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4

크리스천의 차별의식 Favoritism in The Community of Faith

야고보서 2:1-13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절),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다.” (5절),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6절), “주인 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7절), “모든 법 위에 우선 되는 법이 있습니다.” (8절), “한 가지 계명을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다 어긴 것입니다.” (9절)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자비를 베푼 사람은 후에 아무 두려움 없이 심판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3절) 이런 말씀들이 모두 중요한 말씀들이고,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저에게는 다른 어떤 말씀보다 1절에 나오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how can you claim to have faith in our glorious Lord Jesus Christ if you favor some people over others?” 직역하면,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favor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어찌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뜻이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입니다. 로마서 8:29에는 예수님은 ‘많은 형제 중 하나님의 맏아들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한 형제 자매를 차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이 좋은 옷에 값비싼 반지를 끼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때, 옷을 잘 입은 사람에게는 “이리 와서 여기에 앉으십시오”하면서 좋은 자리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힐끗 쳐다보면서 어디 앉든지 말든지 자리에 앉혀 주지도 않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왕 옷에 대한 말씀이 나왔으니까, 옷에 대한 얘기를 잠깐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배 때 나오는 옷차림은 검소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화려하거나 값비싼 옷이 아니라 소박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내가 입은 옷으로 나의 신분을 자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같이 무더운 여름에는 자칫하면 예배자의 복장으로 적합하지 않은 옷을 입기 쉽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라운드 티에 반바지 차림으로 오면 시원하고 좋기는 하겠지만, 예배자의 복장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 복장은 좀 격식이 있는 레스토랑에는 입장도 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한국 갔다 오면서 양복을 한 벌 샀습니다. 그 양복을 입고 교회에 왔습니다. 입던 양복이 아니니까 말끔하고 단정하지 않았겠습니까? 몇 분들이 눈치를 채고 “목사님, 양복을 해 입으셨군요.” “목사님, 새 양복이 멋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와서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그래요. 그래서 “아, 예....”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또 똑 같은 말을 합니다.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뭐라고 대답할 지 몰라서 “아, 예.....” 하고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한번 더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요즘에 비싼 것은 천이 반짝 반짝 빛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아, 왜 이러세요? 이 양복 비싼 것 아닌 것 알아요. 싼 데서 샀습니다” 그랬더니 훌쩍 사무실을 나가더라고요. 그 양복 볼 때마다 그 때 그분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납니다.

인간의 3대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의식주 (衣食住)’라고 합니다. 입는 것과 먹는 것과, 사는 집입니다. 옛날에는 하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입는 것과 먹는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조금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주변에 헐벗은 사람들이 많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여전이 집이 없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잘 곳이 없어서 밖에서 자야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여전히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고,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주변에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과거처럼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식주’가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가 됩니다. 옷을 입어도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밥을 먹어도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집에 살아도 어떤 집에 사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2,000년에 쓰여진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찾고 있느냐? 그런 사람을 보려면 왕궁에 가 보아라.” (누가복음 7:25)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그 시대의 지도자들과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여러분이 옷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한다면) 여러분은 악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4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esn't this discrimination show that your judgments are guided by evil motives (그렇다면 이 차별은 여러분의 판단이 악한 동기에 의해서 내려졌다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악한 생각’ ‘악한 동기’ ‘evil motives’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교회에는 내가 친할 사람이 없어.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나하고 수준이 맞는 것 같아! 저 사람하고 친구를 해야 하겠어!” 이런 생각은 아닐까요? 그래서 결국 교회 안에서 편을 가르는 마음이 아닐까요? 

전 주에도 같은 말씀드렸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의 삶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고, 입는 것도 허름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차별 받는 이유가 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6-7절)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을 나와 아무 상관없는 말씀으로 읽고 지나가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고, 편을 가르고, 사람을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경제적인 이유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천국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5절)

한국에 손봉호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존경받는 분 중 한 분입니다.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입니다. 제가 그분의 책 중에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평신도로서 자기가 설교한 것들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그 분은 신학을 공부했지만, 목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의 성경 해석은 틀에 박히지 않은 신선한 데가 있습니다. 그분이 잠언 22:22-23 말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말아라. 가난한 사람들을 법정에서 절대로 짓누르지 말아라. 여호와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억울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 달라고 찾아올 때 이들의 하소연을 일일이 다 들어 주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신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절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기도하면 큰 일 납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이 놀랍게도 그 사람의 외모나 그 사람이 가진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오류(誤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Abraham)의 아내 사라 (Sarah)는 대단한 미인이었었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사라의 미모(美貌)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불려갈 정도였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 (Rebekah)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내가 둘이었는데, 야곱은 두 아내 중에 미모가 뛰어난 라헬 (Rachel)을 더 사랑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같은 사람들도 아내를 선택할 때 미모를 먼저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라같은 여자는 미모는 뛰어났을 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누구도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교인들을 대하면서도 지금도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우리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쳐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People judge by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사무엘상 16: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준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 (Saul)을 버리고, 이새 (Jesse)의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사무엘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들을 본 사무엘은 키 크고, 잘 생긴 엘리압 (Eliab)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같은 영적인 사람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기준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 (appearance)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같은 사람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만일 사무엘이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면,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 놓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사무엘은 즉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다윗 (David)에게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1475-1564, 이탈리아)의 대표작 가운데 ‘다윗 (David, 1504)’이라는 조각품이 있습니다. 명작입니다. 다윗이 손에 돌멩이를 들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는 순간을 포착해서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다윗을 잘 생긴 미남으로, 이상적인 비율로 균형미가 넘치는 남성으로 조각했습니다. ‘다윗’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비록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그런 사람으로 조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윗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발견하고 고쳐 나가야 합니다. 내 속에 사람에 대한 차별의식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잣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교묘한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쉽습니다. 이 사탄의 음성을 듣게 되면, 사람을 차별하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편을 만들게 됩니다. 결국 우리 주님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기준을 추방하고,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어렵지만,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부터 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를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8/12/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3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 Listening And Practicing The Word

야고보서 1:19-27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말씀에서 많은 은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4:22에 있는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제자들을 격려하고, 믿음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2,000년 전에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복음을 전파할 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파했습니다. 복음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했다는 말입니다. 같은 뜻으로, 고린도후서 2: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른 허다한 사람들처럼 복음을 적당히 왜곡시켜 팔고 다니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현대어성경)

요즘엔 Online로 물건을 살 때가 많습니다. 잘 알려진 Online Store에서는 그런 일이 별로 없습니다만, 어떤 곳에서는 물건 값을 속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물건 값이 싼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돈을 낼 때는 처음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이 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이트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취소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어서 곤란을 겪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건 값이 싼 것처럼 보이지만, 잘 눈에 띄지 않는 hidden cost가 붙어서 값이 비싸 집니다. 바울은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파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처음부터 고난에 대한 말씀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가르칠 때 처음부터 ‘행함’ ‘실천’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마치 믿음생활에 ‘초급반’이 있고, ‘중급반’이 있고, ‘상급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르칩니까? ‘초급반’하고, ‘중급반’에서는 말씀만 배우고, ‘상급반’에 가서 실천에 대하여 배우는 것처럼, 왜 그런 식으로 가르칩니까?

여러분, 성경 말씀을 잘 보세요.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7:21)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집은 바위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마태복음 7:24-26)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고 실천하는 일이 두 가지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실천하는 일이 두가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잘못 읽은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1:3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듣고 이 책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He blesses all who listen to its message and obey what it says).”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listening and obeying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일)’ 이 일이 두가지 일이 아니라 한 가지입니다.

말씀 하나 더 볼까요? 시편 1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1-3절) 어느 목사님이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새 교회로 부임을 했습니다. 부임해서 먼저 그 교회의 교인들을 심방 했습니다. 어느 집에 심방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한 장로님에게 그 집에 심방을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결국 그 장로님과 심방을 같이 갔는데, 그 장로님이 심방 내내 똑 바로 앉지 않고 삐딱하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심방을 마치고 오는 길에 “장로님, 왜 그렇게 삐딱하게 앉아 있었습니까?” 하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장로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경에 죄인의 길에 서지도 말고, 죄인의 자리에 앉지도 말하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 대답이 시편 1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묵상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따르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They are thinking about ways to follow him more closely)”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 행복을 발견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곧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운 좋게 그것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짐 엘리엇 (Jim Elliott, 1927-1956)의 말이 생각납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어차피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1949년 10월 28일, 엘리엇이 휘튼 칼리지 (Wheaton College) 4학년 때 누가복음 16:9 말씀을 묵상하고 발견한 생각을 적어 놓은 일기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고 했던 한 청년이 남긴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남긴 일기책의 구절이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인생의 참 행복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참 행복을 얻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중에 성경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MIT 학생은 성경의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 말씀인지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되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웃음이 많고 착한 학생이었었습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집에 가 보면 성경공부 교재들이 많이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 중에 참 행복을 발견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조심해서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도, 일어나면 금방 자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잊어버립니다.” (23-24절) 예전에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탔는데, 사람들이 자꾸 자기를 쳐다보더랍니다. 그래서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쳐다보면서 킥킥거리고 웃는 사람들도 있었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 마자 거울을 보았더니, 얼굴에 온통 머리카락 투성이더랍니다. 이발을 하고, 머리를 감지 않았고 대충 털었는데,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기를 비쳐 보면 자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모두 보입니다. 잘못된 것이 보이면 즉시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지켜야 하지?” 마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으로, 우리는 그 말씀을 무조건 따라야 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야고보서 말씀에서 두 가지 그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합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umbly accept the word God has planted in your hearts, for it has the power to save your souls.”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 속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 (Elisha)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서 많은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강국이었던 시리아에 나아만 (Naaman)이라는 국방부 장관이 있었습니다. 시리아의 실질적인 권력을 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아만에게 문둥병 (leprosy)이 걸렸습니다. 그 때는, 완치가 불가능한 악성 피부병이었습니다. 이 나아만이 이스라엘에 병을 낫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왔습니다. 올 때 시리아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만큼 이 나아만이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을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가다가 요단강을 만나면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만 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를 만나주지도 않은 것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그 때 나아만의 종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이보다 더한 말을 했어도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는데, 그 정도도 못하시겠습니까?” 이 종의 말을 들은 나아만은 크게 깨닫고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아십니까? “나아만의 살결이 마치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깨끗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아만의 병이 나았습니다.” (열왕기하 5:14)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나의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의 유익을 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나에게 유익이 됩니다 (히브리서 4:2)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경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경건’이라는 말을 여러가지로 쓸 수 있지만 영어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은 ‘godliness’라는 말입니다. 형용사는 ‘godly’입니다. ‘conforming to the laws and wishes of God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따르는)’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읽은 야고보서 말씀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십니다.” (26-27절) ‘경건’이라는 것이 단순히 악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경건’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자신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잘 지키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그것이 ‘경건’의 전부가 아닙니다. 진정한 ‘경건’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이 없으면 그 ‘경건’은 ‘죽은 경건’입니다. 2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Pure and genuine religion in the sight of God the Father means caring for orphans and widows in their distress).” 참된 ‘경건’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골방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나와서 고아와 과부를 돌봄으로써 성취됩니다.

야고보는 그 당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각기 살기에 바빠서 아무도 고아들을 돌보지 않고, 아무도 과부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조국을 떠나서 낯선 외국 땅에 피신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경건의 삶을 추구한들 그 경건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편지를 쓰는 야고보의 머리 속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금식은 너희가 부당하게 가두어 놓은 사람을 풀어주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며, 억눌림 당하는 사람들을 풀어주고, 그들이 하는 고된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이다. 너희 음식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을 너희 집에 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에게 너희 옷을 주고, 기꺼이 너희 친척을 돕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이사야 58:6-7)

맞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행동이 없는 경건도 죽은 경건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일은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핑계 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은 곧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8/5/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2

유혹을 받을 때는 When You Are Being Tempted

야고보서 1:9-18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설교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유혹’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유혹(誘惑)”은 ‘temptation’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시험’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새로 번역된 성경에는 ‘유혹’으로 나와 있습니다.

유혹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4장에 나와 있는 세 가지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신 말씀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천사가 너를 안전하게 받쳐 줄 것이다!”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너에게 주겠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은 먹고 사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라는 유혹입니다.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당장에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리라는 유혹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대중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나에게 경배하라는 유혹은 하나님의 자리에 사탄을 올려 놓으라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나의 힘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 이것을 보이라는 유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성장하고 자라서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되면, 이런 유혹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잖아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도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유혹을 받을 때, 놀랄 필요 없습니다.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큰일 났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이 유혹을 이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입니다. 히브리서 12:2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어떤 성경에는 ‘the author of faith (믿음의 창시자, NIV)’했습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the champion of faith (믿음의 챔피언, NLT)’라고 했고, 또 어떤 성경에는 ‘the finisher of faith (믿음의 종결자, NKJV)’라고 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혹을 이기셨는지 성경을 잘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그 방법대로 하면 우리도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에 대처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힘이 없으니,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을 보았습니다. 한번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영화에서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가룟 유다는 그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부터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 큰 일이 벌어지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이 오고, 기적이 일어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먼저 간 여동생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면 예수님께서 뭔가 큰 힘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군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그래도 기대했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때서야 가룟 유다는 자기가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죄책감에 목을 매고 자살을 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기들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때 막달라 마리아가 했던 말이 압권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일이야. 우리는 그분의 결정에 따라야 해. 우리가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이야!”

사탄의 유혹에 나의 생각대로 대처하려고 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나의 생각대로 해서 사탄의 유혹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에 대처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8:3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16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이 말씀은 신명기 6:13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편 107편은 누가 썼는지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시편입니다. 쉬운성경에는 ‘많은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내용은 “여호와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1절)” 이 한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죽 읽어가면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그의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치유하시고, 우리를 파멸에서 구원하셨습니다 (He sent His word and healed them. And delivered [them] from their destructions).” 이 파멸이 사탄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발 한번 잘못 디뎌서 삐끗하면 내 인생이 그대로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정말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린 아이의 마음은 그 위에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은 ‘백지’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백지에 최초로 기록을 남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찍혔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파멸에서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기도로 사탄의 유혹에 대처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씀 앞과 뒤를 읽어보면, 모두 예수님께서 심각한 문제들 직면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은 후에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흥분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했습니다. 정치인들에게 대중의 인기는 마약과 같아서 끊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번 정치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은 발을 뺄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도 그랬습니다. 여기서 안식년을 보낼 때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고 같이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귀국해서 어쩌다가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고,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가 보스턴을 방문했습니다. 아주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눈빛부터 달랐고,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선거자금 위반으로 걸려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뿌리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 속에 “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너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할거야!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야!”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잃어버리도록 사탄의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유혹을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을 떠나 조용한 산으로 가서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시 한번 점검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고 있는지 자신의 사역을 점검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예수님께서 그 유혹의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으셨다면,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점검하지 않으셨다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구대로 왕이 되셨더라면,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셨더라면, 저와 여러분은 여전히 죄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내 생각이 되고, 그 말씀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긴 말씀이 바로 기도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 너희 마음은 원하지만 몸은 약하구나)!" (마태복음 26:41) 예수님께서 대적자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경로는 다양합니다. 리차드 포스터 (Richard Foster, 1942- )가 ‘돈, 섹스, 권력 (Money, Sex & Power)’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1985년에 나왔습니다. 이 책에 ‘The Challenge of the Disciplined Life’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듯이, 이 책은 크리스천이 어떻게 돈과 섹스와 권력에 빠지지 않고 긍정적으로 잘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리차드 포스터가 말하듯이, 자칫하면 크리스천들이 돈과 섹스와 권력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 중에서도 돈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돈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고 하셨습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도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말씀의 씨앗이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22). 돈의 유혹에 빠진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자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돈에 대한 경고의 말씀 중에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1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love of money is the root of all kinds of evil. And some people, craving money, have wandered from the true faith and pierced themselves with many sorrows (왜냐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종류의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들은 참된 믿음의 진리에서 떠나 방황하기도 하고, 많은 걱정으로 자기 자신들을 찌르기도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돈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이 있습니까? 차라리 그 사람에게 돈이 없었더라면 행복했을 사람들이 있습니까? 돈 때문에 가정이 불행하게 된 사람들이 여러분 주변에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사탄의 유혹이 돈을 통해서 쉽게 우리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돈의 유혹이 있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돈에 대한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니, 야고보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인데,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해외에 흩어져 살면서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텐데, 웬 돈에 대한 유혹을 경계하라는 편지를 썼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돈에 대한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유혹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문서를 위조하기도 하고, 사기를 치기도 합니다. 돈에 대한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이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저도 지난 주간에 누구와 얘기를 하다가 하마터면 돈에 대한 유혹에 빠질 뻔했습니다. 아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돈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났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돈 때문에 행복해지고,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돈이 나를 지배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돈을 지배해야지, 돈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가 이에 대하여 쓴 편지를 읽어 볼까요? “만일 가난하거든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적인 부자로 만드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만일 부하거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영적인 부족함을 보여 주신 것을 자랑하십시오. 그것은 부자도 들에 핀 꽃과 같이 결국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9-10절)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 야고보서에는 이 말씀이 ‘영적인 부자’라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가진 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들에 핀 꽃과 같이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것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 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인 것을 자랑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인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읽었던 루엘 하우 (Reuel Lanphier Howe, 1905-1985, 미국)의 말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God made people to be loved and things to be used, and our sin is that we love things and use people (하나님은 사람은 사랑하고 물건은 사용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우리가 물건은 사랑하고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 Reuel Howe “Man’s Need and God’s Action” ‘물건 (things)’이라는 말에 ‘돈’도 포함됩니다. Reuel Howe처럼 Richard Foster도 ‘Money, Sex & Money’라는 책에서 똑 같은 말을 합니다. 사람은 사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반대로,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입니다.


7/29/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1

믿고 구하라. Ask in Faith Without Any Doubting.

야고보서 1:1-8

오늘부터 야고보서 강해설교를 시작합니다. 많은 성경 중에 야고보서를 선택한 이유는, 야고보서의 주제가 ‘행동하는 믿음 (faith active in deeds)’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론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삶에 적용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살아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우리가 베드로전서 강해설교에서도 계속 나누었던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에 연속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한 구절을 말씀드려 볼까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Just as the body is dead without breath, so also faith is dead without good works).” (야고보서 2:26)

그러면,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알고 있는 야고보는 누구일까요? 가장 유력한 대상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요한의 형 야고보입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세 사람이 베드로, 요한, 그 형 야고보입니다. 이 세 사람은 초대교회에서 유력한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교회에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됩니다. 이 핍박은 유대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2:12에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으로 볼 때 요한의 형 야고보는 일찍 순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야고보는 일단 야고보서의 저자는 아닌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son of Alphaeus, 마태복음 20:3)’가 있습니다. 요한의 동생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해서 ‘세베대의 아들 (son of Zebedee)’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큰 야고보 (James the Greater)’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 (James the Less, 마가복음 15:40)’라고 불렀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저자로 거론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잘 드러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비록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낙타 무릎’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낙타의 무릎이 까져 있잖아요? 무릎 꿇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낙타 무릎’이라고 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의 무릎이 ‘낙타 무릎’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남은 ‘야고보’가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성령강림절 이후 갑자기 교회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 (갈라디아서 2:12)’ 또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야고보 (갈라디아서 2:9)’ 이런 성경 말씀들이 나오고, 사도행전 15:13에 나오는 유명한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이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과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야고보서의 저자로 인정한 이유는 야고보서에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James, a slave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물론 이 구절을 가지고 야고보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증언 등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저자로 보는 것에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야고보가 편지를 쓴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에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 (twelve tribes- Jewish believers scattered abroad)’라고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대상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라고 했는데, 야고보서 역시 신앙의 박해를 피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다만 기록 연대가 조금 다릅니다. 베드로전서는 네로가 로마에서 일어났던 화재의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리고 있던 A. D. 64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만, 야고보서는 이보다 조금 이른 A.D. 45-50년 경으로 보는 견해와 A.D. 60년 경으로 보는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Josephus, A.D. 37-100)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동생 의인 야고보는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대제사장 아나노스 (Ananos)에 의해 A.D. 62년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기록 연대는 A.D. 62년 이전이 되겠지요. 어느 경우이든, 베드로전서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학자들 중에는 야고보서의 기록 연대를 이보다 훨씬 이후로, 2세기 중반이나 3세기 초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런 학자들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문장의 표현이 아주 세련된 문장이라는 이유를 근거로 제시합니다. 예를 들면, 야고보서 3:6에 나오는 ‘삶의 수레 바퀴’ 이런 표현들은 1세기나 2세기 중반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표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에 대한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서, 야고보가 그 편지에 썼을 내용들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받고 전 세계로 흩어져 살던 크리스천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시험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지혜가 필요했고, 같은 디아스포라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문제들이 야고보서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이슈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말씀이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을 겪을 때 기쁘게 여기십시오 (2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은 ‘troubles (NLT)’ ‘trials (NIV, NKJV)’ ‘temptations (BRG)’ 또 ‘test (CEB)’ ‘trials and temptation (PHILLIPS)’ ‘difficulties and temptation (TLB)’ ‘tests and challenges’라고 번역된 곳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살면서 여러가지 어려움과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쉽게 거부하거나, 낙심하거나 실망하거나 쉽게 결론짓지 말고 고난이 주는 유익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세상이 누가 자기 삶에 어려운 문제들이 생기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기뻐하라고 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 넘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도 이 같은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한번 보세요. 시편 119:7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나의 고난이 나에게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서 말하면, 만약 나에게 고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소중하게 알고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주어진 덕분에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맞습니까?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그 사람이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 걱정이 없는데 왜 기도합니까? 비록 그렇다고 해도 매일 새벽기도 나오면서 기도하는 사람을 “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문제가 많았구만!”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겪을 때 비로소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성경 욥기를 읽습니다. 욥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고난을 받았다는, 어디서 들은 얘기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욥기를 읽기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를 말씀이 너무 많아서 읽기가 힘이 듭니다.

시편의 저자는, “내가 고난 당한 덕분에 기도하게 되었고, 고난 당한 덕분에 성경을 펴서 읽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고난이 주는 유익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심이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참고 견디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3-4절) 이 말씀 속에 우리가 왜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두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시련을 겪으면서 우리의 인내심이 성장한다고 합니다 (When your faith is tested, your endurance has a chance to grow). ‘endurance’라는 말이 ‘endure (견딘다)’는 동사에서 나왔잖아요? 우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참고 견디는 힘이 강해집니다. ‘endurance’가 생긴 사람은 다음에는 웬만한 어려움이 와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큰 자산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점점 더 완전하고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합니다. “When your endurance is fully developed, you will be perfect and complete, needing nothing (당신의 인내심이 완전히 개발되면, 당신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You know that under pressure, your faith-life is forced into the open and shows its true colors. So don’t try to get out of anything prematurely. Let it do its work so you become mature and well-developed, not deficient in any way (당신이 어려움을 겪을 때 당신의 믿음생활은 진정한 색깔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떤 어려움이든 섣불리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성숙하도록, 잘 개발되도록 해서 아무 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어려움을 당할 때 제일 당황스러운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낯선 언어를 배워야 하고, 직업을 구해야 합니다. 게다가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신변에 대한 불안감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5절)

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지,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40: 2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지혜는 끝없이 깊고 넓어서 우리 인간이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현대어성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No one can measure the depths of his understanding”입니다.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지혜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하라고 합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2,000년 전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입니까? 물론 그들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들이야 말로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구할 때 믿고 구하라고 합니다 (6절).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심은 하나님을 ‘불신 (unbelief)’하는 데서 옵니다. 성경에 ‘맛사 (Massah)’ 혹은 ‘므리바 (Meribah)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7:7).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나?” “하나님께서 계시나?”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길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야고보는 의심하는 사람을 ‘두 마음을 품는 사람 (a double-minded person, 8절)’이라고 했고, 이런 사람은 바다 물결같이 바람에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주님께 무엇을 받을까 하고 기대하지 마라고 합니다 (7절).

기도할 때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공부하는 청년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말씀입니까? 스티븐 코비 (Stephen Covey)가 1989년에 펴낸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란 책을 아십니까? 맨 마지막 습관이 무엇이었습니까? "Sharpen your saw (너의 톱을 날카롭게 갈라)"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톱날이 무디어집니다. 무디어진 톱 날을 가지고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성과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톱의 톱 날을 날카롭게 갈아야 합니다. 스티븐 코비는 톱 날을 날카롭게 가는 일을 영성과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은 나의 톱 날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일도 나의 톱 날을 날카롭게 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역시 나의 톱 날을 날카롭게 준비하는 일입니다.

기도할 때 모세가 드렸던 기도를 하십시오.  모세는 늘 이런 식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씀대로 해 주십시오.” 이 모세의 기도 방식을 여러분의 기도에 적용해 보십시오. “하나님,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구하면 우리가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지혜가 부족합니다.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사람이 어려움을 겪으면 그 사람의 믿음생활의 색깔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색깔이 무슨 색깔이든, 여러분의 믿음이 어느 수준이든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참고 견디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펴십시오. 결코 고난이 주는 유익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When your endurance is fully developed, you will be perfect and complete, needing nothing.”


7/22/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3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X To Believe God’s Care For His Children

베드로전서 5:7-11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로서 베드로전서 강해 설교를 마칩니다. 저 자신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고난의 삶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모습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에게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대하고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만, 제가 기대했던 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걱정과 근심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 걱정과 근심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에게도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어떤 사람은 자녀들의 문제로, 어떤 사람들은 부부 간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로, 어떤 사람은 생의 의욕을 잃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나서, 어떤 사람은 학업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직장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하고 있는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아서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는 걱정이고 근심인데, 성경은 걱정과 근심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마태복음 6:30) 예수님은 염려와 근심이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들에 핀 들꽃이나 들풀들, 하늘에 날아 다니는 새들은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눈에 하찮아 보이는 존재들이지만,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들보다 훨씬 더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얼마나 동의하시나요?

다시,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웬만한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고,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염려가 없겠습니까? 이 사람들에게 근심이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언제 붙잡혀 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6절)”라고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돌보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불안해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 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 우리는 베드로가 그 편지 속에서 말하고 있는 그 하나님과 동일한 믿고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으니까 그 때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성경 속에 나오는 하나님과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똑같으십니다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ever., 히브리서 13:8).”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가 믿었던 하나님은 삶의 매순간마다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순히 방향만 알려 주는 오늘날의 내비게이션과 달랐습니다. 낮에 나타났던 구름기둥은 광야의 뜨거운 태양빛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보호했고, 밤에 나타났던 불기둥은 자기 백성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나요?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과 같이 너는 로마에서도 나를 나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23:11)”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 때까지 바울을 모든 환난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루터가 믿었던 하나님은 루터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맡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었던 루터는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박 속에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밤에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부모에게 있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이 자랄 때까지는 부모가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감동적인 구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감동적인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시편 33:1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nation whose God is the LORD, The people He has chosen as His own inheritance., NKJV).” 다윗이 쓴 시편 144:15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아예 하나님을 자기의 소유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았으면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없습니다.

토마스 브룩스 (Thomas Brooks, 1608-1680)라는 청교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시편 33:12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소망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참된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참된 행복의 기증자이시고, 모든 참된 행복의 지지자이시며, 그것의 중심이 되신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소유한 사람, 그리고 그분을 자신의 기업으로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말씀은 곧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으니까 문제이지, 이 믿음만 가지고 산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본에 기므라 간조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청년 시절에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웅장한 폭포를 보면서 감격하여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어느 미국인이 깔보는 태도로 “당신 나라에도 이런 폭포가 있소?” 하고 으스대면서 물었습니다. 이 말에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서 “그러면 당신은 이 폭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그야 절반은 캐나다 것이고, 절반은 미국 것이 아니겠소?”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당신 틀렸소. 이 폭포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이 폭포 주인의 아들이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당신 크리스천이오?” 하고 묻더랍니다. 기므라 간조 목사님은 자기는 목사라고 하면서 신분을 밝혔습니다. 이 미국인은 자기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이 미국인이 숙소의 전화 번화를 가지고 갔는데, 저녁에 그 미국인이 나가는 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냐?” 고 묻더니, 이번 주일에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 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요청하더랍니다.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주일날 그 교회를 찾아가는데, 길거리에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 와서 설교를 합니다!” 이런 포스터들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날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예배당을 꽉 채웠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방식은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염려하고 근심할 때 똑 같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 중에도 염려와 근심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왜 우리는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으면 누가 그의 자녀들을 돌보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마태복음 6:32)”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주의하십시오. 원수 마귀가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7-9)

재미있는 것은 배고픈 마귀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마귀가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되겠습니까? 마귀의 ‘스킴 (scheme)’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염려와 근심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염려와 근심으로 꽉 찬 사람들은 마귀가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관계만 분명하게 확인한다면 우리는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사정을 아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라 (9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tand firm against him, and be strong in your faith (그를 대항하여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게 되십시오).” 도대체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마태복음 6:33)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열심히 구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걱정거리가 들어옵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고난을 이해하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힘든 고난은 잠시 동안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우실 것입니다.” (10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after you have suffered a little while, he will restore, support, and strengthen you, and he will place you on a firm foundation.” 우리가 ‘잠깐 동안”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금방 회복시켜 주시고, 후원해 주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굳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a little while’이란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달이 될 수도 있고, 3년이 될 수도 있고, 5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주실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그 시간은 ‘잠깐’에 지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지만, 우리는 고난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잠깐’ 동안의 고난에 힘들어 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고 있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이 고난이 언제나 끝이 날까?” 하면서 절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그들이 두루마리를 읽는 그 시간에 베드로가 쓴 위로의 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들렸을 것입니다. 연약한 마음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희망을 다시 찾았을 것입니다.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염려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심령들이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