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54-60

54 공의회 의원들은 스데반이 하는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나서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56 스데반이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57 그러나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며, 모두가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58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그를 향하여 돌을 던졌습니다. 증인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60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이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사도행전 16:7 에는 ‘예수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the mind of Jesus)’ (고린도전서 2:16) 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이 제자들에게 내렸습니다. 자기들에게 임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제자들은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할 때부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 (native language)로 들리는 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같이 식사를 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도들에게 말씀을 배웠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이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47). 처음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공동체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면서부터 한번도 걷지 못했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이 터집니다. 이 부부는 성령을 속인 죄를 범했고, 이 부부는 같은 날 죽었습니다. 이 부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두려운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임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모임 (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수가 불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 제사장들 중에도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7). 이 사람들은 단순한 ‘무리 (multitude)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 (the Lord)’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예수를 믿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 (마태복음 6:13-14)’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책임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동체 안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기 위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사람을 선발하여, 구제 사업을 전담하게 합니다. 생각해 보면, 공동체 안에 계속해서 사람들이 불어난 것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고, 공동체 안에 불만이 생겨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선발한 것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었습니다.

누가는 공동체가 선발한 일곱 사람 중에서도 스데반이라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기적과 표적을 많이 행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6: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Stephen, a man full of God's grace and power, performed amazing miracles and signs among the peopl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스데반은 ‘a man full of God’s grace and power’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favor)’입니다. 왜 그런지 모릅니다. 설명이 안 됩니다. 왜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벌써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설명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undeserved God’s favor’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말씀이 에베소서 1:12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첫 소망을 가진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기 원하십니다 (God's purpose was that we Jews who were the first to trust in Christ would bring praise and glory to God).” 사람들이 볼 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아니, 이 사람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학교 때는 공부도 나보다 못하고 그랬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이렇게 이유를 찾고 찾다가 마지막에는 “이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야! 그렇지 않고 달리 설명할 수 없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를 불러 크리스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D. L. Moody (1837-1899)는 이곳 매사추세츠 Northfiled에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났지만, 막상 무디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부흥 운동을 했고, 영국에서 성공을 거둔 무디는 귀국해서는 시카고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시카고에 가면 무디교회 (Moody Church)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들을 위한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당연히 누가 설교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디가 설교하는 것이 좋겠다고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반대했습니다. “왜 우리는 꼭 무디에게 설교를 시켜야 합니까? 그의 설교를 들어 보세요. 그가 쓰는 단어는 저속 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장도 틀리기 일쑤입니다. 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설교자로 초청해야 합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쓰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스데반이 그랬고, 무디가 ‘a man full of God’s grace’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는 계속해서 스데반에 대하여 이렇게 씁니다. “스데반이 말하는 지혜나 성령을 당해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6:10)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6:15)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t this point everyone in the high council stared at Stephen, because his face became as bright as an angel's.” 여기서 ‘at this point’라는 말은 스데반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말도 안 되는 말로 스데반을 고소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 때 공회원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쳐다봤더니,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너에 대한 이 모든 말이 사실이냐?” (사도행전 7:1) 그 때 스데반이 자기를 이렇게 변호합니다. 그 변호하는 말이 사도행전 7장 전체에 걸쳐 나와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 어떻게 나타났는지, 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성령을 거스르고,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사도행전 7:52-53).

스데반의 변호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며, 모두가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스데반은 성난 사람들의 손에 돌을 맞아 죽었습니다. 크리스천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세 마디를 남겼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56절)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59절) “주님, 이 죄를 이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60절) 여러분, 그 때 스데반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한 30대 중반쯤이나 40대 초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한참 일할 때에 그는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쉽습니다. 더 살아서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일찍 죽었지만, 그의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목적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스데반도 그렇습니다. 일찍 죽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자기의 사명을 100% 감당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데반이 했던 세 마디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그의 말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그의 삶에서, 그의 죽음에서조차 예수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일 수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16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a Christ-like fragrance)’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예수님 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의미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3:3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 (a letter from Christ)’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마치 예수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는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의 말이 생각납니다. 간디는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힌두교 교인이었던 간디는 한 때 기독교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힌두교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 간디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I like your Christ,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좋아하지만,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당신들이 믿은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릅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If all Christians acted like Christ, the whole world would be Christian (만약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행동했다면, 전 세계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와 교류했던 스탠리 존스 (Stanley Johnes, 1884-1972)라는 영국의 감리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스탠리가 간디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간디가 “당신들이 예수님 같은 삶을 살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흘려 듣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이 믿는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하나의 교양으로만 알았고, 머리로만 받아들였지 가슴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오늘 우리는 똑똑하게 보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본 ‘사막의 라이온 (Lion of The Dessert, 1981)’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안소니 퀸(Anthony Quinn)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리비아를 침공한 이탈리아와 대항해 싸우는 베두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신출귀몰하게 이탈리아 군을 괴멸 시킨 주인공 오마르 무크타르(Omar Mukhtar)는 결국 잡혀서 교수형을 당합니다.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소.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요.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가 투쟁할 것이요." 그의 고개가 푹 떨어지면서 쓰고 있던 안경이 툭하고 떨어집니다. 그걸로 영화는 끝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 보고 있던 ‘알리’라는 한 꼬마가 땅에 떨어진 오마르의 안경을 손에 집어 듭니다.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의 온 몸에 전율(戰慄)이 일어납니다.

이 영화 줄거리와 똑 같진 않습니다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사울이라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독교의 역사는 이 사울이라는 청년에 의하며 대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이 죽고,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됩니다. 크리스천들은 살기 위하여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것으로 교회는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꺼질 것 같았던 교회의 역사는 사울이라는 청년에 의하여 다시 이어집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한다면, 스데반이 죽은 이 장면에 사울이라는 한 청년을 등장 시키는 데는 감독의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이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돌로 스데반을 치는 사람들이 옷을 벗어 이 청년 앞에 놓아둡니다. 누가 보기에도 이 청년은 돌로 스데반을 치는 성난 사람들과 한 패로 보입니다.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역사는 이 청년에 의하여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 스데반은 크리스천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의 온 몸을 바쳐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메시지를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에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스데반의 질문을 똑 바로 듣고 대답하십시오.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