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1:1-2, 9-16

1 가장 높으신 분의 피난처에 사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밑에서 편안히 쉬게 될 것입니다. 2 내가 여호와께 말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이시며 성벽이십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굳게 믿습니다.” ...... 9 가장 높으신 분을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고 나의 피난처이신 여호와를 여러분의 보호자로 모셨으니 10 어떤 불행도 여러분을 덮치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재난도 여러분 집에 가까이하지 못할 것입니다. 11 주께서 천사들을 시켜 여러분을 지키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저들이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12 천사들이 손으로 여러분을 붙들어 주시고, 발이 돌뿌리에 부딪히지 않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13 여러분은 사자와 독사 위를 짓밟고 지나가고 힘센 사자와 뱀을 짓누를 것입니다. 14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구원할 것이다. 내 이름을 높이는 자를 내가 보호해 줄 것이다. 15 그가 나를 부르면 내가 그에게 대답할 것이다. 그가 어려울 때, 내가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구원하고 그를 높여 줄 것이다. 16 그를 오래 살게 해 줄 것이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일 것이다.” (쉬운성경)

1 Those who live in the shelter of the Most High will find rest in the shadow of the Almighty. 2 This I declare about the Lord. He alone is my refuge, my place of safety; he is my God, and I trust him..... 9 If you make the Lord your refuge, if you make the Most High your shelter, 10 no evil will conquer you; no plague will come near your home. 11 For he will order his angels to protect you wherever you go. 12 They will hold you up with their hands so you won’t even hurt your foot on a stone. 13 You will trample upon lions and cobras; you will crush fierce lions and serpents under your feet! 14 The Lord says, “I will rescue those who love me. I will protect those who trust in my name. 15 When they call on me, I will answer; I will be with them in trouble. I will rescue and honor them. 16 I will reward them with a long life and give them my salvation.”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설교 제목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삶 (Abiding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입니다. 지금 저는 매주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말미암아 힘들어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하심을 전해 드리고, 왜 크리스천의 삶에 고난이 있는지, 고난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크리스천의 관점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시편 91편을 모세가 썼다고 주장하는 성서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과연 모세가 이 시편을 썼을까 하고 질문해 보면서 “그럴 것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 역시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는 그토록 원했던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했지만,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다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가장 높으신 분을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고 나의 피난처이신 여호와를 여러분의 보호자로 모셨으니 어떤 불행도 여러분을 덮치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재난도 여러분 집에 가까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천사들을 시켜 여러분을 지키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저들이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9-11절) 이 말씀이 사실일까요? 정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으면 어떤 불행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서울 합정동에 ‘양화진’이라는 외국인 선교사 109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자원해 왔다가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양화진’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요. 25세에 생을 마감한 ‘켄드릭 (Miss Rubye Rachael Kendrik, 1883-1908)’이라는 선교사의 무덤입니다. 그녀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을 모두 조선에 바치리라).” 그녀는 1905년에 캔사스에 있는 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선교 본부를 찾아가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22살 때였습니다. 하지만 규정보다 나이가 2살이 어리다고 해서 2년을 더 준비한 끝에 1907년 텍사스에 있는 엡웟청년회의 후원을 받아 조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역지는 황해도 개성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송도’라고 했습니다. ‘켄드릭’은 도착하자마자 한글을 공부하면서 개성성경학교에서 서툰 한국어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급성 맹장염을 앓게 되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정성과 주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켄드릭’은 1908년 25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를 후원했던 텍사스 엡웟청년회는 그녀와 서신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그녀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 기도했고, 맹장염 소식을 듣고는 그녀의 쾌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전한 편지 속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조선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놀랍게도 그녀의 말처럼 수많은 청년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켄드릭’ 선교사는 조선에 온 지 채 일년도 되지 않아서 제대로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도 못하고 그만 맹장염으로 죽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오스왈드 체임버스 (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는 그의 대표작 ‘주님은 나의 최고봉 (My Utmost For His Highest)’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하루하루 매일 큐티 책처럼 읽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편 91편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연구하라. 예수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라. 나사렛에서 조용하게 순종하며 지낸 30년의 세월을 연구하라. 3년 간의 공생애(公生涯) 사역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가 사역 중에 받으신 비방과 침 뱉음과 배신과 미움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 견디신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이 당하는 그 어떤 아픔도 주님의 고통과 비교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의 안전과 평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요란함과 분쟁과 두려움은 언제든지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절대로 우리의 삶의 상황들이 우리의 내면의 평강을 빼앗아갈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 (those who are under the shadow of almighty)’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방은 낮에는 햇빛이 강렬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늘을 찾게 됩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시편 121편 말씀이 그런 배경으로 써졌습니다. “여호와는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는 여러분의 오른편에 있는 그늘이 되십니다. 낮에는 태양이 여러분을 해하지 못하며, 밤에는 달이 여러분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5-6절) 

사미스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을 달리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피난처에서 사는 사람 (1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요새로, 바위로 고백하는 사람 (2절)’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는 사람 (4절)’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으로 무장하는 사람 (4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보호자로 삼는 사람 (9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14절)’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 (14절)’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는 사람 (15절)’ 등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을 지킨다고 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도 덮치지 않고, 어떤 재앙도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재앙’이라는 말은 ‘plague’라는 말인데, 전염병을 말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본다면 그런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목사가 교인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예배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 절대로 걸리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정말 오늘 성경 말씀이 그런 뜻입니까? 

제가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Shadow Of The Almighty, 1958)’이라는 책입니다. 책 표지에 한 청년이 안데스 산맥에 올라 자기 앞에 펼쳐진 미지(未知)의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이 책의 저자인 ‘Elisabeth Elliot (엘리사벳 엘리엇, 1926-2015)’이라는 여자가 고이 간직하고 있던 자기 남편의 사진입니다. 엘리사벳은 이 책 외에도 ‘Through Gates Of Splendor (영광의 문을 통하여, 1957)’ ‘A Path Through Suffering (고난의 길을 통하여, 2003)’라는 책도 썼습니다. 2019년에는 유작으로 ‘Suffering Is Never For Nothing (고난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2019)’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엘리사벳은 1974년부터 ‘고든콘웰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를 하다가 2015년 매사추세츠의 매그놀리아 (Magnolia)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짐 엘리옷 (Jim Elliot, 1927-1956)’은 ‘휘튼 칼리지’를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남미 ‘에콰도르 (Ecuador)’ 선교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졸업 후에 짐은 동료 네 친구와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에콰도르’의 ‘Curaray River’의 ‘팜비치 (Palm Beach)’에 착륙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교를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다섯 청년들이 ‘아쿠아 (Acua)’ 인디언들에게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까운 청년들이 무모한 선교 계획을 실행하다가 살해당했다는 뉴스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Life Magazine에서는 10 페이지에 걸쳐 이 다섯 청년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제가 그 때 Life Magazine (1956년 1월 30일)을 찾아보았더니 이런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FIVE DO AND DIE (다섯 명이 하다. 그리고 죽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What an unnecessary waste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라며 무모한 선교 정책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엘리사벳’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는 전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제 남편은 이제야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녀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re is nothing worth living for, unless it is worth dying for (그것을 위해 죽을 가치가 없는 일이라면 그것을 위해 살 가치도 없습니다).” 

삶에 대한 관점이 달랐습니다. ‘엘리사벳’이 본 남편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었고, 가치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짐 엘리엇’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그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엘리사벳’은 다시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찾아갔고, 그들은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이 생각하는 남편은 무모하거나 실패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제목의 책을 써서 남편의 삶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도전을 받았고,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그 축복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전쟁터에 나가도 총알이 피해가고,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리지도 않고, 위험에 처할 때는 천사들이 그를 지켜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병에 걸립니다. ‘루비 켄드릭’같이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급성 맹장염에 걸려 선교를 제대로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네 친구들도 무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중에 ‘존 파이퍼 (John Piper)’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복음에 대한 진실한 열정을 좋아합니다. 그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There is infinite, unending security in the almightiness of God — no matter what hap-pens in this life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하나님의 전능하심 속에 무한하고 끝없는 안전이 있다).” “In the darkest moments of our pain, God is hiding his weapons behind enemy lines (우리들의 가장 어두운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무기를 적의 배후(背後)에 숨기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가장 어렵고 힘들어 할 때, 적들의 배후에 치명적인 무기를 숨기고 계시다가 결정적인 때에 ‘하나님의 작전 (God’s Operation)’을 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에서 가장 어둡고 절망스러운 순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무기를 적들의 배후에 숨기신 무기는 ‘부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시작되자 단번에 모든 것이 역전되었습니다. 적들은 패배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한국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Affirmation of Faith)’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습니다 (We believe in the final triumph of righteousness and in the life everlasting).” 의가 불의에게 패배합니다. 불의가 의를 이기고 불의가 의를 정복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렇고, ‘루비 켄드릭’의 생애가 그렇고, ‘짐 엘리엇’의 생애가 그렇고, 또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고난과 역경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서 면제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 때 유일하게 보장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의 최후 승리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지금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참고 견디고 이겨내는 사람들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