리에서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날 그의 마음은 주님을 모신 깊은 평화가 영혼에 자리한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잠시 우리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 마음이 반복적으로 무너지고 넘어지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왜어려울까요? 내가 쌓아둔 것을 조금이라도 잃어 버릴까 두렵습니까? 버리고 싶지 않은 옛자아가 원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숨기고 싶었던 비밀스러운 마음의 공간까지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1장에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너희가 이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적 연약함과 죄성으로 인해, 마음 속에 끊임없는 이기심과, 분노, 시기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위선적 신앙에 대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고, 종교적 열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마음은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죄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아시고, 율법으로 죄를 드러내셨지만,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 없었기에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을 가능하면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셨고, 이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시기 위한 절규가 느껴집니다. 그럼으로 기도의 집은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시선이 머무르도록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교제하며 지나간 이 자리에는 미움과 원망, 거짓과 분쟁이 사라지고 ‘하나되게 힘쓰라고’ 하신 주의 말씀만이 남게 됩니다. 삶의 변화는 하나님의 고통이 담긴 사랑을 이해하게 될때에 마음 안에 찾아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결국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트집을 잡고 잘못을 들추어 내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예수께서 헤롯성전을 나가시게끔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성전 앞에 놓여진 촛불을 밝히며 "성령이여 이곳에 오소서, 이곳을 성별하소서"라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켜져 있는 촛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공간을 만드시는 성령께서 지금도 이 자리에 운행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거룩함이 상실되어 진다면 인간의 마음은 언제든지 부패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불의한 세상에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연한 순은 약하고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줄기 빛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셨습니다. 그 빛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비추고 계십니다.
둘째, 거룩한 성전을 지키는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가리키며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종말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난 제자들은4 “선생님,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언제 그런 일이 닥치겠습니까? 그런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종말의 때와 시기에 관심을 두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종말의 징조를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모두가 이 종말의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종말이 끝이 아닙니다. 이미 죽음 권세를 이기고 마음의 성전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겪게 되는 슬픔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신 주안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려움과 절망이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이미 이전의 삶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시선은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종말은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안에 있는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인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하는 성전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 찾아오는 수많은 아픔들 그런데 그 아픔을 씻겨 내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여러분을 압도하고 있으신가요? 헤롯 성전이 주는 장엄함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으신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방식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미워하고, 맞서 싸우고, 맞받아 치고, 이기는 자와 지는 자를 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은 오히려 불편하고 아프고 힘든 순간에 더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허용하시는 고난이라면 모든 것은 주안에서 유익한 일이 됩니다. 예수께서 오시고 난 뒤에 이천년 동안 교회는 끊임없는 저항과 핍박속에 있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보여지고 들려지는 일들로 미혹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을 사는 성도는 거룩한 마음의 성전을 잘 지키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세의 때에 주어진 임무는 기도의 등불을 켜고, 매일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정작 이러한 때에 교회는 예수님으로 인해 모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거룩해진 백성으로 삶을 살 각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끝이라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의 완성으로 이해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의식은 현실을 극단적으로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미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게 될 때에도 '너희는 놀라지 말라.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그것이 아직 마지막 때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하셨고,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세의 징조만을 언급하신 것은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의 자세로 살아가라는 교훈을 줍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의 책 ‘영적 침체‘를 보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영적인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균형 잡힌 신앙과 영적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재의 신앙생활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과업과 소명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지만, 진리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기준은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침체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도 교훈합니다.
끝이 없는 듯한 문명의 발전에 우리는 길을 잃어 버릴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화려한 현대 문명의 그늘 뒤에 가려진 채 더해 가는 세상의 방법들을 멈추고 그날을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길은 많아 보이지만 출구가 없는 이 시대속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며 우리 삶을 통해 거룩한 성전을 세우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1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미혹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13:6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13:7 또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너희는 놀라지 말라.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그것이 아직 마지막 때는 아니다. 13:8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서로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고, 온 땅의 도처에서 지진이 일어나며, 곳곳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아직 시작일 뿐이다.
미혹은 억지로 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동조하거나 추종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직전에는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내가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미혹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러한 일들이 만연하게 되면 폭력과 전쟁, 무질서와 불법은 사회 안에서 횡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종말의식은 내 마음의 거짓과 부패함, 타락해져 가는 것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일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믿고 주어진 사명을 다해 살아가면 됩니다. 한주도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하늘의 교회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땅에서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성전이 되도록 살아가며 매일의 삶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10/2024 | 성령강림후 제 25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6 작지만 가장 큰 마음 A small but the greatest heart
막 12:38-44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율법교사와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상반된 신분을 가진 인물들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부와 존경을 받으며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이었고, 반면에 과부는 가난과 멸시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는데, 이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경건한 모습을 과시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것은 주님께서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부유한 율법교사들이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는 탐욕적인 마음과,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모든 것을 드린 과부의 마음은 분명하게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섬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는 이 말씀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마음의 자세를 재조명하게 합니다. 물질의 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와 가난한 과부를 대조하면서 참된 경건의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율법교사들은 외적인 모습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한 반면, 가난한 과부는 모든 것을 드리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첫째, 참된 경건을 어떻게 채워가야 하는가?
하나님은 다윗의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르켜 '내 마음에 합한 자' 라고 칭찬 하셨는데, 다윗의 마음을 볼수 있는 기도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29장 12절에서 14절입니다.
12 이 세상의 온갖 부요와 영광이 모두 주께로부터 말미암으니, 진실로 주께서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강하고 위대하게 되는 것도 모두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높이 찬양합니다. 14 주여, 우리가 이토록 즐겁게 예물을 바칠 힘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저나 제 백성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주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리는 주의 손에서 나온 것을 다만 주께 바쳤을 뿐입니다.(역대상 29: 12-14)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또한 다윗은 사람이 강하고 위대하게 되는 것도 결국 주의 손에 달려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주님을 향한 찬양의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찬양과 감사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은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의 진실함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 벽을 따라 일렬로 놋쇠로 만든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 뜰에 있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당시 모든 화폐는 금속을 주조하여 만든 동전이었기 때문에 헌금의 많고 적음을 소리로 쉽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은 인간적인 과시로 헌금을 했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을 주목하셨습니다.
"많은 돈을 넣은 부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라는 구절에서 "넣다", "던지다"라는 단어는 ἔβαλλον (에발론)으로 미완료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는 부자들이 반복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부유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동전을 집어 넣은 모습을 묘사합니다. 아마도 놋쇠로 된 헌금함에 동전이 들어가는 소리가 길고도 크게 들렸을 겁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은 ἔβαλεν (에발렌)으로 부정과거형으로 쓰여있습니다, 이는 과부가 동전 하나를 조용히 넣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때 과부가 헌금을 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유추해 볼수 있는 것은 동전 한개의 소리가 작고도 초라했을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진심으로 드린 과부의 헌금을 더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차이는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돈과 성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다르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물질과 명예가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내면의 진실된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외식하는 자가 되기 쉽도록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쩔수 없이 세상속에서 높아지기 위해, 소유하며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고 살아가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과 가정과 일터 그리고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 보시고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의 걸음입니다. 내가 가진 마음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아픈 마음도 먹먹한 마음도 주님 앞에 온전히 내어드리며 나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 참된 경건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세상의 섬김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성도의 섬김은 하나님을 위한 섬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의 죄와 내면의 연약함을 깨닫고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 그 사람의 내면의 동기가 변화하게 됩니다. 부족한 것이라도 채워주려는 마음,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는 자들이 되십시오."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의 삶을 살아가십시오.(쉬운말 성경)
많은 사람들이 ‘경건’을 겉으로 드러나는, 눈에 띄는 말이나 행동으로 오해합니다. 경건의 삶은 먼저 마음의 동기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회개한 후에 그 동안 토색하던 물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반이나 돌려 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물질관이 변화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경건의 삶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경건해질수록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들은 자신을 더 낮추며,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율법교사들은 회당이나 잔칫집에서 항상 윗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길게 하는 등 외적인 경건을 중시했습니다. 물론 기도를 길게 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성전에서 일어난 마지막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앞장인 마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시며,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강력히 질책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성전이 그저 상업적 이익을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으며, 이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회복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성전의 개념을 외형적인 건축물에서 신앙의 내적인 차원으로 확장하여 "마음의 성전"이라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고린도 전서 6:19-20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KRV 고린도 전서 6:19-20)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 안에 충만히 임재하시면, 점차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모습에 치중하며 살아갑니다. 겉모습은 깨끗하고 화려해 보여도, 내면의 상태가 부패하면 결국 그 모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만일 겉은 깨끗한 컵이지만 안에 담긴 내용물이 오래되어 신선하지 않다면 결국 그 컵의 내용물은 썩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1615 - 1691)는 ‘참목자상’이라는 책에서 '자아성찰'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은혜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안에서 온전히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보라 둘째,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은혜가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보라 셋째, 행동이 자신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지 살펴 보라 넷째, 다른 사람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신은 혹시 그런 죄에 빠져 있지 않는지 살펴보라 다섯째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꺼려하지는 않는지 살펴보라
경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도움을 줄 때에는 드러나지 않게 도우라고 하십니다. 드러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낮아져야 하는 것이 성경의 지혜입니다.
마태복음 6:3-4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3 그러므로 당신이 친절을 베풀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도 모르게끔 하십시오. 4 그렇게 해서, 당신의 자선 행위를 아무도 모르게 고이 숨겨 두십시오.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마 6:3-4)
교회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시선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형식과 겉모습만 남고 그 본질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Oswald Chambers, 1874-1917) 는 '제자도'라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실 때, 아무도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리가 신앙인들에게 위험한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유혹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과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교사들의 경건이 형식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종 자신의 위엄과 지위를 과시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 했습니다. 물론 모든 율법교사들이 다 경건의 형식만 추구한 것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교훈해주셨습니다.
믿음의 시선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믿음의 본이 되신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실한 믿음의 길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걸어 가다보면 고난 앞에서 울 수 밖에 없고, 매일의 마음의 넘어짐 앞에서 주저 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까지도 내어 드리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작은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큰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그 진실한 마음 붙들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교우들의 삶에 이번 한주도 주님의 평안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11/3/2024 | (성령강림후 제 24주 예배)
듣고, 깨닫고, 사랑하라 Listen, Understand, and Love
마가복음 12:28~31
종교개혁자 루터는 양심에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쉴새 없이 안간힘을 쓰며 고해성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죄까지 어떤 때는 여섯 시간씩 고해성사를 했어요. 고해를 할 때에 십계명을 훑어 내려가며 자신의 일생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고해성사를 받아주던 스승 슈타우피츠 신부가 '이봐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화를 내시고 있는게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군요. 소망을 지니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었냐고 소리치며 그리스도께 용서를 받고 싶거든 자질구레한 죄가 아니라 다음에는 큰 죄를 짓고 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루터는 그렇게 죄를 고백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의 검열을 피해 빠져나간 죄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인간의 성품 자체가 타락해 있다는 사실과 씨름하며 깊은 괴로움을 경험했습니다. 믿음으로 고뇌하던 그 자리에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참된 믿음을 발견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발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 이후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예수를 책잡으려고 하는 이들과 논쟁이 벌어집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과도 논쟁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지켜본 한 율법 교사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듣고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합니다.
12:28 ○ 율법 교사들 가운데 한 명이 거기에서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답변을 아주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또 물었다. “모든 계명들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질문을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오. 곧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주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한 율법 교사도 처음에는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비유로 전하셨습니다.
첫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한 것인데, 유대인들은 아이가 자라면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쉐마’의 첫 절인 이 말씀을 가르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쉐마’라는 것은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입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소식도 어디서나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가 만들어 지기 전에 듣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아이들도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시간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게 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도 먼저는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롬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 죽었던 믿음이 살아납니다. 신앙의 영적 상태를 평가하는 척도는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듣는 이들의 마음에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포로 귀환 후 돌아온 백성들은 성벽을 재건한 뒤, 율법책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에스라가 큰소리로 말씀을 낭독할 때, 온 회중은 그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숨죽여 낭독하는 소리에 집중하며 듣다가, 읽기 시작하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마음이 벅차올랐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기록된 말씀(the written Word)”, “계시된 말씀(the revealed Word)” "선포된 말씀(the preached Word)”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셨고, 성경은 그 말씀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설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보여야 믿겠다는 태도보다는, 기록되고 계시된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록된 것은 주님께서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이고, 성도에게는 영생의 시간을 살아가는 세계가 펼쳐 졌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율법교사의 질문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은 보이지 않는 개념이며, 그 단어는 지극히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영생을 실제로 갈망하고 그로 인해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이는 계명의 본질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라는 법관원은 "귀 있는 자들아 들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율법을 읽었고, 높은 직책에 있었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하냐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데 있습니다. 모든 나라에 교회가 세워지고 매주일 말씀은 선포되고 있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온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루터는 깨달음을 통해 관점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씨름하던 문제는 바로 회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Martin Lloyd-Jones, 1899-1981)은 촉망받는 젊은 의사였는데, 28세에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의 직업을 내려놓고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는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저는 살인이나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회개가 제게는 와닿지가 않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간음과 살인죄를 연속적으로 범한 사건(B.C. 991년경)에 대하여 나단 선지자 로부터 책망을 듣고 자기 죄를 참회하며 지은시입니다. 이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회개는 죄의 종류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의지에서 비롯되는 행동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어느 날 요나에게 이방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이방인들에게 가도록 보냄 받은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요나는 말씀을 듣고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느끼며, 그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용기가 없었던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도망가고 싶어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셨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의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선장은 요나에게도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풍랑이 일기 전 잠들어 있던 요나는 이제 위기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배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풍랑이 일어 난 것이라 자백합니다. 사람들은 요나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노를 저어 보았으나, 풍랑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나의 마음속에 얼마나 괴로운 씨름이 일어났겠습니까? 요나에게는 죽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구원의 물고기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요나는 깊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에 보내시더라도 나는 변명할 입장이 없습니다. 그럴 만한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이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설명했습니다. 크리스챤에게는 주어진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이 궁극적인 부르심은 우리가 일상속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점검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첫째 계명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라고 하셨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갈등을 다 해결할 수 없고 사랑으로만 섬기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18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 쪽에서 먼저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등 앞에 어려운 문제 앞에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을 것입니다. 갈등을 넘어서는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개의 계명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팀 켈러는 그의 책과 설교에서 율법주의와 상대주의를 인간이 진정한 복음을 대체하는 두 가지 잘못된 방식으로 자주 설명합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행위와 규칙 준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율법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집중합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을 자만에 빠지게 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반면에 상대주의자는 절대적 권위의 명령을 무시하고,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기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하나님 없이 인간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잘못된 믿음을 형성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받은 선물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삶을 통해 열매 맺는 참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의 관습을 뛰어넘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의 대상은 유대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 설명하셨습니다. 유대인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음을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가장 큰 계명안에 담긴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은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613개의 규정이 있었고, 유대 랍비들은 어느 규정이 더 크고 무겁고, 어떤 것이 더 작고 가벼운지에 대해 끝없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의 완성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쏜 죄악의 화살이 예수의 심장을 관통했을 때, 그 화살을 빼내어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시고, 그 사람에게 사랑으로 돌려주시며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 안에 정의와 사랑이 조화롭게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의 개념을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각으로만 상대를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내 편'과 '너의 편'이 나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편'이 아닌 대상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러한 시대에 참된 성도에게 필요한 믿음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자신의 아들을 적극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성도의 존재가 변화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예수께 표적을 요구했지만,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표적을 보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바꾸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작은 노력일지라도 우리가 받은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에게 손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한주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듣고 깨닫고 사랑한 삶의 노력과 흔적을 지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0/27/2024 | (성령강림후 제 23주, 종교개혁주일)
은혜 앞에 서기까지 Until We Stand Before Grace
시편 13:1-6
역사의 주인은 창조자이십니다. 인생이나 나라를 세우시고 폐하시고 높이시고 낮추시고 부하게 하시고 가난하게 하시고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진행됩니다.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원칙,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게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인생이 타락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완전해짐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은 시대마다 동일하였고 이 시대에도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변방에서 왕을 찾으셨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베들레헴이라는 촌 동네에서 양치는 소년이었습니다. 무명의 소년이었으나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때 하나님은 눈여겨보셨습니다. 오늘 날 성도들이 교회 생활 할 때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감으로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증거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찾았을 때는 다윗이 유명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골리앗을 죽였을 때나 전쟁에서 이방의 적들, 블레셋, 모압, 암몬에서 승리하고 유명했을 때 왕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실히 양 떼를 지키는 중에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유명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셨으니 자녀처럼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자녀삼아 주신 하나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것이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꿈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예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1. 인생의 고통이 반복될 때 창조자의 길에 서야합니다.
오늘 시편은 개인적인 탄식으로 시작되는 다윗의 시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쫓기던 삶의 심정을 담은 외침입니다. 자신의 고통이 “어느 때 까지”인지 묻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생의 아픔이 묻어난 시입니다.
다윗의 네 가지 질문 중 처음이‘나를 잊으셨나이까?’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를 알 때 그의 소리침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시 78:70) 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시대 목동은 최하위 신분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직업이었습니다. 실제로 목동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되지 않던 때입니다. 공부 할 기회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모았을 때도 다윗은 목동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형들에게도 인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시편 42편에 고라 자손의 시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거할 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모세를 반역하여 땅이 갈라져 죽는 재앙을 당했는데 그 당시 고라 자손이 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윗 시대에 성가대의 직무를 감당하였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라고 시작 된 시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비웃으며 조롱할 때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영혼의 상태가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그 때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찬송하게 된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다윗도 고라자손처럼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시 42:9) 하는 것은 인생의 고통의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고통가운데 눌리다가 견디다가 부르짖는 비명이고 절규는 기도였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신앙의 순도가 나타납니다.
다윗의 인생의 질문이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더 깊은 고통을 토설하였습니다. 양치는 목동들 중에는 자기의 양을 치는 자와 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에게 자기의 양은 몇 마리일까요? 아버지의 양, 형들의 양, 이웃의 양을 치는 자였을 것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시78:71) 기록함으로 그가 양치는 목동이었을 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되었음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한 이유도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마음이 완전하다.’는 뜻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나 골방에서 혼자 있을 때나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양이 곰이나 사자, 늑대에게 공격받을 때나 이웃의 양이 공격받을 때나 똑같이 같은 마음으로 양을 지켰습니다. 양을 치는 모습이 성실하였습니다. 맹수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동일하게 지켰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는 일에 진심이었습니다. 이것이 크신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을 찾으셔서 머리에 기름 부을 때 다윗의 나이가 십대 중반이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꿈이 다윗의 인생 속에 들어갔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꿈은 이 어린 소년을 이스라엘 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다윗 같은 마음을 가진 자를 찾아 하늘의 꿈을 담으시는 분이 창조자이십니다.
2. 창조자를 향한 사랑은 고통을 견디게 합니다.
다윗의 질문은 자기신세 한탄처럼‘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합니까?’호소합니다. 십대중반에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삶을 십년이상 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되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도망자라는 고난과 고통의 긴 시간이었습니다. 라마에서 헤렛 수풀까지, 기브아, 놉, 가드, 아둘람 굴, 모압미스베, 그일라, 십 황무지, 마온 황무지, 엔게디 황무지, 바란광야, 갈멜, 시글락까지의 도망 길에는 사울의 삼천 명의 군대의 추격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쫒길 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의 시간을 견뎌야했습니다. 그 시간은 땅 끝으로 가서 숨어도 사울의 온 군대가 찾아오는 절망적 순간이었습니다. 쫓기는 처참함의 시간들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부르짖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인생길이 보이지 않음에도 담대하게 ‘나를 봐 달라’는 이 기도는 자신의 뜻대로 사는 자의 기도가 아닙니다. 다윗처럼‘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하나님을 주목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함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또 나의 원수가 이겼다 할까? 더 나아가 자신이 흔들릴 때에 대적들이 기뻐할까?’두렵다 하였습니다. 아둘람 굴로 도망할 때 다윗의 형제들과 친척들이 찾아오고 사울의 압제하에서 고통당하던 자들과 빚진 자들과 불만을 가진 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때는 도망자의 초기였고 엔게디 요새까지 그들을 데리고 도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사람의 수는 점점 불어나 육백 명이나 되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가족을 합치면 삼천 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다닌 도망자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한 다윗의 삶을 바라봅니다.
실제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에도 사울을 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망자의 삶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손이 끝내야하는 전쟁임을 안 지혜자였습니다. 그가 스스로 사울을 죽이는 순간 자신이 사울과 같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 속에 고독과 좌절과 안타까움 앞에서 하나님을 찾아 가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외침입니다. 자신의 사망으로 원수가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할 수는 없다는 부르짖음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찾아가는 다윗은“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한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신을 만나는 영광은 사랑 안에서 이룹니다. 삼십 세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눈을 밝혀달라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 진 것처럼 마귀와 전쟁 할 줄 아는 이런 믿음의 영광을 성도들이여 만나길 소망합니다. 이 믿음으로 성도들이 이 시대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하고 악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하는 소명입니다.
3. 은혜 앞에 선 승리자만이 찬양합니다.
사막의 하루가 매일 똑같을 것 같지만 하루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든지 비가 내리면 길이 바뀝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앞서간 양떼 발자국이나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걸을 때 그 길은 믿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합니다. 사막을 걷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하늘의 별자리를 따라 걷는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변함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합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광야와 같습니다. 그 길은 매일 다른 길이 펼쳐집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말씀하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랑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 다윗이 한편의 시로 그때의 심정을 쏟아놓았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여호와를 찬송할 수 있는 이유가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었다 선포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은덕을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구원이 은총이었음을 알고 찬송함이 위대하였던 다윗입니다. 사울의 군대에 쫓길 때에 다윗의 고백은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57:7)며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하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법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자로 훈련받았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하신 약속을 따라 산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늘 백성으로 훈련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때까지’를 부르짖었던 다윗의 인생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길은 불가능을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송축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한 다윗의 멋진 노래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의 인생도 사단을 이기고 승리하여 찬송하는 복된 믿음의 인생이길 축원합니다.
10/20/2024 | (성령강림후 제 22주 예배)
건강한 교회 시리즈 34 영광의 자리를 위한 준비 Preparation for the Place of Glory
마가복음 10:35~45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영광의 자리를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을 때, 자신들도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요청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일한 기사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한 아들은 주님의 오른편에 다른 아들은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마태복음의 기사에서는 진한 모성애로 느껴지겠지만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영광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출세 (出世) 하다'를 직역하면 '세상에 나온다'라는 뜻입니다. 숨어 살던 사람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해 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청탁하던 영광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을 받고, 주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이 잔은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수 있는지 되물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이 당할 고난을 언급하며,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넘겨지며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침을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난 후에 전한 말씀입니다. (33-34)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언하는 마지막 단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례자가 걸어야 할 마지막 발걸음이었지만, 그 길은 단순히 유대인의 결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이해하고 있던 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으며, 그 핵심이 바로 거룩성과 섬김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세상에서 출세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의 구원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복 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알면서도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이방나라로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섬기던 주인의 아내가 유혹을 하자 이를 거절하고, 성결한 삶을 선택했는데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에서 수많은 고난을 선으로 바꾸시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선한 결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거룩한 삶을 선택한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걸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출세란 세상의 기준에 따라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출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삶을 부여 받도록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예상치 못한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세상의 성공의 기준으로 보면 더딘 것 같고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 삶이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욥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대로 모든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 다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은 세상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알려 주고 싶었던 교훈입니다.
첫째, 지위가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과거에 기독청년들에게 '고지론'을 외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영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취지였습니다. 그 후, 다른 한쪽에서는 '미답지론'을 외쳤습니다. 답이 없는 낮은 자리, 세상의 변두리로 가서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은 곳을 지향하는 믿음과 낮은 자리로 가라는 믿음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리며 모든 계층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고 화해하는 사역을 실천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정체성은 예수님처럼 밀알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자리에서 나오게 됩니다. 지위가 있는 자리나 낮은 자리나 주어진 환경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개혁과 변화를 이끌고, 동시에 소외된 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역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어머니는 당시 수도였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눈에 보이는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왕좌에 앉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다윗 성전의 보좌가 아니라 내가 마셔야 할 잔과 세례(38)을 받을 수 있느냐였습니다.
본문에서 표현한 잔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고통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슬픔과 관련된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와 출애굽 당시 애굽 군대가 물에 수장되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죽음을 상징하는 물의 이미지입니다. 이해가 달랐던 세베대의 아들들은 '예, 저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14:50 참조),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 앞에서 그들은 그 잔을 피했습니다. 이후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성령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부활의 영광으로 드러난 것을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깨달은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순교한 첫 번째 사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12: 2) 야고보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유진피터슨 목사님은 한길 가는 순례자라는 책에서 ‘한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순례자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과 그 길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면서 깊은 기도가 없이는 긴 순종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도마는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해 그 길을 좀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가야 할 방향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 길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달리는 경주자는 무거운 짐이 되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인가요? 외국생활에서 잠시 여행을 온 관광객과 현실을 살아내는 이민자들의 삶의 시선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관광객은 잠시 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 땅을 바라보고 떠나지만, 이민자는 그 땅에서 살아가며 그곳의 목적과 의미를 깊이 생각합니다. 순례자도 이와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잠시 깨닫고 머물다 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살아가는 순례자의 마음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똑같이 이 땅을 밟고 있어도 향하는 시선과 마음이 달라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영원한 소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표를 향해 매일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믿음의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자기 목자의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상 17:40)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고 선언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으로 사명의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둘째,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44 또, 너희 중에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고 온 것이다.”
어떤 자리에 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제로 내 손에 든 것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위대함이 권력이나 영광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마음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이나 선행을 피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 는 말씀은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한 일을 다 보신다고 기록합니다. 잠언 19장 17절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리라" 말씀합니다. 선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이기에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행위를 기억하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신뢰 관계 속에서 우리의 선행의 힘은 더욱 더 커질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가던 가을이었습니다. 미국의 오리건주 유게네 마을 회관에는 종교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붙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즐겁게 인사를 나누며 영화를 관람합니다. 내용은 한국 전쟁이 낳은 고아들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가 끝나자 한 농부 부부는 그 아이들을 잊을 수 없었고, 영화를 잊으려 해도 영화가 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와보니까 6.25 전쟁 직후의 한국은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대로 전쟁 고아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전쟁 고아 8명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나자 여러 단체에서 이들을 돕겠다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농부 부부는 전쟁 고아들을 돕는 기관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관이 홀트 아동 복지재단입니다. 홀트씨는 선한 씨앗을 심은 것 뿐인데, 홀트 아동복지재단이라는 열매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1955년 해리 홀트(Harry Holt, 1905 ~ 1964)와 그의 부인 버다 메리언 홀트(Bertha M. Holt, 1904 ~ 2000)가 전쟁으로 인해 고통속에 있는 한국의 고아 8명을 입양한 것이 홀트아동복지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노부부는 현재 한국에 묻혀 있지만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이 프로그램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지만 이 땅의 영광의 자리를 거부하고 섬기는 자의 본이 되셨습니다. 순례자의 길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영광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영광의 보좌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우리에게 영원한 상을 예비해 주십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고 말씀하며, 성도들의 삶에 상급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현실속에서 뜻을 분명히 알 수 없는 모호한 문제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홍해 바다가 앞을 가로 막기도 하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을 떠난 온 것을 후회하기도 하며, 기본적인 생존권에 대한 위협과 어려움이 있는 광야의 한복판에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한주 동안도 섬김을 통해 우리 모두 영광의 자리를 준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