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4:4-11, 18-19

4 내가 여호와를 찾아 도움을 청했더니 내게 대답하시고, 내가 두려워하던 모든 것에서 나를 건지셨습니다. 5 주님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은 빛이 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6 이 불쌍한 사람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7 여호와의 천사들은 주님을 높이는 사람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8 여호와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살피고 맛보십시오. 그분께 피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9 너희 성도들이여, 여호와를 높이며 두려워하십시오. 저를 높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10 젊은 사자도 힘이 없고 배가 고플 때가 있지만,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갖가지 좋은 것들을 모두 얻게 됩니다. 11 젊은이들이여, 이리 와서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를 높이고 두려워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습니다.......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사람 곁에 계시고, 낙심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19 의로운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모든 어려움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쉬운성경)

4 I prayed to the LORD, and he answered me. He freed me from all my fears. 5 Those who look to him for help will be radiant with joy; no shadow of shame will darken their faces. 6 In my desperation I prayed, and the LORD listened; he saved me from all my troubles. 7 For the angel of the LORD is a guard; he surrounds and defends all who fear him. 8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Oh, the joys of those who take refuge in him! 9 Fear the LORD, you his godly people, for those who fear him will have all they need. 10 Even strong young lions sometimes go hungry,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lack no good thing. 11 Come, my children, and listen to me, and I will teach you to fear the LORD........18 The LORD is close to the brokenhearted; he rescues those whose spirits are crushed. 19 The righteous person faces many troubles, but the LORD comes to the rescue each time.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바깥 생활이 자유롭지 않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요즘에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랑겔한스섬의 오후 (Afternoon in the Islets of Langerhans, 1986)’에 처음 등장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느끼는 행복’이라는 신조어(新造語)입니다. 영어로는 ‘small but certain happiness’라고 하네요. 요즘에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하고 짜증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우리 스스로 ‘소확행’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다든지, 보고 싶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 화분에 꽃을 길러 보는 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식구들과 먹는 일,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성경을 읽는 일 등이 모두 ‘소확행 (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해당하는 일들입니다. 

‘소확행’에 대한 비판의 말들도 있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말 중에 ‘뉴-노멀 (New Normal)’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확행’의 시간이 길어지고, 또 이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이것이 새로운 일상생활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혼자 있는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되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을 멀리하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 되어 버리면 인간 관계가 깨지고 반사회적(反社會的)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뭔가 정상적이 아닌, 불안한 생활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시편 34편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단순히 위로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가 책을 통해서 마음에 평안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 것은 꼭 성경이 아니어도 동양의 고전이나 좋은 책들을 통해서도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위로를 받자는 값싼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어렵고 힘들 때 (in times of trouble)’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도움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옆에 있는 말씀 카드를 한번 보십시오.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얼굴로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카드에 적인 글을 한번 보십시오. “가끔 나는 눈을 들어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 알아요. 하나님 당신이었죠? 감사해요!”

그러면, 오늘 시편을 쓴 다윗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어떻게 체험했을까요? 이 시편은 다윗이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고 쓴 시편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한 밤중에 ‘놉 (Nob)’이라는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수행원도 없고, 몸에는 아무 무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 (Ahimelech)’을 찾아 갑니다. 아히멜렉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번에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고 다윗에게 먹을 것을 내 줍니다. 그리고, 마침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칼을 내 줍니다. 이 칼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은 전리품이었는데, 그 칼을 아히멜렉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 막 떠나려고 하다가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됩니다. ‘도엑(Doeg)’이라는 사울왕의 ‘목자장’으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차 싶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 도엑이라는 사람이 사울왕에게 자기가 여기 왔었다는 것을 보고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땅에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습니다. 다윗은 죽기 아니면 살기다 식으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블레셋 땅에 숨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틀림없이 변장을 하고 블레셋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정체가 탄로나서 다윗은 블레셋 왕 ‘아기스(Achish)’에게 끌려갔습니다. 사람들이 아기스에게 말합니다. “이 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우리의 원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처럼 따르는 자입니다.” “이 자를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이 자는 우리 땅을 정탐하려고 들어온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이 아기스 왕 앞에서 갑자기 미친 척을 했습니다 (David heard these comments and was very afraid of what King Achish of Gath might do to him. So he pretended to be insane, scratching on doors and drooling down his beard) (사무엘상 21:12-13)”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아기스가 다윗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아기스가 다윗을 죽였더라면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기스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디서 이런 미친 놈을 데려왔느냐? 썩 이놈을 데리고 물러가라!”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것은 기발한 신의 한 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정작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가 발휘한 신의 한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니까 안심이 되고 마음에 위로가 되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상황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까 상황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는 왜 두고두고 후환이 될 사람을 살려주었을까요? 왜 아기스는 그 때 상황을 잘못 판단했을까요? 아까 말씀 카드에서 읽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Sometimes I just look up, smile and say ‘I know that was you God. Thank you!’” 하나님께서 그 상황 속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똑 같은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놓고 분을 참지 못한 이집트의 왕 ‘바로 (Pharaoh)’는 자기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합니다. 바로는 왜 이스라엘 백성 추격해서 결과적으로 자기 군대를 모두 홍해바다에 수몰(收沒)시켰을까요? 성경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출애굽기 14:4, 로마서 9:18)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셨으면, 그래서 나를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의 시편은 책상 앞에 앉아서 쓴 시가 아닙니다. 그의 시편은 모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온 시들입니다. 한 편 한 편마다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의 시편에 나오는 구절들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찾아 도움을 청했더니 내게 대답하시고, 내가 두려워하던 모든 것에서 나를 건지셨습니다.” (4절) “이 불쌍한 사람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In my desperation I prayed, and the LORD listened; he saved me from all my troubles).” (6절)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자기 정체가 탄로나고, 아기스 왕 앞에 끌려갔을 때, ‘아기스’의 말 한마디에 그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다윗은 온 몸에 식은 땀이 났을 것입니다. 그는 긴급했던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여호와의 천사들이 주님을 높이는 사람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angel of the LORD is a guard; he surrounds and defends all who fear him.” 주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을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그를 지키신다고 합니다. 다윗은 위기의 순간에 그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형식적인 믿음생활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산 믿음’과 ‘죽은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2:17, 26).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은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또 불안한 이 상황 속에서 나의 믿음이 나를 지켜주는 ‘산 믿음’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서 아무 소용없는 ‘죽은 믿음’인지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in times of trouble)’ 내 믿음이 나를 지켜주지 못하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그 집은 반석 (firm foundation) 위에 세워진 집이다.” (마태복음 7:25)

여러분, ‘Catfish Effect (메기효과)’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The catfish effect is the effect that a strong competitor has in causing the weak to better themselves (강한 경쟁자가 약한 경쟁자들을 더 끌어 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이론입니다). 다윗에게는 고난이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메기였습니다. 이 메기 덕분에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에도 “고난 받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좋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주의 말씀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1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미스트에게도 고난이 ‘메기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살피고 맛보십시오. 그분께 피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Oh, the joys of those who take refuge in him)!” (8절) 보통 음식을 맛본다는 말은 많이 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맛을 보라는 말은 참 독특한 표현입니다. 제 선배 목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요. 그 아버님도 목사님이셨는데, 아버님 목사님이 성경 말씀을 재미있게 가르치기로 소문이 나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새벽 기도 때마다 작은 성경을 한 손에 들고 “이 말씀이 뜻인고 하면......”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도 말씀을 들으면서 입맛을 다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마치 음식의 맛을 보듯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의 피난처가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그의 위로가 되시고, 그의 기쁨이 되시고, 도움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꿀같이 단 말씀으로, 어떤 때는 징계의 말씀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끝으로, 다윗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들이여, 이리 와서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를 높이고 두려워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11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 되겠지!” “봉사를 열심히 하면 되겠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법이 있거든요? 다윗은 나쁜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나쁜 길에서 돌아서라고 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