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40-46

40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41 깨어서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영은 원하지만 육체가 약하구나.”
42 예수님께서 다시 가셔서 두 번째 기도를 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여, 이것이 제게서 지나갈 수 없고, 제가 마셔야만 한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합니다.”
43 그리고 나서 다시 제자들에게 가셔서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졸렸던 것입니다.
4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놔 두고 다시 세 번째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기도를 한 번 더 하셨습니다.
45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자고 있고, 쉬고 있느냐? 보아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진다.
46 일어나라, 가자. 나를 배반한 사람이 가까이 오고 있다.”

40 Then he returned to the disciples and found them asleep. He said to Peter, "Couldn't you watch with me even one hour?
41 Keep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give in to temptation. For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42 Then Jesus left them a second time and prayed, "My Father! If this cup cannot be taken away① unless I drink it, your will be done." / ①Greek If this cannot pass
43 When he returned to them again, he found them sleeping, for they couldn't keep their eyes open.
44 So he went to pray a third time, saying the same things again.
45 Then he came to the disciples and said, "Go ahead and sleep. Have your rest. But look?the time has come. The Son of Man is betrayed into the hands of sinners.
46 Up, let's be going. Look, my betrayer is here!"

어저께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히브리서 4:1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cannot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One who has been tempted in all things as [we are, yet] with-out sin.).”

이 말씀에 나오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sympathy (동정심)’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와 똑 같은 몸을 입으시고 3년 동안 세상에 사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피곤함을 아십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새벽 기도에 나왔다가도 깊은 잠이 듭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셨는지, 예수님을 혼자 남겨 놓고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우리의 배고픔을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즘엔 청년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걱정, 진로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걱정에 ‘sympathy’ 가지고 계십니다. 혼자 걱정 하지 마세요. 혼자 모든 걱정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세요. 찬송가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이 찬송가 좋아하시지요? 곡조도 좋지만, 가사가 참 대단해요. 1절에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모두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절 가사입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완벽한 가사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sympathy’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쓴 잔’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느냐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 ‘쓴 잔’이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잖아요? 왜 다른 방법을 물으셨을까요? 하나님과 단절되고 버림 받는 것이 무섭고 싫어서 그랬습니다. 예수님처럼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피해 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잖아요? 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희생 없이, 십자가 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짆아요? 비록 예수님의 겟세마에 동산의 기도와 그 깊이는 다를지 모르지만, 피하고 싶은 마음만은 똑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시간, 예수님은 매우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가 보여 주는 것은 비록 몸과 마음은 피곤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아주 견고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가가 그의 복음서에 잘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마가복음 14:36)’고 기록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마가만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바 (Abba)’라는 말은 아람어로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를 때 그 말 속에 아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이 들어 있습니다. 아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도는 한가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가할 때는 기도하지만 바쁠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기도를 건강할 때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피곤하고 힘들고 아플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기도를 실패한 사람들이, 뭔가 큰 일이 나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을 때, 자기 계획대로 잘 나갈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평소에 많이 해서 저축해 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사시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이상한 궤변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기도는 저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급할 때 기도하지 않고 은행에서 돈 찾아 쓰듯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몸 컨디션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분이 좋을 때다 기분이 다운 될 때나, 기도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얻는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반드시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과 희생이 반가운 손님이 찾아 오듯이 그렇게 오나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굉장한 아픔을 주고, 걱정과 근심을 안겨 줍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과 고뇌를 제자들에게 모두 털어 놓았습니다.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가복음 14:34)

하지만,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이 모든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로마서 5:3-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우리는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압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이 과정이 무슨 과정이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숙한 자녀로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보세요. ‘Suffering (고난)→ Perseverance (인내) → Character (인격) → Hope (희망)’ 여기 ‘희망’은 ‘Final Salvation (마지막 구원)’에 대한 희망입니다.

‘Suffering’이 없이는 이 과정이 시작이 되지 않습니다. ‘Suffering’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고난’은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이는 인내도 없고, 인내가 없이는 인격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고난’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여러분의 삶 속에 찾아 오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