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1-7

1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그 무렵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본토 유대인들이 매일 음식을 나누어 줄 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과부들에게는 관심을 쏟지 않아, 그들이 배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서 말했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 받은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5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다고 생각해서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을 비롯하여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인으로 개종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뽑았습니다. 6 사람들이 이들을 사도들 앞으로 데려오자, 사도들이 그 사람들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7 그후,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서 제자의 수가 많이 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제사장들 중에서도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1절)” 이런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3,000명에서 5,000명으로, 5,000명으로 신자의 수가 늘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many of the people who heard their message believed it, so the number of believers now totaled about 5,000 men, not counting women and children①. / ①Greek 5,000 adult males (사도행전 4:4)”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수는 이제 5,000명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it’라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어디서든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설교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제 신자의 수는 5,000명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을 모두 합하면 20,000명 정도 되었겠죠? 이젠 신자의 수가 20,000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는 ‘무리 (multitude)’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 (Jesus’ Lordship)’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example (본)’로 삼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내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불이익이 오든지 상관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마태복음 5:13-16)”고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으로 살 사람들이었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빛으로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시 한국 영화 ‘곡성(哭聲, wailing)’을 보셨나요? 전라남도 곡성(谷城)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을 다룬 공포영화입니다. 관객수가 6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나, 이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제가 본 이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 일본 무당 (쿠니무라 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큰 굿을 해 주고 돈을 버는 전국구 무당 일광 (황정민)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영계(靈界)를 움직이는 대단한 힘을 가진 무당들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종구 (곽도원)가 등장합니다. 시골 경찰서의 겁 많고 무능한 경찰입니다. 하지만, 자기 딸이 이상한 증세를 보이고 미쳐가는 것을 보면서 이 사건에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종구는 자기 딸이 미쳐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마을의 신부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이 신부는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딸을 살려 보겠다고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간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설교자인 제 눈에 비친 이 무능한 신부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교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치고, 죽어가고,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처절한 삶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말을 지껄이고 있는 이 신부의 모습에 화가 치밉니다. 궂을 해서 영계를 주무르고, 죽은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서 부리는 무당들 앞에서,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는 로컬 귀신 무명 (천우희) 앞에서, 형식적이고 관료적인 이 신부의 한심한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울화가 치밀게 합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이 이렇다는 말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한심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반성의 눈을 가지고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신자의 수가 5,000명이 넘었습니다. 아니, 성인 신자 수만 센다면 10,000명이 넘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전체 기독교 신자의 수와 비교한다면,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한 교회 신자의 수만 100,000명이 넘는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1절)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사람들은 단순한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예수를 믿는지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이 사람들 사이에 불평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하는 구제 사업에서 왜 우리 측 사람들이 소외를 당하느냐 하는 불평이 생겼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있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아마도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어찌어찌 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고, 신자들의 공동체에 머물게 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다고 가정한다면, 여기에 딸린 문제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우리가 그런 걱정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교회가 하는 구제사업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과부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신자들의 수는 늘어만 가고, 내부적으로 불평이 생겼습니다. 열 두 사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혜를 모았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 2-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 받은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더 앞으로 나가기 전에 몇 가지 문제를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계속해서 신자의 수가 늘어갔다는 말씀입니다. 불과 15-20여년 전만해도 ‘부흥’이라는 단어가 한국교회의 화두(話頭)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공개적으로 몇 년 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큰 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이 말했던 ‘부흥’과는 정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부흥’을 말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때 ‘부흥’을 말했던 사람들이 모두 똑 같은 생각으로 ‘부흥’을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양적인 부흥을 말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신자의 수가 늘어갔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성장에 대한 특별한 철학 없이,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대형 교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교회성장’이었다면,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교회 성장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말씀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곧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이 박해 때문에 교회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납니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피난을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신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Diaspora Christians)’을 온 세상으로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둘째로, 교회 내부에서 생긴 불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아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공동을 사용했고, 날마다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데, 무슨 불평이 생깁니까?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는 모두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사이에 불평이 있고,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사도행전 15:39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 때문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Their disagreement was so sharp that they separated”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갈라설 정도로 서로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지혜를 모았습니다. 사도들의 결론은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분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뒤집어서 말하면, 교회 안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언제까지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들을 사도들이 리더십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는 시스템을 고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을 뽑아 세우고, 이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맡긴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하는 문제는 사도들이 세웠던 사람을 뽑아 세우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 받는 사람들’을 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those who are well respected and ar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NLT)’입니다. NIV 성경에는 ‘those who are known to b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진통 가운데, 사람을 바르게 세우지 못해서 겪는 진통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면에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또 지금도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알려 주신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헌신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나의 재능을,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재능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학문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돈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시간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런 말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유능한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돈 많은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 곳도 있습니다. ‘영 (spirit)’이라는 말이 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영은 볼 수도 없고, 어떻게 설명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영’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은 ‘마음 (mind)’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We have the mind of Christ., 고린도전서 2:16)”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경우 ‘마음’이라는 말은 ‘성령’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눈빛도 좀 이상하고, 하는 말도 좀 이상하고, 가까이 하기는 겁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 지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사람이 필요할 때는 그런 사람을 찾아 세웠습니다. 그래서 세운 사람이 일곱 명인데, 그 일곱 명의 명단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그 명단을 보면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곱 명 중에 왜 스데반에게만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이란 말이 붙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Stephen (a man full of faith and the Holy Spirit)’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이런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무나 세우지 말고, 이런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교회가 이 기준을 지키지 않고 세상 기준에 맞는 사람들을 세운 열매들을 지금 거두어 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자신이 이런 사람이 되기를 힘쓰세요.

주님의 교회가 확장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많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확장 속에 이들을 거룩한 목적에 사용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뽑아 세워서 일을 분담했습니다. 아무나 세우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퍼져 나갔고, 제자의 수는 계속 늘었습니다 (7절). 이제,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실 다음 일들이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