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8-12

8 그 근처 들판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9 주님의 천사가 갑자기 이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둘러 비추자, 이들은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10 천사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11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12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8 That night there were shepherds staying in the fields nearby, guarding their flocks of sheep.
9 Suddenly,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among them, and the radiance of the Lord's glory surrounded them. They were terrified,
10 but the angel reassured them. "Don't be afraid!" he said. "I bring you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
11 The Savior?yes, the Messiah, the Lord?has been born today in Bethlehem, the city of David!
12 And you will recognize him by this sign: You will find a baby wrapped snugly in strips of cloth, lying in a manger."

오늘은 ‘Advent Candle (대강절 촛불)’ 세 개를 켰습니다. 오늘 켠 촛불이 기쁨의 촛불, 핑크 색깔 촛불입니다. 핑크 색과 우리 마음의 기쁨이 잘 연결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까지, 우리는 인생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리포트 점수가 잘 나왔다든지, 학위를 받게 되었다든지,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든지, 좋은 사람을 만나 장래를 약속하게 되었다든지,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기쁨’이 모두 일시적인 (temporary)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기쁨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그보다 먼저,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개의 사인)’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긴 합니다만, 이제 이런 말이 매우 보편적인 말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구글에서 찾아보면 금방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사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그의 복음서 안에 대표적인 사인 7개를 배치했습니다. 제일 먼저 배치한 것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보여 주신 사인입니다. 그 때는 결혼 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손님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결혼 잔치를 하루에 치르는 것이 아니라 7일, 10일, 20일, 어떤 때는 한 달 동안 결혼 잔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의 결혼식은 단순히 당사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온 동네의 축제였습니다. 그 때는 가난했고, 먹을 것도 부족했고, 별로 기쁜 일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결혼식이 일생에 가장 기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기쁨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잔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오래 전에 제가 교회 청년들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에 단기선교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낯선 손님에게 잘해 줍니다. 친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주고, 잠도 재워줍니다. 우즈베키스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중동지역의 나라들이나 중앙아시아 나라들이 다 손님들에게 친절합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집에 비해 마당이 매우 크고 넓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결혼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에 손님들을 많이 초대해야 하는데, 마당이 작으면 손님들이 많이 들어 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들에게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읽어보면, 결혼 잔치 끝 무렵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미리 가서 잔치를 도와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그 때 포도주가 떨어져서 주인이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포도주를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은 주인에게 큰 수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곤란한 자리에서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시고, 이 항아리들을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항아리에 든 포도주 맛을 본 후에 감탄하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다가 나중에 잔치를 마칠 무렵에는 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내는 데, 당신은 어떻게 이런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놓았습니까?” (요한복음 2:10) 

물이 최 고급 포도주가 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이 포도주로 변하다니요? 물과 포도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물은 평범하고 흔한 것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귀한 것입니다.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This miraculous sign at Cana in Galilee was the first time Je-sus revealed his glory (as the Son of God). And his disciples believed in him).” (요한복음 2:11)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Jesus did many other miraculous signs in the presence of his disciples, which are not recorded in this book. But these (signs)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John 20:31, New English Translation)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 오실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생에 들어 오시면, 평범한 삶이 비범한 삶으로 바뀌고, 재미 없는 삶이 재미 있는 삶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염려와 근심이 웃음으로 바뀝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To all who mourn in Israel, he will give a crown of beauty for ashes, a joyous blessing instead of mourning, festive praise instead of despair).” (이사야 61:1-3)

이사야 61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메시아로서의 자기 사역을 온 세상에 선언하신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 61장 말씀을 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7-19)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하실 사역 중에 우리의 삶에 기쁨을 회복 시켜 주신다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도 똑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Don't be afraid! I bring you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 The Savior-yes, the Messiah, the Lord-has been born today in Bethlehem, the city of David!).” (누가복음 2:10-11) 이 말씀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 있는지 아십니까? ‘great joy to all people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에 찍혀 있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 (Good News)’입니다.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구원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듯이, ‘기쁨의 좋은 소식’도 어느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전하여 준 ‘기쁨의 좋은 소식’은 우리를 위하여 ‘구세주 (the Savior)’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해 주세주가 태어나셨다”는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가 탄생하신 것은 우리 모두에게 ‘구세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속에서 계속 살 수 없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finds its rest in you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창조하셨기에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354-430)의 '고백록' 1권 1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 안에 안식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비로소 내 안에 안식 (rest)이 주어집니다. 이 고백은 어거스틴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사람,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 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트 교리 문답 (Westminster Catechism) 1번 질문이 생각납니다. “사람의 첫째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rimary purpose of man)?”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It is to glorify God and enjoy Him forever).”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기뻐하십시오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빌립보서 4:4) 

하지만, 우리 삶에는 기쁨의 시간보다 슬픔과 절망과 염려와 근심의 시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주 안에서 (in Christ)’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주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삶이 불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since our friendship with God was restored by the death of his Son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10)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기쁨과 평화가 그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you will be filled with my joy. Yes, your joy will overflow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말 대로 한다면 틀림 없이 기쁨이 흘러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5: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my joy’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람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무조건 기쁨의 삶을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을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심각하게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엊그제 새벽기도에서 마태복음 11:19절 말씀을 읽고 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its results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라도 그 지혜를 들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은 우리가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들은 ‘기쁨의 좋은 소식’이 진실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