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7

"가라, 온 세상으로! “Go Into All The World!”

마가복음 16:15-20

오늘 “가라, 온 세상으로!” 마가복음 강해설교 67회를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시작했던 것이 2015년 5월 4일 주일이었습니다. 2년 3개월만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통해서 제 자신이 받은 은혜가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설교 준비를 하면서 복음서 중에 가장 처음에 기록된, 가장 오리지널 형태의 복음서를 읽고 설교한다는 설렘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이 설렘을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누가복음 7: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종의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교훈을 지혜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이 참되냐 그릇되냐,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의 마가복음 강해설교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달했느냐, 또 얼마나 좋은 설교였느냐 하는 것은, 그 설교를 들은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변화 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선교의 명령을 하시는 것을 끝이 납니다. 요한복음 역시 20:21-23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물론 그 뒤에 21장에 있지만, 신학자들은 21장을 요한복음의 ‘appendix’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 전파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命令, commandment)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잘 따르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듣지 않거나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온 세상으로 들어가 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 이렇게 명령 하시는 데,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에밀 부루너 (Emil Brunner, 1889-1966, 스위스)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입학한 것이 1971년이니까 부루너가 사망한 지 5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저는 이런 신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신학공부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 1884-1976, 독일),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 독일), 등의 신학도 공부를 했습니다. 이들보다 좀 뒤에 나온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 1892-1971, 미국), 그 동생 리차드 니버 (Richard Niebuhr, 1894-1962),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등의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신학적인 사조(思潮)에서 보면 모두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온 신학입니다.

에밀 부루너의 신학은 학문적이라기 보다 실천적인 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그의 신학을 선교신학이라고 불러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실할 때 교회의 존재 이유가 분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에 무관심하거나 게으르다면 그 교회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를 함으로써 존재한다 (The church exists by mission as a fire exists by burning).”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에 특별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보스턴 다운타운에 가면 구세군 본부가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마침 그 때 구세군 교회에 한국 목사님이 와 계셨기 때문에 만나 볼 일이 있어서 그 교회에 갔었습니다. 목사님을 기다리면서 홀에 앉아 있다가 벽에 이런 성경 말씀이 새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Mark 16:15) 우리 말 성경에서 읽던 것 하고는 달리 이 말씀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 왔습니다. 참 표현이 독특하다 싶어서 집에 와서 찾아 봤더니 마가복음 16:15을 New International Version으로 적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았던 것은 ‘into’라는 접속사였습니다. 사전을 찾아 봤더니 3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To the inside of (~ 속으로) 2. to a point of contact with (~과 접촉점으로) 3. be intensely involved in (~과 긴밀하게 관계하다) 그러면, 뒤에 ‘world’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세상과 긴밀하게 관계하라’ ‘세상과 접촉점을 만들어라’ 이런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세상에 빛을 밝혀 주는 의미로, 또 세상에 필요한 존재들이 되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선교학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 (a point of contact)’의 역할을 해서 세상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살아야 할 무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갈 만한 힘과 용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사도행전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결코 지루한 성경이 아닙니다. 읽을 때마다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영감(靈感)을 주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이 땅에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거나, 인정받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앞세워서 사회를 혼란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유대사회의 지도자들이 이 사람들을 잡아 다가 심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너희가 무슨 능력으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By what power, or in whose name, have you done this)?” (사도행전 4:7) 유대 지도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사람들이 모두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4장에 생생하게 나와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자기들의 믿음을 말할 수 있는가 (They were ordinary men with no special training in the Scriptures. How could they say so boldly their belief)?” (사도행전 4:13)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는 그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이들에게 귀신을 이기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병을 치료하라고 이들을 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9:1-2)”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냥 내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능력 (power)’과 ‘권위 (authority)’을 주셨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과 ‘권위’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위임하신 (commission)’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 (명령)하실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의 능력과 권위를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다시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초대교회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평범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유대 지도자들이 놀랄 정도로 담대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전파했던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능력’과 ‘권위’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에도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일꾼이 차고 넘치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요.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새학기를 앞두고 우리교회도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팀장들이 필요하고, 이 팀들을 섬길 간사가 필요합니다. 청년부의 규모가 커져서 팀을 5-6팀 늘려야 할 형편입니다. 그만큼 일꾼이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실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 일이 다른 점이 어디 있겠습니까? 확실합니다. 주님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섬기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17-18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따라올 것이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배우지 않은 새로운 말을 하고,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을 것이며, 환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누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 믿는 사람은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if they drink anything poisonous) 아무 해가 없을까? 정말 환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까?”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접근하는 사람은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강한 사람이라도 몸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독 (poison)’을 마시면 죽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 (commentators)은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현장에서 주님은 어떤 위험한 환경에서도 그의 제자들을 지켜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난파되어 사람들은 널판지나 부서진 배 조각을 붙잡고 가까스로 몰타섬 (the island of Malta)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때 비가 오고 기온이 뚝 떨어져 매우 추웠습니다. 다행히 섬 사람들이 친절하게 맞아 주고 춥지 않도록 불을 피워주었습니다. 바울이 장작을 가져다 불 속에 넣었는데, 장작 속에 숨어 있던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섬 사람들은 바울이 그 자리에서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렇지 않게 그 뱀을 불 속에 던졌습니다. 바울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선교 현장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주님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접촉점을 만들고, 복음을 전파합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은 변함이 없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형식과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말로 전파하는 복음보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의 삶으로 보여 주는 복음 전파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조선족들이 사는 곳에 ‘명동(明東)’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명동교회가 있고, 교회 바로 옆에 시인 윤동주 생가와 문익환 목사님의 생가가 있습니다. 이 둘이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습니다. 명동교회를 다녔고요. 그런데, 그 때 명동교회의 목사님이 김약연 (金躍淵, 1868-1942) 목사님이었는데, 이 분이 ‘간도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자연히 윤동주와 문익환 목사님은 김약연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은 처음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신 분입니다. 이 분은 돌아가시면서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이 목사님은 삶이 곧 그의 유언일만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셨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은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지켜 보고 실망했습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진실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행동을 보고 너희가 하는 말을 믿고, 너희가 전하는 복음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교회가 큰 도전을 받고 있고, 크리스천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이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떳떳하게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이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꿔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성경에도 보세요. 시대가 편안할 때보다는 시대가 어려울 때 예언자들이 나와서 시대가 나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시대가 편안할 때보다는 어려울 때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니라,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진실하게, 정직하게 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진실하게 행동으로 나타내십시오.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8/6/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6

"그건 넌센스야!" “It Sounds Like Nonsense!”

마가복음 16:9-14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는 말씀과,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다른 두 제자의 말을 듣고도 열 한 명의 예수님읜 제자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은 열 한 제자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우리교회라면 이 정도 말씀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화면에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오늘 본문 말씀이 나갔습니다. 9절 첫 머리에 [Longer Ending of Mark]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물론 번역 성경에 따라서는 이런 말씀을 표기(表記)하지 않은 성경도 있습니다.

하지만 NASB은 9절부터 20절 끝절까지 [  ]로 묶어 놓았습니다. NET, NIV, ASB, AMP, CEB,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Phillips (J.B. Phillips New Testament), MSG (The Message) 등 많은 번역 성경들이 이 사실을 표기했습니다. Phillips에는 9-20절 말씀에 ‘An Ancient Appendix (오래된 후기)’라는 말을 붙여 놓았고, NIV 성경에는 [The earliest manuscripts and some other ancient witnesses do not have verses 9–20 (가장 오래된 사본과 다른 고대 증언에는 9-20 말씀이 없다).]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을 보면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에 이 말씀을 다른 설명 없이 괄호로 묶어 놓았습니다.

신학자들은 공관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학자들 간에 큰 이견(異見)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서에 오늘 읽은 9-20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없으면 마가복음은 16:8,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그것은 무서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뭔가 복음서의 끝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9-20절 말씀은 (NLT 성경에 [Longer Ending of Mark]이라고 나오는 부분) 마가복음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후에 첨가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히 성경 학자들에게 이것이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학설들이 나오고 주장들이 나왔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절대적인 학설이나 주장은 없습니다.

제가 지난 번 설교에서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마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부활 신앙이 중요한 만큼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부활의 역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역사성’이 검증(檢證)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활신앙’은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 목격했던 여자들의 충격과 무서움, 그리고 공포,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그의 복음서에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가가 그 뒤에 아무 기록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요나서도 끝이 좀 이상한 것 아세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 나무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옳으냐?’ 요나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고 싶도록 화가 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넌) 네가 심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았으며, 밤새 나타났다가 이튿날 죽고 만 그 나무를 그렇게 아끼는데, 하물며 옳고 그름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도 넘게 살고 있으며,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저 큰 성 니느웨를 내가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서는 이렇게 어정쩡하게 끝이 납니다. 그 뒤에 더 이상 아무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지 않아도 요나서를 읽고 나면 뭔가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학적인 수사법에서는 ‘open endings’이라고 합니다. ‘open endings’과 반대되는 수사법은 ‘closed endings’입니다. 더 이상 아무 여운을 남기지 않고 모두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가가 그의 복음서를 여자들이 느꼈던 충격과 공포와 당황스러움으로 끝을 낸 데에는, 그의 복음서를 ‘open ending’으로 끝내고 싶었던 마가의 의도(意圖)가 들어있지 않았을까요? 마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closed ending’으로 그들의 복음서를 완성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 지십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믿어 지십니까? 지금 새벽기도에서 누가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지난 주간에 누가복음 7장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Nain) 이라는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 실려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어머니를 불쌍하게 보시고, 그 죽은 사람의 관에 손을 대시면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정말 죽었던 그 청년이 살아나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아십니까?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위대한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아 주셨다!’” (누가복음 7:16)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이 말씀을 읽으니까 정말 그 때 광경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Great fear swept the crowd, and they praised God, saying, ‘A mighty prophet has risen among us,’ and ‘God has visited his people today (큰 두려움이 군중들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큰 선지자가 나왔다. 하나님께서 오늘 그의 백성들을 찾아 오셨다.’)’”

부활은 결코 우리가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부활은 우리의 경험과 이성(理性)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아테네 (Athens)에 갔습니다. 학자들 간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 때가 대략 1세기 중반, 서기 60-70년 경이었을 것입니다. 90-100년 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벌써 그곳에 ‘아레오바고 (Areopagus)’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The Most Learned Society of Philosophers in the city (최고의 철학자들의 모임)’입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Socrates, 469-399 B.C.)와 그의 제자 플라톤 (Plato, 428-348 B.C.)이 활약했던 곳입니다. 그야말로 철학의 도시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난 사람들은 ‘에피큐리언 (Epicurean)’ ‘스토익 철학자들 (Stoic philosophers)’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의 철학을 이끌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설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도행전 17:32에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내용에 관해 나중에 더 듣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When they heard Paul speak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laughed in contempt, but others said, ‘We want to hear more about this later’).”

오늘 읽은 말씀에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알렸습니다. 그 시간에도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을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하지만 그 말이 그들에게는 넌센스 같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열 한 제자들은 계속해서 들려 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이 두 제자는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7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는 가까운 마을입니다. 이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두 제자는 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가서 열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열 한 제자들은 여전히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목격하면서도 열 한 제자들은 “유령이다!” 하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자기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성경을 가르쳐 주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셨습니다. 마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의 믿음이 적음과 마음이 굳어 있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He rebuked them for their stubborn unbelief because they refused to believe those who had seen him after he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마가복음 16:14)”라고 기록했습니다.

‘stubborn (고집)’ ‘unbelief (불신앙)’ ‘refused (거절하다)’이런 단어들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고집을 부렸을까요?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믿기를 거절했을까요?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도 부활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경험과 이성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하물며, 철학의 도시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부활에 대한 바울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조금 더 말씀을 깊이 들어가 볼까요? 부활을 왜 믿기가 어려운지 알기 위해서요.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 같은 사람도 죽을 때를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길로 간다.” (열왕기상 2:2) 사도 바울은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죄의 삯 (wages)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23). 인간의 죽음은 그가 지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정말 엉망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죄 받을 거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저 사람 벌 받아도 싸지!”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6:23 말씀을 계속 읽어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fre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through Christ Jesus our Lord (죄의 삯 (대가)는 죽음이지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속에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through Christ Jesus our Lord)’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Jesus)’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to believe Jesus Christ)’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the free gift of God’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선물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세요.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선물은 상대방이 값없이 주는 호의 (favor)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은 선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인간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절대로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들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이 죽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태어났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자기 하고 싶은 것 하고, 즐기고 싶은 것 즐기고, 보고 싶은 것 있으면 보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 다른 동물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말씀 속에 인간의 생명은 다른 동물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는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운명적인 공식을 깨뜨리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인물들도 많이 있었고, 위대한 발명도 있었고, 위대한 사상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른 아무 것 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활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뉴스를 처음으로 들었던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도 그렇게 말하는 여자들을 허튼 소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하지만 그 말이 그들에게는 넌센스 같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 ‘넌센스’라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이나 사건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closed ending’으로 마무리를 하지 않고, ‘open ending’으로 끝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던 여자들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당황스러움으로 끝을 냈습니다. 마가복음을 다 읽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을 읽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복음서의 끝이 마무리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예수님께서 온 세상으로 제자들을 내 보내시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마무리를 잘 지어 놓았습니다.

마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성에서 그의 복음서를 끝냈습니다. 이제 ‘open ending’으로 끝난 마가복음을 마무리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토리로 마가복음을 끝맺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위에 어떻게 여러분의 부활신앙을 이어 나가겠습니까?

 

 

 


7/30/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5

그가 살아나셨음으로! Because He Lives!

마가복음 16:1-8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을 때,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은 굴려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무덤 속에서 흰옷을 입을 한 젊은 청년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가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무덤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충격과 무서움과 공포’가 여자들을 사로 잡았다고 했습니다만,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rembling and bewildered’라고 나와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무덤 속의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또 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보고 얼마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이 여자들은 두려워서 적어도 일주일 동안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마가복음의 기록이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마가와는 달리 여자들은 두려우면서도 매우 기뻤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들은 재빨리 무덤을 떠나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려고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8). 얼뜻 볼 때는 두 복음서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복음서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마가가 무덤을 찾아 갔던 여자들이 경험했던 충격과 두려움과 공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마태복음은 이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는 일주일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여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이 여자들은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들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여자들이 부활의 첫 증인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여자들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다가 예수님의 무덤이 빈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도 그렇고, 마태복음도 그렇고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여자들을 먼저 만나 주십니다. 그 후에 이 여자들은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한 것으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 서두에서 이런 말씀을 조금 장황하게 드리는 이유는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믿음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유명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부활이 없다면 (If there is no resurrection of the dead)’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If our hope in Christ is only for this life’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전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차라리 “인생을 마음껏 즐기자.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가고 싶은데 가 보고,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 보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더 인생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성경의 메시지는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고,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지 않고,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의 삶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서로를 돌아 보고, 자기 것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성경 말씀을 한번 읽어 보세요. “But in fact, Chr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He is the first of a great harvest of all who have died. So you see, just as death came into the world through a man, now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has begun through another man. Just as everyone dies because we all belong to Adam, everyone who belongs to Christ will be given new life. (고린도전서 15:20-22)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 처음으로 살아나신 ‘부활의 첫 열매 (수확)’입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부터 세상에 들어 왔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아담’을 말합니다.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죽어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을 통해서 ‘부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이 ‘다른 한 사람’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새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everyone who belong to Christ’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부활을 믿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 중에는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부활은 믿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기분에 따라서 믿고 안 믿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감정에 따라서 믿고 안 믿고를 결정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의 진리를 믿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 (the historical fact)’입니다. 부활은 여자들이 새벽 어두컴컴했을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다가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당장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알렸던 그런 ‘해프닝 (happening)’, 그런 ‘nonsense’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던 여자들은 일주일 간이나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경험했던 일이 너무나 쇼킹했고, 너무나 무서웠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너무나 당황스럽고 혼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일주일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봅니다. 이 때 비로소 그 여자들은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런 식으로 기록한 마가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조금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사도행전 7장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다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성경에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8:1)”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사울은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면 빌립보서 3장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나는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며,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여, 나는 율법을 가장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당연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내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헛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4-7)

이 때 사울이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빌립보서 말씀의 분위기로 봐서 30대 중반 정도나 아니면 40대 초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해서 확신에 차 있었던 사람, 율법 교육을 충실하게 받은 사람,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 사회적으로 보면 성공이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 (Gamaliel)의 제자 (사도행전 22:3)였습니다. 가말리엘 역시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유대 산헤드린의 멤버였습니다 (사도행전 5:34).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됩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使徒, apostle)’가 되었으니까요. 정말 극적인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그 당시 교회 측에서는 사울의 회심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을 만큼 사울의 변화는 믿을 수 없는, 극적인 변화였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가 다메섹이라는 시리아의 도시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 때 그는 다메섹에 크리스천들이 많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는 강렬한 빛 속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듣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야 (Ananias)라는 사람에게 사울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He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사도행전 9:15)

사울은 이렇게 그의 변화된 삶을 고백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빌립보서 3:8)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기 원합니다.” (빌립보서 1:2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빌립보서 1:21)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I want to know Christ and experience the mighty power that raised him from the dead. I want to suffer with him, sharing in his death, so that one way or another I will experience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빌립보서 3:10-11)

바울의 고백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이 사람 예수에게 미친 사람 아니야?” 맞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에게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3). 이 시대의 불행은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삶에 있어서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 나의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 “For to me to live is Christ!”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이 시대의 불행입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 1861-1930) 목사님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고, 진정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그가 평생 강조했던 주장이 묘비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는 그의 성경 표지에 이렇게 써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To be Inscribed upon my Tomb.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이렇게 써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신념은 그가 앰허스트 칼리지 (Amhurst College)에 와서 유학생활 하던 20대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성경 강의는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강의할 때마다 300-400명의 학생들이 몰려 들어 강의를 들었고, 강의가 끝나고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에 배운 학생들이 이차대전에서 일본이 패전국이 되었을 때 일본을 재건하는 주인공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알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만,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삿보로 대학에서 식물학을 가르쳤던 윌리암 클라크 (William Clark, 1826-1886) 교수의 제자였습니다. 클라크 교수 역시 앰허스트 칼리지 출신으로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urst의 교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클라크 교수가 우찌무라 간조를 자기 모교인 엠허스트 칼리지로 유학을 보낸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평범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데살로니카에 갔을 때, 바울을 시기했던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에 대하여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They have caused trouble all over the world, and now they are here disturbing our city, 사도행전 17:6)”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바울이 총독 벨릭스 (Felix)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는 더둘로 (Tertullus)라는 변호사를 통해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이 때 벨릭스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 교파를 퍼뜨리는 ‘a pestilent fellow (염병 같은 놈)’라고 소개했습니다. ‘pestilent’라는 말은 ‘페스트 (pest)’라는 말에서 온 말이지요? 페스트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염병’이라고도 했지요.

2,000 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trouble maker’로, ‘pestilent’로 살았습니다. 조용하던 도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온 도시에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trouble maker’로, ‘pestilent’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입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고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쉽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게 삽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7/23/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4

부자의 무덤 속에 In A Rich Man’s Grave

마가복음 15:42-47

오늘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安葬) 하는 말씀입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내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요셉은 유대 사회에서 존경 받는 유대 의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가 기록한 이 짧은 말씀만 가지고는 요셉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이 가슴이 들어 옵니다. 비록 그가 의회원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요셉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삶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불법과 악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이 어서 끝이 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정의로운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셉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oseph of Arimathea took a risk and went to Pilate and asked for Jesus' body.” (43절)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지지한다는 말이고,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요셉은 부자였고,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57). 그 때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것을 보면,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셉도 그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 알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백부장을 불러 예수가 죽었는지 확인을 합니다. 예수가 죽은 것을 확인한 빌라도는 아무 말 없이 그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 줍니다. 요셉은 긴 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쌌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시신을 모셨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무덤은 ‘요셉 자신의 새 무덤 (his own new tomb, 마태복음 27:60)’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무덤에 묻혔고,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 막았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마가가 기록하지 않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무덤에 가서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시켜 입구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66)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무덤 맞은 편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47절)’라고 기록했고, 마태도 그의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61)”라고 기록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은 죽었고, 그의 시신은 이렇게 무덤에 묻혔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올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 마음을 집중해서 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이 사람이 존경 받는 유대 의회원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했습니다. 매우 흥미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감춰왔습니다 (요한복음 19:38)”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이 죽은 마당에 뭐가 아쉬워서 빌라도를 찾아 갔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고, 예수님을 시신을 자기의 새 무덤에 안장을 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요셉은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자기에게 닥쳐올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보면 ‘말씀대로’ 혹은 ‘기록된 대로’ 이런 말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하여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지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6:24)”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쓴 편지에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해프닝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의 구원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부자 요셉에 대한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장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 이사야 53:9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으며,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묻혔으며, 그의 무덤이 부자들 사이에 있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좀 묘한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평소에는 다른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알까 봐 숨기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이 죽고 나서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빌라도를 찾아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내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또,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 줍니다. 요셉은 자기의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사야 53:9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 맞은 편에서 이 광경을 끝까지 지켜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7:56).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이 요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다행히 마태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마태복음 27:56)’라고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마가복음 15:40)’이라는 성경 말씀으로 보아, 요세의 어머니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가 분명합니다. 요세는 야고보의 동생으로 보입니다.

이 여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자들이 예수님이 무덤에 안장되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지켜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여자들이 이틀 후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합니다. 우스꽝스럽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여자들이 이른 새벽에 엉뚱한 무덤을 잘못 찾아 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은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이런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세 사람 이상입니다. 무덤에 안장될 때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던 이 여자들이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고 해도 무덤을 잘못 찾아갔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하나님은 이 여자들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證人, witnesses)’로 삼으셨습니다. 어쩌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켜 보았고,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는 광경을 모두 지켜 보았고, 이틀 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던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왜 그 여자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고 그 자리를 지키게 하지 않았을까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작은 마음과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참 잘했구나. 너는 착하고 신실한 종이다. 네가 적은 것에 최선을 다했으니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너에게 맡기겠다 (마태복음 25:21, 23)” 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 고린도전서 15:58 말씀이 생각납니다.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하잖아요? 죄 때문에 우리가 죽었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권 (privilege)를 내려 놓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6-8).

우리의 생각이 미치는 범위는 여기까지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덕분에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이상입니다. 제가 이 설교 말씀을 준비하기 전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본디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에는 ‘descendit ad inferos’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다)”이라는 뜻입니다. 전체적으로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신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 이런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지옥에 떨어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은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습니다.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그 구절이 빠졌을까요? 혹시라도 현대인들이 ‘지옥’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니면, 그 구절을 빼야 하는 무슨 신학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히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고맙게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신 것입니다. 그 대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감사와 감동을 넘어 ‘shocking’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고 죽으신 자리(장소)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골고다 (Golgotha)’라는 말은 ‘해골의 곳 (Place of the Skull)’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보여 주듯이 흉악한 죄수들을 사형 시키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이기 때문에,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습니다.

제가 히브리서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란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히브리서 13:11-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성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안이 영광과 성공과 출세를 보장 받는 자리라고 하면, 성 밖은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받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 그 저자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유대교에 정통한 사람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유대교의 제사 예법을 이렇게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3:11-13 말씀은 바울의 편지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비야라는 사람이 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한비야가 월드비전 구호요원으로 세계 각국을 돌면서 활동한 이야기들을 써 놓은 책입니다. 그녀의 열정적인 삶의 이야기는 청년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묻는 질문 중에 제일 많은 질문이 “재미있는 세계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구호 활동을 하세요?” 라는 질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의 제목은 매우 도전적인 제목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곳이 안전하고, 그곳이 익숙하고, 그곳이 내 꿈을 이룰 장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비야는 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은 그런 안일한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지도 밖의 변두리를 돌아보면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들이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찾아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의 제목을 통해서 크리스천의 삶의 대한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지도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지도 안으로 들어가서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삶을 거절하고 지도 밖으로 나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지도 밖의 삶은 위험하고 불안합니다. 아무 것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지도 밖의 삶은 자기를 내려 놓아야 하는 삶입니다.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지도 밖의 삶은 가슴을 뛰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도 밖에,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지금 나의 삶을 점검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성문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7/16/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3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 The People at The Foot of The Cross

마가복음 15:33-41

오늘 말씀은 십자가 아래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여러 사람들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백부장의 지휘를 받는 로마의 군인들이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지켜 보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던 사람들이었고, 그 외에 다른 여자들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41절). ‘서 있던 사람들 (35절)’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군지 정확한 설명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the bystanders (NLT, NASB)’ ‘some of those who stood by (NKJV, NIV)’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십자가 형을 구경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5:29과 마태복음 27:39에 ‘지나가는 사람들 (the people passing by)’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단순히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이었고,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서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형 집행을 흥미 있게 지켜 보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십자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9:26-27).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또, 이 사람들 역시 오늘 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조금 전까지 십자가 형이 집행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마가복음 15:31).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형이 집행되는 것을 지켜 보다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일찍 그 자리를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분류를 해 보면, 예수님을 반대했던 그룹들과, 예수님 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과 크게 이해 관계가 없는 구경꾼 그룹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반대했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외에도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 바리새인들도 있고, 사두개인들도 있고, 헤롯 당원들도 있지만,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특별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에 따로 분류할 필요는 없습니다. 율법학자들 중에는 바리새인들이 많았고, 제사장들 중에는 사두개인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조직적인 ‘음모 (plot)’를 꾸며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서로 협력을 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마가복음을 강해 설교하면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에 대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방을 감독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황제의 권력을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권한을 가지고 남의 나라에 파견된 사람은 정보력이 생명입니다. 그 나라 사정도 잘 모르고, 문화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고, 언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유능한 사람이라면 그 지역을 잘 아는 현지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문제가 생기면 신속하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대해서 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유대 나라는 예수라는 사람에 때문에 떠들썩합니다. 제사장들, 율법학자들은 이 사람을 재판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었으면 빌라도 나름대로 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힌트가 마가복음 15:10에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자기에게 넘긴 것을 알았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he realized by now that the leading priests had arrested Jesus out of envy.” 또 NASB에는 “For he was aware that the chief priests had delivered Him up because of envy”라고 나와 있습니다. NIV나 NKJV도 똑 같이 ‘envy’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a feeling of discontent or covetousness with regard to another's advantages, success, possessions, etc.’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고 있는 특혜나 성공, 소유물에 대해서 불만을 품거나 그것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갖는 것입니다. 유대 총독 빌라도는 이미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리더들이 제일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지지도(支持度)’ 입니다.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지지를받고 있는지, 그 정도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되기 전에 늘 30% 정도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 정도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 대충 국민들의 1/3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그렇게 잘못하고 있지는 않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80%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국민들이 모두 내 편이라는 큰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좀 더 겸손해 지려면 지지도가 50% 정도로 떨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들 편에서 볼 때, 자기들이 받고 있던 지지를 지금 예수님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실 때 얼마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까? “우리 계획은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이 저 사람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2:19) 이 말 속에 조금 전까지 그들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지지할 때 오는 자괴감이 고스란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것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 옵니다. 우리 마음에 시기하는 마음이 자라도록 내 버려 두면 안 됩니다. 이 마음이 내 속에서 계속 자라도록 내 버려 두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제사장들이 그랬고,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 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지지했던 사람들입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체포 되셨을 때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내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마가복음 14:27, 스가랴 13:7) 정말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붙잡히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다만 제자 요한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요한에게 어떻게 그런 용기가 주어졌는지 경이로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 모두 예수님을 버려도 자기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마가복음 14:29)”고 큰 소리쳤던 베드로도 십자가 밑에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요한을 가리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요한에게 두려움을 이기게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을 끝까지 지지(支持)했던 사람들 중에 ‘여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 여자들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from a distance)’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말이 여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몇 몇 여자들은 그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이 여자들은 평소에도 예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They were contributing their own resources to support Jesus and his disciples., 누가복음 8:3).” 여기 이름이 나온 여자들 외에도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모두 갈릴리의 여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감동적인 것은 이 여자들이 삼일 후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절정 (climax)의 순간에 ‘여자들’을 사용하십니다. 이 말씀은 가히 혁명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나라의 문화와 관습에서 여자의 위치는 크지 않습니다. 출애굽한 사람들을 보통 60만명이라고 하는데요. 이 숫자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약자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건장한 남자들만 60만명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37). ‘오병이어’의 기적 때도 빵을 먹은 사람이 5,000명이었다고 하는데요. 이 5,000명은 남자들만 센 숫자였습니다 (요한복음 6:10).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교만한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부족함을 아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패턴이고 공식(formula)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식’이 나옵니다. 그 공식에 맞게 대입을 하면 정답이 나옵니다.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공식이 있습니다. 이 공식에 맞게 대입을 해야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늘 마음이 겸손해야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들을 공식에 대입해야 정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가 있습니다. 6.25 전쟁이 막 끝난 직후여서 조국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 조국의 참상을 목격한 26세의 한 젊은 여교사가 찬송시를 써서 박재훈 선생에게 보냅니다. 이 찬송시를 쓰신 분이 석진영 선생입니다. 석진영 선생은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 사범대학 국문과를 마치고, 울산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을 겪게 됩니다. 신앙심이 각별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석진영 교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국의 참상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찬송가 가사를 썼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 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 할고.” 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살아 계신 주 하나님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전하셨다.” 최고의 가사에, 최고의 곡을 붙인 찬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강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약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뜻을 알게 하셔서 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실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의 시각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꿔 보세요. 여러분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힘내세요. 여러분의 약함으로 인해 여러분의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약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세요.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인생에 새로운 챕터가 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방관자들이 있고, 구경꾼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팔짱을 끼고 구경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이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냥 재미있게 구경하면 됩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서 있던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고 서로 말합니다. “저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저 사람을 구해 주는지 봅시다!” 이것이 십자가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 더 언급할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끝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로마의 지휘관입니다. 성경에 여러 사람의 백부장이 나오는데,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백부장과 동일 인물이라고 하는 아무 증거가 없습니다. 이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죄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의 임무는 골고다에서 형 집행하는 것을 감독하고, 형 집행이 끝나면 보고서를 작성해서 빌라도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형이 집행되는 동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 보았습니다. 그 때,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This man truly was the Son of God)!” 어떻게 해서 이 백부장이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마가는 이 백부장이 ‘예수님 바로 앞에 서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한 사본의 기록을 소개합니다. “When the Roman officer① who stood facing him② saw how he had died, he exclaimed, ‘This man truly was the Son of God!’” / ①Greek the centurion ②Some manuscripts add heard his cry and 이 백부장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었고, 그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고, 그가 어떻게 죽는지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에게 말을 걸고 소통할 때, 우리가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치유의 능력입니다.

헨리 나우엔 (Henri J.M. Nouwen, 1932-1996) 이 쓴 책 중에 ‘탕자의 귀환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이 이 책을 쓸 때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 1606-1669)가 그린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 아버지가 등장하고, 작은 아들이 등장하고, 큰 아들이 등장합니다. 멀리 희미하게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등장 인물 중에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 하나가 있는데, 머리에 모자를 쓰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습니다. 해설가들은 이 사람이 그 집의 집사(執事)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자를 쓴 사람이 렘브란트 자신이라는 창의적인 해석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을 보면 모두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렘브란트는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들어가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기한 끝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약한 여자들이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팔짱을 끼고 구경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무슨 일이 있든지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방관자들입니다. 또 백부장과 같이 극적으로 십자가 밑에서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 자신들의 입장을 말해야 합니다. 렘브란트가 성경 속의 장면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성경 말씀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서야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서겠습니까?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방관자들로 서 있을까요? 제가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백부장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이 변화되어 평생 예수님 편에 서는, 확고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