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024 | 대강절 첫째 주일
일상의 믿음 (Faith in Everyday Life)
유민용 목사
데살로니가 전서 3:9-13
9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기쁨, 곧 여러분이 우리에게 안겨 준 그 모든 기쁨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10 다만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기를, 또한 만나서 여러분의 믿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드릴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속히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쉬운말 성경)
9 How we thank God for you! Because of you we have great joy as we enter God’s presence. 10 Night and day we pray earnestly for you, asking God to let us see you again to fill the gaps in your faith. 11 May God our Father and our Lord Jesus bring us to you very soon. 12 And may the Lord make your love for one another and for all people grow and overflow, just as our love for you overflows. 13 May he, as a result, make your hearts strong, blameless, and holy as you stand before God our Father when our Lord Jesus comes again with all his holy people. Amen.(New Living Translation)
교회력으로 대림절의 시작은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탄생과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이제 4주 동안 네개의 촛불이 차례대로 켜질텐데 첫번째 보라색의 촛불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촛불입니다. 설교자의 스톨도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잃어 버렸던 희망, 평화, 기쁨,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촛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치열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빛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어둠을 통과하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고통으로 지친 이들의 마음에 찾아가 십자가 사랑으로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성도들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며 한해의 열매를 기다리는 것처럼 믿음이 더 깊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군 생활을 해 보신 분들이라면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모든 과정이 다 지나가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할 당시에 마게도냐 지역에 빌립보 교회를 세운 이후 두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도시는 로마의 행정 구역으로 부유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보통 항구 도시는 여러 도시에서 이방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음행과 우상들이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도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이 만연했고, 여러 철학 사상들로 인해서 그릇된 사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도시에서 바울은 잠시 머무르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는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데살로니가 지역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합니다. 그 믿음의 현장에서 바울은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로 인해 생명의 위협 속에서 결국 베뢰아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그를 죽이려 하자 바울은 또 다시 아덴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바울의 형편은 누군가를 걱정할 상황이 못되었지만 그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복음사역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을 떠나 왔지만 갓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인이 갈수 있는 상황은 안되고 교우들의 믿음을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아들처럼 여겼던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게 됩니다.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3장 6절을 보시면, “6 그런데 지금은 디모데가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 언제나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고, 또 우리가 여러분을 보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여러분 역시 우리를 무척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교회 안에 새가족들의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6절에서 "지금은"이라는 단어를 보면, 디모데가 갖고 온 좋은 소식을 듣자마자 기쁨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됩니다. 또한 믿음 안에서 형제가 된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위로와 격려입니다.(2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을 지키는 일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겪게 될 것임을 미리 경고했습니다 (4절) 믿음의 고난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명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믿음을 전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섬기는 자는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믿음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5절) 바울 같은 경우에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이 믿음을 전파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9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기쁨, 곧 여러분이 우리에게 안겨 준 그 모든 기쁨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10 다만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기를, 또한 만나서 여러분의 믿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드릴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굳건히 서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자신의 고통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굳건히 서 있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훈련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믿음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기보다는, 아직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믿음이 확고히 서 있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믿음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기에 그들의 믿음을 위해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신앙을 오래 지켜온 사람이라도 믿음에서 완전한 성숙을 이루기까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도우심이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종종 믿음의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랜 신앙의 습관으로 자기 중심적인 믿음에 빠지거나, 신앙생활이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방향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삶 속에서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 1장 서두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1:5 그러기에 우리가 전한 복음이 여러분에게 단지 말로써만 아니라, 능력으로, 성령으로,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깊숙이 가 닿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있었을 때, 여러분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1:6 그래서 여러분은 모진 고난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우리가 전한 말씀을 잘 받아들여, 우리를 본받고 또 주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1:7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 중에도 삶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리적으로 아가야 지역은 데살로니가 지역의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가야 지역에 있는 믿는 이들까지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원동력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에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역사했다고 강조합니다.
1:13절 보시겠습니다. “1:13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그 말씀은 믿는 여러분 가운데서 지금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은 로마 황제를 '구원자와 주'로 칭하며, 황제가 군사적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오기 전에 성도들에게 고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니 고난 속에서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권면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일터나 세상속에서도 이어져야 한다는 메세지는 2000년대 초, 한국 교회 내에서도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믿음 생활은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사역에 집중되었고, 직장이나 일상생활에서의 신앙적 실천은 상대적으로 적게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의 신앙은 단순히 교회 밖의 삶만이 아닌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실천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삶으로 이어지는 실제적인 삶에 대해 2008년 국민일보 미션 라이프에 실린 기사를 스크랩하여 가지고 있는데, 한국 교회에 일터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진다는 글입니다. 기사의 글을 잠시 소개합니다.
"성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일터에서 드려지는 삶의 예배도 교회의 한 형태라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일터에 임하고 일터속에 크리스천들로 인해 그 직장은 물론 사회가 변혁될 수 있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이뤄지는 교회다. 토드 홉틴스와 레이 힐버트는 "모든 크리스천들은 일터의 변혁을 위해서 부름받은 사역자들" 이라고 말했다. 크리스천들에게 주일의 교회보다 더 중요한 교회는 주중의 일터에서 이뤄지는 교회라고 강조했다."
일터교회는 매일의 삶이 주일의 믿음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입니다. 일과 삶이 결국 사역이라는 것이지요.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삶으로 나아가는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믿음 생활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확장됩니다.
“11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속히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세상은 과거에 비해서 참 편리해 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좁은 길에 서야 하기도 하고, 불의에 맞서 저항하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려 할 때, 그 기준은 단순히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도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여도, 때로는 세상의 영광과 자기 자랑을 추구할 유혹을 받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의 사랑을 잃어 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연약함으로 인해 세속적 욕망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악함을 왜 그냥 두시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땅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 둘을 갈라 놓으려고 하면 알곡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로마 황제는 더 이상 인생의 길을 열어 주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믿고 주님이라 따르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제 서로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그 사랑 안에는 자신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몰랐던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만큼 깊고 크며, 그 사랑에 의해 우리는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의 노력을 통해서 복된 관계를 지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니까 수고로움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가 없다면 그 곳은 가정이든 교회이든 일터이든 사막과 같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므로 기꺼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섬김의 자리에서 묵묵히 수고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 볼 때마다 숨길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기쁨이 회복 되도록 애쓰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전도 사역의 피곤함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믿음의 소식을 듣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새 힘을 주었습니다. 참된 믿음의 공동체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서로가 세상속에서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며 용기를 얻고, 함께 모여 교제할 때는 세상에서 지친 마음을 주 안에서 위로 받으며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믿음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그리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 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한 길로 인도받으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