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5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쉬운성경)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15 No one lights a lamp and then puts it under a basket. Instead, a lamp is placed on a 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16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날처럼 크리스천의 의미가 혼동 스러운 때가 과거에 없었습니다. 과거에는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의미가 분명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서구의 발전된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던 때가 있었고,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생각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또 크리스천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겼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크리스천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축소되었습니다. 사회적인 영향력이 미미해졌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실리면 “또 교회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나 보다” 이런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 세습’에 대한 뉴스가 실렸습니다. 며칠 전에 그 교회가 속한 교단 (denomination)의 총회가 열렸습니다. 총회에서 그 교회의 ‘담임 목사 세습’이 정당한지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총회 대표들은 사회적인 인식과 동떨어진 세습이 정당하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연일 뉴스에 오르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이 과거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벌써 저만큼 생각하고 있는데, 교회는,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을 높이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는 정반대로 교회가 구태의연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그 대형교회의 그런 결정은 한 교회의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민낯을 세상에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속해서 이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You are salt of the earth)!” (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14절)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저의 눈에는 ‘of the earth’ ‘of the world’라는 말이 들어 옵니다. ‘of’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eposition used to indicate spe-cific identity or a particular item within a category (그 범위 안에 있는 특별한 정체성이나 특정한 물건을 가리키는 전치사로 사용된다)’ 이 말을 예수님의 말씀에 적용해 보면, 크리스천은 세상에서 소금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 빛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크리스천은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소금으로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하고, 크리스천은 언제, 어느 곳에서도 빛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정체성은 ‘짠 맛 (salty flavor)’을 내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짠 맛’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짠 맛’이 들어가면 썩지 않습니다.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소금에 절여서 오랫동안 먹거리들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제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왜 그렇게 음식들이 짠지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사서 먹는데, 맛은 있는데, 왜 그렇게 짠지, 엄청 짰던 생각이 납니다. 마켓에서 감자 칩 (potato chips)을 사 오면 왜 그렇게 짠지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대한 생각들이 높아져서 ‘salty’한 것도 있지만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unsalty’한 것도 있고, 소금이 적게 들어간 ‘less salty’한 것들도 다양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먹는 고추장, 된장도 얼마나 짭니까? 엄청 짭니다. 그런데, 짠 것이 건강에 나쁘다는 생각들이 많아지니까 고추장, 된장도 소금을 많이 넣지 않은 ‘less salty’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시지요?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나왔습니다만 ‘차마고도 (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중국의 내륙지방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험하고 험한 산중에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자동차가 없었겠지요. 그 험한 절벽에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고, 말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 길로 상인들이 지나다니면서 차 (tea)와 생활 필수품들을 사옵니다. 다큐에 나오는 한 마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첩첩 산중 마을에 한 우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이 깊은 지하에 있기 때문에 물을 퍼 날라야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우물에서 소금물이 나옵니다. 마을의 여자들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소금물을 길어 올라와서 염전(鹽田)에 붓는 일을 계속합니다. 소금을 만들어 자기들도 사용하고, 그 소금을 팔아서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천은 이렇게 세상에서 소금의 짠 맛을 유지해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지켜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은 짠 맛을 유지해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야크 (yak)’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소처럼 생긴, 초원에 무리 지어 사는 야생동물입니다. 그 사람들이 ‘야크’를 길들여서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고, 고기도 먹고, 가축을 이용하고, 물건을 나르기도 합니다. 이 야생동물들이 사람에게 길이 들어 도망가지 않습니다. 이 야생동물들이 사람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소금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초원에서 풀을 뜯는 ‘야크’가 소금을 섭취하기 어려운데, 사람들이 소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 때문에 길이 들어 사람을 떠나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합니다. 재미 있기도 하지만, 조금 슬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3절) 지금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들이 소금의 짠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빛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서의 크리스천의 역할을 ‘산 위에 있는 동네 (도시), a city on a hilltop)’에 비유하셨습니다. ‘산 (언덕) 위에 있는 동네’는 멀리서도 잘 보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 교회를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언덕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고된 일을 하다가 멀리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를 보면서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얻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은 빛으로서의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등잔 위에 있는 램프 (The lamp on a lamp stand)’에 비유하셨습니다. 램프를 켜서 등잔 위에 올려 놓아야 방 전체를 밝힐 수 있습니다. 바닥에 내려 놓거나 뭘로 덮어 놓으면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하고, 등잔 위에 올려 놓은 램프와 같이 주변을 밝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너 교회에 나가니?” “응.” “그런데 왜 나에게 말 안 했어?” “네가 안 물어 봤잖아? 물어보면 말하려고 했지.”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아니, 교회에 나가세요?” “예. 뭐.....” “그렇군요. 전 전혀 몰랐어요.”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이 대화에 어디가 잘못된 곳이 있습니까? 잘못된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언덕 위에 세워진 마을’처럼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고, 등잔대 위에 올려 놓은 램프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16절) “이와 같이, 너희의 선한 행동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비치도록 하여라.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여라.”

요즘에 ‘선한 영향력 (good influence)’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주변에, 내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그 때는 아무도 이 편지 한 장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줄 몰랐습니다. 이 아이는 집에 와서 선생님이 줬다고 하면서 이 편지를 엄마에게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편지를 한번 훑어 본 후에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이 아이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입니다. 이 아이를 가르칠 좋은 선생님이 없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엄마는 선생님의 말을 따랐습니다.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엄마는 천재인 자기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엄마가 떠난 지 수년이 지나 아들은 유능한 발명가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엄마가 남긴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유품 중에 오래 전에 학교 선생님이 엄마에게 보냈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그 편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우리 학교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이 아이에게 퇴학 처분을 내립니다.” 아들은 그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만들었다.”

우리는 ‘선한 영향력’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만 가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패했습니다. 썩었습니다. 어둡습니다. 그 어머니의 저능아 아들처럼 절망적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저능아인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아시지요? 이사야 (Isaish)가 보았고, 하박국 (Habakkuk)이 보았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말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듯이, 그 땅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 찰 것이다 (As the waters fill the sea, so the earth will be filled with people who know the Lord).” (이사야 11:9, 하박국 2:14) 두 선지자가 살았던 기원전 700-600년은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입에서 “세상이 다 그렇지 뭐”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서로가 소금을 지니고 화목하게 지내라.” (마가복음 9:50)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for seasoning. But if it loses its flavor, how do you make it salty again? You must have the qualities of salt among yourselves and live in peace with each other.”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소금으로서 ‘qualities (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계속해서 세상에서 빛의 ‘quali-ties’를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지는 삶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내가 소금의 qualities, 내가 빛의 qualities를 유지하고 있는지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