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7-23

17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각 사람의 행동을 공평하게 판단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전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조상이 물려 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19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20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택하시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보내 주셨습니다.
21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믿게 되었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이제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22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고,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는 온 맘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
23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 새 생명은 죽어 없어질 것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결코 죽지 않는 것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시 태어난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쉬운성경)

CCM 찬양 중에 ‘We Are The Reason’이라는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우리가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분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We were the reason that He gave His life. We were the reason that He suffered and died. To a world that was lost, He gave all He could give. To show us the reason to live.” “우리 때문에 그는 그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네. 잃어버린 세상에게 그는 모든 것을 주셨네, 우리에게 삶의 이유를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네요. 아주 탁월한 가사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잘 표현했습니다.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우리가 이유였다’ ‘우리 때문에’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아침에 제 눈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유난히 귀하게 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모자라고, 부족하고,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참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세대 용어로 개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질문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수치스럽다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벌써 오래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내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내어 주셨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도 증언한 것입니다.” (로마서 3:21, 25)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as was promised in the writings of Moses① and the prophets long ago.” /①Greek in the law “오래 전에 모세의 글들과 (율법 안에) 예언자들의 글 속에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이런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개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세의 글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지, 예언자의 글 어디에 그런 말이 나오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말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예언자의 글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부드러운 새싹처럼, 메마른 땅에서 자라는 나무 줄기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아름다움도 없었고, 우리의 눈길을 끌 만한 위엄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움을 받았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에게 지게 하셨다.” (이사야 53:2-6)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 동안 어느 집이나 가면 유행처럼 걸려 있던 그림이 있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의심에 찬 한 사진 작가가 눈이 녹아 질퍽질퍽한 중국의 어느 시골 길을 말을 타고 걷고 있었습니다. 이 사진 작가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예수님의 얼굴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했답니다. 길을 걷고 있던 이 사람에게 갑자기 “사진을 찍어라”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무작정 사진을 찍었는데, 집에 와서 사진을 빼 보았더니, 그 사진 중에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 사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진이 한참 유행 했었습니다.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리빙룸에들 걸어 놓았습니다. 그 액자에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God is the head of this house, the unseen guest at every meal and the silent listener at every conversation).”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에 기록된 예언자 이사야 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고난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말씀을 쓰면서 틀림 없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이 말씀을 베드로가 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가장 많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도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6:16).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이 유별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도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하면서 예수님께 충실하게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베드로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믿음으로 잘 서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32).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과 기도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사람들은 한번 배반한 사람은 영원히 배반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한번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는 그 후 그가 순교할 때까지 예수님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나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방)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 사람들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는 그 박해를 견뎌냈습니다. 그 중심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들도 마음대로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 아가 8:6)”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그 사랑이 베드로를 어떻게, 얼마나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지 한 example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 베드로가 지금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 쓴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한 번 들어 보시지요. “이전에는 우리가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이 말씀도 놀랍지만,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더 놀랍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택하시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믿게 되었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이제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0-21)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할 말을 잊었습니다. 정말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다. “아,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구나!” 이 말 밖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말들이 있잖아요? ‘패러다임 쉬프트 (paradigm shift)’라는 말이요. 한 동안 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2,000년 들어서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떠들썩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도 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이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말은 훨씬 더 이전부터 있었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정말 인간의 삶에 큰 변화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최근에는 구글에서 만든 인공지능 ‘알파고 (Alphago)’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필 이 ‘알파고’가 한국의 이세돌과 바둑 시합을 하는 바람에 더 화제가 되었습니다. 바둑 전문 기사들은 ‘알파고’의 등장으로 바둑의 정석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알파고’가 그동안 수천년 동안 인류가 만들었고, 알아냈던 바둑의 정석의 틀 (frame)을 깨버린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린 애들 사이에 바둑 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편지에 쓰고 있는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 가치관, 인생관을 한꺼번에 바꿔버립니다. ‘무가치한 삶에서 가치 있는 삶으로 (from the empty life to the valuable life)’,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에서 하나님께로 (from the selfish life to the life of faith and hope in God)’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사고의 틀이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사실이 베드로의 편지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저는 단언(斷言)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쉬프트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이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요즘에는 거의 모든 차들이 자동으로 기어를 변속하지만, 예전에는 기어 (gear)를 통해서 속도를 변속했습니다. 이것을 ‘기어 변속 (gear-shift)’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 삶에 ‘gear-shift’가 일어나야 합니다. ‘무가치한 삶에서 가치 있는 삶으로’ ‘나만 생각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삶으로’ 기어 변속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설교를 마무리 지면서 한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왜 꼭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까?” “그런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말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For you know that God paid a ransom to save you from the empty life you inherited from your ancestors. And the ransom he paid was not mere gold or silver. It was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God chose him as your ransom long before the world began, but he has now revealed him to you.” (베드로전서 1:18-20a)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ransom’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 이 ‘ramsom’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마가복음 10:45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이 말씀에 나오는 ‘대속물’이 바로 ‘ransom’입니다. 유대인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대속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다. 그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수년을 살아왔습니다. ‘대속물’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대신 드리는 제물을 말합니다. 내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르자면 죽어야 하겠지만, 차마 죽지는 못하고 대신 ‘몸값’으로 양이나 염소 같은 동물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왕이면 흠이 없고, 깨끗한 것을 골라서 드렸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말씀을 공부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들었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런 동물을 제물로 드려서 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제물이 된다면 그 제물은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소개했던 “We Are The Reason” 그 찬양 가사가 참 탁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보세요.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이제 내가 살 이유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참 훌륭한 가사 같지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난 이제 주님만을 위해서 살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예전의 이기적인 삶의 모습이 다시 보입니다. 주님만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 다시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만일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빵점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세요.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고,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는 온 맘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 (22절) 베드로의 말입니다. 이제 패러다임이 쉬프트된 사람은 나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로 흘려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가야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완성됩니다. “착한 일을 하며 궁핍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제물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6) 이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착한 일로, 내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