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1-13

1 여호와여, 주께서 지금까지 나를 살피셨으니 주는 나를 알고 계십니다.
2 주는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들을 아십니다.
3 주는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을 아십니다. 주는 나의 모든 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호와여, 주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5 주는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주는 주의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6 이것을 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 지식은 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가 계신 곳을 떠나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8 만일 내가 하늘 위로 올라간다 해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내가 깊은 곳에 눕는다 해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9 만일 내가 새벽의 날개 위에 오른다 해도, 내가 바다의 저 끝 쪽에 자리를 잡는다 해도,
10 주의 손이 거기서 나를 인도하실 것이요,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굳게 잡으실 것입니다.
11 만일 내가 “어두움이 확실하게 나를 숨겨 줄 것이다” 라고 말한다 해도, “빛이 내 주위에서는 밤이 된다” 라고 말한다 해도,
12 어둠이 주께는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밤이 낮처럼 빛날 것입니다. 이는 어둠이 주께는 빛과 같기 때문입니다.
13 주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을 지으셨으며,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1 O Lord, you have examined my heart and know everything about me.
2 You know when I sit down or stand up. You know my thoughts even when I’m far away.
3 You see me when I travel and when I rest at home. You know everything I do.
4 You know what I am going to say even before I say it, Lord.
5 You go before me and follow me. You place your hand of blessing on my head.
6 Such knowledge is too wonderful for me, too great for me to understand!
7 I can never escape from your Spirit! I can never get away from your presence!
8 If I go up to heaven, you are there; if I go down to the grave①, you are there. / ①Hebrew to Sheol
9 If I ride the wings of the morning, if I dwell by the farthest oceans,
10 even there your hand will guide me, and your strength will support me.
11 I could ask the darkness to hide me and the light around me to become night -
12 but even in darkness I cannot hide from you. To you the night shines as bright as day. Darkness and light are the same to you.
13 You made all the delicate, inner parts of my body and knit me together in my mother’s womb.

“예수님에게 생의 목적이 있으셨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생의 목적이 있으셨겠지요. 생각해 보면 생의 목적이 없다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의 목적’은 그 사람의 삶의 이유와 삶의 의미, 그 사람의 사명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삶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 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말도 되고, 사명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게는 무엇이 삶의 목적이었을까?” 하는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력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나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Christian’이라고 하는 말의 정의를 찾아 봤더니, 이런 정의가 있더라고요.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예수님의 인격을 우리의 삶 속에서 증명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알렉산더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전투에 나아가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행위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도망병을 잡으면 공개적으로 처형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한 병사가 도망치다 붙잡혀 알렉산더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 병사를 보니 파란 눈의 앳된 소년이었는데, 너무 불쌍해 보여 죽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병사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알렉산더가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어라고?” 소년 병사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병사의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과 똑같았던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화가 나서 세 번째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라고?” 놀란 병사가 “알렉산더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자 알렉산더가 달려가서 그 병사의 멱살을 휘어잡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네가 알렉산더라고? 네 이름을 바꾸던지, 네 삶의 태도를 바꿔라!”하고 호령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용기 없는 소년이 자기와 똑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정말 크리스천답게 살지 않으려면, 그냥 이름만 가지고 있을 생각히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생각이면, 크리스천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마가복음 10:45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even’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 윗절에서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대속물’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속물(代贖物)’이라고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대신 드리는 속죄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ansom’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몸값’ ‘보석금’이라는 뜻입니다. ‘보석금’이라고 할 때 ‘bail’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을 ‘ransom’으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그대신 우리는 풀려나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죄의 노예로부터 풀려나 자유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반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for many)’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어떤 사람들을 상대하셨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 가시는 곳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도 예수님은 서슴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땅은 유대인들에게는 들어가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도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이틀르 머물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40). 예수님은 지중해 연안 시돈과 두로 지방에도 가셨습니다. 이 지방 역시 유대인들은 들어가기를 꺼리는 이방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딸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한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기 위해 왔는데, 그 중에 시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아무 차별 없이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지혜의 말을 듣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24-25)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이 그저 아무 뜻 없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장차 예수님이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주님 (the Lord)’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ransom for many’라는 말씀 속에 이렇게 인종을 초월해서, 국경을 초월해서, 사상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말씀 속에 여러분과 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지만, 그 중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깨닫는 사람은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ransom’의 의미를 자신의 삶 속에 잘 적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산다면 결국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서 말씀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고백을 듣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살고 난 후에 이런 고백을 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습니까? 아쉽지만 그 때는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나의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언제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정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초월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빌립보서 4:7)’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대한 생각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9편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주께서 지금까지 나를 살피셨으니 주는 나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들을 아십니다. 주는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을 아십니다. 주는 나의 모든 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호와여, 주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는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주는 주의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이 지식은 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합니다” (1-6절)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 내가 언제 잠자리에 들어가는 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두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If I go down to the grave①, you are there.” (8절) / ①Hebrew to Sheol 내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실망에 빠지고,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추적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단 한순간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 엄청난 지식에 완전히 압도되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Such knowledge is too wonderful for me, too great for me to understand.” (6절)

또 계속 말씀을 읽어 보시지요. “주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을 지으셨으며,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You made all the delicate, inner parts of my body and knit me together in my mother’s womb).” (13절) 하나님은 나를 속속들이 모두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속품까지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속품을 조립해서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1:5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I knew you before I formed you in your mother’s womb. Before you were born I set you apart and appointed you as my prophet to the nations (내가 모태에서 너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나는 너를 알았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너를 구별해 세계 만민을 위한 예언자로 선정해 놓았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 전부터 (뱃속에 내가 생긴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하나님은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시나요? 이 사실을 믿고 안 믿고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또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 삶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예레미야 29:11)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선한만큼 나의 삶은 선한 결말을 가져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 속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나를 위해 ‘ramsom (대속물)’로 주신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나를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29)”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삶이 아무 의미 없이 길거리에 나뒹구는 삶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고, 그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습니다. 주저 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삶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