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017 | 성령강림절 메시지

성령충만한 제자들 The Disciple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2:1-13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영어로는 ‘Pentecost (펜테코스트)’라고 합니다. 라틴어 ‘pentēcostē’에서 왔는데요. ‘50번째 (50th)’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50번째 되는 날 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때를 ‘오순절’이라고 불렀는데요. 일종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입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바로 이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갑자기 어느 날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미리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요엘 2:28-32에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라.” (누가복음 24:49) 바로 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제자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모두 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 그만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한 기대와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통하여 내 마음을 만져 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것을 기대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이해서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 성령께서 나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시기를, 그래서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체험을 주시도록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새벽기도 때도 말씀을 들렸습니다만,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령에 대한 오해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나 혹은 주변에서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의 부적절한 말과 행동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무슨 신들린 사람처럼 쉰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리고, 행동하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가정을 소홀하게 여기고 밖으로 나돕니다. “저는 밥은 아주 조금만 먹고요. 하루 온 종일 기도만 합니다” 이런 가식적인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아주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성령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 여러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성령체험’이라고도 나와 있고, ‘성령 세례’라고도 나와 있습니다. “도대체 성령을 받으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을 받으면 한마디로 ‘우리의 인간성(人間性, humanity)이 변화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다”는 고린도전서 15:50 말씀 이었습니다. 여기서 ‘혈과 육’이라는 말은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인간성을 말합니다.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인간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말이 ‘self-ishness (이기심)’라는 말입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다 그랬습니다. 그나마 예수 믿고 나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좀 나아졌습니다. 좀 나아진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의식적으로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처음으로 성령이 임했던 그 현장으로 가 볼까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약 120명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모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명단 (사도행전 1:13-14)을 잘 보면, 그 자리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3년 꼬박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인간성은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나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연약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또 주목해서 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요한의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7:5). 이런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나더니, 사람들이 앉아 있던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혀처럼 생긴 불꽃이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불꽃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그 곳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다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성령 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자기들의 언어와 다른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4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uddenly, there was a sound from heaven like the roaring of a mighty windstorm, and it filled th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from heaven)’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사건은 ‘하늘 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런 현상을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이런 일어난 일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일으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시몬이라는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나도 그런 능력을 갖고 싶다고 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당신은 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니,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 하시오.” (사도행전 8:20-23) 성령을 받는 일이 세상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라면 돈 많은 사람이 성령을 소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베드로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물 (the gift of God)’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이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충만한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제자들은 모두 밖으로 뛰어 나가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 을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겁과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이 ‘겁과 두려움’ 역시 나약한 우리 인간성 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속에도 이 ‘겁과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 에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를 전도하려고 할 때 내 속에 ‘겁과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있는 이 ‘겁과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유대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이 일을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사도행전 2:14) 이같이 성령충만한 제자들은 두려움 없이 지금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습니다.

둘째로,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목적 (purpose)’이 없다는 말은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삶의 목적’이란 말을 별로 해 보지 않았습니다. 맞습니까? 학교 가야 하니까 학교 가고, 공부해야 하니까 공부 하고, 직장에 나가서 일해야 하니까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을 벌고, 결혼해야 하니까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 하니까 애를 낳고, 그냥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제자들에게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삶의 목적’이 주어졌습니다. 제자들은 그 목적을 위해서 자기 삶 전체를 헌신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삶의 목적’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미련 없이 내려 놓았습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어 볼까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 ‘이 모든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 모든 것들’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연약한 그의 인간성 때문에 또 언제 주님을 배반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의 인간성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모두 내려 놓고, 한 가지 목적에 끝까지 충실했습니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말을 못할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삶의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나의 삶 속에 들어 오면, ‘삶의 목적’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모두 내려 놓게 됩니다. 억지로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이것을 드러내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땅끝’이 어디인지 묻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은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밖으로 나가서 외국어를 말하지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오순절이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러 왔습니다. 이 유대인들 중에는 1세들도 있었고, 2세들도 있었습니다. 아예 그 나라 사람인데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나라와 지역 이름이 9-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놀랍게도 이 지역의 언어 (their native languages)로 말을 했습니다.

누가 그렸는지 그 지역들을 모두 찾아서 지도에 그려 보았더니, 이런 모양의 지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든 모양새입니다. 이 지도를 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지역들이 바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지역들이라는 것입니다. 지도에는 화살표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지만, 이제 예루살렘에서 세계 각국으로 복음이 전파되도록 화살표가 그려져야 합니다. “너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지역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해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문자적인 의미에서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 하는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파 해야 할 ‘땅끝’이 어디인지, 또 나를 통해서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왜 진작 교회는 성령충만한 삶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왜 나의 삶을 변화 시킨 복음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지금이라도, 비록 더디고 시간이 많이 걸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복음을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5/28/2017 | 야외예배

하나님의 케어 속에 있는 삶 The Life Under God’s Care

시편 95:1-7

오늘 모처럼 이렇게 야외로 나오니까 참 상쾌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가끔 일상생활을 떠나서 제자들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가복음 6:31 말씀이지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잠시 쉬도록 하자.”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Let's go off by ourselves to a quiet place and rest awhil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13에는 예수님께서 혼자 있기 위해서 사람들을 떠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a remote area)’ 가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죽고 나서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예수님에게 쏠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떠나서 혼자 있을 장소를 찾으셨습니다.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공부하고, 페이퍼 쓰는 일, 회사에서 일하던 일, 비지니스에 대한 생각, 자녀들에 대한 생각, 이런 생각들을 잠시 내려 놓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불고기에 삼겹살을 준비했다고 하는데요. 서로 서로 둘러 앉아서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짬짬이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 보세요. 저 쪽 뚝 위로 올라가면 호수가 있습니다. 호수 가로도 한번 걸어 보세요.

오늘 제가 잠시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95편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누가 썼는지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꼭 다윗이 썼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만, 학자들은 다윗이 쓴 것으로 보지 않고 다른 익명(匿名, anonymous)의 저자가 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편 95편을 한 절 한 절 읽어 보면 그 안에 많은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목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장 안에서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양 떼들입니다.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가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편 23:1-6)”라고 고백했습니다.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자기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차고 넘친다는 고백입니다.

시편 95편을 쓴 저자 역시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He is our God. We are the people he watches over, the flock under his care.” (7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 (care)’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안심 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돌보신다고요. 요즘에 ‘오바마 케어 (Obamacare)’라는 말도 하고, ‘프럼프 케어 (Trumpcare)’라는 말도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케어 (God’s care)’를 받고 있습니다. ‘오바마케어’가 우리를 완전히 케어해 주지 않습니다. ‘트럼프케어’가 우리를 완전히 케어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케어’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케어’는 당장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케어’가 구체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케어’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그렇게 좋은 것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케어’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recognize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돌보고 계시구나! 나는 하나님의 케어를 받고 있구나!” 어떻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새를 보아라.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 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새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들에 피는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6:26-30)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나무, 풀, 새, 이런 것들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야외예배는 일종의 현장학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나무들과 핀 꽃들, 그리고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기르시는 ‘하나님의 케어’를 현장에서 느껴보는 것입니다. 저 혼자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자연 속에 들어 오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케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95편 저자는 ‘하나님의 케어’를 recognize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하나님께 기쁜 노래를 부르자 (1절). (2)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 (2절). (3)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자 (6절). (4)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자 (Let us kneel before the Lord our maker., 6절). (5)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Listen to his voice today., 7절).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찬양과 감사와 예배와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케어’를 확인할 수 있는 채널들입니다.

오늘 야외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는 단순히 “아, 다시 지겨운 집으로 가는구나! 지겨운 학교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요. 내가 ‘하나님의 케어’ 속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 제가 ‘하나님의 케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주 안에서 새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에너지로 충만한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5/21/2017 |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 God’s Plan for Achieving Goodness

로마서 8:26-28


5/14/2017 |

새로 지음 받은 자의 삶 A Life of The Newly Created Person

고린도후서 5:1-5


5/7/2017 | (어버이주일/졸업예배 메시지)

하나님의 은혜로 By His Grace on Me

고린도전서 15:10

오늘은 어버이주일과 졸업예배를 같이 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번에 우리교회 졸업생들이 모두 52명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4명이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받는 친구들이 20명이고요 대학원을 마치고 석사학위 받는 친구들이 21명이고요. 박사학위를 받는 친구들이 7명입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은 대학교 4년, 대학원 2년, 박사학위 4-5년, 대학교부터만 계산해도 모두 10년이 넘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직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있을 나이인데 부모를 떠나고, 집을 떠나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이 있게 해 주신 분들 중에 가장 감사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고요. 그 다음에 감사해야 할 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이십니다. 다 동의하시죠?

부모가 없이 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자기 자식보다 남의 자식이 더 예쁘고 똑똑한 데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제일 예쁘고 똑똑한 줄 압니다. 부모는 자식을 볼 때 객관적(客觀的)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요. 주관적(主觀的)으로 보는 눈만 있습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이 있는데, 늘 만나면 손자 자랑을 합니다. 자기 손자를 찍은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김목사, 우리 손잔데, 이것 봐. 내가 보기엔 천재 같아!” 그래요. 그러면 제가 놀려 주려고 “목사님, 천재는 무슨? 그만한 때 애들 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 손자는 정말 천재라니까!” 하면서 기분 나빠 합니다. 부모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식이, 자기 딸이 못났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고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기릅니다. 자식을 위해서 돈을 써도 아깝지 않습니다. 온갖 사랑을 다 쏟아 붇고도 더 쏟아 부을 것이 없어서 안타까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런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이번에 졸업한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님들이 얼마나 기뻐하실 지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살아 계신가요? 건강하신가요? 전 다음 주간에 한국에 잠깐 다녀 오려고 합니다. 아버님 연세도, 어머님 연세도 90이 넘으셨습니다. 연로하신다 보니 건강이 아주 않 좋으십니다. 제가 한국에 가면서도 두려운 것은 저를 혹시라도 못 알아 보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건강할 때 잘 해 드려야 하고, 건강할 때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데, 이제 연로하셔서 저를 못 알아 보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는 한국을 떠나 온 지가 34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부모님을 뵈었겠습니까? 늘 목회한답시고, 교회 일 한답시고, 제대로 뵌 적이 없습니다. 뵈어도 잠간 밖에 뵙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한자로 ‘효’ 자를 어떻게 쓰는지 아시지요? 위에는 ‘노인 노(老)’자가 있습니다. '노(老)' 자는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형태인데요. ‘효(孝)’자는 지팡이 대신 ‘아들 자(子)’ 자가 있습니다. 글씨 형태로 보면  연로하신 부모님을 지팡이 대신 아들이 받치고 있는 것을 형태입니다. 제가 한자를 배울 때는 ‘효’자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아들이 엎고 가는 모양이라고 배웠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찾아 보았더니 아들이 연로하신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가는 모양이라고 설명한 데도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부모님에 최선을 다해 드리세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자주 부모님 곁에 있어 드리세요.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 친부대(子欲養而親不)”라는 말이 자꾸 생각납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말인데요.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라는 말씀이 자꾸 마음에 떠 오릅니다. 공자가 유랑을 하다가 하루는 몹시 울며 슬퍼하는 사람을 만났답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 슬피 우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첫째는 젊었을 때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나신 것이고, 둘째는 섬기고 있던 군주가 사치를 좋아하고 충언을 듣지 않아 그에게서 도망쳐 온 것이고, 셋째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제를 하던 친구와 교제를 끊은 것입니다. 무릇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 잘 날이 없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이미 안 계신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마른 나무에 기대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노래 중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조은아 작사, 신상우 작곡인데요. 오늘 읽은 말씀 고린도전서 15:10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작사했고, 곡을 붙였습니다. 가사도 곡도 아주 훌륭합니다. 신상우 씨가 캐나다 밴쿠버에 살 때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고 합니다. 갈 곳에 없어서 밴쿠버에 있는 고형원 씨 집에 얹혀 살았는데, 고형원 씨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이 내가 하나님님께 헌신하겠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나에게 어려움을 주시는지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성경 말씀은 꾸준하게 묵상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린도전서 15:10 말씀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다가 나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밴쿠버에 살고 있던 조은아 씨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사를 하나 써 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조은아 씨는 그 다음 날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가사를 써 왔다고 합니다. 종이에 만년필로 쓴 가사였는데, 이 가사 첫 줄,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을 읽으면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태어난 곡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곡이라고 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whatever I am now, it is all because God poured out his special favor on me—and not without results. For I have worked harder than any of the other apostles; yet it was not I but God who was working through me by his grace.”

이 말씀이 주는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but whatever I am now’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내가 성공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무조건 성공하고, 무조건 잘 되고 이것 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 중에 계획대로 안 된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친구는 학점 문제로 학교와 문제가 있어서 이번에 졸업을 못하는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만 그런 것 아닙니다.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에 또 어려움 겪고 있는 분들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취직 문제로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모두 잘 된 사람들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위에서 신상우 씨도 그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이 노래를 작곡했을 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이런 그를 다시 일으켜 준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5:10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환경에 있든지, 내가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좋은 위치에 있는지 낮은 위치에 있는지 상관 없이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하게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실패와 절망 중에 있는 내가 성공했을 때, 낮은 자리에 있던 내가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by God’s grace on me’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졸업생 여러분들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겸손에 대하여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남아프리카공화국)가 그의 책 ‘겸손 (Humility, 1895)’에서 한 말입니다. “Just as water ever seeks and fills the lowest place, so the moment God finds you abased and empty, His glory and power flow in.” “물이 항상 낮은 곳을 찾아 채우는 것처럼, 당신이 낮아지고 비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발견하시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당신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이 말씀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겸손에 대해서 한가지 말씀을 더 볼까요? 잠언 3:5-6에 있는 말씀입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네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지 마라.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그리하면 네가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보여 주실 것이다.”

비록 이 말씀 안에 겸손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씀 자체가 이미 겸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understanding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길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이 보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사람이 받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당장에는 교만하고 똑똑한 사람이 이기는 것 같지만,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아니, 자기가 결정한 길을 걷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을 걷는 사람 중에 누가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겠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공한 사람만 이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당장에 앞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What-ever I am now it is all because God poured out his grace on me”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가 어느 형편에 있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성공과 실패와 절망 속에도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항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다른 어떤 사도들 보다도 자기는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일 마저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요. 여러분들 다들 아실 겁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자서전을 냈는데, 자서전 제목이 ‘최선을 다 하는 삶 (Why Not The Best)’입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 하는 제목입니다. 그는 재임 중에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크리스천인 카터는 항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2002년에는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항상 겸손하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의 귓전에 저의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들립니다. “목회 열심히 해라. 교회 일 열심히 해라. 넌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니까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목회 열심히 해라!” 어머니가 정정하실 때는 이 말을 하시면 “알았어요!” 하고 짧게 대답하곤 했는데, 지금 어머니를 찾아 뵈면 그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못 알아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떠나 보내실 때 눈물을 훔치시면서 “목회 열심히 해라!” 늘 하시던 이 말씀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