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23-28

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교훈을 지킬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 사람에게 와서 함께 있을 것이다. 24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교훈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이 교훈은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교훈이다. 25 이 모든 것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너희에게 말하였다. 26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28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라고 말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진정 나를 사랑했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이는 아버지가 나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쉬운성경)

23 Jesus replied, "All who love me will do what I say. My Father will love them, and we will come and make our home with each of them. 24 Anyone who doesn't love me will not obey me. And remember, my words are not my own. What I am telling you is from the Father who sent me. 25 I am telling you these things now while I am still with you. 26 But when the Father sends the Advocate as my representative-that is, the Holy Spirit?he will teach you everything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told you. 27 "I am leaving you with a gift-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28 Remember what I told you: I am going away, but I will come back to you again. If you really loved me, you would be happy that I am going to the Father, who is greater than I am. (New Living Translation)

지금은 불안한 시대입니다. 1977년에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갤브레이스 (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가 ‘The Age of Uncertainty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BBC 방송의 제안으로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송된 것을 후에 책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갤브레이스는 아담 스미스, 리카도, 맬서스, 스펜서, 베브렌, 마르크스, 레닌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년 간의 ‘경제 사상사’를 소개하면서 앞으로의 세계 경제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이 책에서 지금은 과거처럼 확신에 찬 경제학자도, 자본가도, 사회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가 사용했던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은 이 시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로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갤브레이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미래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지금 세 가지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미국은COVID 19에 대한 안일한 대처로 사망자가 현재 무려 118,00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세계 사망자의 거의 1/3이 미국인인 셈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뒤늦은 대처로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고 있고, 연일 코로나바이러스에 무슨 약이 좋다는 둥 이상한 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 내의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입니다. 

둘째로, 지금 미국은 전에 없는 경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신규 실업자가 4,000만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미국 전체 노동력의 1/4에 이르는 숫자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1930년대의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 때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거기다 미국과 중국 간의 COVID 19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와 무역 패권 경쟁으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셋째로, 미국은 인종 간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가 백인 경찰에 의하여 8분 46초 동안 목이 눌려 있다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국 전국에서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흑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경찰의 총격으로 죽은 사건이 많이 있었지만, 이번에 일어난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SNS를 통하여 생생하게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이 공개되면서 들불처럼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이 항의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55년 앨라배마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 (Rosa Parks)라는 흑인 여자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건과 흡사합니다. 그 때는 그런 일들이 늘 있는 일이었지만, 로사 파크스 사건은 그냥 묻히지 않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하여 마틴 루터 킹이라는 흑인 민권운동가가 나오게 되고, 이 사건은 흑인 민권 운동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난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가 전세계로 확산되어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라는 시위의 도화선이 되고 있습니다. 플로이드의 장례식 소식을 전한 AP 통신은 프로이드의 죽음이 온 세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면서 ‘빅 플로이드 (Big Floyd)’라는 말로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 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이 둘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이 둘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찾아오셨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찾아오셔서, 평화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에베소서 2:16-17) 

차별이 없는 세상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 비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차별의 장벽을 몸으로 없앴던 것처럼, 우리도 차별을 없애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우리 속에 많은 차별 의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 못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 의식, 못 배운 사람에 대한 차별 의식,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있습니다. 이번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지켜본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차별 의식부터 없애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항의 시위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피켓에 “Black Lives Matter”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되어야 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은 마땅히 철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율법보다 위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시각입니다.

정치적인 발언이 될까 봐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플로이드 사건을 보면서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머리 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미국에서 사망자가 만명을 넘고 있을 때, 트럼프는 자화자찬을 늘어 놓았습니다. “전문가들은 모두 10만명 이상 죽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우리가 대처를 잘 하는 바람에 사망자가 5만명 밑으로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플로이드 사건 때도 트럼프는 연방군을 투입해서 사태를 진압하겠다고 시위자들을 협박했습니다. 그 선언을 하고 나서 손에 성경책을 들고 백악관 근처에 있는 한 성공회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바이블 벨트 (The Bible Belt)’에 있는 지지층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인명을 경시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트럼프는 실제로 군대를 동원해서 시위를 진압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선거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정은이라는 한국의 소설가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 요즈음에 ‘임계장’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임시 계약자 노인장’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또 ‘고다자’라는 말도 있는데,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큰사람인지도 알고 그 안에 얼마나 거대한 세계가 있는지도 잘 안다. 아마 다른 노인들도 그럴 것이다. 아마 다른 젊은이들도 그럴 것이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전율할 때가 있다. 오랫동안 들여다봐야 잘 알 수 있는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그 사람들 안에 있는 것이다. 도구로 쉽게 쓰이고 버려질 수 없는, 모든 사람이 각각 한 명의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큰 꿈인가.” 

미국이 이렇게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정책을 표방하면서 그동안 미국이 참여했던 일에서 속속 손을 빼고 있고, 스스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습니다. 독일이 미국 편을 안 들어준다고 금방 독일 안에 있는 미군을 대거 철수시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미국에 사는 것이 무섭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I am leaving you with a gift-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27절) 

걱정과 근심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 살아!” 이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걱정하지 않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평안을 줄 테니까 그 평안으로 걱정과 두려움을 충분히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자’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 9:6)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 ①Or Wonderful, Counselor ‘Prince of Peace’라는 말은 평화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Prince of Peace’로 태어나셨습니다. ‘Prince of Peace’가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Prince of Peace’이신 예수님은 평화에 대하여 제일 잘 아시는,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분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의 평안 (my peace)’을 제자들에게 주신하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그 ‘평안’은 어떤 ‘평안’인가?” “도대체 그 ‘평안’은 어디서 온 ‘평안’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비로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이해할 수 있고, 그 ‘평안’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그냥 물건을 주고받는 것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온 ‘평안’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I pray that they will all be one, just as you and I are one-as you are in me, Father, and I am in you.” (요한복음 17: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You move us to delight in praising You; for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and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You.”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이 없었다는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평안 (안식)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고, 교회 분위기가 좋으면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됨의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됨 (oneness)’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한 ‘하나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중단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이 ‘하나됨 (oneness)’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my peace (나의 평안)’는 아들이 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들과 ‘하나됨’에서 오는 ‘평안’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My soul is crushed with grief to the point of death. Stay here and keep watch with me).” (마태복음 26:38) 말씀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의 평안’을 말씀하신 예수님께 걱정도, 불안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런 ‘평안’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걱정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평안’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속에 걱정과 불안이 생길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심으로 하나님과 소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마음에 걱정과 불안이 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고, 거기에서 오는 ‘평안’으로 모든 불안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perception을 주고, insight를 주고, understanding을 주고, discernment를 줍니다. 지혜가 있으신 분들은 “아,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을 소유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이미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신 ‘나의 평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불안할 때마다, 걱정이 있을 때마다 조용히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나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이 우리의 마음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평안’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요한복음 16:33), 우리도 이 ‘평안’을 가지고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