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2019 | 창립 41주년 기념예배 메시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VI) To Live As A Christian

사도행전 20:17-28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1주년을 맞이 하는 주일입니다. 창립주일이면 그 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설교를 해야 되기 때문에 설교자로서 “과연 무슨 설교를, 무슨 내용을 설교해야 하느냐?” 하는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제가 선택한 말씀이 오늘 읽은 사도행전 20장 말씀입니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 2년, 2차 전도여행 3년, 3차 전도여행 5년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밀레도 (Miletus)’라 곳에 도착합니다. 어떤 사람이 1차에서 3차에 걸쳐 바울이 여행했던 거리를 계산해 보았더니, 그 거리가 무려 12,000km나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을 느꼈던 말씀이 있습니다. “In fact, my visit to you has been delayed so long because I have been preaching in these places. But now I have finished my work in these regions, and after all these long years of waiting, I am eager to visit you. I am planning to go to Spain, and when I do, I will stop off in Rome. And after I have en-joyed your fellowship for a little while, you can provide for my journey.” (로마서 15:22-24) 이제 이 지역에서 나의 사역을 마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곳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의 복음의 열정에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부릅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약 45km 떨어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시입니다. ‘밀레도’는 B.C. 5세기경 그리스에 멸망할 때까지 천 년 역사를 자랑할 만큼 일찍부터 문명화되었으며, 그 결과 아폴로 신전, 경기장, 야외극장 등 문화, 종교 시설들이 많았던 도시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부탁한 말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선교사로서 이렇게 살았다고 자신의 삶을 고백합니다.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겸손하게 눈물로 섬겼다는 것과, 그리고 누구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고 필요한 것은 스스로 일해서 얻었다고 합니다 (17-19, 33절). 둘째로, 그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감옥과 환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22-23, 25절). 셋째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다 할 수 있다면 자기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합니다 (24절). 넷째로, 그는 자신이 전파했던 메시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21절), 줄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고 (21, 25절),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27절). 다섯째로, 그는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먼저 자신을 잘 살피고 맡겨진 양 떼를 잘 살피고 돌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돌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교회를 맡긴다고 합니다 (28, 32절).

바울이 남긴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만, 저는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한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 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24절) “내가 나의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2,000년 전에 살았던 바울이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고백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제가 감히 말씀 드립니다만, 오늘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사명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제가 선물이라고 말씀 드리는 이유는, 이 사명이 너무나 고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전파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골로새서 3:1-2) 모든 인간은 ‘땅의 것 (the things of earth)’에 마음을 두고 삽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삽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직장에서, 더 많은 샐러리를 받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땅에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지 않나요? 아닙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은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속한 것 (the things of heaven)’에 마음을 두고 삽니다. 정말 굉장한 말씀 아닙니까? 모두가 땅을 바라보면서 사는데,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 때,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지새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열 두 명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One day soon afterward Jesus went up on a mountain to pray, and he prayed to God all night. At daybreak he called together all of his disciples and chose twelve of them to be apostles. Here are their names).” (누가복음 6:12-13) 와! 정말 굉장한 말씀입니다. “여기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면서 열 두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여러분께 드리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왜 열 두 명을 부르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명에게 제자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도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사람을 부르실 때 제자의 삶에 방점(傍點, operative word)을 찍으신 것이 아니라 사도의 삶에 방점을 찍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처음부터 세상에 나가서 사도의 삶을 살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사도의 삶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everyone.” (마가복음 16:15)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세상 구석 구석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to get involved in)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에 속한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려 주라. 이것이 너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여러분, 왜 이런 말씀들이 오늘 우리에게 공허하게 들릴까요? 세상의 유혹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 강합니다. 물질적인 유혹이 너무나 강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었지만, ‘땅의 것’에 마음을 쏟으라는 유혹을 이기기가 힘에 버겁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땅의 것’에 마음을 쏟고 사는데, 어떻게 나만 다른 방식의 삶을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삶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타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도 중요하지만, 우리 시대에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말로 ‘통합적인 선교 (integrated mission)’라고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는 전통적인 선교 방식과는 다른 선교 방식입니다. ‘통합적인 선교’에는 보내는 사람과 보냄을 받은 사람 사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설교에서 했던 말씀은 교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 떼를 잘 살피고 돌보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8절) 그는 교회를 가리켜 ‘His church, purchased with His own blood (그의 피로 사신 그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the people of God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이고 ‘the people of God’입니다. 여러분은 케임브리지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 값을 주시고 사신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마지막 공식 설교에서 교회에 대한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회의 미래가 걱정 되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Cheap grace is the grace we bestow on ourselves.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without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 Cheap grace is grace without discipleship, grace without the cross, grace without Jesus Christ, living and incarnate. Costly grace confronts us as a gracious call to follow Jesus, it comes as a word of forgiveness to the broken spirit and the contrite heart. It is costly because it compels a man to submit to the yoke of Christ and follow him; it is grace because Jesus says: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값싼 은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은혜이다.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용서에 대한 설교이며, 교회의 훈련을 받지 않고 받는 세례이며, 고백이 없이 참가하는 성만찬이다. 값싼 은혜는 제자직이 없는 은혜이며, 십자가 없는 은혜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가 없는 은혜이다.....값비싼 은혜는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은혜로운 부름이다. 이 부름은 깨지고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에게 용서의 말씀으로 주어진다. 이 부름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은혜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The Cost of Discipleship (제자직의 대가, 1937)

본회퍼의 이 책이 1937년에 출판되었습니다. 82년이 지난 지금 본회퍼의 설교는 우리들의 삶에서 모두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회퍼는 교회의 미래를 예측했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 값을 주시고 사신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값싼 은혜에 빠져 회개가 없고, 십자가가 없는 값싼 설교에 길들어 제자직를 잃어 버릴 것이라고 그는 예측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교회의 이런 점을 걱정했는지도 모릅니다.

창립 41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값싼 은혜’에 길들어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도 ‘제자직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믿음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자직의 대가’를 설교하면서 화가 난 얼굴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울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교회를 부탁한 것처럼, 지도자들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도자들의 사명은 먼저 자신을 ‘guard’하고 교회를 ‘guard’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먼저 자기 속에 ‘값싼 은혜’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오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값싼 은혜’를 즐거워하는 풍조가 들어오지 않도록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feed’하고 ‘shepherd’해야 합니다 (28절). 교회를 양육하는 일에 교회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훌륭한 크리스천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간사들은 내가 맡은 팀에서 그런 사람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이 먼저 ‘제자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가족장, 간사, 팀장들이 ‘값싼 은혜’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보스턴의 청년사역의 마지막 보루(堡壘, sconce)입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사역이 무너지면 보스턴의 청년 사역이 무너집니다. 41주년이면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나이만큼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과 사명에 충실한, 성숙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0/6/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V) To Live As A Christian

디모데전서 4:12-16

오늘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시리즈 설교 다섯 번째를 맞이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비정상적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5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더욱 자랐고,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esus grew in wisdom and in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all the people.” ‘stature’라는 말은 키 (height)라는 뜻도 있지만, ‘the degree of development of a person (한 인격체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정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신체적인 면에서나, 지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 또 감정적인 면이나 정서적인 면에서 훌륭하게 잘 성장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영감이 무엇입니까? 크리스천은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누가 썼는지 그 저자를 모른다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히브리서의 기록 연대를 대략 65-70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대 화재 사건이 64년에 일어난 것을 감안한다면, 히브리서가 기록된 때는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 때 히브리서 저자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신자들에게 우리의 믿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편지로 씁니다. “여러분은 벌써 오래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가르칠 만도 한데 아직도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도 채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큼 크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젖만 먹는 갓난 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젖만 먹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사람들입니다 (You have been believers so long now that you ought to be teaching others. Instead, you need someone to teach you again the basic things about God's word. You are like babies who need milk and cannot eat solid food. For someone who lives on milk is still an infant and doesn't know how to do what is right. Solid food is for those who are mature, who through training have the skill to recognize the difference between right and wrong).” (히브리서 5:12-14)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히브리서 저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날로 험해 가는데, 크리스천들은 여전히 어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들이 모진 핍박을 견뎌 낼 것인가?” “과연 이 사람들이 교회를 지켜 낼 것인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줄 모르는 이 사람들이 과연 세상에 나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될 것인가?” 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말은 ‘성숙한 크리스천 (a mature Christian)’이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자라서 성숙한 믿음을 가져야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고,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능력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큰 자산 (assets)이 아닌가요? 학교에서 공부 잘한다고 해서 이런 능력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공부는 잘하는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모르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 아닙니까?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한국에 나갔다가 청년 사역으로 유명하다는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정말 청년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청년들이 그 말씀을 조용하게 듣습니다. 특별한 메시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설교자가 믿을 만한 곳에서 얻은 정보라고 하면서 이번 주에는 무슨 무슨 주식이 올라가니까 그 주식을 사라고 합니다. 나중에 들은 말입니다만, 그 목사님이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경영학인가 뭔가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불타 있는 청년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소스를 제공함으로써 청년들의 야망이 타오르도록 기름을 붓고 있었습니다.

돈 많이 벌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성공의 길을 알려 주는 일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과 악,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제가 늘 청년들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곳 보스턴에 왔으니 여기서 최고의 학문을 공부하라고요. 보스턴에 하바드와 엠아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스턴에 있는 학교들은 모두 훌륭합니다. 모두 좋은 학교들입니다. 제가 보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하바드 스퀘어에 있는 ‘Episcopal Divinity School’라고 하는 작은 학교에서 한 과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학교에 비하면 학교 사이즈가 아주 작습니다. 도서관도 작습니다. 그런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학교의 커리큘럼을 봤더니 장난이 아닙니다. 과목 별로 그 분야의 최고 신학자들이 와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스턴에 있는 학교들이 다 좋고 훌륭합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세계 수준의 학문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성숙한 크리스천 (a mature Christian)’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성숙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까? 대답은 성경 속에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모두 바울이 제자 데모데 (Timothy)에게 쓴 편지입니다. 편지 내용은 목회에 필요한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 중에 목회자로서 디모데 개인에게 쓴 충고의 내용들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 12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대가 젊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그대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십시오 (Don't let anyone think less of you because you are young. Be an example to all believers in what you say, in the way you live, in your love, your faith, and your purity).” 전에도 한번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디모데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30살을 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여러가지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만, 요약하면, 네가 발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15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온 맘을 다해 충성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Throw yourself into your tasks so that everyone will see your progress).” 다른 번역성경에는 ‘so that your progress may be evident to all (NASB)’ ‘so that everyone may see your progress (NIV)’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아, 저 사람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게,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구나!” 이렇게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성만찬주일’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크리스천교회들이 같은 날을 정해 놓고 성만찬 예식을 갖습니다. 이렇게 성만찬을 하는 이유는 주님의 몸인 빵과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함께 먹으면서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누가복음 22:19)”고 하셨습니다. ‘remembrance’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 말로 ‘기념’ 혹은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을 잊지 말고 실천에 옮겨라,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잊지 말라고 너희들의 삶에서 나타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예식을 통해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해야 합니다 (For every time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proclaim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고린도전서 11:26).” 여러분, 이것이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기념한다는 말의 뜻입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주님의 성만찬 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왠지 공허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저에게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I don't have any silver or gold for you. But I'll give you what I hav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the Nazarene, get up and walk!” 사도행전 3:6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한마디로 예루살렘이 뒤집히고 난리가 났거든요. 1세기의 사도들에게는 ‘내게 있는 것 (what I have)’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세상에 나가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정말 부끄럽고 안타까운 것은 오늘 우리에게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what they have’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진리를 세상에 proclaim하는 것이 성만찬을 갖는 의미라고 말했는데, 오늘 우리 안에서 세상을 향해서 선포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고, ‘십자가의 메시지’가 없습니다. A. W. 토저 (A. W. Tozer, 1897-1963)의 말이 생각납니다. “We have sold out to carnal methods, carnal philosophies, carnal viewpoint, carnal gadgets and have lost the glory of God in our midst. We are a starved generation that has never seen the glory of God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들과 세상적인 철학들과 세상적인 관점과 세상적인 기계들에게 우리 자신들을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적이 없는 허기진 세대입니다).” 토저 목사님의 이 예언자적인 말씀인데, 오늘 우리에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와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했던 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네가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해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aspiration), ‘strong desire’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에게 이 열망이 있는 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 열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고, 우리 안에 이 열망이 없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상, 다른 주장과 타협해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향해 아무 것도 선포할 것이 없는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우리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끊임없이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성장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Focus on reading the Scripture to the church (13절)”란 말씀이 나옵니다. 마음 속에 성장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은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성경을 알고자 하는 진지하고 적극적인 마음이 느껴집니다. 기도를 해도 마음에 성장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건성으로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과 진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마음도 다르고 기도하는 태도도 다릅니다.

정말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교회가 이런 성장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열망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 이 열망을 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망이 열매를 맺어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서도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구별합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합니다. 진실과 거짓이 싸울 때에는 서슴지 않고 진실 편에 섭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 속에 ‘what I have’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세상을 향해 선언할 메시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9/29/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IV) To Live As A Christian

마태복음 5:13-16

오늘날처럼 크리스천의 의미가 혼동 스러운 때가 과거에 없었습니다. 과거에는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의미가 분명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서구의 발전된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던 때가 있었고,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생각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또 크리스천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겼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크리스천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축소되었습니다. 사회적인 영향력이 미미해졌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실리면 “또 교회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나 보다” 이런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 세습’에 대한 뉴스가 실렸습니다. 며칠 전에 그 교회가 속한 교단 (denomination)의 총회가 열렸습니다. 총회에서 그 교회의 ‘담임 목사 세습’이 정당한지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총회 대표들은 사회적인 인식과 동떨어진 세습이 정당하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연일 뉴스에 오르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이 과거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벌써 저만큼 생각하고 있는데, 교회는,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을 높이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는 정반대로 교회가 구태의연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그 대형교회의 그런 결정은 한 교회의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민낯을 세상에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속해서 이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You are salt of the earth)!” (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14절)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저의 눈에는 ‘of the earth’ ‘of the world’라는 말이 들어 옵니다. ‘of’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eposition used to indicate spe-cific identity or a particular item within a category (그 범위 안에 있는 특별한 정체성이나 특정한 물건을 가리키는 전치사로 사용된다)’ 이 말을 예수님의 말씀에 적용해 보면, 크리스천은 세상에서 소금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 빛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크리스천은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소금으로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하고, 크리스천은 언제, 어느 곳에서도 빛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정체성은 ‘짠 맛 (salty flavor)’을 내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짠 맛’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짠 맛’이 들어가면 썩지 않습니다.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소금에 절여서 오랫동안 먹거리들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제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왜 그렇게 음식들이 짠지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사서 먹는데, 맛은 있는데, 왜 그렇게 짠지, 엄청 짰던 생각이 납니다. 마켓에서 감자 칩 (potato chips)을 사 오면 왜 그렇게 짠지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대한 생각들이 높아져서 ‘salty’한 것도 있지만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unsalty’한 것도 있고, 소금이 적게 들어간 ‘less salty’한 것들도 다양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먹는 고추장, 된장도 얼마나 짭니까? 엄청 짭니다. 그런데, 짠 것이 건강에 나쁘다는 생각들이 많아지니까 고추장, 된장도 소금을 많이 넣지 않은 ‘less salty’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시지요?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나왔습니다만 ‘차마고도 (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중국의 내륙지방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험하고 험한 산중에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자동차가 없었겠지요. 그 험한 절벽에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고, 말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 길로 상인들이 지나다니면서 차 (tea)와 생활 필수품들을 사옵니다. 다큐에 나오는 한 마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첩첩 산중 마을에 한 우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이 깊은 지하에 있기 때문에 물을 퍼 날라야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우물에서 소금물이 나옵니다. 마을의 여자들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소금물을 길어 올라와서 염전(鹽田)에 붓는 일을 계속합니다. 소금을 만들어 자기들도 사용하고, 그 소금을 팔아서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천은 이렇게 세상에서 소금의 짠 맛을 유지해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지켜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은 짠 맛을 유지해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야크 (yak)’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소처럼 생긴, 초원에 무리 지어 사는 야생동물입니다. 그 사람들이 ‘야크’를 길들여서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고, 고기도 먹고, 가축을 이용하고, 물건을 나르기도 합니다. 이 야생동물들이 사람에게 길이 들어 도망가지 않습니다. 이 야생동물들이 사람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소금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초원에서 풀을 뜯는 ‘야크’가 소금을 섭취하기 어려운데, 사람들이 소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 때문에 길이 들어 사람을 떠나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합니다. 재미 있기도 하지만, 조금 슬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3절) 지금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들이 소금의 짠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빛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서의 크리스천의 역할을 ‘산 위에 있는 동네 (도시), a city on a hilltop)’에 비유하셨습니다. ‘산 (언덕) 위에 있는 동네’는 멀리서도 잘 보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 교회를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언덕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고된 일을 하다가 멀리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를 보면서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얻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은 빛으로서의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등잔 위에 있는 램프 (The lamp on a lamp stand)’에 비유하셨습니다. 램프를 켜서 등잔 위에 올려 놓아야 방 전체를 밝힐 수 있습니다. 바닥에 내려 놓거나 뭘로 덮어 놓으면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하고, 등잔 위에 올려 놓은 램프와 같이 주변을 밝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너 교회에 나가니?” “응.” “그런데 왜 나에게 말 안 했어?” “네가 안 물어 봤잖아? 물어보면 말하려고 했지.”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아니, 교회에 나가세요?” “예. 뭐.....” “그렇군요. 전 전혀 몰랐어요.”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이 대화에 어디가 잘못된 곳이 있습니까? 잘못된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언덕 위에 세워진 마을’처럼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고, 등잔대 위에 올려 놓은 램프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16절) “이와 같이, 너희의 선한 행동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비치도록 하여라.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여라.”

요즘에 ‘선한 영향력 (good influence)’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주변에, 내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그 때는 아무도 이 편지 한 장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줄 몰랐습니다. 이 아이는 집에 와서 선생님이 줬다고 하면서 이 편지를 엄마에게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편지를 한번 훑어 본 후에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이 아이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입니다. 이 아이를 가르칠 좋은 선생님이 없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엄마는 선생님의 말을 따랐습니다.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엄마는 천재인 자기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엄마가 떠난 지 수년이 지나 아들은 유능한 발명가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엄마가 남긴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유품 중에 오래 전에 학교 선생님이 엄마에게 보냈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그 편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우리 학교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이 아이에게 퇴학 처분을 내립니다.” 아들은 그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만들었다.”

우리는 ‘선한 영향력’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만 가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패했습니다. 썩었습니다. 어둡습니다. 그 어머니의 저능아 아들처럼 절망적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저능아인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아시지요? 이사야 (Isaish)가 보았고, 하박국 (Habakkuk)이 보았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말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듯이, 그 땅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 찰 것이다 (As the waters fill the sea, so the earth will be filled with people who know the Lord).” (이사야 11:9, 하박국 2:14) 두 선지자가 살았던 기원전 700-600년은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입에서 “세상이 다 그렇지 뭐”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서로가 소금을 지니고 화목하게 지내라.” (마가복음 9:50)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for seasoning. But if it loses its flavor, how do you make it salty again? You must have the qualities of salt among yourselves and live in peace with each other.”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소금으로서 ‘qualities (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계속해서 세상에서 빛의 ‘quali-ties’를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지는 삶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내가 소금의 qualities, 내가 빛의 qualities를 유지하고 있는지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9/22/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III) To Live As A Christian

요한복음 13:12-17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여러분과 세 번째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냥 주일날 교회 나간다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한다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Christian’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 봤더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 ‘a person who exhibits a spirit proper to a follower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정신을 보여 주는 사람)’ (2) ‘a person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 (신념)을 고백하는 사람)’ (3)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말씀)을 그의 삶에서 증명할 수 있는 사람) 비록 사전에 나오는 간단한 정의 (definition)이지만, ‘크리스천’이 어떤 사람들인지 핵심적인 내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속에 우리가 따라야 하는 신념이나 가치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 희망, 사랑, 기쁨, 평화, 선 (goodness), 자비 (mercy), 동정 (compassion), 이타심 (利他心, unselfishness), 겸손 (謙遜) (humility), 섬김 (service), 용서 (forgiveness), 화해 (reconciliation), 십자가, 고난 (suffering), 회개 (repentance), 거듭남 (born again), 구원 (salvation), 천국 (the Kingdom of God), 이런 것들이 크리스천들이 믿음을 가지고 따라야 할 가치들 (values)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이런 가치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죄송하지만 크리스천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전에 ‘전도폭발 훈련’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 나갔습니다. 가까스로 그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비록 전쟁에 이기긴 했지만 자기 군사들에게도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군인들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전쟁 중에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앞에 전쟁 중에 도망쳤던 앳되게 보이는 한 청년이 붙들려 왔습니다. 이 청년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어린 아이가 전쟁에 나왔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얘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라고, 네 이름이 뭐라고?” 놀란 이 청년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는 이 청년의 멱살을 잡고 “야, 이 놈아,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당장 네 태도를 바꿔라!” 이렇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우리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여 주는 가치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가치들을 실천하지 않으려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야 합니다. 목회 경험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만하면 교회생활을 잘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목숨까지는 몰라도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을 버려야 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If any of you wants to be my follower,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가복음 9:23)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selfish ways (이기적인 삶의 방식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hypocritical Christians (위선적인 크리스천)’이 됩니다. 결코 진실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또 무슨 일을 보면든지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라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daily)”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더니,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자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고 하는데, 베드로가 강력하게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 말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고요? 그럼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우리는 그 당시 유대나라의 풍습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나라는 기후가 건조합니다. 비가 내리는 우기(雨期)가 잠깐 있긴 합니다만, 그 외에는 비가 오지 않는 건조한 기후입니다. 그래서 밖에 외출하고 들어오면 손과 발이 먼지 투성이가 되기 때문에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여기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외출하고 돌아 오면 반드시 발을 씻고,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도록 율법에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을 ‘유대인의 정결예식 (the Jewish custom of purificatio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나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는 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6). 주인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그 집 하인들이 주인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어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행한 일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이해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그런데, 내가 너희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Do you understand what I was doing? You call me `Teacher' and `Lord,' and you are right. I,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ought to wash each other's feet. I have given you an example to follow. Do as I have done to you.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 (12-15, 17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고 생각 하면서 가볍게 지나갑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이 일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또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섬김 (service)’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섬김’은 제자가 선생의 말을 씻어주는 ‘섬김’이 아닙니다. 또 하인 (servant)이 주인 (Master)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입니다. 주인이 하인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행해지고 있던 풍습, 그 당시에 행해지던 관습을 혁신적이라고 할 만큼 완전히 뒤집어 엎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본을 따라 ‘섬김의 삶’을 실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남김 없이 다 내주고 빈 손으로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용하던 방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 왜 이 사람이 이런 삶을 살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독일 사람이, 남자도 아닌 여자가, 아무 연고도 없는 조선이라는 미지 (未知)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남김 없이 자신을 내 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겠다는 이유 밖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쉐핑 (Eliz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입니다. 32살의 나이에 조선에 들어와 22년 간 조선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54살의 나이에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또 한 사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입니다. 그는 평생 아프리카의 탐험가로,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그 당시 유럽은 아프리카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미개한 땅으로만 알았습니다. 리빙스턴의 노력으로 아프리카의 지도가 그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글래스고 (Glasgow) 대학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얼마든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아프리카로 건너가 60살의 나이에 아프리카 ‘잠비아 (Zambia)’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버리고 그 같은 삶을 선택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I am a missionary, heart and soul. God had an only Son and He was a missionary and a physician, I am a poor, poor imitation of Him, or wish to be. In this service I hope to live; in it I wish to die (나는 마음도 영혼도 선교사입니다. 하나님께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분 역시 선교사이셨고, 의사였습니다. 나는 겨우 겨우 그분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난 그분을 닮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섬김을 계속하면서 살다가 죽기를 원합니다).” 또 그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People talk of the sacrifice I have made in spending so much of my life in Africa. It is emphatically no sacrifice. Say rather it is a privilege (사람들은 내가 나의 생의 많은 시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고 나의 희생에 대하여 말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전혀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누린 특권이었다고 말해 주십시오).”

‘섬김 (service)’의 삶은 주님을 따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humble position of a servant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겸손한 종의 위치를 가지셨습니다).” (빌립보서 2:6-7)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자기가 어렵게 소유한 것을 성공의 발판으로, 출세의 기회로 삼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을 죽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주님의 겸손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손길을 통해서 진정한 ‘섬김의 삶’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이것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살아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유혹이 생길 때마다 자신들의 발을 씻어 주신 주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준 섬김의 본을 잘 깨닫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churchgoer (습관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 a person who goes to church habitually)’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9/15/2019 |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If God Is For Me

창세기 39:1-6

여러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들어 보셨습니까? 영어로 ‘조셉 (Joseph)’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에 “May God add or increase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기를)”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들 이름을 ‘요셉’ (Joseph)’이라고 지은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 아들이 성경에 나오는 ‘요셉’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축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Genesis)에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30장부터 50장까지, 무려 21장이 한 사람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기록한 분량이 많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요셉’의 경우는 그에 대한 기록의 분량도 많고, 또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성장기를 매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위로 형이 열 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라헬 (Rachel)과 그 언니 레아 (Leah)라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언니 레아는 남편 야곱 (Jacob)이 라헬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아기라도 많이 낳아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레아는 열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도 자식을 낳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릴 거예요 (창세기 30:1)” 하면서 남편을 졸랐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해서 라헬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요셉’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끔찍하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급기야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요셉’은 은 20세겔 (shekels) (8 ounces에 해당, 140불 정도)에 팔렸다고 합니다 (창세기 37:28).

그 때 ‘요셉’의 나이가 열 일곱 살이었습니다. 열 일곱 살이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생 정도 되었을 나이입니다. 아직도 부모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때인데,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 것입니다. ‘요셉 사건’으로 야곱의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날마다 슬픔에 잠겨 살았습니다. 형들은 형들 대로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 역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요셉’에게 맞춰진다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어린 ‘요셉’이 이집트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 왔으니 남들처럼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말이 다른 이집트에서 ‘요셉’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나오는 사실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을 하거나, 아니면 통역(通譯, interpreter)을 세워야 의사 소통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42:23).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노예로 팔려 온 ‘요셉’의 고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때 ‘요셉’의 고생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성경에는 ‘요셉’의 고생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주인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모든 일에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His master saw that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the Lord gave him success in everything he did).” (창세기 39:2-3) ‘his master (그의 주인)’는 ‘보디발 (Potiphar)’이라는 이집트 사람을 말합니다. 보디발은 ‘an Egyptian officer, the captain of the guard for Pharaoh (이집트의 관리, 이집트 왕 바로의 경호실장)’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보디발이라는 사람이 괜히 바로의 경호실장이 아니구나! 보디발에게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또 하나는 “도대체 ‘요셉’의 이야기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끝이 날 것인가?” 하는 기대감입니다.

요즘에 ‘소향’이라는 한국 가수의 노래를 많이 듣습니다. 특히 ‘소향’이 부른 노래들에 대한 외국 vocal coaches (노래 코치들)의 분석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소향’이 휘트니 휴스턴 (Whitney Elizabeth Houston, 1963-2012)이 부른 ‘I Have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을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 보컬 코치들에게 소향의 ‘I Have Nothing’을 분석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컬 코치들은 이 노래는 휘트니 휴스턴 말고는 부를 사람이 없는 노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가 어렵기도 하지만 휘트니 휴스턴 보다 더 잘 부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노래를 터키의 ‘엠레 (Yücelen)’라는 보컬 코치가 분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와, 처음 시작이 잔잔하게 나가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완벽한 두성 (head voice)입니다. 마치 이제 곧 일어날 엄청난 일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파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연 소향이 그 부분을 휘트니 휴스턴 보다 더 잘 부를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실력자 보디발의 집에 팔려 온 것은 앞으로 일어날 엄청난 일들의 서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디발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자기 집에 팔려 온 히브리 노예 소년 ‘요셉’이라는 사람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야, 요 녀석,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보디발은 ‘요셉’에게 이 일 저 일을 시켜 봅니다. 집안 일도 시켜 보고, 농사 일도 시켜 보고, 가축을 돌보는 일도 시켜 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시킨 일마다 다 잘 되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들었는데, 요 녀석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분명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의 집안 일을 모두 맡겨버립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하여 보디발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보디발은 자기가 먹는 음식 말고는 ‘요셉’이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았습니다.” (6절) 여러분,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히브리 노예 소년 ‘요셉’에게 그 엄청난 재산, 그의 집안 일을 완전히 맡겨 버리고 일체 참견하지 않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 때 ‘요셉’의 나이가 겨우 스무 살 안팎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십시오. 지금 성경은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 옴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요셉’에게 이집트로 팔려 오는 불행한 일이 없었더라면 성경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편안한 삶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비록 그것이 편안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누가 그런 드라마를 보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루브 (groov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홈’ 혹은 ‘골’이라는 뜻입니다. “그 음악에 그루브가 있다, 없다”이런 말들을 하거든요? 아무리 박자와 리듬을 잘 맞춰서 정확하게 연주해도 박자와 리듬에 변화를 주는 그루브가 없으면 재미 없고 지루한 음악이 되고 맙니다. 골프 클럽에도 ‘groove’가 있거든요? 골프 클럽 헤드에 길게 옆으로 패인 홈들이 있는데, 이 홈들을 ‘groove’라고 합니다. ‘groove’ 덕분에 공을 때리는 순간 마찰력이 생겨 그린 위에 멋지게 공을 세우거나 백스핀을 넣어서 공을 딸려오게 만드는 묘기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삶은 ‘groove’가 많은 삶입니다. 고난과 우여곡절이 많은 삶입니다. 여기 저기 패인 ‘홈’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요셉’의 삶 속에 개입해 들어오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The Lord was with Joseph)”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까 ‘요셉’의 삶 속에 난 그 수많은 ‘grooves’는 오히려 ‘요셉’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보스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여러분의 앞날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힘든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여러분이 보스턴에 왔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보스턴에 오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삶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쓰시는데 ‘groove’가 꼭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겪게 되는 ‘groove’ 속에 여러분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요?” 하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They are plans for good and not for disaster, to give you a hopeful future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을 알고 있다. 그 계획은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는 좋은 계획이다).” (예레미야 29:11) 이 말씀에 나오는 ‘너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the people of God)’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이 사람들은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을 보스턴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보스턴 생활에서 겪게 될 수많은 ‘grooves’는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를 드라마틱 하게 만들어 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일들이 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은 7년 기근 (famine)으로 고통을 받던 식량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합니다. 모든 나라들이 양식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이집트로 돈을 싸 들고 몰려 옵니다. ‘요셉’ 덕분에 엄청난 부가 이집트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의 손을 거쳐 막대한 돈이 들어오고 양식이 나갔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하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중에 찰스 스윈돌 (Charles R. Swindoll) 목사님이 쓴 ‘Joseph: A Man of Integrity and Forgiveness (순전한 믿음으로 꿈을 이룬 사람, 1998)’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감동을 받았던 책입니다. 스윈돌 목사님이 그 책 거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끝까지 요셉답게 살아야 했다. 그는 끝까지 그가 믿었던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살았다. 식량을 분배하는 일은 공정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 모든 돈은 합법적인 구좌에 입금 되었다. 아무런 뇌물도, 상납금도 없었다. 그는 해외에 비밀 구좌를 만들어 돈을 빼돌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은밀한 비자금이 없었다. ‘요셉’은 순전한 인격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였고, 이집트 사람, 가나안 사람, 히브리 사람, 기타 다른 민족들의 생존을 보장하였다. 그가 수년 전에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했을 때도, 그는 지금과 같은 성실함을 보여 주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신분과 역할은 크게 바뀌었지만, 그의 성품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p. 243)

왜 우리에게 ‘요셉’ 같은 인물이 없습니까? 안타깝습니다. 그가 받은 학위를 발판으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많은데, 왜 ‘요셉’ 같은 큰 인물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요셉’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는 우리 조국을 위해서 ‘요셉’ 같은 인물이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곳 보스턴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겪게 될 ‘groove’를 탓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grooves’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grooves’를 주목하지 말고,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