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9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17-30

오늘 말씀은 가장 읽기 힘든,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말씀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모두 읽고 말씀을 전체적으로 구성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말씀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성경공부에서 이 일곱 말씀이 무엇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8시에 온라인 찬양과 성경공부에 모두 들어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공부 교재는 교회 홈페이지 자료실 (청년부 성경공부 교재)에 올려 놓았습니다. 미리 보시고 들어 오시면 더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골고다’에 세워졌습니다.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이 두 사람은 ‘강도 (마태복음 27:38)’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criminals’라고 나와 있습니다. 범죄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일반 강도들이 아니라, ‘revolutionaries’입니다. 우리 말로 ‘혁명가들’이라고 해야 겠네요. 국가를 전복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는 뜻입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총독 빌라도 입장에서 보더라도 달갑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예수님을 이 두사람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예수님을 이런 범죄자들과 같이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으며,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묻혔으며, 그의 무덤이 부자들 사이에 있었다.” (이사야 53:9)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에 나오는 ‘악한 사람들’이 바로 ‘criminals’입니다. 메시아가 범죄자들과 함께 묻혔고, 그의 무덤은 부자들 사이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criminal’이라는 죄명으로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부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묻힐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 갑자기 등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리마대 요셉 (Joseph from Arimathea)’인데요. 마태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57). 그런데, 이 사람이 부자였습니다. 평소에 자기가 죽으면 거기에 묻히려고 무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이 갑자기 등장해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에게 내 달라고, 자기가 그분을 모시겠다고 합니다. 의외로 빌라도는 백부장을 불러 그가 죽었느냐고 묻고, 죽었다고 하니까 이 사람에게 시신을 내 주라고 명령합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부자들의 무덤 사이에 묻혔다는 이사야 53:9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한가지, 빌라도가 왜 그랬을까 하는 미스터리 같은 일이 일어나는데요. 예수님의 ‘명패’를 빌라도가 직접 씁니다. 뭐라고 쓰는가 하면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라고 썼습니다. 아람어로, 그리스어로, 라틴어로 그 말을 씁니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유대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깜짝 놀라면서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써야 합니다” 하면서 억지를 부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예수님의 명패에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쓰면 예수님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소!” 하면서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패는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결정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 명패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이 예루살렘 성에서 가깝고, 그 명패는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로마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시리아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때는 유월절이 끝난 때였지만 아직도 예루살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십자가 위에 ‘INRI’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는데요. 이 말은 ‘IESVS NAZARENVS REX IVDAEORVM (예수스 나자레누스 렉스 이오데우룸)’의 라틴어 약자입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 쓴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위, 땅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심을 선포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9-11절) 비록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있었지만, 장차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왕이 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라도가 명패를 쓰는 그 일에도 개입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의 군인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집니다. 요한은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렇게 되리라고 말한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24절)”라고 썼습니다. 시편 22:18에 이미 이 말씀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하시면서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이 고통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시편 22:15에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메시아가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 하신 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작은 일도 모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이 마르다고 하시니까 군인들이 신포도주를 솜에 적셔서 예수님의 입에 대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맛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30절).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군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군인들도 예수님께 나아와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면서 ‘만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 자신을 구원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3:36-37) 그러니까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맛보신 것은 조롱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 한번 보시겠습니까? “군인들은 예수님을 ‘해골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골고다로 끌고 갔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 (wine drugged with myrrh)를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마가복음 15:22-24)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기 직전에 군인들이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 (wine drugged with myrrh)’를 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시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몰약을 탄 포도주’는 고통과 아픔을 줄여주는 일종의 진통제 (wine drugged with myrrh)입니다. 그걸 마시면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걸 거절하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 어느 것의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몸소 그 아픔과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온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쉽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값싼 은혜 (cheap grace)’로 만들지 마십시오.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 (costly grace)’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It is finished!”는 그리스 말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이 말을 영어로 하면 ‘paid in full’입니다. 마켓에서 물건을 사면 딱지를 붙여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딱지에 ‘paid in ful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물건 값을 모두 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졌으니까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치러 주신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And so, dear brothers and sisters, we can boldly enter heaven's Most Holy Place because of the blood of Jesus. By his death, Jesus opened a new and life-giving way through the curtain into the Most Holy Place.” (히브리서 10:19-20) 단순히 우리의 죄만 용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a new and life-giving way’가 열렸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말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야 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부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목사는 그런 위치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위치는 제사장의 위치가 아니고, 신부의 위치도 아닙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하  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We can boldly enter heaven's Most Holy Place because of the blood of Jesus”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 길을 ‘a new and life-giving way’라고 했습니다. 이제 자신 있게, 담대하게, 용감하게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4/9/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8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다

요한복음 13:1-17

오늘 말씀 전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날이 유월절 전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이면 유월절이고요. 각 유대인 가정에서는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합니다. 양고기와 쓴나물, 그리고 누룩이 없는 빵을 상에 올립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식사 장소를 따로 마련하셨습니다. 양고기와 쓴나물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에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면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불안하고 힘드니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시고 따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예수님은 유다가 끌고 온 성전 수비대 사람들에게 체포 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일이 있기 하루 전입니다. 그러니, 그 긴장감이 얼마나 컸을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예수님은 체포되고, 곧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유월절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1절) “Before the Passover celebration, Jesus knew that his hour had come to leave this world and return to his Father.” 3절에 다시 같은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이렇게 같은 말씀이 반복해서 나온 것은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을 모두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날 저녁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식구들와 그날 저녁을 보내겠습니까? 아니면 평소에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겠습니까? 한 10여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그날 눈이 몹시 오는 날이었습니다. 후배 목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보스턴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보고 가라고 했더니, 렌터카를 타고 집에 왔습니다. 아내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셋이서 왔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아내가 암으로 고생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배 가족과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클레아몬트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아들이 손에 뭘 들고 있습니다. 신장 투석하는 도구들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눈오는 날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형이 생각이 나서 한번 보고 가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좀 당황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오려면 좋은 날 오지 그랬더니, 아무 말이 없어요. 그래서 일단 우리 집에 머물기가 불편하겠다 싶어서 옆에 있는 하이야트 호텔에 방을 잡아줬습니다. 대접을 하려고 해도 부인이 잘 식사를 못하니까 잘 해 주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도 눈이 많이 왔는데, 후배 가족은 그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는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상황이라면 마지막 저녁에,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1절) 이 말씀은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He had loved his disciples during his ministry on earth, and now he loved them to the very end①.” / ①Or he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은 그의 사역 기간 동안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reference가 붙어 있습니다. “He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이렇게, 끝까지 사랑했다는 말을 그의 사랑이 미칠 수 있는 최고의 범위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다 살았을 때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쓴 논문, 내가 쓴 페이퍼,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비록 그 논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주목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내 생이 끝나는 마당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도서에 바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History merely repeats itself. It has all been done before. Nothing under the sun is truly new. Sometimes people say, ‘Here is something new!’ But actually it is old; nothing is ever truly new. We don’t remember what happened in the past, and in future generations, no one will remember what we are doing now.” (전도서 1:9-11)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들을 누가 기억해 주겠느냐는 말입니다. 머지 않아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 모든 것이 헛되다는 pessimism이 흐르고 있긴 합니다만, 충분히 솔로몬이 이렇게 말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사랑을 실천하고 베풀었던 일들만 영원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Love never gives up, never loses faith, is always hopeful, and endures through every circumstance. Love will last forever!” (고린도전서 13:7-8)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희망적이기 때문에, 사랑은 어떤 환경에서도 견디기 때문에,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 마지막 저녁에 하신 일은 자기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4-5절)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예수님께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고 생각하고 지나갑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 ‘섬김’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섬김’에 몇 가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섬김의 동기가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것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행위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 외에 다른 것이 동기가 되어서 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크리스천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다른 동기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선하게 생긴 자기의 외모를 이용해서, 필요하다면 눈물을 흘리는 연극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선교의 이름으로, 헐벗은 사람들을 이용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이용하고, 생명이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이용해서 결국은 자기 잇속을 차리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해야 되겠다는 자기 생각이나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왔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물이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 가듯이,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사랑의 출처 (origin)도 하나님과의 관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Dear friends, let us continue to love one another, for love comes from God).” (요한일서 4:7)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매우 ‘겸손한 (humble)’ ‘자기를 낮추는 (menial)’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13-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예수님은 “내가 선생인데, 내가 주인데, 그런 일을 할 수 없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빌립보서 2장은 바울이 예수님의 겸손에 대하여 쓴 말씀입니다. 바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합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의 겸손에 대하여 썼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Instead, he gave up his divine privileges;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When he appeared in human form, he humbled himself in obedience to God and died a criminal's death on a cross.” 이 말씀은 우리가 왜 겸손한 삶을 살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데.....” “그래도 체면이 있지......” 이런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의 삶을 살지 못하게 가로 막습니다. 이런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equality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내려 놓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섬김에 대한 말씀은 우리의 섬김이 매우 ‘지속적 (insistent’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섬김’이 일회적으로 그치면 안 되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되는 법이다.’” (9-10절) 날마다 외출하고 들어와서 발을 닦아야 하듯이, 발을 닦아 주는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섬김의 일을 그의 제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14-15, 17절)

예수님께서 그날 발을 씻겨 주신 제자들은 평생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금이라고 마음 속에 교만한 마음이 들거나,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 (16절)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너희들의 주로서 섬김의 본을 보였는데, 너희가 내 본을 따라 살지 않으면 너희가 나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 보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가 누군데.....” “내가 이런 사람인데.....” 하면서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서 한번 섬겨 보시지요. 예수님의 말씀 대로 정말로 내가 행복지는지요. 섬기는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과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의 본을 따르고 있다는 기쁨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4/8/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7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요한복음 12:27-43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의 마음이 괴롭다고 하시면서 힘든 마음을 공유하시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공관복음서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태복음 26:38) 제자들과 그런 마음을 나눈다고 해서 예수님께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요? 주님은 그 힘든 시간에 나와 함께 깨어 있자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모두 잠들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계속해서 그런 제자들과 마음을 나누자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대로 기도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 더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말씀을 전할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에베소서 6:19) 우리도 이런 본을 받아서 비록 상대방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마음을 나누고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의 핵심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나누는 성도의 교제는 서로 집을 방문하고, 같이 밥을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하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누는 교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아시지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는 교제입니다 (We proclaim to you what we ourselves have actually seen and heard so that you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요한일서 1:3)

예수님은 계속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척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온 것입니다.” (27절) 이 말씀이 Good News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my heart is troubled--and what shall I say? Shall I say, ‘Father, do not let this hour come upon me’? But that is why I came--so that I might go through this hour of suffering.” “지금 나의 마음이 괴롭다. 그렇다고 ‘아버지, 이 시간이 저에게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까?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이 괴롭고 힘든 고난의 시간을 겪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힘든 고난의 시간을 혼자 겪어야만 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온전히 우리를 위해 힘든 시간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는 대속물 (ransom)이 되실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같이 깨어 있지 않고 잠을 잤다고요. 예수님은 누구의 도움고 받지 않고 혼자 그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니까요? 여러분과 저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고난의 시간을 혼자 모두 겪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힘든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또 하나의 ‘example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힘든 시간에 기도하라고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힘든 시간 (in times of trouble)’에 하나님의 도움을 실제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설정에 힘써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고 갑자기 힘든 일을 맞이해서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 (cheap grace)’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Father, bring glory to your name)!”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언제나 나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시지요? 이 말씀이 공관복음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26:39, 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22:42)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 기도에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다시 영화롭게 할 것이다.” (28절) 신기한 것은 옆에 있는 사람들도 뭔가 분명하지는 않아도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7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채널은 매우 다양하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내용이 이해가 가십니까?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다시 영화롭게 할 것이다 (I have already brought glory to my name, and I will do so again).” 하나님께서 두 번 영광을 받으시는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이미 받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번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기 두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첫째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즉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하고요.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으면 그 뜻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 시간 관계상 이 문제를 더 자세하게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이 성경 말씀과 일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체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자기 뜻을 말씀해 주십니다. 셋째는 내가 분별한 하나님의 뜻이 이기적인 것이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 번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간혹 부부가 저에게 와서 “목사님, 저희는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래요?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결정을 했어요?” 이렇게 물어 보면 “왜 몇 주 전에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저희는 그 말씀이 저희에게 주신 말씀으로 알고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말들 합니다. 저는 그 부부를 대상으로 설교한 것은 아닌데, 그 부부는 그렇게 들은 것입니다. 그런 케이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내가 (인자가) 땅에서 들려 올라가게 되면, 나는 (인자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 (3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LT 성경에 “And when I am lifted up from the earth, I will draw everyone to myself”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And when the Son of Man is lifted up from the earth, the Son of Man will draw everyone to myself”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기서 알아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인자’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인자가 땅에서 들려 올라가게 되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성경에 처음 나온 것은 요한복음 3:14-16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이 말씀에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구리 뱀 (a bronze snake )을 만들어 높이 매단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구약성경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사 (poisonous snakes)를 보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시고 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8)”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고,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장대 끝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모두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도 그를 믿는 사람들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들려야 한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골고다 (Golgotha)’라는 말은 아람어, 혹은 히브리어인데 ‘Place of the Skull (해골의 곳)’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형수들이 그곳에서 죽었던 것 같습니다. ‘골고다’에서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를 땅에 놓고 죄수들을 못 박은 다음에 들어 올리는 식으로 죄수들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간에 다른 두 죄수도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모두 산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 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라는 사람이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구원이 그렇게 쉽냐고요. 예. 우리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렇게 쉽습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복된 소식’ ‘기쁜 소식’ ‘Good News’입니다. ‘gospel’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good story’ ‘good message’라는 뜻입니다.

누구는 이 구원의 소식을 의심할 것입니다. 예, 그래서 이 구원의 소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여, 우리가 전한 메시지를 누가 믿었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LORD,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To whom has the LORD revealed his powerful arm)?” (38절) 이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 53: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를 구원하다니 말도 안 돼!” “아니,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런 사람에게 구원의 능력이 어디 있겠어?” 우리가 말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아무리 쉽고, 간단하고,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말씀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초라하게 보이지요?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 우리를 구원할 것 같지 않지요? 십자가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렸구만. 당신이나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내가 믿겠소 (마태복음 27:42)”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이제 말로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구원 받은 삶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약속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삶을 이렇게 산다고 우리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의 말을 들었습니다. “신천지 문제가 없었으면 벌써 한국은 코로나바이러스를 해결했을 것이라고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이 고난주간 셋째 날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온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드리십시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여전히 우리의 희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분께 있습니다.


4/7/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6

요한복음 12:20-26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쉬운성경에는 이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for the Passover celebration’ (NLT) ‘to worship at the festival’ (NIV, ESV) 다른 번역성경에서도 ‘명절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온 그리스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순순한 그리스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Now there were certain Gentiles among them’ (Douay-Rheims Bible) ‘But there were also some of them from among the Gentiles who came up to worship at the feast’ (Aramaic Bible in Plain English) 이런 성경들은 아예 이 사람들이 ‘이방인 (gentiles)’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들은 ‘certain Greeks’라고 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리스 사람들 중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는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선교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눈에 비친 이 그리스 사람들은 날마다 토론회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스토익 철학자들 (Stoic philosophers)도 있었고, 에피큐리언들 (Epicureans)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7:18). 스토익 철학은 B. C. 3세기에 제노 (Zeno)라는 사람이 세운 철학사상입니다. ‘금욕’을 중요한 덕목으로 보았습니다. 이 보다 조금 늦게 Epicurus라는 사람이 'Epicureanism'이라는 철학 사상을 주창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모두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소크라테스 (Socrates, B. C. 470-399)는 이들보다 약간 늦게 기원전 4세기에 활동했던 철학자입니다. 유명한 플라톤 (Plato, B. C. 428-348) 이 그의 제자입니다.

이런 문화와 철학적인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예배 드리기 위해서 왔다는 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고 순수한 그리스 사람들이라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을 리는 없고, 이 사람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에 목이 마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대나라에 지혜로운 랍비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겠지요? A. D. 1세기에도 그 나름대로의 지역과 지역 간에 소통의 시스템이 존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랍비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이니까 예루살렘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가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4-25절)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is planted in the soil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ts death will produce many new kernels--a plentiful harvest of new lives. Those who love their life in this world will lose it. Those who care nothing for their life in this world will keep it for eternity.”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보면 새로울 것도 없고 매우 당연한 말씀입니다. 농부들이 밭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뿌린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 죽고 거기서 많은 씨앗들을 거두어 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뉴톤 (Isaac Newton, 1643-1727, 영국)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생각해 냈다고 합니다. 사과나무에 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했지 거기에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들 간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법칙 (Law of Universal Gravity)을 발견한 사람은 뉴톤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죽고,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많은 열매를 맺고, 이걸 보면서 이 속에 영원한 삶의 진리가 숨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원리는 실험을 해서 증명을 해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백신도 개발이 되면 인간의 몸에 부작용은 없는지 실험을 해야 합니다. 많은 실험을 한 후에 부작용이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되어야 백신을 사람의 몸에 주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무슨 ‘이버멕틴 (Ivermectin)’이라는 구충제 말이 많이 나오는 모양인데,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과학적인 법칙은 실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지만, 인문학적인 진리는 체험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1-23). 바울이 말한 로마서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29-30)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 And having chosen them, he called them to come to him. And having called them, he gave them right standing with himself. And having given them right standing, he gave them his glory.”

궁금합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합니다. 특이한 것은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다고 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깊은 인상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공부하고 들었던 모든 사상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체계입니다. 스토이시즘 (Stoicism)은 Zeno가 만든 사상이고, 에피큐리언니즘 (Epicureanism)은 Epicurus가 만든 사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근본적으로 출처 (origin)가 다릅니다. “이것은 처음 듣는 말씀이로다!” 하면서 지금까지 그들이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다시 한번 이렇게 확인해 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비유적으로 말하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있는 밀알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아닙니까? 어저께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There is only one thing worth being concerned about. Mary has discovered it,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누가복음 10:42) 제가 보여드린 그림 밑에 나온 말씀 기억하고 계시나요? “My Alabaster Jar..... It’s Mine for Breaking.”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평생 붙들고 사는 사람은 죽지 않는 밀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리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입니다. 거기서 많은 밀알을 추수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우리는 마음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 것? 영원히 한 알의 밀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기꺼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될 것인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자기의 옥합 평생 내 것이라고 붙들고 살 것인가? 아니면 깨뜨리기 위해 옥합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릅니다. “뭘 그냥 성경을 읽으면 되지. 그렇게까지 결단을 할 필요가 있을까?” 예.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그런 사람은 지금까지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삶이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서 높이실 것이다 (Anyone who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follow me, because my servants must be where I am. And the Father will honor anyone who serves me).” (26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예수님을 ‘따른다 (follow)’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삶의 ‘example (모범)’을 삼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민할 것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선택하면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로마서 8:34)’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4/6/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5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어라

요한복음 12:1-11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말씀을 전체 문맥 상황 속에서 읽고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말씀만 따로 떼서 읽는 것입니다. 뭐 이렇게 읽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말씀을 전혀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들이 대개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만 가져다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매님, 여기 이런 말씀이 있지요?” 하고 말씀을 딱 읽어 주면 대부분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전체 문맥에서 읽고 내용을 파악하면 그럴 위험성은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경우가 딱 여기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누가복음 버전 (누가복음 10장)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일을 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옆에 앉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접대하는 일을 했고, 마리아는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봉사하고 일하는 것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더 귀하다고 해석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 잘못하면 노동과 봉사를 경시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지금 새벽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분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열심히 예수님 일행을 접대한다고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마르다는 지금 뭘 잘못하고 있는 것이네요? 모두 말씀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것도 문제 아닌가요? 하나님의 일에는 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을 말입니다만, 수도사들은 일을 기도라고 생각한다고 하네요. 강원도 태백산에 있는 예수원에 가면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는 것이 노동이다.” 이런 글귀가 예배당 양 옆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해석할 때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하면서 누가 더 잘했다, 잘못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인 문맥과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한 마르다의 행동이 예수님께 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198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미국에 왔습니다. 사모님도 같이요. 그 때는 지금처럼 비행 시간이 짧지 않았습니다. 직항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개는 어디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갔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저는 무슨 비행기를 탔는지 지금 기억이 없습니다. 미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일본을 경유했습니다. 한국인 승무원이 없었던 것을 보면 미국 비행기였던 것 같습니다. 전 그 때만해도 비행기 여행을 해 본 경험이 정말 없었습니다. 신혼여행 때 제주도에 갔다 온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조금 가져 갔는데, 그 돈을 작은 가방에 넣었습니다. 누가 훔쳐갈까봐 잠도 자지 않았고, 화장실로 안 갔던 것 같습니다. 매우 긴장했습니다. 일본 공항에서 4-5시간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미국 비행기를 타고 LA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 잠도 안 자고요. 화장실도 한번 안 가고요. 무릎 위에 가방을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계속하겠어요. 공항에 내려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계획이 없었습니다.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그러잖아요? “제일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야. 인생은 계획대로 안되거든. 계획은 세워봤자 틀어지기만 해. 계획이 없으면 틀어질 일도 없고. 무슨 일이 닥쳐도 아무렇지 않지.” 정말 이 대사처럼 저희는 공항에 도착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그 때 가서 어떻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에 처음 오는 데다 계획마저 없으니 스트레스는 많이 받았겠지요. 더 많이 피곤하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공항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연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미국에 오도록 주선해 주신 분인데요. 캘리포니아 한국 간호사협회 회장 직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나와 있다가 우리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 부부는 계획이 없었으니까요. 그냥 그 분을 따라가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그분 차를 타고 가서 그분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이 좋더라고요. 저희 두 사람을 위해서 이 분이 터키를 구워 놓았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웠으니까 터키를 구워 놓은 모양입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 진 것이 맛이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한 점 딱 먹었는데, 입에 안 받는 것입니다. 너무 피곤했고 긴장이 풀렸는지 딱 한 점 먹었는데, 더 이상은 못 먹겠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분도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피곤한 사람들이 입 맛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 분도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또 하나 이 분이 잘못한 것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터키를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 못한 것입니다. 이 분의 정성은 고마웠지만, 입에서 안 받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만든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맛있게 잘 먹었어야 했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 말씀을 전체 문맥과 상황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에 도착한 것은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누가복음 19:28)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0:32-34) 32절만 영어 성경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They were now on the way up to Jerusalem, and Jesus was walking ahead of them.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awe, and the people following behind were overwhelmed with fear. Taking the twelve disciples aside, Jesus once more began to describe everything that was about to happen to him.” 이 말씀이 베다니에 오시기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분위기였습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문맥과 상황은 1절에 있는 “유월절 육 일 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celebration began, Jesus arrived in Bethany, the home of Lazarus--the man he had raised from the dead)” 이 말씀입니다. ‘유월절 육일 전에’ 이 말씀을 이해해야 전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이 육일 남았을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베다니에 오시면서도 제자들보다 앞서 걸으셨고, 예수님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에게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음식을 좋아합니다. 잘 먹어요. 그런데, 그 때는 너무 긴장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고, 또 음식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터키였고요. 그래서 못 먹었습니다. 안 먹혀요. 예수님은 그 때 어땠을까요? 그 때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는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마르다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맛있는 것 만들어서 예수님을 대접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동생 마리아는요. 누가복음 버전 (누가복음 10:38-42)에는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가만이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매우 비싼 나드 향유 약 300그램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위의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바닥에 비싼 향유가 든 옥합 (a alabaster jar)이 깨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그림 밑에 이런 글이 씌여 있습니다. “My Alabaster Jar..... It’s Mine for the Breaking.....” “내 옥합인데..... 깨뜨리기 위한 나의 옥합입니다” 이런 글이 씌여 있습니다. 뭔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옥합들이 있습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옥합을 평생 깨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언젠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옥하바은 무엇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for keeping or for breaking?’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전 여러분이 언젠가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깨뜨리기 위해서 옥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것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인데 말이야.” 하지만, 마태복음 버전에서 이 이야기를 보면 성경에 보면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다 마리아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6:8). 자, 그러면 여러분이 잘 아는 누가복음 버전과 요한복음 버전을 다시 한번 비교해 보시지요. 누가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저녁 준비로 바빴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고, 마르다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행동은 두 버전이 똑 같고요. 마리아의 행동은 향유를 붓는 것으로, 또 가만히 예수님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르다와는 다른 행동 양식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보세요. 마르다와 마리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마르다가 준비하고 있던 식사입니까? 아니면 마리아의 행동에 더 예수님께 위로가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예수님께서 별로 식사에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터키를 구워 주신 분같이요. 그분은 최선을 다해서 터키를 구워 저를 잘 대접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상황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에게 큰 실례를 한 것은 맞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버전에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고요 (누가복음 10:42).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서는 마리아는 나의 장례를 위하여 향유를 준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와 같은 행동을 성경에서는 ‘분별력’이라고 합니다.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어로, ‘understanding’이라고 할 수 있고요. 좀더 전문적인 말로는 ‘discernment,’ 혹은 ‘insigh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 종에게 다른 종들을 맡기면, 제 때에 양식을 나누어 줄 일꾼이 누구겠느냐?” (누가복음 12:4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faithful, sensible servant is one to whom the master can give the responsibility of managing his other household servants and feeding them.”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sensibilities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