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14-18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목 시키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14 For Christ's love compels us, because we are convinced that one died for all, and therefore all died. 15 And he died for all, that those who live should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but for him who died for them and was raised again. 16 So from now on we regard no one from a worldly point of view. Though we once regarded Christ in this way, we do so no longer. 17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18 All this is from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New International Version)

거룩한 산의 기슭에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세력이 그리 강성하지 못한 한 인디언 부족이 있었습니다. 그 부족의 추장은 나이가 많아서 곧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에게 똑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희는 모두 저 거룩한 산에 올라가서 뭔가 우리 부족을 이끄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가져오도록 해라. 가장 훌륭한 선물을 가져 오는 자가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며칠 뒤 큰 아들이 가장 먼저 돌아왔습니다. 큰 아들이 가져 온 것은 날카로운 화살촉과 창촉을 만들 수 있는 부싯돌 덩어리였습니다. “아버님, 이제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에서 부싯돌을 잔뜩 찾아냈습니다.”

두 번째로 돌아 온 둘째 아들은 땔감이 많은 숲을 봐 두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이제 우리는 추위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모닥불을 지피고, 음식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땔감이 충분한 곳을 보아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온 막내 아들은 빈 손이었습니다. “아버님, 저는 아버님께 보여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산 정상에서 멀리 새로운 땅을 보았습니다. 그 땅에는 숲과 초원, 산과 계곡, 물고기와 동물로 가득했습니다. 그 땅은 먼 곳에 있지만, 언젠가 저는 저희 부족을 이끌고 그 땅으로 갈 것입니다.”

세 아들의 말을 모두 듣고 난 추장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너는 나와 우리 부족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주었다. 너에게는 미래를 내다 보는 비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전과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은 그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비전과 열정은 삶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승화 시키는 요소입니다.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새로워지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매우 유명한 지도자였고,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존경 받는 랍비였습니다. 이 니고데모에게 새로워지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눈을 피해 ‘한밤중에 (at night)’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또 예수님을 우물 가에서 만났던 한 사마리아의 여자도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목마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셔서 제가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요한복음 4:15) 또 삭개오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았던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 위로 올라 갔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 “오늘 이 집에 구원을 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그의 편지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고린도후서 5:17) 그가 말하는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피조물 (new creature)’ ‘새로운 사람 (new person)’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 어디에 ‘방점 (the operative word)’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맞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outside Christ)’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핵인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로서 성격이 활발하고 모임에 무리 없이 녹아 드는 사람을 ‘핵인싸’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녹아 든 ‘핵인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인싸’가 되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united with Christ)’ 라는 뜻입니다.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 프랑스)이라는 유명한 명상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은 크리스천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며 동시에 의무이다 (It is in the ordinary labors and duties of life that the Christian can and should develop his spiritual union with God).”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와 연합하는 일은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의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My old self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에서 ‘나’는 ‘옛날의 나 (old self)’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관점과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과거의 나’는 죽었기 때문에 이제 예전에 추구했던 것들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막연하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같다는 감정이나 느낌을 가지고 말하지 마십시오. 구체적으로 이런 변화가 내 속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새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나눈다 (partake)”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3).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속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태복음 6:9-10)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가졌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그가 가졌던 기도를 나의 기도로 삼고, 그 꿈을 나의 삶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보십시오. “나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쫓아 내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3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도 형식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복음서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떤 문둥병 환자 (a man with leprosy)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해져라!’ 그러자 바로 문둥병이 떠나고 그가 나았습니다.” (마가복음 1:40-42)

며칠 전에 프랜시스 교황이 환영하는 사람들을 만나다가 어떤 사람이 교황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교황이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의 손을 뿌리친 영상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교황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나도 인간이기에 자주 이런 잘못된 면을 보일 때가 있다고,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한 일이었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Mov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and touched him (그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compassion’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헨리 듀넌트 (Jean Henry Dunant, 1828-1910)라는 스위스 사람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말 로는 앙리 뒤낭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유명한 은행장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만나고 싶어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야망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스위스의 은행장으로서 프랑스와 경제협력의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스위스의 경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서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전쟁터로 떠난 후였습니다. 듀넌트는 실망하지 않고 전쟁터를 찾아가서라도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전쟁터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난생 처음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고 있는 수많은 시체들을 바라보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허무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는 거기에 남아서 의사를 도와 부상병들을 처리하고 시체들을 치우는 일을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을 만나 개인적인 야망을 채우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점차 이 꿈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의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시작된 것이 ‘적십자 (The Red Cross)’입니다. 이 꿈 덕분에 그는 1901년에 프랑스의 Frédéric Passy와 함께 첫 번째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것이 예수님의 삶을 나누고 실천하는 일이 아닌가요? 이것이 세상에 화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미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전에 가졌던 꿈을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우리 안에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Since we are living by the Spirit, let us follow the Spirit’s leading in every part of our lives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5: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뜻, 자기 생각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a worldly point of view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 혹은 ‘a spiritual point of view (영적인 관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꿈을 좇던 사람이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꿈을 꾸게 됩니다. 사람이 관점이 달라지면, 자연히 추구(追求)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2020년 새해를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소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워지고 싶은 소원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해에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을 여러분의 삶에서 잘 깨닫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