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5:6-11

6 “너희는 찾을 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여호와를 불러라. 7 악한 사람은 그 길에서 돌이키고, 죄인은 자기의 악한 생각을 버려라. 여호와께 돌아오너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실 것이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리면, 그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오직 그 물이 땅을 적셔, 그것으로 식물이 싹이 터 사람들의 먹을 양식으로 자라난다. 11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그러하다. 내 말은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내 뜻을 이룬 뒤에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다한 뒤에야 내게로 돌아온다.” (쉬운성경)

6 Seek the Lord while you can find him. Call on him now while he is near. 7 Let the wicked change their ways and banish the very thought of doing wrong. Let them turn to the Lord that he may have mercy on them. Yes, turn to our God, for he will forgive generously. 8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says the Lord.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9 For just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my ways are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higher than your thoughts. 10 “The rain and snow come down from the heavens and stay on the ground to water the earth. They cause the grain to grow, producing seed for the farmer and bread for the hungry. 11 It is the same with my word. I send it out, and it always produces fruit. It will accomplish all I want it to, and it will prosper everywhere I send it.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읽은 이사야 55장은 ‘제 2이사야’ 끝에 속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희망과 위로와 치유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더욱 이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6절에 나오는 “너희는 찾을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여호와를 불러라” 이 말씀에 주목할 것입니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말씀인 것은 맞지만,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는 먼저 너희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悔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회개’를 ‘후회’나 ‘뉘우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먼저 회개의 과정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회개하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7-38) 유대 명절인 오순절 날에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제자들이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악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23, 36)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회개 없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생겼습니다.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이런 현상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결국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 (cheap grace)’로 만들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교회의 미래가 매우 위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이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잘 정리를 했습니다. “Repentance means ‘change of mind.’ Yet the full meaning is somewhat more. In the New Testament, the word metanoia is often translated as ‘repentance’. But this kind of repentance is not about regret or guilt or shame; it implies making a decision to turn around, to face a new direc-tion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메타노이아’는 ‘회개’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이 말은 단순히 ‘후회’ ‘죄의식’ ‘수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메타노이아’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뜻은 ‘돌아서기로’ ‘새로운 방향을 향하도록’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회개’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Let the wicked change their ways and banish the very thought of doing wrong. Let them turn to the Lord that he may have mercy on them. Yes, turn to our God.” (7절) 이 말씀에 ‘change their ways’ ‘banish the very thought of doing wrong’ ‘turn to the Lord’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이 말들이 정확하게 회개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회개’의 과정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아마도 교인이 되는 과정을 쉽게 만들어서 큰 교회를 만들겠다는 인간적인 야망과 경쟁심이 크게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큰 교회를 만들겠다는 인간적인 야망, 그리고 경쟁심, 이런 것들이 교회를 파괴하는 죄악들입니다. 아니, 지금도 이런 야망을 가진 교회들이 있더라고요. 그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크게 잘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모인다”고요.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고요. 지금은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이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닙니다.

지난 주에 ‘한국기독청년협의회’에서 한국교회에 드리는 호소문 (성명서)을 발표했습니다. 청년들은 “우리는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다. 이대로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으며 사그라질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전광훈과 극우 기독교 세력을 만들어낸 묵은 땅을 갈아엎고, 개 교회 중심주의, 중년·남성·목사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제 보다보다 못한 청년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와서 길을 닦고 그가 닦아 놓은 길로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잘 준비된 마음의 밭에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3:15).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과거의 잘못된 삶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결단 없이 믿음생활을 시작한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교회는 나오지만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결과로 나왔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크리스천들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지금과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Seek the Lord while you can find him. Call on him now while he is near (하나님을 찾을만한 때애 그에게 찾으라. 하나님께서 너희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6절) 지금은 하나님을 만나기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계시는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역사적인 맥락’에 따라 읽어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 중입니다. 대규모 건설사업에 동원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피곤하고 내일을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John Flavel이란 사람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라고요. 어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에 그를 부르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너희를 만나러 오셨을 때에 너희도 그를 만나러 나오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사미스트’였습니다. 성경에 다윗이 쓴 시편이 무려 63개나 들어 있습니다. 그가 겪었던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그를 위대한 ‘사미스트’로 만들었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말하면 만약 다윗의 생애 속에 고난이 없었고 편안한 삶이 계속되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연히 재미 있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음악가 베토벤의 생애를 소재로 해서 뮤지컬을 만들었는데, 상당히 반응이 좋아 해외로까지 수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악성(樂聖)’이라고 불릴만큼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린 것은 1796년 유럽 순회 공연을 다닐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자마자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는데,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음악가에게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 베토벤은 신경이 예민해졌고, 좌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유서를 씁니다. 그의 나이 서른 한 살 때였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로 알려진 이 유서는, 베토벤이 자기 동생들에게 쓴 편지인데, 당시 그가 겪었던 좌절과 공포가 고스란히 이 유서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다행히 그는 자살을 실행에 옮기 못하게 되었고, 유서는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베토벤은 시련과 싸우며 음악 활동을 계속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교향곡 3번 ‘영웅 (1803)’. 교향곡 5번 ‘운명 (1807-1808)’, 교향곡 9번 ‘합창 (1822-1824)’ 등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들은 모두 유서 작성 후에 작곡한 곡들입니다.

뮤지컬 ‘루드윅 (Ludwig)’은 베토벤이 유서를 작성한 날, 그 무엇이 그를 다시 삶의 길로 이끌었는지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베토벤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그 날 밤, 마리라는 여자가 한 소년을 데리고 그의 방문을 두드립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발터인데, 그녀의 스승의 아들이었습니다. 마리는 베토벤에게 이 아이를 제자로 받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고아가 된 발터는 영국으로 보내질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자신가 발터의 보호자가 될 테니, 제발 이 아이가 빈에 남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냈는데, 법원에서는 발터가 베토벤의 제자로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의 이야기를 들은 베토벤은 사연은 딱하지만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제자를 받아 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마리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마리의 등장으로 인해 베토벤은 자실 시도에 실패하게 되지만 자신이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베토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기면서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다는 것입니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니까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살을 생각하고 유서까지 쓴 사람이 생각을 바꾸잖아요? 그리고 자기의 불행을 이겨내잖아요? 불행을 딛고 불후의 명곡을 쏟아내잖아요? 베토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다시 불행을 딛고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여러분, 지금 화면에서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이 어떻게 해서라고 소리를 듣고 싶은 안타까움에서 그가 사용했던 보청기(補聽器)들입니다. 처음에 왼쪽 귀에서 시작된 난청 증상이 오른쪽 귀에도 생겼고, 48세 때에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베토벤에게 있어서도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도 여러분이 경험하는 ‘extremity (극단적인 절망)’가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단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회개’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 여러분의 삶과 단절(斷絶)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여러분의 삶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지금까지 향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향 (a new direction of life)’으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어렵고 힘든 상황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계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시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면, 지금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기회가 되고 선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