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2019 | 성탄주일 메시지 II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V) To Live As A Christian

요한복음 3:16-18

세계 각국의 성탄절 인사가 재미 있습니다.  미국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일본 "メリ クリスマス (메리 크리스마스)!" 중국 "圣诞快乐 (셩딴 콰일러)!"
프랑스 "Joyeux Noël (조이유 노엘)!" 스페인 "¡Feliz Navidad (펠리쓰 나비대드)!"
브라질 "Feliz Natal (펠리쓰 나딸)!" 독일 "Fröhliche Weihnachten (프뢸리헤 바이나흐텐)!"
이탈리아 "Buon Natale (부온 나탈레)!" 그리스 "Καλά Χριστούγενα (칼라 크리스토게나)!"
한국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 북한 "기쁜 성탄절 되시라요!"

성탄절이 되면 성탄 찬송을 많이 부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탄 찬송가 중에 최고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찬송가는 Joseph Franz Mohr (모어, 1792-1848, 오스트리아)가 시를 쓰고, Franz Xaver Gruber (그루버, 1787-1863, 오스트리아)가 곡을 붙였습니다. ‘모어’는 그 교회의 주임 신부로 섬기고 있었고, 학교 음악 교사였던 ‘그루버’는 그 교회 성가대 지휘자 겸 오르간 반주자로 있었습니다. 때는 1818년 크리스마스 전 날 저녁이었습니다. 주임 신부 ‘모어’는 다급한 마음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가대 지휘자 ‘그루버’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모어’의 손에는 그가 2년 전에 써 놓은 시 한 편이 쥐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미사가 불과 몇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모어’ 신부는 미사에 쓸 음악이 필요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교회의 오르간이 고장 나는 바람에 다른 음악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모어’는 이 찬양시에 곡을 붙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그루버’의 집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어’의 시를 읽고 영감을 얻은 ‘그루버’는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간단한 멜로디와 합창으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만든 악보에는 6절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날 저녁에 테너 ‘모어’와 베이스 ‘그루버’가 이중창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성가대가 후렴 부분을 불렀다고 합니다. ‘모어’가 기타 반주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노래가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이 노래가 1858년에 영어로 번역이 되었고, 현재는 140여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수 십년 간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 (1803-1815)’으로 마음이 황폐해 진 사람들이 평화와 안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노래가 바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찬송을 국보급으로 여기고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이 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이 곡을 이용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에 유네스코 (UNESCO)에서는 이 노래를 ‘인류의 유산 (world heritage)’으로 지정함으로써 더욱 가치를 인정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배 시간에 사용할 음악은 필요한데, 교회 오르간은 고장이 나서 쓸 수 없게 되고, 예배 때까지 시간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이런 상황 속에서 불후의 명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많았더라면 영영 이 노래가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기와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들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대강절 촛불 (Advent Candle)’ 네 개를 모두 켰습니다. 오늘 켠 촛불이 사랑의 촛불입니다. 보라색 촛불입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흰색 ‘그리스도의 촛불’을 켰습니다.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까지,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감격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과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저는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네 가지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위대한 희생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3:16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성경 66권을 요약한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NIV)”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암송하면서도 오랫동안 ‘독생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차라리 ‘독자(獨子)’ 혹은 ‘외아들’이라고 했으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왜 ‘독생자’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독자 (창세기 22:2, 12, 16, only son)’라고 나와 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영어로 ‘only begotten son’이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낳은) 아들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희생하신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거나, 내려 놓거나, 희생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지난 주 예배 시간에 불렀던 찬송가 304장 가사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이 찬송시를 쓴 Frederick M. Lehman (1868-1953, 독일)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 범위가 별보다도 높은 곳에서부터 저 땅 속 깊은 지옥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넓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라면, 우리가 어떤 비참한 상황과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천박한 것입니까? 우리는 나에게 잘 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수준이 같은 사람만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해도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랑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들을 사랑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외아들 (only son)’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 (sacrifice for reconciliation)’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And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who brought us back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od has given us this task of reconciling people to him.” (고린도후서 5:18) 여러분,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New creation in Christ)’이 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 (task)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임무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 시켜야 하는 ‘그리스도의 대사 (Christ’s ambassadors)’로서의 임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20)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first)’ 베푸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악한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죄를 벌하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로 내주신 데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기를 마다하겠습니까?” (요한일서 4:9-11, 현대어 성경) 또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랑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We love each other because he first loved us).”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고 배우기 전에는 우리를 서로 사랑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잊혀 지지 않는 고마운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유분자 씨입니다. 저희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 올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그 때 그분은 재미간호사협회 회장으로 있었는데, 한국을 방문 중이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저를 미국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참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김 목사님, 저에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처음에 미국 왔을 때 다른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저에게 감사하지 마시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주세요.”

사랑은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사랑을 베풀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의 ‘주도권 (initiative)’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먼저 나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내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손을 내 밀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영어 단어에 ‘empower’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준다’는 뜻입니다.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that is what we are! But the people who belong to this world don't recognize that we are God's children because they don't know him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게 되었으니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모릅니다).” (요한일서 3:1) 사도 바울은 “For Christ's love compels us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합니다., 고린도후서 5:14)”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드라이브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단순히 위대한 사랑이라고 찬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empower’하고, 우리를 ‘compel’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 하지 않고, 쉽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 이 말씀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empowering’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2/15/2019 | 대강절 셋째 주일/성탄주일 (I)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V) To Live As A Christian

누가복음 2:8-12

오늘은 ‘Advent Candle (대강절 촛불)’ 세 개를 켰습니다. 오늘 켠 촛불이 기쁨의 촛불, 핑크 색깔 촛불입니다. 핑크 색과 우리 마음의 기쁨이 잘 연결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까지, 우리는 인생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리포트 점수가 잘 나왔다든지, 학위를 받게 되었다든지,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든지, 좋은 사람을 만나 장래를 약속하게 되었다든지,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기쁨’이 모두 일시적인 (temporary)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기쁨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그보다 먼저,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개의 사인)’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긴 합니다만, 이제 이런 말이 매우 보편적인 말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구글에서 찾아보면 금방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사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그의 복음서 안에 대표적인 사인 7개를 배치했습니다. 제일 먼저 배치한 것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보여 주신 사인입니다. 그 때는 결혼 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손님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결혼 잔치를 하루에 치르는 것이 아니라 7일, 10일, 20일, 어떤 때는 한 달 동안 결혼 잔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의 결혼식은 단순히 당사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온 동네의 축제였습니다. 그 때는 가난했고, 먹을 것도 부족했고, 별로 기쁜 일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결혼식이 일생에 가장 기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기쁨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잔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오래 전에 제가 교회 청년들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에 단기선교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낯선 손님에게 잘해 줍니다. 친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주고, 잠도 재워줍니다. 우즈베키스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중동지역의 나라들이나 중앙아시아 나라들이 다 손님들에게 친절합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집에 비해 마당이 매우 크고 넓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결혼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에 손님들을 많이 초대해야 하는데, 마당이 작으면 손님들이 많이 들어 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들에게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읽어보면, 결혼 잔치 끝 무렵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미리 가서 잔치를 도와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그 때 포도주가 떨어져서 주인이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포도주를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은 주인에게 큰 수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곤란한 자리에서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시고, 이 항아리들을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항아리에 든 포도주 맛을 본 후에 감탄하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다가 나중에 잔치를 마칠 무렵에는 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내는 데, 당신은 어떻게 이런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놓았습니까?” (요한복음 2:10) 

물이 최 고급 포도주가 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이 포도주로 변하다니요? 물과 포도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물은 평범하고 흔한 것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귀한 것입니다.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This miraculous sign at Cana in Galilee was the first time Je-sus revealed his glory (as the Son of God). And his disciples believed in him).” (요한복음 2:11)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Jesus did many other miraculous signs in the presence of his disciples, which are not recorded in this book. But these (signs)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John 20:31, New English Translation)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 오실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생에 들어 오시면, 평범한 삶이 비범한 삶으로 바뀌고, 재미 없는 삶이 재미 있는 삶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염려와 근심이 웃음으로 바뀝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To all who mourn in Israel, he will give a crown of beauty for ashes, a joyous blessing instead of mourning, festive praise instead of despair).” (이사야 61:1-3)

이사야 61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메시아로서의 자기 사역을 온 세상에 선언하신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 61장 말씀을 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7-19)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하실 사역 중에 우리의 삶에 기쁨을 회복 시켜 주신다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도 똑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Don't be afraid! I bring you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 The Savior-yes, the Messiah, the Lord-has been born today in Bethlehem, the city of David!).” (누가복음 2:10-11) 이 말씀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 있는지 아십니까? ‘great joy to all people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에 찍혀 있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 (Good News)’입니다.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구원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듯이, ‘기쁨의 좋은 소식’도 어느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전하여 준 ‘기쁨의 좋은 소식’은 우리를 위하여 ‘구세주 (the Savior)’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해 주세주가 태어나셨다”는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가 탄생하신 것은 우리 모두에게 ‘구세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속에서 계속 살 수 없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finds its rest in you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창조하셨기에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354-430)의 '고백록' 1권 1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 안에 안식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비로소 내 안에 안식 (rest)이 주어집니다. 이 고백은 어거스틴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사람,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 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트 교리 문답 (Westminster Catechism) 1번 질문이 생각납니다. “사람의 첫째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rimary purpose of man)?”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It is to glorify God and enjoy Him forever).”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기뻐하십시오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빌립보서 4:4) 

하지만, 우리 삶에는 기쁨의 시간보다 슬픔과 절망과 염려와 근심의 시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주 안에서 (in Christ)’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주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삶이 불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since our friendship with God was restored by the death of his Son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10)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기쁨과 평화가 그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you will be filled with my joy. Yes, your joy will overflow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말 대로 한다면 틀림 없이 기쁨이 흘러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5: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my joy’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람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무조건 기쁨의 삶을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을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심각하게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엊그제 새벽기도에서 마태복음 11:19절 말씀을 읽고 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its results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라도 그 지혜를 들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은 우리가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들은 ‘기쁨의 좋은 소식’이 진실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입니다.

 

 


12/8/2019 |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II) To Live As A Christian

마태복음 5:9, 로마서 12:17-21

‘Advent Candle (대강절 촛불)’이란 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까지 4주 동안 대강절이 계속되는데, 매주마다 촛불을 켭니다. 첫 주에는 보라색 촛불을 켜는데, 이 촛불은 희망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둘째 주에도 보라색 촛불을 켜는데, 이 촛불은 평화를 상징라는 촛불입니다.  셋째 주에는 핑크색 촛불을 켭니다. 이 촛불은 기쁨을 상징합니다. 넷째 주에는 다시 보라색 촛불을 켭니다. 이 촛불은 사랑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그리고 넷째 주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흰색 촛불을 같이 켭니다.

이번 리뉴에서 많이 부른 찬양 중에 ‘시간을 뚫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김강현이란 분이 가사와 곡을 쓴 찬양입니다. 찬양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시간을 뚫고 이 땅 가운데 오셨네
우리 없는 하늘 원치 않아 우리 삶에 오셨네
자신의 편안 버리고 우리게 평안 주셨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삶에 오셨네
(합창)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네
꿈 없는 우리에게 그 나라 보여 주시네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힘 없는 우리의 인생을 위로 하시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 빛이신 그분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The one who is the true light, who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 (요한복음 1:9) 이 참 빛이 세상이 비치기까지 인류에게 희망이 없었습니다. 참 평화가 없었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비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김강현의 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뚫고’ 이 땅에 들어 오심으로 말미암아 꿈이 없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두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언더우드는 뉴저지에 있는 뉴 브런스윅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26살의 청년이었고, 아펜젤러 역시 뉴저지에 있는 Drew 신학대학을 졸업한 27살의 청년이었습니다. 이 두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덕분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뀌고, 저와 여러분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펜젤러가 조선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 날에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시간을 뚫고’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처음부터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And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ternal Father, Prince of Peace).” (이사야 9:6)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신 분이지만, 특히 ‘평화’에 대하여는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신 (preeminent) 분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전문가입니다. 이 말이 ‘Prince of Peace (평화의 왕)’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누가복음 2:14)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하셨습니다.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뻐하셨습니다. 마태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3).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겸손 사람의 예로 ‘목자들 (shepherds)’을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46:34). 아마도 목자들의 몸에서 동물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유목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농경문화에 적응하게 되고, 그 때부터 목자는 천대 받는 직업이 되었습니다. 원래 겸손을 말하는 ‘humble’이라는 말이 라틴어 ‘humilis’라는 말에서 왔는데 이 말은 ‘lowly’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교황이 266대 프랜시스 교황입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입니다. 그의 언행이 이전의 교황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이 분이 교황이 되면서 많은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그가 사제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Be shepherds with the smell of sheep).”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그 사람이 참 목자이고,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비로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God opposes the proud but favors the humble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야고보서 4:6) 하나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겸손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샬롬 (shalom)’입니다. 여러분, ‘샬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고, 빠진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리고 “주께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다윗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샬롬’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창조자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everyone has sinned; we all fall short of God's glorious standard. Yet God, with undeserved kindness, declares that we are righteous. He did this through Christ Jesus when he freed us from the penalty for our sins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도 안 되는 친절을 베푸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23-24) 요한은 이 사실을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요한일서 4:10-11)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복음 5:9)”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을 뚫고’ 이 역사 속에 들어 오셔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는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이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화의 창조자들 (peacemakers)’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해야 하는 ‘평화’는 단순한 ‘peace’가 아니라 ‘샬롬 (Shalom)’입니다.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창조자들은 꾸준하게, 포기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하나님의 샬롬’을 창조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크리스천으로 사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악으로 악을 갚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평화의 창조자 (peacemaker)’로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끝으로,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같이 읽겠습니다.

평화의 기도 (Prayers for Peace)- 성 프랜시스 (St. Francis, 1182-1226, 이탈리아)

주여, 나를 주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Thy peace;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error, truth;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oubt, faith;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espair, hope;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and Where there is sadness, joy.
오 주님,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게 하시고,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To be loved as to love;
왜냐하면, 줌으로써 받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용서하는 것이 용서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And it is in dying to ourselves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Amen.


12/1/2019 | 대강절 첫째 주일

(1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Wanting, Hoping And Praying) / (2부) 기다리는 사람들 (People Who Are Waiting)

(1부) 출애굽기 19:5-6 / (2부) 말라기 3:1-5


11/24/2019 | 추수감사절 메시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I) To Live As A Christian

데살로니카전서 5:16-24

‘플리머쓰 락 (Plymouth Rock)’이란 말을 들어 보셨지요?  ‘플리머쓰’는 보스턴에서 동남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타운입니다. 차로 가면 50분 정도 가야 합니다.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 플라워 (Mayflower)’ 호가 도착한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커다란 돌에 ‘1620’이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이 돌을 ‘플리머쓰 락’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타운이 잘 형성되어 있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는 허허 벌판이었습니다. 이곳 신대륙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플리머쓰’에 도착한 이들을 반겨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해 겨울을 보내면서 추위에 굶주린 청교도들이 절반이 죽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들 청교도들에 의해서 ‘추수 감사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감사의 본질(本質)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감사는 모든 것이 풍족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아굴 (Agur)’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거짓말 하지 않고 살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꼭 필요한 양식만 공급해 주십시오. 너무 가난하면 남의 것을 훔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염려가 됩니다. 너무 풍족하여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까 걱정입니다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Give me just enough to satisfy my needs. For if I grow rich, I may deny you and say, “Who is the Lord?” And if I am too poor, I may steal and thus insult God’s holy name).” (잠언 30:7-9) 그는 인간의 본능 속에 들어 있는 ‘교만 (pride)’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패한 사람이 불쌍한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이 위험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실패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생각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36편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26절까지 있는데요. 이 시편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예배 시간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시편 같습니다. 인도자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는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배자들이 한 목소리로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그 시편대로 감사의 고백을 해 볼까요?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2절) “홀로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는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4절)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스라엘을 이끄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12절)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가게 하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16절) “우리가 비천한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셨던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23절) “모든 피조물에게 음식을 주시는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25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26절)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홀로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행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가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합당한 응답 (response)은 “그의 진실하신 사랑은 영원합니다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라는 고백입니다. ‘faithful love’라는 말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형식적이거나 거짓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세월이 가도 변함이 없이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데살로니카전서 5장 본문 말씀은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데살로니카전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성경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 시기를 A.D. 50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을 하던 중에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편지의 특징은 다른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Christ’s return)’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카전서는 기록된 때가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불과 17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17년이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911 테러 사건이 2001년에 일어났거든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전 지금도 그 날 아침 일이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아침에 집에 있는데, 어떤 교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얼른 TV 좀 보세요!”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하고 TV를 켰습니다. 비행기 한 대가 뉴욕을 빌딩 사이를 비행하더니 그대로 빌딩으로 돌진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그대로 목격했습니다. 그 빌딩이 ‘쌍둥이 빌딩 (The Twin Towers)’이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다시 World Trade Center 건물이 섰다고 하는데, 전 보지는 못했습니다. 18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데살로니카전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때가 아직 생생하게 기억날 때 기록된,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바울의 편지입니다. 제가 이 말을 강조하는 것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예수님의 기억이 머리 속에 생생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곧 오겠다고 약속을 했거든요 (사도행전 1:11)? 그러니까 바울이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쓴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기대감이 충만한 상황에서 쓴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종말의 시간 (the eschatological time)’ 혹은 ‘종말의 상황 (the eschatological context)’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꼭 그런 상황 속에 있거든요? 다음 주가 ‘대강절 (Advent)’의 시작입니다. ‘대강절’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2,000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고, 이제 다시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대와 설레임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종말의 시간’이거든요? 이 시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바울은 이 세 가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의 삶에서 지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고, 이 세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는데, 항상 어느 상황에서나 기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Jesus)’라는 말이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who belong to Christ Jesus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이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늘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가 같이 한 목소리로 “그의 진실하신 사랑은 영원합니다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로마서 5:8)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쏟아 부어졌다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in Christ Jesus, 로마서 5:5)”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사랑을 마치 하늘에서 소나기가 퍼붓듯이, 우리 마음에 그렇게 쏟아 부어졌습니다.

요즘에 제가 조명섭이라는 한국의 트롯트 가수에게 푹 빠졌습니다. 조명섭은 21살된 청년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현인, 박인수 같은 옛날 가수들의 노래를 잘 부릅니다. 조명섭은 어린 시절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인지 3살부터 9살까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노래를 좋아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다리에 장애가 있습니다.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하면서 그의 생에 큰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인터뷰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의 인생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빵점도 안 되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런 상을 받으면서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는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소나기처럼 쏟아 부어 주실 정도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슬픈 일이 있다고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요?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외롭고 슬프다고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항상 우리의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감사할 일이 없다고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여기서 ‘감사함으로’라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모든 환경에서, 모든 상황에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아까 위에서 읽었던 시편 136편 16절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가게 하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불평과 원망이 많았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40년을 살았으니까 그럴 만도 합니다. “Give thanks to him who led his people through the wilderness.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광야생활이 지치고, 고단하고, 아프고,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하루 하루가 버거운 날이었지만,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때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하여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광야생활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산교육을 광야에서 경험했습니다.

감사절은 오늘 하루로 지나가지만,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계속해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로닉하게도 지금 세대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밤이 깊으면 별이 더 빛난다고 했습니다.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