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2022 | 성령으로 난 사람(1)

눈을 주님께 돌려(VII) Turn Your Eyes Upon Jesus

요한복음 3:1-8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데에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니고데모는 자기가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자기가 예수님께 가지고 온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조용한 시간에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과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제한된 자료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에서 알아주는 랍비였습니다. ‘랍비(Rabbi)’는 ‘선생’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말로 학문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 붙여주는 칭호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랍비’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습니다(요한복음 4:31, 9:2, 11:8. 마태복음 26:25)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외에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요한복음 1:38, 49, 3:2). 니고데모도 예수님께 ‘랍비’라고 불렀습니다(요한복음 3:2). 니고데모는 71명으로 구성된 ‘공의회(Sanhedrin)’의 의회원이었습니다. 이 직은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라 최고의 권위를 가진 유대 사회의 실질적인 ‘rulers’입니다. 니고데모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고, 불의한 일을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요한복음 7:50). 

중요한 것은 그가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3:1). 이 말은 그가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문자 하나까지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빌립보서 3:5). 바울도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율법을 신봉했던 유대교의 체계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보자마자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아셨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문제를 모두 알고 계시는 마당에, 하나님과 본질 상 같은 분이신(빌립보서 2:6)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았고, 율법을 지켜왔던 니모데모였지만, 삶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자신이 따르는 율법의 조항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지금 네가 가진 문제는 네가 거듭나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unless a person is born again [reborn from above—spiritually transformed, renewed, sanctified], he cannot [ever] see and experience the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다”는 말은 믿음 생활의 가장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너의 답답함을 잘 알고 있다. 네가 기쁨을 얻고 만족함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즉 네가 영적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성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니고데모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뱃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가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평생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실천해왔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공의회의 의회원이었지만, 니고데모는 영적으로는 초보적인,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에 놀라지 마라. 바람은 제 마음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도 이와 같다.”(6-7절)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볼까요? “Humans can reproduce only human life,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So don't be surprised when I say, `You must be born again.”

크리스천의 삶을 이해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있을까요? 크리스천으로 사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봐야 되겠다고 결심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심을 해도 매번 실패하거든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거나 새로워지는 것은 사람의 결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spiritual life(영적인 삶)’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진리를 ‘바람’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성령’이라는 말과 ‘바람’이라는 말이 어원(語源)이 같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말로는 ‘루아흐(רוּחַ)’라는 말이고 그리스 말로는 ‘프뉴마(πνεῦμα)’라는 말입니다. ‘바람’ ‘숨’ ‘호흡’ ‘생명’ ‘영’ ‘성령’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람이 부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도 그 과정을 모두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람이 부는 것을 볼 수는 없지만, 바람이 불고 지나간 흔적은 볼 수 있습니다. 맞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도 흔적을 남깁니다. 나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선하고, 좋은 흔적을 남깁니다. 어떤 때는 드라마틱한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전에는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이었는데,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하도 급진적(radical)이고, 드라마틱해서 그 당시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바울을 어떻게 믿느냐?” “그 사람 때문에 잡혀간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하면서 바울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사도행전 9:20-22, 26). 

갈라디아서 5:22-23에 보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맺는 열매들이 나와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자비와 착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할 율법이 없습니다(There is no law against these things., NLT).” 이 열매들 중에 율법에서 금지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열매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에서 권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남기는 흔적들입니다.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첫째로,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능력(power)’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령에 대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면(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높이게 되고 예수님 중심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능력이 주어진다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But you will receive power and ability when the Holy Spirit comes up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to tell people about Me]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even to the ends of the earth., Amplified Bible).” (사도행전 1:8)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에도 그 외에 다른 목적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능력을 돈으로 살려고 했다가 망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사도행전 8:20). 사마리아에 살고 있던 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gifts)’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능력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능력은 ‘내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인식한다면 그 선물은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고, 그 선물을 주신 분의 생각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을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 혹은 흥분 상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때로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실 때 감정적인 변화가 따라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의 변화가 반드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찬양 집회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종종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집회 장소에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고, 흥분의 도가니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을 성령충만과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로, 성령을 무슨 ‘원리(principle)’나 ‘원칙’ 혹은 어떤 ‘정신(spirit)’ 같은 비인격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이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인격(personality)’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의 인격이 존중을 받을 때 기뻐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합니다(에베소서 4:30). 성령을 인칭 대명사로 표시할 때 대문자 ‘Him’으로 표시합니다. 이 사실 역시 성령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우리가 성령과 관계를 맺을 때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성령의 인도를 기꺼이 받고, 순종함으로써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넷째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 목소리가 크고,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대화가 잘 되지 않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고, 가까이하기 부담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못된 오해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리스천으로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날씨가 더울 때 싱그러운 바람이 불면 얼마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습니까? 성령이라는 말과 바람이라는 말이 같은 말에서 나왔다고 했잖아요?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싱그러운 바람과 같아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For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ver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고린도후서 3:17)

이 말씀을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성령이 계시지 않는 곳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성령은 모든 얽매인 것들을 풀어줍니다. 맞습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명예에 얽매였습니까? 권력에 얽매였습니까? 돈에 얽매였습니까? 무슨 업적을 쌓는 일에 얽매였습니까? 예수님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의 말을 따르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성령)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1813-1873)의 말을 나누려고 합니다. “God, send me anywhere, only go with me. Lay any burden on me, only sustain me. And sever any ties in my heart except the tie that binds my heart to Yours(하나님, 저와 함께만 가신다면 어느 곳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오직 저를 지탱할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어떤 짐이라도 저게 지우십시오. 그리고 저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묶고 있는 끈 외에는 어떤 끈도 끊어주십시오).” 우리는 리빙스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진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고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5/8/2022 | 어버이주일/졸업예배 메시지

눈을 주님께 돌려(VI) Turn Your Eyes Upon Jesus

디모데후서 3:10-17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번에 고등학교 졸업이 3명, 학사가 14명, 석사가 10명, 박사가 8명, 모두 35명이 졸업합니다. 졸업생 여러분들이 졸업하기까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고,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과 기도가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은 ‘오 나의 어머니’라는 시에서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를 세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첫째로, 어머니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어머니의 사랑은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어머니는 눈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깊은 바다에 빠진다고 해도 어머니의 눈물은 거기까지 흘러온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어머니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내 몸과 영혼이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어머니의 기도가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사에 업적을 남긴 훌륭한 인물들을 보면 모두 그 뒤에 어머니가 있습니다. 모세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이집트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사람이 모세입니다. 이런 모세의 뒤에 요게벳(Jochebed)이라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요게벳이라는 이름에는 “여호와는 영광이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모세의 아버지 이름은 ‘아므람(Amram)’이었는데, 아므람은 거의 역할이 없습니다. 대신 어머니 요게벳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입니까? 요게벳이 모세를 낳았을 때는 사내 아이를 낳으면 무조건 죽여야 했던 때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어나지 못하도록 억제 정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 요게벳은 국법을 어기고 모세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떠내려 보냅니다. 이것을 마침 바로의 공주가 보고 데려다 키우게 됩니다. 요게벳은 유모를 자처하여 궁중으로 들어갑니다. 요게벳은 바로의 궁중에서 모세를 키우게 되고, 모세의 성장 과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어머니니까 이런 지혜를 내게 되고, 어머니니까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요게벳만 훌륭한 어머니가 아닙니다. 졸업생 여러분들의 어머니도 요게벳 못지 않게 모두 훌륭한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과 기도 덕분에 오늘 여러분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공자의 논어(論語)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孟武伯 問孝 子曰 父母 唯其疾之優(맹무백 문효 자왈 부모 유기질지우)”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약함을 걱정할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넓게 해석하면, 자식이 부모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孝)는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몸은 아프지 않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게다가 믿음의 부모에게는 한가지 걱정이 더 있습니다. 자식이 믿음생활을 잘 하는지 걱정합니다. 이런 부모의 마음에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 부모에게 해 드리는 최고의 효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에 대하여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에베소서 6:1)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the Lord [that is, accept their guidance and discipline as His representatives], for this is right [for obedience teaches wisdom and self-discipline].” 이 말씀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성경 말씀의 뜻입니다. 우리가 철이 들지 않았을 때 부모에게 반항하고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돌아가신 아버님, 어머님이 생각나서 많이 울었습니다. 울면 뭘합니까? 아버님, 어머님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데요. 후회하면 뭘합니까? 아버님, 어머님은 이미 계시지 않는데요.

졸업생 여러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모두 부모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희생과 부모님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은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해서 세상을 섬기고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출세하여 이름을 날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입신양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후서 3장 본문 말씀은 바울이 제자 디모데를 멘토링(mentoring)하는 말씀입니다. 예전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제자에게 스승이 편지를 써서 멘토링했습니다. 그 때 디모데는 한창 때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입장에서는 해 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을 것입니다. 청년 시절에는 멘토링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스스로를 훈련시키십시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이십시오.” (디모데전서 4:7-9) 디모데가 사역자로 있던 에베소는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밀로(Milo)의 ‘비너스상’은 기원전 1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미론(Myron)의 ‘원반 던지는 사람(Discobolus)’은 기원전 45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에베소에도 수많은 ‘짐나지움(gymnasium)’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남성들이 하루 일과 중에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 ‘짐나지움’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청년들이 힘을 기르고, 근육을 키우고, 기술을 연마했습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올림픽에 나가 우승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체육에 매달렸습니다. 바울은 충분히 청년 디모데가 그런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육체를 위한 훈련도 좋지만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었던 멘토링의 하이라이트는 10절 말씀입니다. “(너는 지금까지) 나의 교훈, 나의 삶의 방식, 나의 삶의 목적을 따라왔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인내와 사랑과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You have closely followed what I teach, and how I live, and what my purpose in life is. You know my faith, my patience, my love, and my endurance(perseverance).” ‘삶의 목적’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삶의 목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결정됩니다. 

일본이 배출한 존경받는 인물 중에 ‘우찌무라간조(1861-1930)’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한자로 ‘내촌감삼(内村鑑三)’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분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함석헌, 김교신, 송두용, 최태용 등 많은 분들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가 우찌무라간조의 전기를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뉴잉글랜드 앰허스트 칼리지(Amherst College)에 다니던 어느 날, 그는 고린도전서 3:21-23 말씀을 읽다가 문득 자신의 삶의 목적을 이렇게 설정합니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는 그 때부터 자신이 확정한 삶의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가 기른 제자들은 2차 대전 후 패망한 일본을 재건하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온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영어로 “Better late than never!”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Fyodor Dostoyevsky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ystery of human existence lies not in just staying alive, but in finding something to live for(인간 존재의 신비는 단순히 살아있다는 것에 있지 않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발견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요?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면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은 삶의 목적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purpose of life is not to be happy. It is to be useful, to be honorable, to be compassionate, to have it make some difference that have lived and lived well(삶의 목적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필요한 것이어야 하고, 영예로운 것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긍휼하게 여기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목적은 지금까지 내가 잘 살아왔다는 것과 뭔가 다른 삶을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But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to you).” (마태복음 6:33)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삶의 목적에 대하여 가르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의를 구하라(Seek His righteousness)’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내가 내 양심에 걸리는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해서 내가 흠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4:4) 우리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His Righteousness(하나님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의 나라를 구하라(Seek the Kingdom of God)”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어디든지 간에 그 곳에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마가복음 16:15, NKJV).” ‘go into’라는 말은 여러분들이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하고, 사업자를 만나서 사업 이야기를 하고, 학교 실험실에서 동료들과 실험을 하고, 실험 결과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그런 자리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자리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면 그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열정(passion)’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올바로 정해지면 ‘열정’이 생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The Beatitudes)’중에 이런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마태복음 5:6, NIV)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정하고,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면, “They will be filled” 결국 하나님의 의를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면을 한번 보세요. 지난 금요찬양예배 때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There are no limitations to the children of God who desire to establish God’s righteousness on this earth(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는 소원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한계가 없다).” Sunday Adelaja라는 분의 말씀인데요. 그 분은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목사님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멘토링을 하는 장면을 그려 보십시오. “너는 나와 함께 지내면서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두 보지 않았느냐?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의 삶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바울 서신을 읽을 때마다 그 점이 부럽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든지, 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삶의 목적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교회 역사 중 가장 어렵고 힘든 때입니다. 동시에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때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고향 케임브리지한인교회는 이곳에서 계속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갈 것입니다. 외롭고 힘들 때, 여러분의 믿음을 키웠던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말씀 배우며, 함께 찬양하며, 함께 기도하던 친구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여러분의 눈을 돌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과 용기와 믿음이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5/1/2022 |

눈을 주님께 돌려(V) Turn Your Eyes Upon Jesus

고린도후서 2:12-17

제가 클레아몬트(Claremont) 신학교에 다닐 때, 그 때가 1984-1986년경이었습니다. 그 때 목회학 클래스를 한 과목 들었습니다. 그 클래스에서 사용했던 책이 ‘The Reformed Pastor(1656)’라는 책이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영국)라는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목사가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에 ‘reformed’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이 ‘reformed’라는 말은 ‘Reformed Theology(개혁주의 신학)’라는 의미입니다. 목사는 누구인가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목사의 사명과 역할은 무엇인지 정말 잘 쓴,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책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사를 하면서 그동안 소장했던 책을 거의 대부분 버렸습니다. 엄청난 양의 책을 직접 쓰레기 하차장에 가져가서 버렸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리차드 백스터의 책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아이쿠, 버렸나 보다” 하고 실망했었는데, 다시 찬찬히 찾아보니 책꽂이 한쪽에 잘 꽂혀 있더라고요. 그만큼 이 책은 평생 소장하고 싶은 책입니다.

누가 언제 붙였는지 모르지만,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를 ‘pastor’라고 합니다. ‘pastor’는 목장에서 ‘양을 치는 목자(shepherd)’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pastor’라는 말에는 ‘a person who leads to pasture(초장으로 인도하는 사람)’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인들을 ‘목사와 평신도’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양(牧羊)’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자연히 목사 사무실을 ‘목양실’이라고 하는 것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인들을 목사와 평신도로 구별하는 것은 목사들에게 엄청난 특권의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양들이 아무 생각 없이 앞에 가는 목자를 따라가듯이, 목사는 교인들을 앞에서 이끌어가는 사람이고, 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 생각은 새 시대가 요구하는 크리스천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둘째로, 참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선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herd, 요한복음 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는 목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목사들에게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리차드 백스터 역시 ‘pastor’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람 같으면 ‘pastor’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책상에 앉아 책만 쓴 사람이 아니라 교인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시간을 교인들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200여권의 책을 쓴 경이로운 인물입니다.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쓴 “Knowing God(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저자 J.I. Packer는 리차드 백스터를 진정한 성자이며 존경스러운 인물이라고 칭송했습니다.

현재 카톨릭 교황은 266대 ‘프랜시스(Francis, 1936-현재, 아르헨티나)’ 교황입니다. 이 분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입니다. 교황으로 부임하면 이름을 바꾸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 분은 평소에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살았던 ‘프랜시스(Francis of Assis, 1181-1226, 이탈리아)’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프랜시스’로 바꾼 것입니다. 이 분은 부임 초기부터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녔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말과 행동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프랜시스 교황이 2014년 8월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도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교황이 한국 방문을 거의 마칠 무렵에 카톨릭 성직자들이 모인 자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Be shepherds with the smell of your sheep).”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황이 여전히 목자와 양이라는 전통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은 유감이지만, 사역자들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말을 사역자들이 양들과 대화하고, 양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양들과 공감하면서 양들의 삶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사역자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의 몸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야 할까?” 당연히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야 할까요? 다행하게도 오늘 성경 본문 말씀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15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Our lives are a Christ-like fragrance rising up to God(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올라가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또 14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Now he uses us to spread the knowledge of Christ everywhere, like a sweet perfume(하나님은 향기로운 향수와 같이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파하도록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편지를 어떤 상황에서 쓰고 있는지 아시나요? 한번 오늘 말씀을 찬찬히 읽어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 주님께서 내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나는 그곳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났습니다.” (12-13절) 이 말씀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3차 전도여행은 2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다시 따라가면서 교회들을 방문하는 식이었습니다. 드로아(Troas)는 바울이 꿈에 마케도니아 땅에 대한 환상을 보았던 곳입니다. 그는 이 환상을 따라 에게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별 감동 없이 읽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럽이 기독교 국가들이 된 데에는 2,000년 전에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에게 바다를 건너갔던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에서 볼 때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A Christian historian said that the ship that carried the Apostle Paul carried the history of the world in it. Arnold Toynbee said in his ‘A Study of History’ that, when a wooden boat carried the Apostle Paul from Troas of Asia Minor to Macedonia, it moved the center of the world from the birthplace of civilization to Mediterranean and to the European Continent (한 기독교 역사가는 사도 바울을 태웠던 그 배는 그 배 안에 세계 역사를 태우고 있었다고 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작은 목선이 소아시아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을 태웠을 때, 세계의 중심은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지중해와 유럽 대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Our Daily Bread, 9/11/2011)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기분이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뭔가 알 수 없는 우주적인 기운을 이 말씀에서 느꼈습니다.

지금 바울은 두 번째로 빌립보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도시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을 걸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벌써 2,000년 전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는지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에 교회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전도훈련을 받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지구촌교회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폭발 훈련 마지막 날, 전도폭발이라는 전도법을 만든 제임스 케네디(D. James Kennedy, 1930-2007) 목사님의 설교를 영상으로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 마지막에 이런 감동적인 예화가 나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전투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도망병이 잡혀오면 가차 없이 공개 처형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한 병사가 도망치다가 붙잡혀 알렉산더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 병사를 보니 파란 눈에 너무 앳되고 불쌍해 보여 죽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어린 병사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병사에게 “애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알렉산더는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라고?” 겁에 질린 병사는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병사의 이름이 자기와 이름이 똑 같았던 것입니다. 화가 난 알렉산더가 다시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라고?” 놀란 병사가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자 알렉산더는 그 병사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이 놈아,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의 태도를 바꿔라!”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를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이름이 무엇이냐?’ 그 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 이름은 무엇이냐?’ ‘크리스천입니다.’ ‘너희 이름은 무엇이냐?’ ‘예, 크리스천입니다.’ 우리의 대답에 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그의 아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희 삶을 바꿔라!’” 이렇게 소리지르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세상의 냄새’가 더 많이 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고 세상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적고 세상과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세상의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양들과 함께 지내야 우리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Merriam Webster 사전에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말에 대한 이런 정의가 나옵니다. ‘one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 of Jesus(예수의 교훈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 간결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믿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송하지만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전을 찾아보다가 놀란 것은 ‘Christian’이라는 말이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treating people in a kind or generous way(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하는)’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전을 찾아봤더니, 형용사로 사용될 때 ‘decent(품위 있는)’ ‘respectable(존경할 만한)’ 이런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세요? 사도행전 11:26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속에 조롱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일년동안 열심히 섬긴 결과 안디옥 시민들의 눈에 비친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관대하고 품위가 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성서학자들 중에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유래를 그리스어 ‘카리스(χάρις)’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리스’라는 말은 ‘호의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매력(attractiveness)’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My old self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갈라디아서 2:20)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결단의 시간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버리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올바로 살든지 결단해야 할 시간입니다. 

뉴잉글랜드의 4월은 바람이 많이 불고 춥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불수록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 멀리 퍼져 나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황을 핑계대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에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풍성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 이 말씀에서 ‘보화’는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질그릇(clay jar)이 깨지면 오히려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이 더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 강렬하게, 더 멀리 전파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24/2022 |

눈을 주님께 돌려(IV) Turn Your Eyes Upon Jesus

빌립보서 3:7-11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갈 무렵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까지는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자기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2-4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내가 여러분에게 전파한 말씀을 굳게 붙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Amplified Bible에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By this faith you are saved [reborn from above—spiritually transformed, renewed, and set apart for His purpose], if you hold firmly to the word which I preached to you, unless you believed in vain [just superficially and without complete commitment]. 3For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what I also received,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at which] the Scriptures [foretold], 4and that He was buried, and that He was [bodily]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at which] the Scriptures [foretold].”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씀은 “For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what I also received”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누구로부터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해 받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 때 전도자들이 주고받았던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케리그마(κήρυγμα)’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 ‘케리그마’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설교의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부활’에 대한 주제를 피하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1세기의 전도자(사도들)은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1세기 크리스천들에게 ‘부활’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facts)’이었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수많은 증언자들이 있었습니다. 법정에서는 확실한 증인 두 세사람만 있어도 그들의 증언은 그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을 때요. 이 일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과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도 모두 멀리 서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함께 온 여자들이 요셉을 뒤따라 가서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어떻게 누워 있는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고 안식일에는 계명대로 쉬었습니다.” (누가복음 23:49, 55-56, 마태복음 27:55, 마가복음 15:47) 이 여자들이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무덤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아 놓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 걱정했습니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 주지요(Who will roll away the stone for us from the entrance to the tomb)?” (마가복음 16:3) 그런데, 막상 가 보니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서 있었고(마태복음 28:4),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은 옆으로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때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느냐?” (누가복음 24:5-7)

여러분, 그 때 이 여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 여자들이 받은 충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자들은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무서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The women fled from the tomb, trembling and bewildered, and they said nothing to anyone because they were too frightened).” (마가복음 16:8) 하지만,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여자들이 그 길로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렸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8).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세요? 누가는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요한은 여자들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무덤 속을 확인하기 위하여 달려갔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요한복음 20:3-4) 정말 여자들의 말 대로 무덤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 20:9)”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이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확실한 믿음으로 자리를 잡았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 때 당시에 유대사회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많은 루머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루머가 돌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8:11-15). 새벽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루머도 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는 소문도 그 때 나온 루머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루머들이 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강력한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진실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단순히 말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으로 보여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그들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고, 그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꼭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십자가에서 끝나면 안 됩니까?”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나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특별히 선택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 약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인간의 족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He was declared to be the Son of God when he was raised from the dea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is Jesus Christ our Lord).” (로마서 1:4)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부활한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주장하신 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니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들로 판명될 것입니다(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then all our preaching is useless, and your faith is useless, and then we are found to be false witnesses about God, 고린도전서 15:14-15)”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톰 라이트(N.T. Wright)의 말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의 말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을 목숨 아닌가?” 이런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삽니다(고린도전서 15:32). 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temporary residents(일시적인 체류자, 베드로전서 2:11)’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citizenship(시민권, 빌립보서 3:20)’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삶의 방식이 달라도 뭔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오늘 빌립보서 본문 말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한 후에 그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완전한 변화가 그의 삶 속에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의 삶이 가능할까요?

고린도전서 12:3에 “예수님은 주님이시다(Jesus is Lord)”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 말로 “Κυριος ΙΗΣΟΥΣ”라고 합니다. 이 말은 1세기 크리스천들이 사용하던 일상적인 말입니다. ‘Κυριος’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lord, master, chief, ruler, owner’라는 뜻입니다. 웹스터 사전에 ‘Κυριος’라는 말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arly Christians confessed Jesus Christ as their Kyrios instead of the emperor(초대 크리스천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Kyrios로 고백했다).” 그 당시에 황제를 ‘Kyrios’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Kyrios’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Kyrios’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사는데 어떻게 삶이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1세기의 크리스천들에게는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누구에게나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Kyrios)’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Kyrios’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주인이 되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변화의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10절) 

‘부활의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처럼,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삶의 문제들을 이기는 것입니다. 로버트 플래트(Robert Flat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resurrection gives my life meaning and direction and the opportunity to start over no matter what my circumstances(예수님의 부활은 내 삶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고, 어떤 상황에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여러분,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여러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이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I want to suffer with him, sharing in his death)” (10절)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힘들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9:23)”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나는 날마다 죽습니다(I face death daily in Christ Jesus)” (고린도전서 15:31) 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을까요? 날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4/17/2022 | 부활절 메시지

눈을 주님께 돌려(III) Turn Your Eyes Upon Jesus

요한복음 12:20-26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을 영어로 ‘이스터(Easter)’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레저렉션(resurrectio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셨다(re+surge)’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크리스천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foundation)와 같습니다. 이 말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크리스천의 삶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언제, 어떤 인생의 위기를 만나 무너질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확장되던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을 가리켜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사도행전 9: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는 하나님의 도구(instrument)로써 그의 인생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We are more to be pitied than anyone in the world).” (고린도전서 15:14, 19) 이 말씀이 맞습니까? 

부활에 대하여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Our Lord has written the promise of resurrection, not in the books alone, but in every leaf in springtim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봄이 되면 죽었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파란 잎이 돋아나는 자연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톰 라이트(N. T. Wright, 1948-presen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essage of Easter is that God's new world has been unveiled in Jesus Christ and that you're now invited to belong to it(부활절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새로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고, 당신은 그 새로운 세상의 일원이 되도록 초청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앞에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몰랐을 때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후에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 인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본회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기 4개월 전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갇혀 있던 수용소에 연합군이 들어오기 불과 며칠 전에 교수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본회퍼의 전기(傳記)를 읽어보면 그의 사형을 집행했던 간수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본 일이 없다.” 본회퍼는 교수형을 받기 위해 끌려 나가면서 같이 갇혀 있던 동료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Good-bye. It is the end, but for me, beginning of life(안녕히 계세요.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의 묘비에는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Dietrich Bonhoeffer, a witness of Jesus Christ among his brethren)”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절 설교가 공식적으로 저의 마지막 부활절 설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성경 본문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 내용을 구상합니다. 제가 오늘 선정한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12:20-26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가장 잘 나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여러분의 삶은 진작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The Passover)’입니다. 이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이스라엘 내국인들과 해외에 나가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리고 이 축제를 구경하러 온 외국인들로 예루살렘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그리스’ 사람들도 유월절 축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순수한 그리스 사람들(Greeks)같아 보입니다. 말씀의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직접 질문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온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들의 질문에 대한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추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22-23) 이 말씀 속에 ‘유대인’ ‘그리스인’ 그리고 ‘크리스천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합니다. ‘표적(表迹)’은 ‘miraculous signs’이라고 번역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복음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당신이 표적을 보여주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 ‘지혜’라는 말을 영어로 ‘wisdom’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 말로는 ‘소피아(Sophia)’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하잖아요?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을 ‘philosopher’라고 하잖아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일찍부터 지혜를 사랑했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모두 그리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소크라테스(470-399B.C.), 플라톤(428-348B.C.),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 피타고라스(570-495B.C.) 등이 모두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선교를 가서 가장 놀랐던 것이 아네테 시민들이 날마다 광장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만난 사람들 중에 ‘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에피큐리안들과 스토익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때 이미 상당한 수준의 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인간의 삶을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생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눈에 비친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All the Athenians seemed to spend all their time discussing the latest ideas).” (사도행전 17:21)

예수님을 만나러 온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새로운 지식이나 새로운 사상을 배우기 위해 온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유대나라에 지혜로운 랍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유월절 명절도 구경할 겸 예루살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알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is planted in the soil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ts death will produce many new kernels—a plentiful harvest of new lives).” (24절)

예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해 줄 말은 이 말 밖에 없다. 너희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해 준 말 속에 너희들이 찾는 지혜가 모두 들어 있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I tell you the truth)”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꼭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경연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 부상(副賞)으로 책을 받았는데, 그 책 제목이 “The Seed Must Die(씨는 죽어야 한다)”였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한국의 손양원(1902-1950)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목사님 중 한 분이신데요. 손양원 목사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 목사님은 정말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진 분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의 별명이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어떻게 양아들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 양아들이 목사가 되어서 지금 L.A.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인터뷰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제가 최근에 ‘니콜라스 윈턴(Nicholas Winton, 1909-2015, 영국)’을 주인공으로 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체코를 점령한 나치는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난민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아이들까지 갇힌 난민 수용소의 실상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당시 29살의 은행원이었던 ‘니콜라스 윈턴’은 아이들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목숨을 내놓고 사비를 들여 아이들을 영국으로 빼돌려 입양을 시킵니다. 나치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이 일을 성사시켜 총 8번에 걸쳐 아이들을 기차에 실어 영국으로 보냅니다. 이렇게 빼돌린 아이들이 무려 669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번, 막 세계 제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250명의 아이들을 싣고 가던 기차가 멈추게 되고, 안타깝게도 그 아이들은 모두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를 모르게 됩니다. ‘니콜라스 윈턴’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껴 그 후 50년 동안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락을 정리하던 그의 아내가 오래 묵은 그의 수첩을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빼곡하게 그가 빼돌려 목숨을 구해 준 669명의 아이들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아내는 방송국에 제보를 합니다. 그래서 ‘니콜라스 윈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눈물과 감동 없이는 볼 수 없는 영상입니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idzS-K1LrPc)

놀라운 것은, 그가 구출한 669명의 아이들이 6,000여명의 아이들로 불어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 아닙니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5-26절)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아테네 광장에서 날마다 토론을 일삼던 말씀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어떻게,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몹시 궁금합니다.

철학은 아무리 그 내용이 심오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철학책을 읽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철학은 사람이 만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바울은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했습니다. “헛된 말과 거짓 철학에 속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멀리하시기 바랍니다(Don't let anyone capture you with empty philosophies and high-sounding nonsense that come from human thinking and from the spiritual powers of this world, rather than from Christ).” (골로새서 2:8) 기독교의 복음과 비교해 보면 철학은 그야말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empty philosophies and high-sounding nonsense’입니다. 바울이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성경은 그 자리를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이라고 했습니다. 본회퍼도, 손양원 목사님도, 니콜라스 윈턴도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알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살았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 희생과 헌신을 거부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특별한 생각 없이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런 삶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다시 톰 라이트의 말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새로운 세상의 일원이 되도록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세상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