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개역개정)

1 [A psalm of David.]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all that I need. 2 He lets me rest in green meadows; he leads me beside peaceful streams. 3 He renews my strength. He guides me along right paths, bringing honor to his name. 4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est valley①,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Your rod and your staff protect and comfort me. / ①Or the dark valley of death 5 You prepare a feast for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honor me by anointing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6 Surely your goodness and unfailing love will pursue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live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시편 23편을 함께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이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다윗이 이 시편을 언제 썼을까?” 하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한 때는 “그가 어렸을 때, 초원에서 양을 치면서 이 시편을 썼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다윗이 이 시편을 쓴 것은 그의 삶이 가장 어렵고 힘든 때였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일이 잘 되고, 아무 걱정이 없을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 않나요? 어렵고, 힘들고,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더 큰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크리스천의 삶에 ‘고난’이라는 주제는 ‘필요악(必要惡)’과 같습니다. 누가 ‘고난’를 좋아합니까? 누가 ‘고난’을 환영합니까? 모두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천의 삶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가 고백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고난이 나에겐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71절) 다시 야고보서 5: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받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만약 ‘suffering’이 없었더라면, 만약 나에게 ‘affliction’이 없고, ‘hardship’이 없고, ‘trouble’이 없었더라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시간이 있었을까요? 내가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실어 나르듯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지도 보았다 (You have seen what I did to the Egyptians. You know how I carried you on eagles' wings and brought you to myself).” (출애굽기 19:4)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목자와 양’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sacrifices his life for the sheep).” (요한복음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는데요. 다윗이 고백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말씀을 보실까요? 1절에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빌립보서 4:11-13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만족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 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압니다. 배가 부르거나 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게 힘을 주시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에 간섭하시면서 항상 나에게 최선의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고난도, 가난도 모두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바울이 발견한 ‘the secret of living in every situation (빌립보서 4:12)’입니다. 

둘째로, 목자이신 하나님은 그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위험한 길’을 통과해 봐야 합니다. 그 ‘위험한 길’을 통과해 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안전하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지만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우리 말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나와 있고, NLT 성경에는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라고 시제 (tense)가 ‘미래형’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나니까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삶을 이렇게 인도하시겠구나!” 하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the dark valley of death)’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메타포 (metaphor)’입니다. 그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언제 생명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순간들이 있었나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유일한 사람 다윗의 삶에 이런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참 크다고 생각합니다.

캘리포니아 동부 북쪽에 네바다 주 접경 지역에 ‘Death Valley (죽음의 골짜기)’라는 곳이 있습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 중 하나로 섭씨 56.7도까지 기록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화씨로 134도입니다.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사진을 찍다가 전화기가 녹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합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생물과 식물들이 자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이 이런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 아니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 죽음의 골짜기에 있지만,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이런 믿음 아니겠습니까? 이 때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엄마와 아들이 기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5살 정도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는 지루했는지 자기 자리에 계속 앉아 있지 못하고 기차 안을 여기 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저쪽에 물먹는 곳이 있는 것을 안 이 꼬마는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물을 마십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금방 또 가서 컵에 물을 따라옵니다. 옆 좌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이 꼬마에게 말을 건넵니다. “얘야, 옷이 참 멋있구나. 해군 아저씨들이 입는 옷하고 똑같네!” 이 꼬마가 신이 나서 말합니다. “맞아요! 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거예요.” “정말? 직접 만들어 주신 거야? 네 엄마는 정말 좋으신 분이구나!” “우리 엄마가 이 단추도 달아 주셨어요!” “그 멋있는 줄무늬도?” “예, 그 것도 우리 엄마가요!” 꼬마는 신이 나서 자기 엄마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차가 터널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방이 깜깜해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이 아이는 자기 엄마 다리를 꼭 붙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엄마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죠? 무섭지 않죠?”

다윗이 쓴 시편 23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1-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He’라고 3인칭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4절 말씀에서 ‘음침한 죽음의 골짜기’를 말할 때는 하나님을 ‘He’라고 3인칭으로 말하지 않고 ‘You’라고 2인칭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잘 나와있지 않습니다. 보세요.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 valley of death,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Your rod and your staff protect and comfort me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나는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 옆에 계시고 당신의 지팡이가 나를 지키고 위로할 것이 때문입니다).” 마치 엄마와 함께 기차 여행을 하던 꼬마가 자기 엄마 자랑을 한창 늘어 놓더니 막상 깜깜한 터널을 지나갈 때는 엄마 달려와서 엄마 무릎을 꼭 잡았듯이, 다윗이 어렵고 힘들었을 때 그를 지켜 준 것은 하나님을 붙들었던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다윗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 앞에서 그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니, 그의 잔이 넘쳤다고 합니다 (5절). 사방에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적들이 우글거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먹이시고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목자가 양들을 돌보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Why do shepherds put oil on sheep (왜 목자는 양들에게 기름을 바르는가)?” 이런 제목의 매우 흥미 있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 보면, 목자는 3가지 경우에 양들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첫째는, 숫양 (rams)들이 암양들 (ewes)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울 때입니다. 이 때를 대비해서 목자는 숫양의 뿔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그러면 치명적인 부상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양의 코에 기름을 발라 준다고 합니다. 양의 코에 알을 낳으려는 파리들이 꾄다고 합니다. 이걸 그냥 방치하면 양이 병이 들거나 치명적인 병에 옮기도 하고 아픔으로 앙들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목자는 양들의 코에 올리브 오일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셋째는, 목자는 양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기름을 바르면 ‘scab disease’라는 전염병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병은 양의 머리에 기생충이 서식하는 병인데, 양들이 서로 머리를 비비거나 할 때 다른 양들에게 전염된다고 합니다.

다윗은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신다고 했습니다. 목자가 양들의 사정을 잘 알고 세심하게 양들을 돌보는 것처럼, 다윗은 자기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와 축복을 “나의 잔이 넘친다”는 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And this same God who takes care of me will supply all your needs from his glorious riches.” (빌립보서 4:19)

우리가 이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는구나!” 하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로마서 5:8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말씀을 머리로 읽으면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슴으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 이 말씀에 ‘마음으로 믿으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If you believe in your heart’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만 믿지 말고 가슴으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5:8 말씀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머리로 읽으면 큰 감동이 없지만, 가슴으로 읽으면 큰 울림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로마서 5:8 말씀을 가슴으로 읽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I loved you at your darkest (나는 네가 어둠 속에 있을 때 너를 사랑했다)!” 

구약 말라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너희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너희를 좋아하겠느냐?” (1:8) 하나님을 총독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함이 있는 제물들을 바칩니다. 바치는 시늉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내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