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1-9

1 우리는 우리가 거하는 땅에 있는 천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2 우리는 이 천막집에 살면서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게 될 것을 고대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그것을 덧입게 되면 벌거벗은 몸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4 우리는 이 천막집에서 사는 동안,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킴당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이 천막집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하늘의 집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5 이것을 우리에게 마련하시고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7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8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살기를 더 원합니다.
9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입고 있든지 몸을 벗어 버리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1 For we know that when this earthly tent we live in is taken down (that is, when we die and leave this earthly body), we will have a house in heaven, an eternal body made for us by God himself and not by human hands.
2 We grow weary in our present bodies, and we long to put on our heavenly bodies like new clothing.
3 For we will put on heavenly bodies; we will not be spirits without bodies.① / ①Greek we will not be naked
4 While we live in these earthly bodies, we groan and sigh, but it’s not that we want to die and get rid of these bodies that clothe us. Rather, we want to put on our new bodies so that these dying bodies will be swallowed up by life.
5 God himself has prepared us for this, and as a guarantee he has given us his Holy Spirit.
6 So we are always confident, even though we know that as long as we live in these bodies we are not at home with the Lord.
7 For we live by believing and not by seeing.
8 Yes, we are fully confident, and we would rather be away from these earthly bodies, for then we will be at home with the Lord.
9 So whether we are here in this body or away from this body, our goal is to please him.

예루살렘을 여행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 보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올리브산이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겟세마네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입니다. 올리브산 자체가 절대 높은 산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해발 720m 정도이고, 올리브산은 이보다 조금 높은 해발 820m 정도입니다.

올리브산에는 말 그대로 올리브 나무가 많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아주 단단하고 강인한 나무입니다. 올리브 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열매는 식용으로 먹을 수 있고, 열매를 짜서 나오는 기름은 건강에 좋은 최고 품질의 기름입니다. 그리고, 나무는 아주 단단해서 목공이나 조각품을 만듭니다. 올리브 나무는 똑 바로 자라지 않고 줄기가 뒤틀리면서 자랍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받으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어느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올리브 나무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나무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겟세마네 동산 어딘가에 은밀한 예수님의 기도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늘 그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큰 올리브 나무 근처 어디였는지 모르지요. 제자들은 그 장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던 그 저녁에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될 수만 있다면 이 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고 (He wen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 갔다 (누가복음 22:39)”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과 조금 떨어져 혼자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북돋워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날 밤이었을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예수님의 괴로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He was in such agony of spirit.”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는 매우 근심하며 괴로워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4:33-34)’”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 날 밤에 그토록 괴로워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 힘들어 하셨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 밤에 괴로워하셨던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것 (to be separated from God)"이었습니다. 죽음을 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혀 있던 시간은 이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날 수로는 삼 일이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 속에 있었던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 속에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무도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 논리로 무장된 사람들이나,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예수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힘들고 아파하셨던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 때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 때가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속으로 들어 가 볼까요? 예수님께서 그 날 밤에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감당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 앞에 구원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상하지 않았던 문제가 생기고, 고통과 아픔, 실패와 좌절이 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도 고난은 예외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의 뜻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아픔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당장에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지금 손 놓고 계시는 것 아니야.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위해서 가장 완벽한 계획을 수행하고 계셔. 나는 지금 그 과정 속에 있는 거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와 십자가를 지시는 모든 과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힘들어 하시더니, 급기야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pro-ject는 착착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for we live by believing and not by seeing).”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간략하게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울 같은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볼까요? 사도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사도로 살아서 받은 눈에 보이는 보상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 말씀이 “우리가 거하는 땅에 있는 천막집이 무너진다”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천막집이니까 제대로 된 집이 아닙니다. 그것마저 무너집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면 사도의 삶이 그렇게 초라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게 천막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삶도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놀라운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나님은 그의 신실한 종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집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이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God himself has prepared us for this, and as a guarantee he has given us his Holy Spirit).” (5절) 예,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보증 (guarantee)’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공식 (formula)과 같은 것입니다. 공식은 답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식을 모르거나, 잘못된 공식을 사용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올바른 공식에 올바로 대입하면 정답이 나옵니다. ‘겟세마네 동산→ 순종→ 하나님의 뜻의 성취’ 이 공식에 대입을 하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 고난과 시련을 대입하고, 다시 거기에 순종을 대입하시면 ‘띵똥땡’ 하고 정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은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을 이깁니다. 예수님도 그런 믿음으로 사셨고, 사도 바울도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