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7/14/2024 | (성령강림후 제 8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1 고독한 믿음, 빛나는 은혜 Lonely Faith, Shining Grace
마가복음 6:14~29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입니다. 마가는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소개되는 플래쉬백(Flash back)기법을 사용하여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을 소개합니다. 플래쉬백(Flash back)기법은 17절에서 시작됩니다. ‘일전에’ 라고 하면서 마가는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의 전말을 전해줍니다. 등장인물을 보면, 숭고한 희생자 세례요한, 세속적 권력의 대표자 헤롯, 권력의 희생자 헤롯의 동생 빌립, 악독한 헤롯의 불륜녀 헤로디아,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헤로디아의 딸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헤롯왕은 우리가 잘 아는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헤롯대왕은 예수가 탄생 시기에 새로운 왕의 탄생을 막고자 2세 이하의 유아학살 명령의 내렸던 포악한 왕입니다.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B.C. 4년부터 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통치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의 전체 문맥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분봉왕 헤롯도 그 소문을 들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예수의 사역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알려졌을 텐데 그 소문을 듣고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의 영이 예수께 들어가서 다시 살아 났을거라 여기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가 한 독백을 보면 "내가 목을 벤 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중얼거리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도 양심을 파고드는 진리의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플래쉬 기법을 사용하여 당시 헤롯왕가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2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세상 권력의 핵심인 왕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륜사건이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로운 사람에 대한 살해사건입니다.
마가가 소개하는 헤롯가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헤롯왕이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학자이며 로마 시민이었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를 방문하는 도중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졌고, 동생과 이혼시키고 아내로 맞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세례요한은 헤롯의 재혼을 두고 “그 일은 잘못된 일이오!” 하면서 입바른 말로 충고했습니다. 헤롯왕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요한의 말을 두려워 하고, 내적으로 괴로워 했지만 그를 옥에 가뒀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앙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던 중에 좋은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 지역의 유지들을 모두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게 되는데 헤로디아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춤을 선 보이게 됩니다. 그 자리에 공주가 친히 들어와 춤을 추는 일은 특이한 일로서, 헤롯을 유혹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당시 헤롯 왕은 헤로디아의 딸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생일 잔치를 즐겁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원한다면, 내가 떼어 주겠다."라고 잔치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딸에게 요한의 목을 베어 가져 달라고 시킵니다. 딸은 어머니의 요청을 그대로 전하게 됩니다. 이 일로 헤롯왕은 근심과 후회가 되나 앉아 있던 자들 앞에서 왕의 말의 책임과 무게가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경비병을 시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했습니다. 우리는 헤롯 왕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1세기나 지금이나 세상은 혼탁합니다.
1세기 헤롯 왕궁에서의 불륜 사건과 딸을 이용해 왕을 유혹한 사건을 보면 당시 왕실의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례요한의 살해 사건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상황적 윤리나 가치 기준으로 인해 기독교의 진리는 희망사항 정도로만 여겨집니다. 성경의 진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내면의 신앙적 갈등으로 기독교적 진리가 충돌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적 진리를 전하는 일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성적으로는 얼마나 타락된 세상을 살아갑니까? 헤로디아의 딸은 소녀티를 벗은 결혼 적령기에 이른 처녀를 가르키는 '코라시온'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헤롯왕은 헤로디아 외에도 그의 딸까지 아내로 삼으려 했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성적으로 타락한 왕이었음을 유대 역사의 기록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이 앙심을 품으면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혈기와 욕심, 교만의 죄가 상황만 만나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다스림 받지 않고 앙심을 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죄에 이끌려 가게 됩니다. 헤롯왕의 내적갈등은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안에서 겪게 되는 갈등처럼 보여집니다. 왕의 자리에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하는 헤롯은 연약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여주는 메타포적 인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께 기억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기억해 주신다면 고독하게 믿음의 길을 정진하며 갈 용기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얻게 되는 고통을 견뎌낼 믿음이 있으신가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마태복음 12장 47절에서 5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7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려고 밖에 와 계십니다.” 하고 전하자, 48 예수께서 물으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요?”49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어머니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고독한 믿음의 길을 걷더라도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혼탁한 세상속에서 성도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의 눈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없이 구조적 변화만 추구한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계속되는 과제만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빛을 바라보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스스로 질문하시며 존재를 변화를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상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라고 추종할때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자신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그는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목베임을 당하며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예수의 길을 예비한 그의 외침은 살아 있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순교의 피로 인해 확장이 됩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적지 않는 충격을 받고 슬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던 말은 그가 순교 한 후에 요한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에 더 묵직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요한은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조선땅에서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1840~1866)를 소개합니다. 그는 27살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순간까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든 조선의 관군에게 성경을 전하며 생애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는 토마스가 타고 온 배였습니다. 1866년 8월 20일 토마스가 탄 배는 대동강 하류에 도착합니다. 당시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 아래 경계가 심했고,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지휘아래 사격을 가했습니다. 불에 타는 배에서 어떤 사람은 불에 타죽고, 겨우 헤엄쳐 나온 사람들은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불을 피해가면서 배에 있던 성경을 계속 던지며 한권의 성경을 품에 품은채 강 언덕 위로 끌어 올려져 병사의 칼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품에서 성경을 꺼내어 자기를 치려는 병사에게 주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병사가 주춤하는 사이에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그 병사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토마스를 죽인 병사는 성경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이 책을 가지고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느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노라…”
이 글을 읽는데 제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영국의 웨일즈의 어느 시골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마음에 복음을 향한 씨가 심겨졌고, 그 복음의 씨는 그를 죽인 조선의 한 관군의 마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당시 제너럴 셔먼호에서 던진 책을 습득한 사람 중에 11세 최치량이라는 소년은 불온한 책을 불태우라는 포고령에 성경을 없애 버렸고, 당시 박영식이라는 사람은 남들이 버리는 성경을 모아다가 자기 집벽에 도배지로 사용합니다. 훗날 최치량이라는 사람이 그 집을 사서 여관으로 경영했는데 벽에 바른 성경을 보고 한국 개신교 교단의 최초의 목사가 나오게 됩니다. 최치량도 나중에 전도를 받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시작이 된 장대현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마음에 흐르는 것입니다. 그 피의 의미가 깊어져야만 우리 안에 있는 혈기를 참아 낼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선지자로 하나님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 세례 요한의 순교의 무게감이 느껴지시나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세계 곳곳에는 지금도 세상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선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멈춘 것 같아도 그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멈추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시간에도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해줍니다.
셋째로, 고독의 자리는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6:2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스승의 시체를 거두어다 장례를 치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에는 말할수 없는 고독감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인생에 고독감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고독의 자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없는 내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고독의 자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평안으로 자유함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니까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혼자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마태는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순교사건을 기록하고 죽음의 소식을 들으신 예수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요한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반응임을 알수 있습니다. 주님도 고독의 자리로 가셔서 요한을 기억하셨던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0절로 13절입니다. "10 결국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목이 잘렸고, 11 그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건네졌다. 그러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갖다 주었다. 12 이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한 뒤에, 예수께 가서 그 일을 알렸다. 13 그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혼자 외딴 곳으로 물러나 계셨다." (마 14:10-13)
사명자는 반드시 용기를 지니고 고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이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습니다.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는 과정이 버거울 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 삶이 한없이 초라한 것 같을때, 예수께서 깨어진 세상에 오셔서 빛나는 은혜로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덮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연약할때에, 죄인되었을때에,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않았을때에도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함, 썩지 않을 소망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무대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사명자로 살아간다는 것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집나간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고독의 자리에 있을때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 왔을때, 아버지는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다가 내가 얻었다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이땅에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은혜가 이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소망입니다.
7/7/2024 | (성령강림후 제 7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0 믿음없는 세상속에서의 사명 The Mission in a World Without Faith
마가복음 6:1~13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요 '고향의 봄'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이원수 시인(1912-1981)이 작사했습니다. 그래서 가사 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그리워하는 독립운동가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낯선땅에서 주변인으로 살면서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설움과 외로움을 견뎌내며 현실의 무게가 짓누를때에 때를 따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땅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예수께서 어린시절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던 곳이고, 유년 시기에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던 추억의 장소이며,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말씀을 배우며 성장하셨던 익숙한 동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함께 찾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꺼리고 복음을 배척하며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처절함과 고향을 잃어버린 예수님의 마음이 오버랩됩니다. 고향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전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면목없이 그 권위가 철저하게 무시 당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열린 마음으로 경험하라
3절입니다. 3 저 사람은 한낱 목수가 아니던가? 또한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꺼려하고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본래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동생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도 우리가 다 알고 있다." 마 13:55
하나님 나라의 힘은 복음이 상업주의화 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복음이 증거되면 배척 당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의 가르침, 지혜, 기적까지 보고 들은 사람들이 그들 안에 선입견으로 인해 예수의 가르침을 꺼렸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 55절은 '저 사람은 본래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는 '저 사람은 한낱 목수가 아니던가?' 라고 언급합니다. 두 구절의 말씀들을 비추어 보면 예수님은 목수 아들로 태어나서 목수의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 안에 예수를 목수의 아들로만 여겼던 선입견이 있었고,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누군가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그 아버지가 죽은 경우라고 해도 상대를 모욕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고향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꺼린 것은 목수에 불과한 예수 너가 우리에게 보인 지혜와 권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사렛 사람들은 선입견을 지닌채 혈연관계속에서 예수의 존재를 파악하려고만 했습니다.
만일 우리도 선입견을 갖고 말씀을 들을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제한됩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배척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저 사람을 다 알고 있다라고 선입견을 갖고 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다 알 수도 없고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심리학에서 조해리의 창(Johari’s window) 이론이 있습니다. 조해리의 창 이론은 조셉 러프트(Joseph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라는 두 심리학자가 1955년에 발표한 논문을 토대로 개발한 이론인대요. 조해리(Johari)는 두 사람 이름을 합성해서 만든 용어입니다. 간단히 소개하면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안에 4가지 마음의 창입니다. 첫째는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 창’, 둘째는 자신은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숨겨진 창’, 세번째 창은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아는 ‘보이지 않는 창’, 마지막으로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창’ 입니다. 사람은 내가 보지 못하는 영역을 타인을 통해 보게 되기도 하고,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판단하며 알았다고 생각하는 창은 그저 작은 영역일뿐입니다.
인간은 평생 내가 누군인지를 깨달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과도 친밀한 교제를 하게 됩니다. 믿음생활에서 불신이 높아질수록 숨겨진 창이 더 넓어질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고 깊어질수록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가는 열린 창이 넓어질 것입니다. 어쩌면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고 외면 당하는 일입니다. 볼수 없는 부분을 전하며 이해시키려고 하다 보면 영적인 공격은 언제든 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느끼는 장소였습니다. 에덴은 모든 인간의 고향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슬픔과 아픔도, 시기와 미움, 분열과 전쟁, 판단도 정죄함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에덴의 평화로운 삶이 깨져 버렸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후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에덴에 인간의 웃음소리는 끊어졌고, 인간이 떠난 자리에는 공허와 혼돈만 가득하고 하나님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죄로 인한 불신은 고향땅을 찾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선입견이 하나님 나라를 제한한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그분의 다스림과 통치를 구해야 합니다. 에덴을 떠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이상적인 에덴을 만들려고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수고와 슬픔,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바른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확신과 자기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설 때에 더해지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선입견이 없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을까요?
7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는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귀신 들림의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학적 치료를 행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의사들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환자를 의술로 치료하기보다는 영적인 충고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모든 질병이 악한 영에 의해 생긴다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병을 의학적으로 분리해서 치료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영혼이 피폐해져 가는 이들은 마음에 더 큰 불안과 근심에 억눌렸을 것이고 사회적 고립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신 것은 이들의 영혼과 육체를 회복시키고 사회적으로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포용하고 돌보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에 예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마술을 사용해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고, 자신을 우상화하려는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주어 낫게 해줍니다. 당시 기름은 상처를 치유하는 치료제였습니다. 현대인들은 관계에 지치고, 노동의 피로로 인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져 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사라지고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집니다.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거짓된 자아로 인해 불신을 조장하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마음을 다치고 서로가 믿는 하나님이 다른것만 같은 마음조차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구원은 영혼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 안에 상처의 가시를 뽑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권세로 집착과 억압으로 부터 풀려진 사람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고, 타인을 혐오하지도 않습니다. 용서받은 믿음은 우리를 열린 사고로 인도해 줍니다. 참된 삶은 수평의 세계에서 홀로 행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수직적 세계관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 나라를 현실에 뿌리 내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서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아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지혜로 모든 상황속에서 최상의 것을 응답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결핍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복음전도도 세속적인 것을 전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집니다. 전도는 예수를 팔아서 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대속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받은 복을 나눠주고 흘려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삶이 아니라, 귀한 것을 나누고 베푸는 삶입니다.
상품화된 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복음이 상품화 되는 시대에, 복음을 듣는 이들이 성도들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더 깊이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들의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서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 주님의 권면은 단순히 장소적 의미만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에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수시로 변화되고 개인주의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오래 머무르는 것은 필수적인 영성입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영성이 필요합니다. 오래 머무르는 영성은 단기적인 성과를 추구하기 보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 거하며 머무르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 빨리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일하기보다 효율을 높이고 보여지는 결과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교회일을 할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시간안에 머물러 겸손하고 성실하게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있도록 선택하셨다는 믿음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어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의 10절 말씀에서 한 집에서 계속 머무르라는 것은 복음 안에 있는 관계성을 실천하라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영향력은 오랜 시간 함께 머물며 서로의 관계가 깊어질 때 형성됩니다.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어떠한 일을 무리하게 해 나가다 보면 그 일들이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고 관계입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사역과 복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신앙 공동체는 함께 모여 예배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할때에 더욱 견고해 집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것 처럼 믿음 생활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고 점검하여 우리의 영적 건강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 시간이나 기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를 높이는 삶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속에서 사명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편협한 사고를 버리고, 내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과 육를 지닌 존재로 창조 하셨기에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만큼 죄의 유혹도 부지런히 따라오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삶의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벧전1:15)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위기와 도전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까지 믿음의 여정을 지속하시길 바랍니다.
6/30/2024 |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가? Why Do We Believe in Jesus Christ?
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10
“왜 크리스천들이 비난을 받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내놓는 중요한 것 두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마태복음 5:13-14)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크리스천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고, 교회 밖에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영어 단어에 무슨 뜻이 있는지 아십니까? 웹스터 영어 사전에 ‘One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른 사전들도 약속이나 한듯이 똑 같은 크리스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김대건(1821-1846)’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2022)’을 보았습니다. 아주 잘 만든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이 영화의 압권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마지막 남긴 말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주인을 알지 못하면 보람이 없고, 살아도 쓸 데가 없습니다. 천주께서 곧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끊임없이 보내 주실 것이니, 서러워 말고 큰 사랑 을 이루어 한 몸같이 천주를 섬기다가, 영원한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길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김대건’은 불과 15살에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현종(顯宗)은 라틴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지리, 측량 등 다방면에 박학했던 그의 재능을 몹시 아까워서 살리고 싶었지만 결국 김대건 신부는 25 세의 나이로 순교 했습니다. 저는 그가 마지막 남긴 말에서 강한 크리스천의 향기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감동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목적, 그리고 나의 믿음과 인내와 사랑,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의 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0) 바울의 삶은 분명했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제자 디모데가 보기에 바울의 삶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 세대에 와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지, 왜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지, 왜 크리스천들이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욕을 먹고 있는지, 한번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이유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다면, 그 결과가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모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 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병이 낫기도 하고, 어렵던 사업이 잘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를 믿는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식들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자식들이 잘 되기만 한다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교회에서 권사직까지 받은 사람이었는데요. 하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답답해서 그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저야 뭐.....”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더니 “제 와이프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저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이 질문은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the foundational question)’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철학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다행히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이유와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맞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영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한자로는 ‘永生’이라고, ‘길 영, 날 생’자를 씁니다.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영생’이라는 말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삶의 ‘길이’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영생은 곧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어 성경에는 좀 더 분명하게 이 말씀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And this is the way to have eternal life-to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the one you sent to earth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즉 오직 참된 하나님이신 당신을 알고, 당신이 세상에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γινώσκω(ginōskō)’라는 그리스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지식’을 뜻하는 ‘γνῶσις(그노시스)’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을 이용하여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get a knowledge of perceive, feel). 단순히 ‘know’라는 영어 단어를 가지고는 그 뜻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영생’을 ‘길이’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그렇게 계획해 놓으셨습니다(For we are God's master- 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 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에베소서 2:10)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말씀이 로마서 3:21 말씀과 함께 복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매스터피스’입니다. ‘매스터피스’는 작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작곡가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의 ‘매스터피스’는 ‘메시아(Messiah)’입니다. 헨델은 이 작품을 쓸 당시 끼니를 잊을 정도로 몰입했다고 합니다. 가끔씩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자필 악보에 “그는 멸시를 당하였다(He was despised)”는 부분에는 그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시아’ 악보의 맨 끝에는 자필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작곡가 헨델의 ‘매스터피스’가 ‘메시아’인데,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매스터피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죄가 들어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우리가 살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교제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납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의) 옛 모습을 벗어 버리십시오.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모습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에베소서 4:22-24)
누가 저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저의‘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말은 ‘참 사람’, ‘참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불의 앞에서 분노할 줄 알고, 눈 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 이런 사람으로 살기 위해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고,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의 성패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삶에 달려 있습니다. 그 밖에 다른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나누는 ‘펠로우십(fellowship)’ 에 모든 힘을 쏟아야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됩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각이 어느 새 나의 생각이 되고,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가치들이 어느 새 나의 가치관이 되어 그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끝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배워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폴 워셔(Paul David Washer, 1961- 미국)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여러분의 삶을 비교하지 말고,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십시오 (Stop comparing yourself with others who call them-selves Christians. Compare yourself to the Scripture).”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저 사람보다 훨씬 낫다는 우월감 에 빠지게 쉽고, 반대로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마땅히 행동을 해야 할 때에도 “저런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뭘......” 하면서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면,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때로는 말씀을 통해 격려를 받기도 하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저는 요즘에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전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음악을 듣게 됩니다. 클래식도 듣고, 팝송도 듣습니다. 어느 채널에서 1970년 대에 유행했던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El Condor Pas(엘 콘도르 파사)’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사가 전과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나는 달팽이가 되느니 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 나는 못이 되느니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 “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 라는 가사가 강력한 메타포(은유)로 제 귀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느리고, 게으르고, 항상 제 자리를 맴도는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소망하면서 오늘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6/23/2024 | (성령강림후 제 5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9 예수께서 보이신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God that Jesus showed
마가복음 4:35~41
1933년도에 발표한 '갈릴레아 바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정지용 시인(1902-1950)은 문학사에서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우기도 합니다. '갈릴레아 바다'라는 시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사의 비운이 녹아져 있습니다. 갈릴레아는 라틴어식 발음이고 갈릴리는 영어식 표기입니다. 그는 식민지로 살아가는 민족적 비애를 갈릴리에 일어난 파도에 비유했습니다. 시의 일부분입니다.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 때 없이 설레는 파도는 미한(아름다운) 풍경을 이룰 수 없도다 / 다만 주를 깨움으로 그들의 신덕은(믿음은) 복되도다 / 돛폭은 다시 펴고 / 키는 방향을 찾았도다 / 오늘도 나의 조그만 갈릴레아에서 주는 짐짓 잠자신 줄을 / 바람과 바다가 잠잠한 후에 나의 탄식은 깨달었도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배에 오른 채 모여든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비유를 가르쳐 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항해하는 장면입니다. 때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무리를 피해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는 배를 따라서 다른 배들을 끌고 따라 갑니다. 주님은 말씀을 가르치며 지쳐 있으셨는지 피곤한 몸을 충전하시기 위해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마가는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와 물이 배를 덮치고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오게 되는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왜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느냐고 원망합니다. 마가는 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시고 그 날 저녁에 풍랑을 만나서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록했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한 필요 요소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믿음은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배 안에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적당한 풍랑을 만났다면 자신들의 경험으로 배를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풍이 배를 덮치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순간 비로소 주님을 찾아 갑니다. 믿음은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배웠다고 해서 실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성숙해져 갑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주님과 함께 이뤄가는 전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만나서 믿음의 눈을 뜰때 비로소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현재 겪고 있는 일들이 인생의 풍랑이라고 느껴진다면 고단해도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인내와 성실함으로 주님의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80세에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지기까지 그는 40년이라는 시간을 공주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기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을 보내는 동안 그는 철저하게 광야 길을 인도해야 할 지도자로 훈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인생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실때에 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왕자로 살아가다가 광야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도 하고 나그네와 같은 자신의 삶에 모세의 마음에는 끊임없는 파도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의 첫째 아들 이름이 게르솜인데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며 자신의 무능을 철저하게 절감하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찾아 오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설 때에 그는 이제껏 신던 발의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세상의 신발을 벗는 것은 내가 지금껏 걸어온 삶을 부인하라는 뜻이 아니라 너를 위해 걸어온 이력들을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순간 잃어 버리고 놓친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보다는 내 생각과 경험을 신뢰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믿음의 전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풍랑으로 인해 두려워 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두려워 합니다. 환경를 바라보는 두려움에서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41제자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이분이 어떤 분이길래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 것일까?" 하고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걸어온 인생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전환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르심 이후 모세의 40년의 인생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의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고 금송아지를 숭배했을때 모세는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모세의 간청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 32절입니다. "31 모세가 주께로 가서 여쭈었다. “주여, 이 백성이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32 하지만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만일 주께서 저들을 용서하실 수 없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차라리 제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 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인생의 길과 진리가 되셨다는 사실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살아갑니다. 마가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과 두려워 하는 제자들을 대조하여 기록하며 하나님 나라의 실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고 계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서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내려놓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둘째로 믿음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가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는 '안식의 여정'(Sabbatical Journeys)의 책에서 서커스 곡예사 친구의 말을 소개합니다. 그네 곡예에서 뛰는 사람과 잡는 사람 사이에는 꼭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뛰는 사람이 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뛰어 오르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가만히 있으면서 잡는 사람이 자신의 손을 붙잡아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뛰는 사람은 절대로 잡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될 경우에는 곡예를 하다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기다림은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고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우리의 기도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나의 계획이 멈춘 듯 느껴지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가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며 더딘 시간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37편 7절을 보면 "잠잠히 인내하면서 여호와를 기다리십시오." 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무려 24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도 광야의 40년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7세에 하나님의 꿈을 꾸고 13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림으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를 통해 요셉의 형제들과 민족을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셨지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림 끝에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끝까지 기다린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고,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도 자신들의 힘으로 안되는 일을 만나게 되니까 주님께 따지듯이 이런 상황에 잠이나 자고 있느냐고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믿음 없이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배가 침몰하지 않을거란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낼 때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 나라가 되는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종말의 날에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신음하고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23 피조물만 아니라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들 자신도 속으로 신음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우리 몸이 구속될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 8:22-23)
셋째로 믿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은 겸손하게 그분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람과 파도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피조물을 통제할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와 동일한 능력을 지니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의심하는 마음의 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인간 관계도 서로를 향한 신뢰가 없으면 깊어질 수 없듯이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해서 믿음을 다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구원 이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믿음의 과정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시련이 올때 마다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생활을 하며 겪게 되는 모든 경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과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대부분 시련을 겪으며 믿음을 단련시켜 나갔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험들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수한지 알아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금보다도 훨씬 귀합니다. 금은 불에 의해 단련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순수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벧전 1:7)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사랑하는 자녀가 세상 속에서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시지만,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실수가 많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면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불안과 염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만 있어도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이 타고 계시던 배를 따라오던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주님이 계신 배를 따라가기만 해도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가 무엇인지, 광풍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갈릴리 바다가 잠잠해지는 사건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우리들의 믿음의 여정을 그려 줍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듯 주님은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갈릴리 바다의 풍랑처럼 삶 속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날 수 있지만 믿음의 성도는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께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풍랑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시련이 와도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는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전하시며 마가복음 4장 9절과 23절에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너희의 마음의 새겨 들어야 한다'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깨닫지 못한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강한 풍랑으로 인해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능력의 원천입니다. 제자들은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하게 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고, 인생의 파도를 잠잠하게 합니다. 인생의 광풍이 우리의 감정을 출렁이게 할 때, 감정의 파도 속에서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하는 믿음의 인생이 되길 소망합니다.
6/16/2024 | (성령강림후 제 4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8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 Jesus' Parable of the Kingdom of God
마가복음 4:26-34
하워드 A. 스나이더(Howard A. Snyder 1940-현재) 박사는 한국교회에도 잘 알려진 기독교 미래학자이자 선교신학자입니다. 그는 세속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교회, 세상에 대한 주제로 많은 책을 집필했습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 대해 한 사람의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매일의 삶에서 그 실제적 관심을 그의 책들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스나이더 박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모호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하나님의 통치와 새로운 질서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없는 나라이기에 아무리 설명하려고 애를 써도 쉽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7가지 주제를 평화로운 질서, 약속의 땅, 하나님의 집, 왕의 도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 안식과 희년으로 분류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달랐습니다. 세상은 불신과 폭력이 가득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평화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평화를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본향 땅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소망이 되셨습니다. 이 은혜의 신비는 맡겨진 사명의 무게를 지니고 일상의 자리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로 살아가도록 합니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에게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성도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새로운 질서 가운데 서로의 시간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매주일마다 우리는 한주간의 리듬을 다시 확인하고 몸과 마음에 참된 안식과 평화가 임하도록 하나님 나라에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 관한 것입니다. 이 내용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리는 것과 같고, 뿌려진 씨는 농부가 자든 깨어 있든 밤낮으로 싹을 틔우고 저절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작지만, 나중에는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무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다른 비유들보다 복음서 앞쪽에 배치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 비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엿보게 됩니다. 마가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를 기록하는데 서른 다섯절의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드러났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사람들과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농부가 되시는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뿌려진 씨앗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씀을 전하기 전까지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물리적 공간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국가,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에도, 좋은 땅에도 뿌려진 씨앗입니다. 주님은 모든 세상에 뿌려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편협한 마음으로 인해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의심이 많아서 말씀이 자라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여 시험에 들기도 하며, 재물에 대한 염려와 여러가지 욕심과 육체의 유혹들로 인해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자신들만의 나라라고 믿는 이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씨를 심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의지나 욕망으로 세워지고 무너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가운데 세워지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햇빛과 비를 통해 식물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창조하신 법칙이듯, 숨겨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았고, 버려져 뿌려진 씨처럼 땅속에 묻혔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상처받은 마음이 뿌리 내리고 있고 스스로의 멸시와 거절감으로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이전의 삶의 뿌리가 뽑히고 우리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보게 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죽고 사라진 줄 알았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는 마치 씨가 땅속에서 껍질을 벗고 줄기가 뻗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진행방식이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고작 사람의 됨됨이나 생김새에 의존하지만, 거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성경에는 땅속 깊이 감추인 보화가 가득합니다. 예수의 비유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결핍을 채우고 감탄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주시는 천국의 보화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에서 또 다른 농부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그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려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14절을 보시겠습니다. '14 잘 들어라. 씨를 뿌리는 농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힘이 이 땅에 열매를 맺을 사람들을 만들어 갑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물을 주고 거름을 줄 힘이 약해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류에 뿌린 씨앗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씨 뿌리는 비유의 요점을 놓쳐 버리고 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가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잘못된 이해를 지닌 채로 전해진 복음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역동적으로 다가왔고,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약속된 언약을 오랜 세월 밤낮으로 싹을 틔우고 저절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 계시기에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개인의 역사와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독일의 문학가 괴테의 말이 생각납니다. 방황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살아가며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걱정과 근심으로 뒤척이는 밤을 보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지 않으며 내 입술의 말과 생각이 주님께 올려드려 짐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이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그 길을 걷습니다. 내 속도가 유난히 더딘듯 느껴지고 내 삶에 사랑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 시선의 방향이 분명해지면 목적이 분명해지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제들 안에 억눌려 있는지 얼마나 편협하게 비판하고 살아가는지 마음의 방향을 주님께로 바로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걷다가 본향집 꽃피는 산골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을 수고했다고 안아 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이 되시는 주님의 사랑과 마음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과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빚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버린다면 더 이상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답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임을 설명하시며, 내가 너희를 떠난 뒤에도 너희가 절대로 혼자가 아니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할 수도 있지만, 어떤이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믿음이 성숙해 지는 사람은 경험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도 아니고 복을 많이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씨름한 흔적이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고백 되어지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시간이 땅속에 심겨진 씨와 같아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어진 때를 성실하게 걸어가다 보면 땅속에 있던 씨앗이 껍질을 벗고 생명이 자라듯이 우리의 믿음도 성숙해 질 것입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땅속 곰팡이가 지구 상에 있는 식물의 뿌리들이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낙엽이나 동물의 배설물을 분해한다고 합니다. 식물 뿌리 자체로는 땅속에서 뻗어 나가는데 한계가 있는데 뿌리가 영양분을 쉽게 흡수할 수 있도록 뿌리균이 돕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보이지 않지만 네트워크 속에서 이뤄가는 나라입니다.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서도 연결되고, 선한 영향력을 통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갑니다. 밭을 가꾸는 순서를 보면 먼저는 땅을 고르고, 거름을 주고, 좋은 모종을 골라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후 농부는 잘 자라도록 거름을 주고, 주위에 잡초를 뽑으며, 새싹이 자라면 솎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추수할 때를 기다립니다.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농부가 자든 깨어 있든 밤낮으로 싹을 틔우고 스스로 자라나게 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30-32절)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단서가 겨자씨입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들 가운데 가장 작지만 자라서 새들이 가지에 깃들일 만큼 무성해집니다. 작음과 무성함은 서로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 비유는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가 외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겨자씨 비유일까요?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고, 마케팅을 통해서 세상의 방법으로 부흥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제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은 국경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자유와 새로운 질서 가운데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무성해져서 새들이 깃들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 목표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서로가 큰 사람이 되려는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작은 새들이 와서 깃들일 만큼 누군든 와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교회,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 바른 신학으로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33 ○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많은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34 그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 뜻을 따로 설명해 주셨다.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멈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영적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하여 설명해 주신 후에 제자들에게는 비유안에 감추어진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는 말씀을 실제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단순한 신앙형식에 매달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거하는 일에 쉼없이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작은 겨자씨가 뿌려졌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됨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일상에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고 하신 예수의 비유가 깨달아 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