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0:22-23

22 “하나님을 잊어 버린 너희들아, 이것을 기억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 몸을 찢을 것이니, 아무도 너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23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나를 높이고 길을 예비하는 자이니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줄 것이다.”

22 "Now consider this, you who forget God, Lest I tear [you] in pieces, and there be none to deliver.
23 He who offers a sacrifice of thanksgiving honors Me; And to him who orders [his] way [aright] I shall show the salvation of God." (NASB)

감사절 때마다 생각나는 네 컷 만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간 신문마다 네 컷 만화를 실었습니다. 동아일보에는 ‘고바우 영감’이라는 김성환 화백의 네 컷 만화를 실었고요. 중앙일보에는 ‘왈순 아지매’라는 정운경 화백의 네 컷 만화를 실었습니다. 서울신문에는 ‘코주부’, 경향신문에는 ‘장도리’, 또 여기 저기 신문을 옮겨 다녔던 안의섭 화백의 ‘두꺼비’도 유명한 네 컷 만화입니다. 어느 신문에서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추석이 되어서 과일 가게에 들려 선물로 포장된 감을 사서 들고 부모님을 방문합니다. 부모님께 사 온 선물 꾸러미를 전해 드리고, 밖으로 나와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감사드렸어!”

네 컷 만화가 그랬습니다. 그 당시의 정치나 문화, 사회 상을 고발하는 내용을 네 컷으로 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받으면 먼저 만화를 봤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부모님께 대한 정성과 효도의 마음이 사라지고 핵가족 중심의 삶으로 옮겨 간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추석이 되면 선물 꾸러미 하나 사 들고 가서 부모님께 드리면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 당시의 시대 상을 그런 식으로 비판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한 해 동안 거두어 드린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조상들과 부모님에 대한 감사도 중요하지만, 성경에서 배우는 감사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잠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1:7). 감사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모든 감사의 근본입니다. 근본이라는 말은 시작 (beginning)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감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써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지식을 시작도 못한 사람이니까 지식이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똑 같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의 삶을 시작하지 못한,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50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아삽 (Asaph)’이라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을 ‘다윗’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만, 의외로 ‘다윗’이 쓴 시편은 전체 150개 중에 73개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윗’ 외에 다른 사람이 쓴 것이 77개나 됩니다. ‘고라의 자손’이 쓴 것이 10개, ‘솔로몬’이 쓴 것이 2개, ‘헤만’이 쓴 것이 1개, ‘에단’이 쓴 것이 1개, 모세가 쓴 것이 1개, 저자를 알 수 없는 것이 50개, 그리고, ‘아삽’이 쓴 것은 12개입니다. 시편 50편, 73편부터 83편까지 모두 12개의 시편을 ‘아삽’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삽’이라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쓴 시편을 읽어보면서 ‘아삽’이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겠다 하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삽’이 쓴 시편들을 보면 그 내용이 매우 예리하고 비판적입니다. 이런 것으로 봐서 ‘아삽’이라는 사람은 한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의 특징은 시대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고민을 안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인의 특징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이런 특징을 잃어버리면 지식인의 자격을 상실한다고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배웠으면, 이 시대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이 시대가 흘러가는 대로 따라 사는 사람은 지식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떠맡아 짊어지고, 고민하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특권(特權)입니다.

아삽은 무엇보다도 그 당시 유대교의 형식적인 예배에 대하여 고민했습니다. 시편 50편은 참된 예배를 갈구했던 ‘아삽’의 고민의 결과로 쓰여진 것입니다. ‘아삽’이 고발하고 있는 그 당시의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배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4절, 23절). 여러분, 예배자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아삽’은 이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번 ‘아삽’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네가 드리는 제사를 탓하지 않는다. 네가 언제나 내게 태워 바치는 번제를 꾸짖지 않는다. 나는 네 외양간의 소나 네 우리 속에 있는 염소를 바라지 않는다.” (8-9절)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꾸짖지 않고,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배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자들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예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찬양예배 때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시편 100:4-5 말씀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의 성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찬양을 드리면서 그분의 뜰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분에게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분의 성실하심은 대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이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For the LORD is good and his love endures forever; his faithfulness continues through all generations.” 직역하면, “하나님의 궁전의 대문을 감사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의 궁전 뜰에 찬송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 감으로써 시작됩니다. 시편 100편에는 “그 문으로 들어간다 (Enter his gates)”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집의 문을 통과한 사람은 더 깊숙한 곳으로,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갑니다 (Enter his courts).” 어떤 사람이 그 문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말씀을 잘 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with thanksgiving)’ ‘찬양으로 (with praise)’ 성경에는 오직 ‘감사와 찬양’ 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른 어떤 조건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집의 문을 통과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목사라고, 장로라고, 집사라고, 교회 임원이라고, 성가대 지휘자라고, 반주자라고, 솔로이스트라고, 오케스트라 단원이라고 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의 대문에서부터 제지(制止)를 받습니다.

‘아삽’은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제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으냐 준비되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예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2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time is coming when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The Father is looking for those who will worship him that way. For God is Spirit, so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이 말씀에 ‘true worshipers (참된 예배자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시는데, ‘true worshipers’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삽이 말한 참된 예배자는 ‘with thanksgiving’,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아삽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참된 예배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을 내다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아삽이 말한 ‘with thanksgiving’은 예수님 버전으로 하면 ‘in spirit and in truth’이다.”

그러면,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아삽’은 왜 그렇게 예배자가 갖춰야 하는 감사의 마음을 그렇게 강조했을까요? 왜냐하면,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예배 의식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찬양이 준비되어 있고, 아무리 탁월한 설교자가 있어도, 예배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 예배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배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예배 안내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성가대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설교자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추수감사 헌금이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헌금은 예배자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드린 헌금이 아닙니다.

여러분,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지 않은 헌금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헌금에 대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옆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과부가 ‘두 렙돈 (two lepta)’을 헌금한 것을 보았습니다. 렙돈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제일 단위가 적은 코인입니다. 달러로 하면 센트라고 하기는 그렇고요, 가치로 따지면 한 20센트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1:1-4) 재미 있는 것은 그 때 당시에 성전 입구에 놓여 있던 헌금함의 모양이 나팔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나팔을 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 부자들은 헌금을 하면서 난 이만큼 헌금했다고 하면서 자랑했던 것과 헌금함의 모양이 꼭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부자들의 헌금에는 감사의 마음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넣었던 과부의 헌금에는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우리 마음에서 감사의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남편과 아내가 화를 냅니다. 아빠의 마음에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아서 야단을 칩니다. 예배 안내자들은 왜 얼굴 표정이 그렇지요? 뭔가 잔뜩 화가 난 얼굴들입니다. 성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중요한 날인데, 오늘따라 대원들이 시간을 지키지 않습니다. 지휘자의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가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어제 아침 간사 성경공부 때 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설교자가 무슨 이유로 감사의 마음을 상실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의 전략은 완전히 성공합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 ‘아삽’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22절 말씀 보십시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들아 (You who forget God)!” 예배자들이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예배자들에게 감사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 몸을 찢을 것이니, 아무도 너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22절) ‘이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그 뒤에 나오는 23절 말씀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23절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드리는 예배가 너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23절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나를 높이고 길을 예비하는 자이니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줄 것이다.” 이 말씀이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who offers a sacrifice of thanksgiving honors Me; And to him who orders [his] way [aright] I shall show the salvation of God.” 시편 50편 말씀의 요절(要節)입니다. ‘a sacrifice of thanksgiving’ ‘감사의 제사’ 혹은 ‘감사의 예배’를 말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준비해 가지고 나를 예배하는 사람이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합니다. 다른 것 없이, 감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What is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하는 질문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 대답에 모두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 살았던 ‘아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생의 ‘올바른 길 (his way aright)’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인생의 여정을 들여 다 보십시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8:20, 12:7, 8, 13:4, 13:18, 22:9). 1620년에 우리가 사는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Plymouth)에 도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지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플리머스 플랜테이션 (Plymouth Plantation)’을 한번 방문해 보십시오. 그 때 그 사람들이 살았던 집은 예전 한국의 어느 시골 가난한 집의 구조와 비슷합니다. 작은 뜰과 작은 부엌, 그리고 작은 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이들이 지은 교회에 이런 현판을 붙였다고 합니다. “Think and Thank (생각하고 감사하라)!” 이제는 이 전통을 이어 우리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예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자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