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2020 | In Times Of Trouble 8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II) The Joy Of The Lord Is My Strength!

느헤미야 8:1-10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는 운동을 벌였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에스라는 탁월한 율법학자이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가 임명한 총독입니다. 에스라는 학문과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느헤미야는 열정이 넘치고 추진력이 있는 행정가 (정치가)였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두 사람 모두 바빌로니아 포로 시기에 바빌로니아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 때, 2차 귀환자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에스라 7:8).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 3차 귀환 때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 2:1). 단순하게 귀국 연대만 본다면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약 13살 정도 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에스라, 느헤미야 두 사람을 보면서 바울과 바나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동역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초대교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나바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의 회심 (conversion)을 의심하고 있을 때, 사울의 회심의 진정성을 인정했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하고 있던 사울을 불러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리아 안디옥 (Antioch of Syria)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에서 일년을 같이 사역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가 파견한 선교사로서 1차 선교여행을 같이 합니다.

‘동시대(同時代)’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시대’라는 말입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을 영어로 ‘contemporaries’라고 합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했던 류성룡과 이순신이 동시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당파싸움으로 기진해 있던 조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고, 일본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축복을 받고, 이 시대가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산다는 일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에 에스라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사마리아의 관리들은 끊임없이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처음에 이들은 절대로 성벽 재건 공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성벽을 쌓아봐야 그까짓 성벽은 여우 한 마리만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 공사가 반이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이들은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 당신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당신이 성벽 공사를 마치고 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페르시아의 왕이 이 소문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만나서 얘기합시다. 몇 시까지 ‘오노 평야 (the plain of Ono)’에 있는 한 집에서 만납시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것이 그들의 술책인 것을 알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들은 느헤미야를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한번은 예언자들을 매수해서 “오늘 저녁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으니 오늘 저녁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도 당신과 함께 있겠습니다 (느헤미야 6:10).”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자기를 함정에 빠뜨릴 음모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 말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스마야의 말을 들으면서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아니라 뇌물을 받고 나에게 이런 예언을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I perceived that God had not spoken to him, but that he had uttered this prophecy against me because To-biah and Sanballat had hired him).” (느헤미야 6:12, NASB, NKJV)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어떤 성경에는 “I realized that.......”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지만, 많은 성경들이 “I perceived that.....”이라고 했습니다. ‘perceive’의 명사형이 ‘perception’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을 하자면 ‘지각(知覺)’이라고 할까요? 사전에 ‘perception’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act or faculty of perceiving, or apprehending by means of the senses or of the mind (생각이나 감각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나 행위)’ ‘immediate or intuitive recognition or appreciation; insight; intuition; discernment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인식 능력)’ 제가 이렇게 이 구절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느헤미야가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솔로몬이 쓴 잠언 말씀에 ‘discernment’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네가 은이나 숨은 보물을 찾는 것처럼 지혜를 찾는다면, 네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If you seek her as silver, and search for her as for hidden treasures; Then you will discern the fear of the LORD, and discover the knowledge of God).” (잠언 2:4-5, NASB) ‘perception’ ‘discernment’ ‘intuition’ 이것은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insight (통찰력)’를 얻도록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17-18).

이제 오늘 저의 설교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고, 이제 나라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공동의 비전을 가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음료수를 드십시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입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곧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Go and celebrate with a feast of rich foods and sweet drinks, and share gifts of food with people who have nothing prepared. This is a sacred day before our Lord. Don’t be dejected and sad,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느헤미야 8:10)

이 말씀을 직역하면, “주님의 기쁨이 여러분의 힘입니다” 이런 말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곧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of’라는 전치사가 주로 소유를 나타내는 전치사이지만, 때로는 원인, 이유, 기원 (origin)을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하여 오는 기쁨이 곧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는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Delight in Jehovah is a strong refuge for you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너희에게 강력한 피난처가 됩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입니까? 바로 지금과 같은 때, 답답하고, 우울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우리를 억누를 때, 경제적인 문제를 염려해야 할 때, 직장을 염려해야 하고, 비즈니스를 염려해야 할 때, 모든 활동이 중지되었을 때, 오늘 읽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잘 몰라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된다는 말씀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 (the joy of the Lord)’이라는 말은 매우 광범위한 말이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 앞에 모인 때가 바로 ‘속죄의 날 (The Day of Atonement)’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일곱째 달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자기 마을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물 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1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곱째 달 10일을 ‘Yom Kippur (욤 키퍼)’라는 이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 백성들은 자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줬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회개의 울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atonement’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at onement in harmony’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다른 어떤 일보다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할 것이다.” (누가복음 15:7) 이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어느 글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메모해 놓았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 32편에 대한 말씀입니다. “From David’s experience, we know that he is not talking about sinless perfection. Rather, he means the righteousness that God confers on the repentant believer and the uprightness of the one who confesses and forsakes his sins (다윗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죄 없는 완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올바름에 대한 것이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The children of Israel were never known for their perfect behavior. They were known for being the peo-ple of God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한 번도 완전한 행동으로 알려진 적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사람들로 알려졌다).” 이런 하나님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나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음료수를 드십시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 느헤미야는 계속 금식하고 슬퍼하지 말고 집에 가서 이 날을 축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 혼자만 축하하지 말고 축하하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그냥 아무 뜻없이 성경에 쓰여진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느헤미야가 이 말을 한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代辨)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믿음생활은 항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라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한 개인을 말하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한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말씀이 없습니다. 항상 공동체의 구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This will continue until we all come to such unity in our faith and knowledge of God's Son that we will be mature in the Lord, measuring up to the full and complete standard of Christ).” (에베소서 4:13)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5/24/2020 | In Times Of Trouble 7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 (I) The Joy Of The Lord Is My Strength!

느헤미야 8:1-10

오늘 말씀을 처음 읽으신 분들은 이 말씀의 배경이 무척 궁금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두 사람, 에스라(Ezra)와 느헤미야(Nehemiah)는 바벨론 포로시대에 태어난 2세들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 집안의 학자 (scribe)였습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 I)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셨으므로, 그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왕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 7:6)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은 영성이 좀 떨어지기 쉽습니다. 책만 읽고 페이퍼 쓰고, 강의하다 보면 영성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학문과 영성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같이 학문에 정진하는 청년들이 많은 곳에서는 에스라를 더욱 관심 있게 봐야 합니다. 담임목사로서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 교회가 에스라와 같은 학문과 영성을 겸비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에 얽인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에스라가 왕 아닥사스다의 호의로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왕이 귀국하도록 허락한 이유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잘 지켜지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에스라, 당신을 그 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에스라 7:14)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일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말 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귀환하는 길에 온갖 보물과 또 필요한 물자를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다가 도둑떼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왕에게 군대를 요청할까 하다가 군대를 요청하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에 그가 왕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순조롭게 도와주십니다.” (에스라 8:22) 에스라는 군대를 요청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기 위해서 같이 귀국하는 사람들에게 금식을 시키고 여행하는 동안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귀환자들과 함께 네 달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에스라 8:23).” “길을 가는 동안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와 도적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에스라 8:31)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실에서 왕이 마시는 술을 관리하는 사람(the king's cup-bearer)이었습니다. 그 자리는 왕이 신임하는 사람만 올라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포로 2세 유대 사람으로 그 자리에까지 올라 간 것을 보면 느헤미야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느 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그 성문들이 불타 버렸다는 (느헤미야 1:3) 조국의 소식을 듣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기를 조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하지만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소? 그대가 여행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느헤미야 2:6) 우리는 이 말 속에서 왕이 느헤미야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왕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다시 허락을 받아 조국으로 돌아왔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느헤미아 13:6).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요셉도 그렇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왕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성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탁월함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필요한 때에 불러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여러분은 모든 말과 행동을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17)”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이 하는 일 속에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느헤미야 8장 말씀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같이 등장합니다. 그 때의 상황은 성전은 1차 귀환자들로 말미암아 재건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침체되고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에스라가 귀국하여 백성들의 영적부흥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부흥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성벽 재건을 하려고 했지만 이 일 역시 반대에 부딪쳐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가 귀국하여 마침내 성벽 쌓는 일을 마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느헤미야는 그가 페르시야 왕실에서 누리고 있던 모든 지위와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느헤미야가 네 달이나 하나님께 기도하며 (느헤미야 2:1) 응답을 기다렸을까요?

고대 사회에서 성벽을 튼튼히 하는 것은 곧 나라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가능한 높고 두껍게 쌓아서 적들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 때 쌓은 바빌로니아의 성은 높이가 22.86m, 두께가 9.7m로 성벽 위로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그런 목적으로 쌓은 것인데, 높이가 평균 7.3m, 폭은 5.8m라고 합니다. 에스라도 나라를 지킬 목적으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고 했고,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응답을 얻기 위하여 무려 네 달을 기도합니다 (느헤미야 2:1). 그리고, 마침내 귀국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돈을 많이 가진 귀족들에게 성전 재건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정부 관리들은 적극적으로 성전 재건을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 사람들이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해에도 느헤미야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성벽을 쌓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손에 힘을 주십시오 (Lord, strengthen my hands).” (느헤미야 6:9)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엄청난 공사가 52일만에 완성이 됩니다 (느헤미야 6:15). 성벽 공사를 반대하던 사람들마저 이 사실을 믿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느헤미야 2-7장에 성벽 재건의 긴박했던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려고 할 때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어려움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사명은 쉽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고,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고 하신 예수님의 사명은 온갖 반대에 부딪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가 있었고, 제자들 안에서도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어려움을 이겨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이 사명을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어려움과 고난이 없을 때 “왜 이 과정에 어려움이 없지? 이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맞는가?” 하고 의심해 봐야 합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수문 (The Water Gate)’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이 모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 등장합니다. ‘수문’ 앞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장 속에서 성벽을 쌓느라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습니다. 두 지도자는 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치유해야 할 필요성을 공감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이제 조국을 새롭게 건설해야 할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성벽재건 공사가 끝났습니다. 이제 조국을 새롭게 재건해야 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 일은 성전재건보다 더 어렵고, 성벽을 쌓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두 지도자는 이제 이 일에 착수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몇 년 전에 ‘징비록 (懲毖錄)’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도 재미있게 그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이 조선의 선조 때에 일어납니다. 그 때 영의정으로 있었던 사람이 류성룡(柳成龍)이라는 사람인데, 뛰어난 경세가(經世家)였다고 합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예감하고 미리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여 수군을 지휘하게 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임진왜란 후에 벼슬을 잃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임진왜란의 전모를 기록한 책이 ‘징비록’입니다. ‘징비’라는 말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라는 뜻입니다. 삼 년 선배인 류성룡과 이순신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류성룡은 일찍이 이순신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순신이 전사한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징비록’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류성룡과 이순신이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이순신이 실의에 빠진 류성룡에게 ‘재조산하(再造山河)’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라를 다시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류성룡이 영의정에서 파직되던 바로 그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합니다. 이순신과 류성룡이 그랬던 것처럼,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많은 계획들이 있지만, 그 계획들이 모두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계획들이 성취된다 (잠언 19:21)”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의 삶은 길이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한정된 삶을 어떻게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기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합니다. 한 사람은 인생의 정도(正道)가 무엇인지 알고 살고, 한 사람은 바른 길을 찾지 못해 먼 길을 돌아돌아 갑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수문’ 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에스라에게 “우리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단상에 올라가서 모세의 율법책을 읽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낮 12시까지 읽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면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이 계획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까? 에스라가 그렇게 백성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서 애썼지만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까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는지, 비로소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5/17/2020 | In Times Of Trouble 6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Take Off Your Sandals!

여호수아 5:13-15

성경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셉, 모세,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은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 (Joshua)는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젊었을 때는 모세 옆에서 모세를 도왔던 ‘조력자 (assistant)’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랜 기간 모세의 후광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탐했던 12명의 스파이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대표로 정탐에 참가했었습니다. 가나안 정탐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유다 지파 대표로 정탐에 참가했던 갈렙 (Caleb)을 눈여겨 보셨습니다. “내 종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른 마음을 가졌다. 그들은 나를 온전히 따르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이미 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겠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But my servant Caleb and Joshua have a different attitude than the others have. They have remained loyal to me, so I will bring them into the land they explored. Their descendants will possess their full share of that land).” (민수기 14:24)

그때부터 여호수아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보통 말씀이 아닙니다. 이전까지는 아주 평범했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도 모른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갖게 됩니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보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에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Montgomery, Alabama)에 있는 평범한 작은 교회의 담임 목사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평생 작은 교회의 목회자로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몽고메리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자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 (Rosa Louise McCauley Parks, 1913-2005)라는 한 흑인 여자가 버스를 탔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때는 이런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가라앉지 않고 무려 382일 동안이나 흑인들 사이에서 ‘버스 타기 거부 운동 (Montgomery Bus Boycott, 1955)’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우연히 마틴 루터 킹 Jr. 목사가 개입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가 흑인 인권운동가가 된 계기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정탐 사건이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람이 여러가지 일을 계획해도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You can make many plans, but the Lord’s purpose will prevail) (잠언 19:21)”는 성경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은 쉽게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 성경 말씀에서 여호수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말씀이 출애굽기 17장에 나옵니다.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이라는 사나운 부족들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 전쟁을 여호수아에게 맡깁니다. 모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 (Hur)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전쟁에서 이기는 이상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모세가 지쳐서 팔을 들지 못하게 되자 아론와 훌은 큰 돌을 가져다 그 위에 모세를 앉히고 두 사람이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모세도 몰랐고, 여호수아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여호수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 이후를 준비할 시간도 없이 모세가 죽습니다. 그 누구도 모세의 자리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모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 이후를 치밀하게 대비하고 계셨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 세계와 분명히 같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학교라는 시스템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회사 시스템도 많은 부분 재택 근무형식으로 바뀔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사회 전반이 다 바뀌는데, 교회만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교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회’라는 곳에서 5월 31일을 ‘예배 회복의 날’로 정한답니다. 이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표성이 있는 단체도 아닌데, 마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지금 다시 집단 감염자가 나오고 있는 비상 시국에 왜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지하고, 성급하고, 판단력이 부족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교회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를 어떻게 계획하고 계시는지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목사도 학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첫 번 과제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훈련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대단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굳게 닫힌 견고한 여리고 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호수아는 자기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군이요? 적군이요?” 이 사람은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이오 (Neither one! I am the commander of the LORD's army)!” (14절)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 편도 아니라니요?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이라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감히 하나님은 나의 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여러 번 지적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너희는‘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썩 물러나라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 (마태복음 7:21-23)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의 말은 “나는 지금 어느 편도 아닌 중립(中立)이다. 앞으로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너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말로 들립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Joshua fell with his face to the ground in reverence) 그에게 묻습니다. “주의 종인 저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I am at your command. What do you want your servant to do)?” (14절) “너의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여호수아는 그의 말 대로 했습니다.” (15절)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세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는 ‘다른 것과 구별되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재 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길에서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났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방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선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무슨 행동을 할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순간 “난 더러운 죄인인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뵈었구나.” (이사야 6:5) 이렇게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누가복음 5:8)”라고 고백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worthless)’ 존재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둘째로, “신을 벗어라!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어라”는 말을 요즘처럼 잘 지키는 때가 과거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신을 벗고 집에만 있습니다. 어디를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요. 그냥 말로해서는 신발을 벗지 않으니까 신발을 벗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내몬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 동안 참 바쁘게 살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번은 아침에 센트럴 스퀘어를 지나가면서 바쁜 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버스를 타려고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일 저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먹고 산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당연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 생각입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은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일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인데, 그것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번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깊이 성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해서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넌 지금 여리고 성과 전쟁을 앞두고 부하들과 상의하고, 작전을 짜고, 마음이 분주하겠지만 이런 모든 활동을 중단할 수 있겠느냐? 네가 내 앞에서 신을 벗는다면 나는 이번 전쟁에서 너의 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여호수아는 그의 말 대로 했습니다 (15절)”라는 말씀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5장 말씀이 15절로 끝이 납니다. 꼭 뒤에 무슨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여리고 성과의 싸움은 안 되는 싸움이니까! 아무리 작전을 짜도 이건 안 되는 싸움이니까!” 하면서 신발을 벗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는 동시에 여리고 성과의 전쟁은 여호수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워주시는 전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전 명령은 절대로 사람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작전대로 실천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눈 앞에서 벌어졌고, 견고했던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메시지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가 가진 자원들 (resources)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밀알 하나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가 하신 말씀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한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돌아섰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인리히 호프만 (Heinrich Hofmann, 1824-1911)은 이 말씀을 모티브로 해서 ‘그리스도와 부자 청년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1889)’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안타까운 눈으로 이 청년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록 펠러 (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가 이 그림을 사서 자신이 지은 뉴욕 맨해튼의 ‘리버사이드 교회 (Riverside Church)’에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자 청년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5/10/2020 | 어버이주일/졸업예배/In Times Of Trouble 5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God Will Renew Your Strength

이사야 40:25-31

오늘은 어버이주일과 졸업예배를 같이 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번에 우리교회 졸업생들이 모두 47명입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학사가 19명, 석사가 15명, 박사가 13명입니다. 예전에는 졸업생들을 격려할 때 “형설의 공을 쌓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형설의 공(螢雪之功)’이라는 말은 ‘반딧불’과 ‘눈’으로 책을 읽는 노력을 했다는 말입니다. 예전 가난했던 시절에는 촛불이나 석유 등을 마음대로 켤 수 없어서 밤에는 일찍 불을 끄고 잤습니다. 책을 읽고 싶어도 깜깜해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여름에는 ‘반딧불이 (firefly)’를 잡아서 수건에 싸서 그 빛으로 책을 잃었고, 겨울에는 방문을 열고 ‘눈 빛’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한 마리가 3 룩스 (lux)의 빛을 낸다고 합니다. 책을 잃으려면 적어도 ‘반딧불이’를 150마리는 잡아야 한다고 하네요. 이렇게 공부해서 학교를 마치고 졸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형설의 공을 쌓았다’라고 격려해 주곤 했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루드야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은 ‘나의 어머니 (Mother o’ Mine)’라는 시에서 어머니를 사랑과 눈물과 기도, 세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내가 어떤 극한 상황에 있어도 나에게 흘러 온다고 했고, 어머니의 눈물은 내가 깊은 바다에 빠져도 나에게 흘러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는 내 몸과 영이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God could not be everywhere , and therefore he made mothers (하나님은 어디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드셨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道理)를 ‘효도(孝道)’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자로 ‘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나이 많아 노인이 되신 부모님을 자식이 밑에서 떠받치는 모양입니다. 공자는 효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父母唯其疾之憂(부모유기질지우)”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그저 (자식이) 병들까 걱정할 따름이라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부모에게 무슨 좋은 것을 사 드리면 그것에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진정한 효도는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부모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크리스천이시라면, 우리가 부모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우리가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줄 알고,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면, 그것이 부모에게 드리는 최고의 효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이사야 40장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 하던 당시의 삶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체성 (identity)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우리가 포로생활을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성전이 무너졌을까?” 이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Covid-19’으로 죽은 사람이 277,061명입니다. 미국은 78,335이고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도록 내버려 두실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일까?”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예언자를 일으키십니다. 신학자들은 이 예언자를 ‘제 2 이사야’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겠느냐? 누구를 나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느냐?” (25-26절) “‘왜 너희는 여호와께서는 나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신다. 내 하나님께서는 나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무시하신다’라고 하느냐 (How can you say the Lord does not see your troubles? How can you say God ignores your rights)?” (27절) “아무도 주의 크신 지혜를 알지 못한다 (No one can measure the depths of his understanding).” (28절)

로버트 피어리 (Robert Edwin Peary, 1856-1920)라는 미국의 탐험가가 1909년에 개썰매를타고 북극점에 도착합니다. 피어리는 북극의 날씨를 측량하고 북극해의 깊이를 재고 싶었습니다. 30시간이나 두꺼운 얼음을 깨고 줄에 무거운 추를 달아내렸습니다. 북극해의 깊이는 생각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피어리는 날마다 줄을 더 이어가면서 깊이를 쟀지만 줄은 바닥에 닿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기에 “북극해의 깊이는 이보다 더 깊었다”라는 식으로 기록했습니다. 훗날 첨단 장비로 재 보았더니 북극해의 깊이는 최고 4,087m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지혜의 깊이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똑 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How unsearchable and unfathomable is the depth of the riches of the wisdom of God!” (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는 깊은 바다와 같아서 바닥을 알 수 없어 측량을 할 수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제가 올해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축하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 잠언 3:5-6 말씀을 썼습니다.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주님의 길을 찾도록 해라. 그리하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주님이 보여 주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Pride goes before destruction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다).” (잠언 16:18, 18:12)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이 겸손한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혼란하고,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나의 정체성이 흔들립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오늘 우리가 느끼는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너희는 왜 하나님은 나의 어려움을 모르신다고, 하나님은 나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느냐? 너희 중 아무도 나의 지혜가 얼마나 깊은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지금 당장에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계획하신 대로 일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기택 (송강호)은 가짜 재학 증명서를 들고 과외 알바를 하러 가는 기우 (최우식)를 보면서 대견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무리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렵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쎄서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이유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별들을 하나씩 이끌어 내시며 각각 그 이름대로 부르신다. 그분은 매우 강하시고 능력이 많으셔서 그 이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신다 (26절)”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별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을 잊으시는 일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Behold, I have in-scribed you on the palms of My hands; Your walls are continually before Me.” (이사야 49:16)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다”는 것은 나의 이름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Your walls are continually before Me”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walls’는 무너진 성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너진 성벽은 정말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느헤미야 같은 사람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으려고 귀국을 결심하지 않았습니까?

챨스 스펄전 (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설교자의 왕자 (The Prince of Preachers)’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목사입니다. 그는 매우 절망적인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독실한 청교도 신앙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그는 존 번연 (John Bunyan, 1628-1688, 영국)이 쓴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을 100번도 넘게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열심히 성경을 읽었지만 구원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았고, 자녀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던 스펄전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인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850년 1월 6일, 그 날 아침에 눈이 너무 와서 모든 길이 막혔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평소에 나가던 교회를 가지 못하고 집에서 가까운 작은 감리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이십 명이 채 못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눈이 많이 와서 목사도 오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한 초라한 옷을 입은 사람이 강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읽은 본문 말씀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Look to me, and be saved, all the ends of the earth) (이사야 45:22)”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바라보는 일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들만 바라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바라보십시오. 어떤 이는 성령이 역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이 사람은 강당 바로 밑에 앉아 있던 스펄젼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펄젼을 향해, “당신이 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일생 동안 힘든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청년이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지금 바라보시오!” 스펄젼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스펄젼은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에 꽉 차 있던 구름이 걷히고, 내 영혼에 구원의 빛이 비치었다. 아! 나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 왔던 죄의 무거운 짐이 나의 어깨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나는 존 번연이 넓은 대지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고 외쳤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서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둔다는 말입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2,500년 전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절망적인 청년 시절을 보냈던 스펄전도 새 힘을 얻었고, 새로운 기회을 얻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사로서 여러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앞날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때로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당황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faint).” (31절)  

 


5/3/2020 | In Times Of Trouble 4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십시오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시편 34:4-11, 18-19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바깥 생활이 자유롭지 않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요즘에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랑겔한스섬의 오후 (Afternoon in the Islets of Langerhans, 1986)’에 처음 등장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느끼는 행복’이라는 신조어(新造語)입니다. 영어로는 ‘small but certain happiness’라고 하네요. 요즘에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하고 짜증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우리 스스로 ‘소확행’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다든지, 보고 싶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 화분에 꽃을 길러 보는 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식구들과 먹는 일,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성경을 읽는 일 등이 모두 ‘소확행 (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해당하는 일들입니다. 

‘소확행’에 대한 비판의 말들도 있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말 중에 ‘뉴-노멀 (New Normal)’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확행’의 시간이 길어지고, 또 이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이것이 새로운 일상생활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혼자 있는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되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을 멀리하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 되어 버리면 인간 관계가 깨지고 반사회적(反社會的)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뭔가 정상적이 아닌, 불안한 생활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시편 34편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단순히 위로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가 책을 통해서 마음에 평안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 것은 꼭 성경이 아니어도 동양의 고전이나 좋은 책들을 통해서도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위로를 받자는 값싼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어렵고 힘들 때 (in times of trouble)’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도움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옆에 있는 말씀 카드를 한번 보십시오.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얼굴로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카드에 적인 글을 한번 보십시오. “가끔 나는 눈을 들어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 알아요. 하나님 당신이었죠? 감사해요!”

그러면, 오늘 시편을 쓴 다윗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어떻게 체험했을까요? 이 시편은 다윗이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고 쓴 시편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한 밤중에 ‘놉 (Nob)’이라는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수행원도 없고, 몸에는 아무 무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 (Ahimelech)’을 찾아 갑니다. 아히멜렉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번에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고 다윗에게 먹을 것을 내 줍니다. 그리고, 마침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칼을 내 줍니다. 이 칼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은 전리품이었는데, 그 칼을 아히멜렉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 막 떠나려고 하다가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됩니다. ‘도엑(Doeg)’이라는 사울왕의 ‘목자장’으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차 싶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 도엑이라는 사람이 사울왕에게 자기가 여기 왔었다는 것을 보고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땅에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습니다. 다윗은 죽기 아니면 살기다 식으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블레셋 땅에 숨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틀림없이 변장을 하고 블레셋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정체가 탄로나서 다윗은 블레셋 왕 ‘아기스(Achish)’에게 끌려갔습니다. 사람들이 아기스에게 말합니다. “이 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우리의 원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처럼 따르는 자입니다.” “이 자를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이 자는 우리 땅을 정탐하려고 들어온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이 아기스 왕 앞에서 갑자기 미친 척을 했습니다 (David heard these comments and was very afraid of what King Achish of Gath might do to him. So he pretended to be insane, scratching on doors and drooling down his beard) (사무엘상 21:12-13)”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아기스가 다윗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아기스가 다윗을 죽였더라면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기스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디서 이런 미친 놈을 데려왔느냐? 썩 이놈을 데리고 물러가라!”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것은 기발한 신의 한 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정작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가 발휘한 신의 한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니까 안심이 되고 마음에 위로가 되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상황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까 상황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는 왜 두고두고 후환이 될 사람을 살려주었을까요? 왜 아기스는 그 때 상황을 잘못 판단했을까요? 아까 말씀 카드에서 읽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Sometimes I just look up, smile and say ‘I know that was you God. Thank you!’” 하나님께서 그 상황 속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똑 같은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놓고 분을 참지 못한 이집트의 왕 ‘바로 (Pharaoh)’는 자기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합니다. 바로는 왜 이스라엘 백성 추격해서 결과적으로 자기 군대를 모두 홍해바다에 수몰(收沒)시켰을까요? 성경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출애굽기 14:4, 로마서 9:18)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셨으면, 그래서 나를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의 시편은 책상 앞에 앉아서 쓴 시가 아닙니다. 그의 시편은 모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온 시들입니다. 한 편 한 편마다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의 시편에 나오는 구절들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찾아 도움을 청했더니 내게 대답하시고, 내가 두려워하던 모든 것에서 나를 건지셨습니다.” (4절) “이 불쌍한 사람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In my desperation I prayed, and the LORD listened; he saved me from all my troubles).” (6절)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자기 정체가 탄로나고, 아기스 왕 앞에 끌려갔을 때, ‘아기스’의 말 한마디에 그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다윗은 온 몸에 식은 땀이 났을 것입니다. 그는 긴급했던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여호와의 천사들이 주님을 높이는 사람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angel of the LORD is a guard; he surrounds and defends all who fear him.” 주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을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그를 지키신다고 합니다. 다윗은 위기의 순간에 그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형식적인 믿음생활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산 믿음’과 ‘죽은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2:17, 26).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은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또 불안한 이 상황 속에서 나의 믿음이 나를 지켜주는 ‘산 믿음’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서 아무 소용없는 ‘죽은 믿음’인지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in times of trouble)’ 내 믿음이 나를 지켜주지 못하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그 집은 반석 (firm foundation) 위에 세워진 집이다.” (마태복음 7:25)

여러분, ‘Catfish Effect (메기효과)’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The catfish effect is the effect that a strong competitor has in causing the weak to better themselves (강한 경쟁자가 약한 경쟁자들을 더 끌어 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이론입니다). 다윗에게는 고난이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메기였습니다. 이 메기 덕분에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에도 “고난 받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좋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주의 말씀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1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미스트에게도 고난이 ‘메기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살피고 맛보십시오. 그분께 피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Oh, the joys of those who take refuge in him)!” (8절) 보통 음식을 맛본다는 말은 많이 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맛을 보라는 말은 참 독특한 표현입니다. 제 선배 목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요. 그 아버님도 목사님이셨는데, 아버님 목사님이 성경 말씀을 재미있게 가르치기로 소문이 나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새벽 기도 때마다 작은 성경을 한 손에 들고 “이 말씀이 뜻인고 하면......”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도 말씀을 들으면서 입맛을 다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마치 음식의 맛을 보듯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의 피난처가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그의 위로가 되시고, 그의 기쁨이 되시고, 도움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꿀같이 단 말씀으로, 어떤 때는 징계의 말씀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끝으로, 다윗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들이여, 이리 와서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를 높이고 두려워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11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 되겠지!” “봉사를 열심히 하면 되겠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법이 있거든요? 다윗은 나쁜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나쁜 길에서 돌아서라고 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