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6:1-12

1 여호와여, 내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소서. 2 나는 주께 헌신한 자입니다. 내 생명을 지키소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를 의지하는 주의 종을 구원하소서. 3 여호와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하루 종일 주께 부르짖습니다. 4 내 영혼이 주를 바라봅니다.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5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해 주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6 여호와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절히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7 주는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므로 내가 환난 날에 주께 부르짖습니다. 8 여호와여, 주와 같은 신이 없으며 주께서 하신 일을 행한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9 주께서 창조하신 모든 민족이 주 앞에 와서 경배할 것이며 주의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10 주는 위대하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므로 주만 하나님이십니다. 11 여호와여, 주의 길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 가운데 걸어가겠습니다. 나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주셔서 내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12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를 찬양하고 영원히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Korean Living Bible)

1 [A prayer of David.] Bend down, O Lord, and hear my prayer; answer me, for I need your help. 2 Protect me, for I am devoted to you. Save me, for I serve you and trust you. You are my God. 3 Be merciful to me, O Lord, for I am calling on you constantly. 4 Give me happiness, O Lord, for I give myself to you. 5 O Lord, you are so good, so ready to forgive, so full of unfailing love for all who ask for your help. 6 Listen closely to my prayer, O Lord; hear my urgent cry. 7 I will call to you whenever I’m in trouble, and you will answer me. 8 No pagan god is like you, O Lord. None can do what you do! 9 All the nations you made will come and bow before you, Lord; they will praise your holy name. 10 For you are great and perform wonderful deeds. You alone are God. 11 Teach me your ways, O Lord, that I may live according to your truth! Grant me purity of heart, so that I may honor you. 12 With all my heart I will praise you, O Lord my God. I will give glory to your name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시편 말씀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그 중에서 다윗처럼 매력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13:22에 다윗에 대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이룰 것이다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이 말씀은 사무엘상 13:14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요. 이 말씀의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괜찮은데요. 알고 읽으면 소름이 끼치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직을 감당하던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사울 왕을 찾아갔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처음에는 겸손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나오는데요. 점점 그는 교만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왜 그런지 그의 마음은 초초해 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사울은 블레렛 사람들과 전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 특화된 사람들입니다. 그 때 벌써 철기 문화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쇠로 만든 칼과 창을 사용했습니다. 숫자도 많고요.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쇠로 만든 칼을 사용하는 사람은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 정도였습니다 (사무엘상 13:22). 

이런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멀리 블레셋 군인들이 보이는데, 한 눈에 봐도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습니다. 그걸 본 이스라엘 군대는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탈영병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초초한 사울은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도착합니다. 사울이 이미 제사를 드린 것을 안 사무엘은 자기가 늦게 온 것을 미안하다고 말하기는커녕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어리석은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이제 끝이 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을 자기 백성의 통치자로 임명하셨습니다.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3:13-14) 

“For the LORD has sought out a man after his own heart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이 살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내신 것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다윗을 통해서 그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 (unfailing love), 성실, 자비, 긍휼, 정의, 인내, 용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은 다윗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모형(模型)’이라는 말은 히브리서에 많이 나옵니다. 땅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전 같은 것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계 (genealogy)를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다윗은 그 후손으로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 (shadow)’ ‘replica’ ‘prototyp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다윗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For David had done what wa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and had obeyed the LORD's commands throughout his life, except in the affair concerning Uriah the Hittite.” (열왕기상 15: 5)

완전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윗은 예수님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다윗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그 주변에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 (the brokenhearted)’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윗에게 몰려왔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빚을 진 사람, 그리고 마음에 억울함을 가진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몰려온 사람들은 사백 명가량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2:2) 예수님 주변에도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죄인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a glutton (먹보)’ ‘a drunkard (술꾼)’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마태복음 11:19)’였습니다. 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거든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거든요.

예수님께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그의 ‘모형’인 다윗에게도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주로 그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다윗이 받은 고난도 그가 모시고 있던 왕 사울로부터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받은 고난의 특징은 두 사람 모두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기회는 된 것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어린 다윗은, 형들에게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전해 주려고 전쟁터에 갔다가 블레렛의 적장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말도 안되는 싸움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 사건 하나로 다윗은 단번에 유대나라에서 유명하게 됩니다. “사울이 죽인 적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적은 만만이라네.” (사무엘상 18:7) 사람들은 이렇게 다윗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사울 왕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에게 고난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는 사울 왕의 미움을 받게 되고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많습니다. 이유라도 알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이유를 알 수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다윗도 그런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고난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죽은 사람이 202,213명입니다. 미국은 53,397명이고요. 우리나라는 240명입니다. 제 질문은 “이렇게 죽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고요. 죽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부주의한,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건전하지 못하게 살던 사람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왜 괜찮은 것이지요? 그 사람들보다 뭔가 더 살아야 이유가 있는 사람들인가요? 왜 그 사람들은 죽고, 우리는 살아 있는지 어디서도 정답이 찾을 수 없습니다. 미스터리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아마 그 대답이 최선의 대답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 (favor)’를 베풀어 주신 것 아닙니까?

다윗은 이유 없는 고난을 받으면서 사울 왕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께서 누구를 잡으려 하십니까? 왕이 뒤쫓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왕께서 왜 죽은 개나 벼룩 같은 사람을 뒤쫓고 계십니까?” (사무엘상 24:14) “Who is the king of Israel trying to catch anyway? Should he spend his time chasing one who is as worthless as a dead dog or a single flea?” 다윗은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윗에게서 배워야 할 점입니다.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복수를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억울한 심정을 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마다 시를 썼습니다. 그가 쓴 시 속에 그의 억울한 심정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요. 원수에 대한 미운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점이 다윗이 훌륭한 점이고요.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86편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시편 속에 그의 초조하고 다급한 심정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십시오.” (1절) “내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2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3절)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절히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6절) “내가 환난 날에 주께 부르짖습니다.” (7절) 

여기까지만 보면 별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형편이 어렵고 다급하니까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 외에 다른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아, 이래서 다윗의 시편이구나!” “다윗이 이런 사람이니까 그리스도의 ‘prototype (모형)’이라고 하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강철 같은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많이 힘들어 하시면서 불안한 마음을 제자들에게 숨지 않으시고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태복음 26:38)”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되 먹지 않은 사람을 보면 “그게 인간이냐?” 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참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참 인간’이 됩니다. 사랑할 줄 알고, 올바른 말을 할 줄 알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며,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줄 알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참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훌륭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 봅니다. 반성과 회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묻습니다.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해 주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5절) “여호와여, 주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주의 진리 가운데 걸어가겠습니다. 나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주셔서 내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해 주십시오.” (11절) 다윗은 ‘자기의 길 (his ways)’을 묻지 않고 ‘주의 길 (His ways)’을 묻고 있습니다. 이래서 다윗의 시편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주의 길’을 묻지 않고 ‘자기의 길’만 주장했더라면, 그의 시편은 이기적인 평범한 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prototype (모형)’입니다. 다윗의 기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기도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가복음 14:36) 제 귀에는 이 예수님의 기도 소리가 쟁쟁하게 들립니다. 

매주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FKCC 교우 여러분, 지금의 이 상황이 얼마나 더 오래 갈 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The Second Wave of Covid 19’이란 말이 전문가들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28)”는 말씀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FKCC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