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7:8-11

8 지난 번에 쓴 편지로 인하여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편지로 인해 잠깐이나마 마음 아파했다는 것을 알고는 나 자신도 후회를 하였지만,
9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마음 아파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아파함으로써 회개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슬퍼하였으므로 우리 때문에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11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이 여러분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더 진지해졌고, 자신의 무죄를 더 증명하게 되었고, 어떤 것에 대해 더욱 분노를 느끼게 되었으며, 경각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간절히 바라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점에 있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무죄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8 Even if I caused you sorrow by my letter, I do not regret it. Though I did regret it--I see that my letter hurt you, but only for a little while--
9 yet now I am happy, not because you were made sorry, but because your sorrow led you to repentance. For you became sorrowful as God intended and so were not harmed in any way by us.
10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11 See what this godly sorrow has produced in you: what earnestness, what eagerness to clear yourselves, what indignation, what alarm, what longing, what concern, what readiness to see justice done. At every point you have proved yourselves to be innocent in this matter.

2019년을 시작한 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9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뉴스 중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안구(眼球)’가 없이 태어난 희귀한 질병을 아기가 크리스마스 날에 새로운 가족에게 입양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생후 8개월 된 이 ‘사샤’라는 아기는 ‘안구’가 없다는 것 빼고는 다른 아기들처럼 건강하고 잘 웃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샤’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집이어서 ‘사샤’의 치료비를 댈 수가 없고, 또 키울 형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에 이 아이를 키우겠다는 따뜻한 가족이 나타난 것입니다. 신문에서는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 지는 기사입니다.

이런 따뜻한 소식이 있는가 하면,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닭강정 사건’은 모두의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어느 아파트에 혼자 있는 어머니에게 ‘닭강정’ 30 박스가 배달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많은 ‘닭강정’을 주문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문서에는 그 어머니의 아들이 배달 시킨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우리 집으로 배달이 되었고, 또 ‘닭강정’ 가게에서 손해를 볼 수도 없으니 30박스 돈을 모두 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 먹을 수가 없으니 3박스만 주고 모두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그 아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친구들이 장난을 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닭강정’을 받지 않으면 자기 아들이 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닭강정’ 가계 주인은 그 어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닭강정’ 값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카드 회사에 연락해서 지불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광고를 올려서 “이미 식어버린 ‘닭강정’이지만 필요한 분은 와서 가져 가라”고 광고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의 집에 시키지도 않은 ‘닭강정’을 배달하게 한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에서 조사해 본 결과, 이 일이 ‘대출 사기단’의 소행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이 필요했던 그 어머니의 아들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했지만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인터넷 광고를 통해 ‘대출 사기단’과 접속하게 되고, 이 사람들을 만나 문서를 위조하고, 대출을 받는 연습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은행에 가서는 겁이 나고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 아들은 뒷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밖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대출 사기단’ 사람들은 화가 나서 아들 이름으로 ‘닭강정’ 30박스를 배달 시킨 것입니다. 좀 무섭기도 하고, 마음이 우울해지는 기사입니다. 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닭강정’이 아니라 충분히 더 큰 보복이나 협박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험해 지고 있습니다. 인정은 메말라 가고, 기쁘고 행복한 일보다는 어둡고 우울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이런 일들에 관심을 보일 마음의 여유조차 없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고 벅찹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을 돌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이 한 해를 훌쩍 보내고, 오늘 올해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윌리엄 버클리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일생에 세 번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스도에게 회개하는 마음, 교회에게 회개하는 마음, 그리고, 세상에 회개하는 마음이다.” 그리스도에게 회개하는 마음이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잘못 믿은 것을 뒤늦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생각과 결단 없이 자기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김형석 교수님의 신앙강연 동영상을 봤습니다. 올해 연세가 만으로 100세입니다. 그 동영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지만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교리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상황이 불리할 때는 믿음을 버리거나 예수님을 배반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함께 꾸고, 예수님께서 옳게 여기신 가치들을 자기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뒤에 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방향으로 함께 걷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진작 예수님을 그렇게 믿을 걸!” 하고 후회하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도의 교제’에 올바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회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진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예수님이 옳게 여기시는 가치들을 나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과 교제를 통해서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으면서 같이 크리스천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 ‘성도의 교제’인데, 내가 그 교제를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평소에 ‘성도의 교제’를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후회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셋째로, 세상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나의 책임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마태복음 5:13)”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소금으로서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복음 5:14)”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잘 아시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는 것 (not to be served, bur to serve others)’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주는 것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마가복음 10:45)’이었습니다. 누구를 특정(特定)하지 않고 그냥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for many)’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특정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주신 것입니다.

사이먼 앤 가펑클 (Simon & Garfunkel)은 1960-70년 대에 가장 인기 있는 남성 듀엣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저는 이런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을 들으면서 대학시절을 보냈습니다. 물론 사이먼 앤 가펑클 말고도 좋아하는 가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존 바에즈 (John Baez)나 쥬디 콜린스 (Judy Collins) 노래도 좋아했습니다. 사이먼 앤 카펑클은 수많은 히트곡을 냈는데요. ‘Sound of Silence (1964)’ ‘Scarborough Fare (1966)’ ‘Mrs. Robinson (1968)’ ‘El Condor Pasa (1970)’ ‘The Boxer (1970)’ 이 많은 히트곡 중에도 가장 히트한 곡은 1970년에 나온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입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가 매우 시적이고 의미가 있습니다.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당신이 지쳤을 때, 당신이 작고 초라하다고 느낄 때, 당신의 눈물을 닦아 주고, 당신의 편에 서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옆에 친구가 없을 때, 험한 물결 위의 다리처럼 나를 놓아 드리겠습니다).” 가만히 그 노래의 가사를 음미해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섬긴 예수님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2019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누구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뭔가 아쉬운 마음이 한 구석에 있지 않습니까? 이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회개하는 마음, 교회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리고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리고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올바로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아닐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7장 말씀은 아주 특별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고린도 교회를 몹시 책망합니다. 뒤로 미루거나 주저하지 말고 단호하게 이 일에 대처하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쓴 바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의 편지를 읽고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고린도후서 7:10)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See what this godly sorrow has produced in you: what earnestness, what eagerness to clear yourselves, what indignation, what alarm, what longing, what concern, what readiness to see justice done. At every point you have proved yourselves to be innocent in this matter.” (고린도후서 7:11) 여기서 ‘godly sorrow’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을 말합니다. 반대로 ‘worldly sorrow’라는 것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항상 ‘세상적인 슬픔’에 빠져 삽니다.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입니다. 이런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믿음생활에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godly sorrow’는 그 사람을 회개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고, 열심을 내게 만들고, 불의한 일을 보고 분개하게 하고, 경각심을 갖게 하고, 간절하게 사모하도록 하고, 관심을 갖게 하고, 정의감을 갖게 하고, 순결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소개하는 이유는, 2019년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우리를 회개 시키는 데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godly sorrow’가 되어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 (metanoia)’라고 합니다.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뉘우치거나, 후회하거나, 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changing one’s way of life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함)’ ‘making a decision to turn around, to face a new direction (돌아서기로 결심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마주 보기로 결심함)’입니다.

내가 왜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지 못했을까요? 내가 왜 교회생활을 제대로 못했을까요? 내가 왜 섬기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까요? 아쉬운 마음을 가지세요.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말고 지금 나의 삶을 회개하세요. “2020년 새해에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2020년 새해에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데서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을 마주 보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결심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