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1-9, 15-16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마스커스의 여러 회당에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밝은 빛이 사울을 둘러 비췄습니다.
4 사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습니다.
5 사울은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7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깜짝 놀라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커스로 데려갔습니다.
9 사울은 삼 일 동안, 앞을 보지 못했으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15 그러나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 Meanwhile, Saul was uttering threats with every breath and was eager to kill the Lord's followers①. So he went to the high priest. / ①Greek disciples
2 He requested letters addressed to the synagogues in Damascus, asking for their cooperation in the arrest of any followers of the Way he found there. He wanted to bring them?both men and women?back to Jerusalem in chains.
3 As he was approaching Damascus on this mission, a light from heaven suddenly shone down around him.
4 He fell to the ground and heard a voice saying to him, "Saul! Saul! Why are you persecuting me?"
5 "Who are you, lord?" Saul asked And the voice replied, "I am Jesus, the one you are persecuting!
6 Now get up and go into the city, and you will be told what you must do."
7 The men with Saul stood speechless, for they heard the sound of someone's voice but saw no one!
8 Saul picked himself up off the ground, but when he opened his eyes he was blind. So his companions led him by the hand to Damascus.
9 He remained there blind for three days and did not eat or drink.
15 But the Lord said, "Go, for 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and to kings, as well as to the people of Israel.
16 And I will show him how much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성령강림절’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경 (사도행전)을 찾아 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유익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앞으로의 설교계획은 이렇습니다. (1)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 (사도행전 2장) (2) ‘아름다운 문’ 앞에서 일어난 사건 (사도행전 3장) (3) 신앙공동체의 출현 (사도행전 4장) (4) 사울의 회심 (사도행전 9장) (5) 안디옥 교회 (사도행전 11장) (6) 예루살렘 회의 (사도행전 15장) (7) 유럽으로 건너간 복음 (사도행전 16장) (8)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고린도 (사도행전 18장)  (9) 복음의 변증론자
 
오늘 읽은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회심’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을 돌이켜 먹음’ ‘과거의 생활을 뉘우치고 신앙에 눈을 뜸’이란 뜻입니다. 한자로는, ‘回心’이라고 씁니다. ‘돌아올 회자’와 ‘마음 심자’입니다. 마음을 고쳐 먹고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conversion’이라고 합니다. ‘바꾼다’는 뜻입니다, 성격이나 형태나, 기능이 바뀌는 것입니다. 또 죄인이었던 사람이 의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거나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종교를 바꾸거나, 정치적인 신념이 바뀌거나 관점이 바뀌거나 할 때 ‘convers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자신의 종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불신하거나 반대했던 사람이 아주 열성적으로, 아주 호의적으로 바뀌었을 때도 ‘convers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사울의 ‘회심’은 맨 마지막 정의가 맞을 것 같습니다. 사울이 회심했을 당시 ‘기독교’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울은 처음에 나사렛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 (Stephen)’이라는 사람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에서입니다. 사울은 “저런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 (사도행전 8:1)”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ul was one of the witnesses, and he agreed completely with the killing of Stephen. A great wave of persecution began that day, sweeping over the church in Jerusalem; and all the believers except the apostles were scattered through the regions of Judea and Samaria (증인 중 한 사람인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완전히 동의했습니다. 그날 예루살렘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들을 빼고는 모든 신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울이 ‘다마스커스 (Damascus)’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커스’는 ‘시리아 (Syria)’의 수도입니다. 그의 손에는 대제사장의 편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옆에는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마스커스’에 거의 다 갔을 무렵에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사울에게 비쳤습니다. 깜짝 놀란 사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사울은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4-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울만 이런 소리를 들었지, 같이 가던 수행원들은 무슨 소리인지는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고 ‘다마스커스’로 들어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완벽한 드라마입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마스커스’에 미리 ‘아나니아 (Ananias)’라는 사람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아나니아’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고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묵고 있는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가 기도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손을 얹어서 그의 시력이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충실한 제자 ‘아나니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그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그가 이곳에 올 때 대제사장으로부터 신자들을 잡아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9:13-14)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사도행전 9:15-1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 for 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and to kings, as well as to the people of Israel. And I will show him how much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세상에 이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문제입니다. 그가 ‘내 이름 때문에’, ‘내 이름을 위하여’ 반드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I will show you how much you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과정은 ‘꽃 길’이 아닙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여러분 중에 괜히 느낌으로,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먼저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목사직, 교회에서 받는 장로직, 권사직, 집사직을 수행하는데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 받는 일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We must suffer for the sake of Christ (우리는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왜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을 선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은 그 때 사울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대충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유대교의 구원과 무엇이 다른가? 복음은 그리스 철학과 어떻게 다르며, 그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 (Gnosticism)’같은 사상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사울입니다.
 
어떻습니까? 저의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사울은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5). 그의 고백처럼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고, 그 누구보다도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3-14) 이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덕분에 사울은 누구보다도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는 유대교의 오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기록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울이 쓴 로마서 3:21-22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도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옵니다. 이 의는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이 말씀 속에 율법과 복음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입니다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이 말씀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가말리엘 (Gamaliel)’이라는 탁월한 율법학자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요즘도 그렇겠습니다만, 스승 밑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사상과 학문하는 방법까지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울이 ‘가말리엘’은 밑에서 공부한 것은 일찍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유대인입니다.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 (Tarsus of Cilicia)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그 밑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대로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오늘,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에 대해 열심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2:3) 성경을 읽어보면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산헤드린 (San-hed¬rin)’의 위원으로 모든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대해서도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34-39)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울이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하면서 이런 스승의 사상과 태도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예수님의 사상과 메시지를 이해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내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I was so zealous that I harshly persecuted the church. And as for righteousness, I obeyed the law without fault).” (빌립보서 3:6) 사울 자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습니다만, 그 열심이 지식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2) 유대교 신자로서 사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가졌던 열심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열심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을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my only aim is to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od news of God's grace (그러나, 나는 나의 삶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나의 유일한 삶의 목적은 주 예수께서 나에게 주신 과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 과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4, New International Version) 주님이 주신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더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의 목적이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복음에 대한 이 열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울의 회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배신자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는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명의 자객들이 바울을 제거하는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사도행전 23:12-15). 교회 측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는 사울의 회심을 의심했습니다. 신자들이 볼 때, 사울은 워낙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 (Barnabas)’라는 신실한 사람이 사울을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교회는 사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는 열정적인 사람, 동시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1세기에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는 때에, 그리스의 철학과 타 종교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문화 속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떨까요? 교회의 메시지가 힘을 잃어가고,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감소되어 가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 아닐까요? 복음을 잘 아는 사람, 마음이 열려 있는 관용의 사람, 그리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 하나님은 분명히 이 시대에도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지 살펴 볼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왜 저는 안 되겠습니까? 저를 이 일에 사용하여 주십시오. 저를 이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훈련시켜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