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20-24

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21 나는 여러분이 진정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또 진리 되신 그분 안에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22 옛 모습을 벗어 버리십시오.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모습이 될 뿐입니다.
23 여러분은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24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20 But that isn'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21 Since you have heard about Jesus and have learned the truth that comes from him,
22 throw off your old sinful nature and your former way of life, which is corrupted by lust and deception.
23 Instead,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24 Put on your new nature, created to be like God-truly righteous and holy.

오늘은 2019년 새해 첫 주일 예배입니다. 여러분, 고사 성어 중에 ‘일신일신우일신 (日新日新又日新)’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직역하면,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다는 뜻입니다. 서경(書經)의 상서(商書)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 은 (殷)나라의 탕 (湯)이라는 덕망이 높은 왕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숫대야에 이 말을 새겨 놓고 날마다 세수할 때마다 새로워지려고 다짐함으로써 현실에 만족하려고 하는 자신을 경계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각오를 새롭게 함으로써 과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누구나 새로워지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해 결심한 것 (resolution)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목표를 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마음이 해이해져서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상 (status quo)에 만족하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결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하고 경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은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일과 새로워지는 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읽은 에베소서 4: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at isn'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베소 (Ephesus)는 지금의 터키 남서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큰 도시입니다. 지금은 ‘셀주크 (Selcuk)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에베소’라는 이름 자체가 ‘욕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항구 도시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는 유명한 풍요의 여신 ‘아데미 (Artemis) 신전’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에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에베소에 무려 2년을 머물면서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들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세 달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토론도 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믿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 앞에서 ‘도’를 욕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떠나 신자들을 데리고 두란노 학원으로 가서 날마다 사람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그 일은 2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 지방의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8-10)

바울의 에베소 선교에 대한 애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역자인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러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1:3). 에베소에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교사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에베소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성경 (편지)가 적어도 3권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사도행전까지 하면 모두 4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삶이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진정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또 진리 되신 그분 안에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21절)

오늘 우리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화의 삶에 대한 문제를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변화의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데도 그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생각과 태도를 바꾸자 (Renewing Your Thoughts And Attitudes)”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변화(變化)’는 형식적인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태도가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 (a radical transformation)’입니다. 생각하는 법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paradigm shift’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변화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예제(例題, example)와도 같습니다. 예제를 잘 이해해야 예제를 응용해서 더 어려운 문제들을 풀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 이야기’가 바로 예제와 같은 말씀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를 잘 이해하면 변화의 삶에 대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삭개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고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더라면 삭개오의 삶은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 (chief tax collector)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원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고 했다는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의 삶을 원해야 합니다. 그 다음, 변화의 삶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변화되기 전 우리의 ‘자아’를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old sinful nature (예전의 죄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 (It is corrupted by lust and deception)’고 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 ‘옛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성령께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십시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도록 하려면 먼저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는 지, 어떤 일을 좋아하시는 지, 알아서 그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서 성령께서 활발하게 (actively)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John Piper 목사님이 로마서 12:2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새로워지려면 다음의 4가지를 소원해야 한다. 첫째로, 세상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고, 둘째로, 당신의 속에서부터 변화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하고, 넷째로, 당신의 삶 전부가 영적 예배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보다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 속에 있는 ‘옛 사람’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자극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그것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은 우리의 욕망 (lust)을 자극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것을 기뻐하는 ‘옛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새 사람이 되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동양의 성현 중에 노자 (Lao Tzu)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Warring States period, 770-221 B.C.) 사람으로 도가(道家)를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When I let go of what I am, I become what I might be (내구 누구인지를 놓아 버릴 때 내가 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Joseph Campbell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We must be willing to get rid of the life we’ve planned, so as to have the life that is waiting for us. The old skin has to be shed before the new one can come (새 피부가 생기려면 늙은 피부가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계획한 삶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Put on your new nature (성령께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고, 새로운 본성을 입으라)”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디이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라는 목사를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을 입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 넣고,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살았던 독일 고백교회 (The Confessing Church)의 목사였습니다. 그 때 독일의 교회들은 히틀러의 그런 만행을 보고 침묵하거나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고백교회의 목사들은 히틀러의 독재와 만행에 항거했습니다. 그 때 본회퍼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21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 (Communion of Saints)’는 당시 신학계의 거장이었던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로부터 신학계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재능을 아깝게 여긴 미국의 신학자들이 그를 미국으로 빼돌렸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만찬이 열린 자리에서 본회퍼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나중에 조국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당신은 그 때 어디 있었느냐는 질문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나기 4개월 전입니다.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이 대부분 알려져 책으로 나왔지만, 후에 본회퍼가 자기 애인에게 보냈던 시 한 편이 알려져, 그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선한 능력으로 (Von Guten Mächten)’입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에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죽은 지 74년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선한 능력으로>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 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옛 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아, 주님! 내 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당신께서 준비해 놓으신 구원을 주십시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