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1-8

1 Early on Sunday morning①, as the new day was dawning, Mary Magdalene and the other Mary went out to visit the tomb. / ①Greek After the Sabbath,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2 Suddenly there was a great earthquake! For an angel of the Lord came down from heaven, rolled aside the stone, and sat on it.
3 His face shone like lightning, and his clothing was as white as snow.
4 The guards shook with fear when they saw him, and they fell into a dead faint.
5 Then the angel spoke to the women. "Don't be afraid!" he said. "I know you are look-ing for Jesus, who was crucified.
6 He isn't here! He is risen from the dead, just as he said would happen. Come, see where his body was lying.
7 And now, go quickly and tell his disciples that he has risen from the dead, and he is going ahead of you to Galilee. You will see him there. Remember what I have told you."
8 The women ran quickly from the tomb. They were very frightened but also filled with great joy, and they rushed to give the disciples the angel's message.

십자가의 메시지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십자가를 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것과 믿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큰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21)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 to those who are headed for destruction! But we who are being saved know it is the very power of God. Since God in his wisdom saw to it that the world would never know him through human wisdom, he has used our foolish preaching to save those who believe.” 이 말씀 중에 ‘foolish’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십자가가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 “하나님은 어리석게 보이는 설교를 통해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교회 나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시간에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반문합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MIT에 다니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고모가 되겠네요. 고모가 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모는 크리스천입니다. 교회에 와 보니까 자기 조카들 또래 학생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집에 가서 조카에게 다음 주에 나하고 같이 교회 가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조카가 하는 말이 “What a waste of time!”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에 가자는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나이가 많아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기껏 많아 봐야 서른도 못되었을 텐데, 그 아이들이 자기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쩌다가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얼마나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까? 십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 얼마나 우습게 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천사가 그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와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라. 그리고 그가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예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라.’” (5-7절) 그래서 여자들이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역사의 시작입니다.

누가 재미 있는 주장을 했습니다. 왜 부활의 소식을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들이 하필이면 여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저자들이 유대사회의 관습과 문화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기록한 복음서에 여자들이 이 중요한 장면에 등장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소식을 잘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것이 여자들이 등장하는 이유일까요? 그 당시 유대 관습에서는 여자들의 말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 되지도 않았답니다.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It was Mary Magdalene, Joanna,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everal other women who told the apostles what had happened.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0-11) 쉬운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복음서 저자들은 일제히 여자들을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한 첫 번 사람들이라고 기록을 했을까요? 베드로 같은 사람이 제일 먼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의 소식을 전달한 사람으로 하면 훨씬 더 좋지 않겠습니까? 복음서 저자들이 이런 뻔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여기서 ‘역설적인 증거’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5:1-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나는 전에 여러분에게 전해 준 바로 그 복음의 참뜻을 다시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지금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이 이 놀라운 복음 위에 바로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복음을 처음부터 되는 대로 믿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한마음으로 굳게 믿어 왔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먼저 내가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또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 부분이 중요합니다. “I passed on to you what was most important and what had also been passed on to me. Christ died for our sins, just as the Scriptures said. He was buried, and he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just as the Scriptures said.”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이 메시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전해 받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나에게 전달된 복음이 나에게서 끝이 나 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종교들이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 선행을 강조합니다. 선행을 많이 하면 그 공적이 쌓여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걸지 않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선행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구원 얻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질문의 대답으로 선행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에서는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할까요? 여러분, 잘 들으세요. 기독교에서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 어떤 선행도, 또 선행을 많이 해서 공적이 많이 쌓인다고 해도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너의 선행으로 너의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ransom (몸값)’이 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주 귀하신 분입니다. 죄가 없어요. 조그만 흠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ransom’이 되시기에 충분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복음 1:29, 36)”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분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가 십자가의 메시지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 같이 화면을 보면서 이 말씀을 읽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유대인이 되었든지 그리스인이 되었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