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13-17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15 이제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고,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17 내 계명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쉬운성경)

13 There is no greater love than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14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15 I no longer call you slaves, because a master doesn't confide in his slaves. Now you are my friends, since I have told you everything the Father told me. 16 You didn't choose me. I chose you. I appointed you to go and produce lasting fruit, so that the Father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for, using my name. 17 This is my command: Love each other.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 본문 말씀에서 우리 마음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방금 전에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Now you are my friends)”라는 15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자기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예수님에게서 ‘권위의식’이라든지, 또 제자들과의 ‘차별의식’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2:2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받으셨으며,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는 성경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 일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불러 주신 일이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인데요.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약속을 지키겠다.” (창세기 18:17-19) 이 말씀을 읽을 때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나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렇게 읽으면 이 말씀의 뜻이 더 잘 들어옵니다. 

친구 간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하시려고 하는 모든 계획을 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두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말 엄청난 일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읽는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느냐 하는 것이지요. 어느 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 (Ur)’를 떠나 ‘하란 (Haran)’으로 이사를 갑니다. 여기서부터가 의문투성이입니다. ‘우르’는 그 당시 문명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왜 데라는 ‘우르’를 버리고 식구들을 데리고 ‘하란’으로 이사를 갔을까요? 그런데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죽습니다.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이곳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이 창세기 12장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궁금했던 것이 창세기 18장에 가서 모두 풀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가정의 자녀들이 얼마나 축복을 받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데라가 식구들을 데리고 우르를 떠난 것은 사실은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친구’라는 말은 아주 ‘친밀한 관계 (an intimate relationship)’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게 됩니다. 나에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정말 엄청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모든 것이 분명한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마치 시야(視野)가 뿌옇던 것이 눈에 맞는 안경을 쓰니까 시야가 밝아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아, 결국 하나님과 친구가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소수의 사람들만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오늘 말씀 14-15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이제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Now you are my friends, since I have told you everything the Father told me).”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이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에는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간 따라다니면서도 끝까지 예수님과 다른 꿈을 꾸었던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한 번도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할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하는 것을 너희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You don't understand now what I am doing, but someday you will).” (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후 (someday)’는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날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게 모두 예수님께서 일방적(一方的)으로 하신 일이었지 제자들이 원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버지께 들은 말씀을 모두 너희에게 들려주었으니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조셉 스크리븐 (Joseph M. Scriven, 1819-1886, 영국)이라는 아일런드 (Ireland)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습니다. 그는 더블린에 있는 Trinity College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루 앞 둔 날 저녁, 약혼녀와 강 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강둑을 따라 말을 타고 오던 약혼녀가 갑자기 말이 놀라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급류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약혼녀가 죽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스크리븐은 그 후 아일런드를 떠나 캐나다로 갑니다. 충격을 잊고 새로운 환경에서 삶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캐나다에 정착한 스크리븐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캐나다에 이민 온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 그들의 일손을 거들어 주기도 하고, 땔감을 마련하는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됩니다. 그 때의 기록을 찾아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Scriven was remembered locally as a pious and charitable preacher, almost saintly, whose innumerable good works and charities were carried out despite his own poverty and despondency, and generally performed in secrecy.” 그러다가 엘리자(Eliza)라는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혼을 몇 주 앞두고 엘리자가 폐렴에 걸려 죽습니다. 스크리븐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미처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아일런드에 있는 어머니가 아파 사경을 헤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때 스크리븐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시를 씁니다.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to bear! what a privilege to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O what peace we often forfeit O what needless pain we bare! All because we do not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Have we trials and temptations? Is there trouble anywhere? We should never be discouraged, Take it to the Lord in prayer. Can we find a friend so faithful Who will all our sorrows share? Jesus knows our every weakness, Take it to the Lord in prayer.” 이 시는 스크리븐이 그 동안 많은 상처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를 친구로 받아 주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던 그의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시에 Charles Crozat Converse (1892-1918, 미국)라는 작곡자가 곡을 붙여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스크리븐은 그가 어머니를 위해 썼던 이 시가 유명한 찬송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게 될지 몰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찬송가에 대해서 이런 평을 했습니다. “We are living in crazy times, but no matter what may be happening in your life, know that there is someone that is madly in love with you and is always ready to meet with you and bring comfort. Matter of fact, Jesus is so in love with you that he proved it by dying for you…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ohn 15:13 (우리는 지금 미쳐 돌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당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고, 당신을 위해 위로를 준비하고 계시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그는 그의 죽음으로 이것을 증명했다. 성경에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다).”

저는 오늘 요한복음 본문 말씀과 스크리븐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과연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다섯가지 그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 간에는 비밀이 없는 법인데,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모두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니까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절). 말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은혜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undeserved God’s favor (받을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호의)’ 아닙니까? 은혜는 우리의 이성과 논리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말이 안 되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 (privilege)’입니다. 스크리븐은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스크리븐이 말한 것처럼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구가 된 사람들은 다릅니다. 스크리븐의 찬송가 가사를 다시 한번 보세요. “O what peace we often forfeit O what needless pain we bare! All because we do not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셋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목적과 삶의 스타일이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스크리븐에 대한 다른 기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He was deeply respected locally for his charity, piety, lack of concern for his own needs, and adherence to truth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선과 경건과 그리고 자신의 필요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이다 (1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이나 율법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내 계명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복음 1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그의 말씀을 실천합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생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자기 생에 대한, 자기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면 우리 역시 우리의 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전과 다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됩니다. 

FKCC 교우 여러분, 우리는 천국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친구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신 우리의 친구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을 모두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스크리븐이 말한 대로 주님께 말씀드리지 않아서 주님이 약속하신 평화를 잃어버리고, 쓸데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