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2:1-8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1 [For the choir director: A psalm① of the descendants of Korah.] As the deer longs for streams of water, so I long for you, O God. / ①Hebrew maskil. This may be a literary or musical term

2 I thirst for God,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stand before him?

3 Day and night I have only tears for food, while my enemies continually taunt me, saying, "Where is this God of yours?"

4 My heart is breaking as I remember how it used to be. I walked among the crowds of worshipers, leading a great procession to the house of God, singing for joy and giving thanks amid the sound of a great celebration!

5 Why am I discouraged? Why is my heart so sad?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6 My Savior and my God! Now I am deeply discouraged, but I will remember you - even from distant Mount Hermon, the source of the Jordan, from the land of Mount Mizar.

7 I hear the tumult of the raging seas as your waves and surging tides sweep over me.

8 But each day the LORD pours his unfailing love upon me, and through each night I sing his songs, praying to God who gives me life.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20’ 시간으로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말씀은 ‘고라의 자손’이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라 (Korah)’는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반감을 품고 구데타를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고라’는 다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파입니다. 이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오고, 예배를 돕는 성가대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연주를 잘 해도 성전에서는 연주할 수 없습니다. 그외에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레위 지파 사람들이고,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도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곧 그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신 하나님께 불만을 갖는 것과 동일시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관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라’와 ‘고라’에게 동조했던 250명을 모두 심판하셨습니다. 이 250명은 모두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민수기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에 “3족(三族)을 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에 역심(逆心)을 품으면 그 사람의 친가, 처가, 외가를 역적으로 몰아 처벌한다는 뜻입니다. ‘고라’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성경에는 “그러나, 고라의 자손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However, the sons of Korah did not die that day, 민수기 26:11)”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 중에 시편 42편과 같은 훌륭한 시편을 쓴 사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시편 18:1)!”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편 22:19)!”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아, 정말 하나님을 이렇게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이렇게 찾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은 하나님이나,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동일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았는데,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고도 믿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지식을 믿고, 우리 지위를 믿고, 우리 가진 것을 믿고, 우리 힘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절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 외에 믿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출신 배경이 다른 사람보다 좋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배웠습니다.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로마 말까지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이스라엘에서 알아주는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discarded everything else, counting it all as garbage, so that I could gain Christ).” (빌립보서 3:8)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기독교의 진리는 버림으로써 더 가치 있는 것을 얻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버림으로써 부활하셨고,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 바울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버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도 우리가 믿는 것을 내려 놓기 전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고라의 자손’이 누군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는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1-2절)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역시 이렇게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가질 때까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려 놓는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큰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Why am I discouraged? Why is my heart so sad?)?” (6, 11절)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많이 자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끄덕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태복음 26:3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불안하고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갑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불안한 마음을 계속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여러분에게 염려가 있고, 걱정이 있고, 미래에 대하여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느냐, 가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These things dominate the thoughts of unbelievers, but your heavenly Father already knows all your needs).” (마태복음 6:30-32) 나중에 제자 베드로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7)”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은 그 때 산 위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배운 것입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지금 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5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 이런 것들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시인의 마음 속에도 불안이 있습니다. 낙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이 시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염려와 걱정과 불안이 몰려올 때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 hear the tumult of the raging seas as your waves and surging tides sweep over me.” 직역하면, “나는 성난 바다가 요동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파도입니다. 그리고 나를 휩쓸어가는 물결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물결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금방이라도 나를 뒤덮고, 금방이라도 나를 휩쓸어갈 파도와 물결이 이제는 주님이 보내신 파도와 물결이 되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더니, 상황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황을 지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크리스천이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시인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낙심과 불안을 이겨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5절)”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에서부터 세상을 이기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Here I stand, May God help me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미국)도 그렇습니다만, 마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을 통해서 그가 필요한 일꾼들을 불러내십니다. 루터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대학가에 토론 문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는 학교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마틴 루터도 자기가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채플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그 대자보 속에 그 당시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는 95개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히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교황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1521년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던 루터는 ‘보름스 의회 (Reichstag zu Worms)’에 소환을 받습니다. 루터에게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소환이었습니다. 그 때 루터는 황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Unless I am convinced by the testimony of the Scriptures or by clear reason (for I do not trust either in the pope or in councils alone, since it is well known that they have often erred and contradicted themselves), I am bound by the Scriptures I have quoted and my conscience is captive to the Word of God. I cannot and will not recant anything, since it is neither safe nor right to go against conscience.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May God help me. Amen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는 그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만약 그 때 루터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보았더라면 그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종교개혁은 물 건너갔을 것이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후퇴했을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시인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 때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납게 요동치는 파도 소리는 주님이 보내신 파도 소리가 되고,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은 물결도 주님이 보내신 물결이 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낙심과 불안을 토로했던 이 시인은 이렇게 시편을 끝냅니다. “But each day the LORD pours his unfailing love upon me, and through each night I sing his songs, praying to God who gives me life (하지만, 낮에는 주님이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에게 부어 주시고, 밤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8절)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던 이 시인이 낮에도 두렵지 않고 밤에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