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9:13-16

13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그 입으로는 나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나를 경배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해 오던 대로 형식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14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놀랍고 신기한 일로 이 백성을 다시 놀라게 하겠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를 잃고 똑똑한 사람들은 총명함을 잃을 것이다.”
15 오호라, 여호와 몰래 무슨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 어둠 속에서 일을 꾸미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보겠는가? 누가 우리의 하는 일을 알겠는가?” 라고 말한다.
16 너희들은 얼마나 비뚤어진 자들인가? 진흙과 토기장이가 어찌 같을 수 있느냐?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사람을 향해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릇이 그릇을 만든 사람에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13 And so the Lord says, “These people say they are mine. They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And their worship of me is nothing but man-made rules learned by rote①. / ①Greek version reads Their worship is a farce, /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Compare Mark 7.7
14 Because of this, I will once again astound these hypocrites with amazing wonders. The wisdom of the wise will pass away, and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will disappear.”
15 What sorrow awaits those who try to hide their plans from the Lord, who do their evil deeds in the dark! “The Lord can’t see us,” they say. “He doesn’t know what’s going on!”
16 How foolish can you be? He is the Potter, and he is certainly greater than you, the clay! Should the created thing say of the one who made it, “He didn’t make me”? Does a jar ever say, “The potter who made me is stupid”?

2018년 새해 들어서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1월을 ‘재뉴어리 (January)’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라틴어로 ‘문 door)’을 뜻하는 ‘야누아 (ianua)’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뉴어리’는 한 해를 시작하는 문을 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 ‘재뉴어리’라는 말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요. 우리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야누스 (Janus)’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입니다. 한 얼굴은 앞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얼굴은 뒤를 바라 보고 있습니다. 앞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은 새로운 ‘시작 (beginning)’을 의미하는 얼굴이라고 하고요. 다른 한 얼굴은 지나 온 시간들을 바라보는 얼굴이라고 합니다. 성경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1월 (January)에 얽힌 재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문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 (요한계시록 3:7)”는 말씀이 있습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심으로 닫을 사람이 없는 형통한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새해 첫 주에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21:1-7)”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29:13-16 말씀을 본문을 가지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라”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진실한 마음 (a sincere heart)’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를 드릴 때나, 찬송을 할 때나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과 반대되는 말은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외식하는 자’ 라고 나와 있습니다. ‘위선자’를 영어로 ‘hypo¬crites’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stage actor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뜻입니다.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각본에 나오는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얼굴에서 ‘위선자’의 얼굴을 보신 예수님은 아주 혹독하게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한 장 전체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천국의 문을 막는다. 너희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마태복음 23:13) 바리새인들만 그런 것 아닙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진실하지 못해서, 우리 얼굴에 ‘위선자’의 얼굴이 보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까?

‘진실한 마음’은 꾸밈이 없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sincere’라는 말이 ‘씬체루스 (sincerus)’라는 라틴어에서 왔다고 합니다. 또 ‘씬체루스’라는 말은 ‘씨네 (sine, without)’라는 말과 ‘체라이 (cerae, wax)’라는 말이 합해지면서 생겼다고 합니다. ‘양초 없이 (without wax)’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조각과 건축 자재로 대리석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대리석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어서 흠이 없는 대리석은 아주 고가로 팔렸습니다. 장사들은 약간의 흠이 있는 대리석에 양초를 먹여서 흠집을 메꾸어 고가의 대리석으로 팔았다고 합니다. 대리석 장사들 중에는 “우리 집에서 파는 대리석은 양초를 먹이지 않습니다”라고 선전하는 장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진실한 (sincer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우리 중에 위선자를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 중에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다 좋아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인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숨기는 사람,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우리가 하나님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8)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은 아닙니다. 먼저 죄를 깨끗하게 씻고, 정결한 마음을 품고 나오라고 합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정결한 마음 (purified heart)’이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입니다. 다른 데 모두 뺏기고 조금 남은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 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해 주십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원전 700년경 남왕국 유다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오늘 읽은 말씀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백성이 그 입으로는 나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나를 경배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해 오던 대로 형식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이 말씀이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se people say they are mine. They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And their worship of me is nothing but man-made rules learned by rote①. / ①Greek version reads Their worship is a farce, /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Compare Mark 7.7 직역해 보면, “이 사람들은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 입으로는 나를 존경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나를 예배하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Their worship is a farce (그들의 예배는 우스꽝스러운 희극이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적어도 새해 들어서 믿음생활을 잘 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도 ‘주님 (the Lord)’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주님’이라는 말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라고, 나는 예수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이 말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존경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위에서 야고보서 4:8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가까이 해 주신다는 말씀을 읽었지 않습니까? ‘정결한 마음’이란 신부의 마음입니다. 신부가 온전하게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랑 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지금 너희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요. 성경에는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nd all your mind (마태복음 22:37)”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이 말씀은 구약 신명기 6:5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꼭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지 저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요?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라고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에 유대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의 마음이 다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다가 망해가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보면서도 똑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동족들을 보는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예전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바라 보는 예수님의 심정도 똑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와 같은 위선자들에 대하여 쓴 것이 옳구나.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사람의 전통만 지키는구나.” (마가복음 7:6-8)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을 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이사야 말씀에 좀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보아라, 내가 놀랍고 신기한 일로 이 백성을 다시 놀라게 하겠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를 잃고 똑똑한 사람들은 총명함을 잃을 것이다.” (14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ecause of this, I will once again astound these hypocrites with amazing wonders. The wisdom of the wise will pass away, and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will disappear.” 직역하면, “내가 다시 한번 이 위선자들을 놀라운 일로 놀라게 하겠다. 지혜자의 지혜가 사라지고, 지성인을 자처하던 사람들의 지성이 사라질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once again’이라는 말로 보아서 과거에도 여러 번 이런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똑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학자들에게서 지성 (intelligence)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divine interven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깨닫고, 미련한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까요? 이미 마음을 세상 것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 속에는 이미 세상적인 가치관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생활은 일종의 교양이 되고 만 사람들이, 주변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마음을 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까요? 그런 일들이 주변에서 벌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 올까요? 한번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킬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기 전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냥 우리에게 진실한 믿음을 갖도록 해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시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을 가지고, 왜 우리 때문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실까?”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어제 토요일 아침에 요한계시록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믿음을 가진 라오디게아 교회 (the church in Laodicea)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그렇습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안에서 문을 열기를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문 열고 들어가면 안 됩니까?

워너 샐먼 (Warner Sallman, 1892-1968) 이 그린 ‘Christ At Heart’s Door (마음의 문 밖에 계시는 그리스도)’라는 유명한 그림을 아시나요? (화면을 보십시오) 이 그림은 워너 샐먼이 요한계시록 3:20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서 그린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이 영국의 홀만 훈트 (Holman Hunt, 1827-1910)가 그린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 (Christ The Light Of The World)’에 영향을 받아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예술가들의 영감이 얼마나 놀라운지......이 그림을 잘 보면 문에 손잡이 (knob)가 없습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열고 들어갈 수가 없고, 안에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를 원하시지만, 억지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the potter and the clay)’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토기장이를 향해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16절)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만드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하지 않도록 저와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날 때 분명히 ‘divine intervention’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지혜로운 사람은 빨리 깨닫습니다.

새해에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러분이 형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 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열어 주십니까? 간절히 원하면 열어 주십니까? 교회 열심히 빠지지 않고 출석 잘 하면 열어 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지금이라도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귀를 열어 주셔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가운데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마음 전부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