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공동번역)

1 And so, dear brothers and sisters, I plead with you to give your bodies to God because of all he has done for you.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 - the kind he will find acceptable. This is truly the way to worship him.① / ①Or This is your spiritual worship; or This is your reasonable service 2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New Living Translation)

여러분, 이런 노래 가사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서부터인가 걸어 걸어 걸어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강산에라는 가수가 부른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의 가사입니다.

연어는 신기하게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산란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를 ‘회귀본능(回歸本能)’이라고 합니다. 연어를 양식장에서 양식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연어는 다른 물고기들과는 달리 평소에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물 위를 뛰어오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저 연어가 저렇게 물 위를 뛰어오르는지 알아봤더니 연어의 몸에 ‘sea lice(바다 이)’가 기생하고 있는데, 이게 연어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바다 이’를 몸에서 떼어내려고 물 위를 뛰어오른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아니,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연어가 저렇게 평소에도 물 위를 뛰어오르는 연습을 하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면서 폭포를 거슬러올라갈 수 있을 만큼 꼬리의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어는 강에서 태어나 약 6개월 정도를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그 때 고향의 물맛과 냄새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산란기가 되어 고향을 찾아올 때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물맛과 냄새의 기억을 되살려 돌아온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학설도 있습니다. 지구의 미세한 자기장(磁氣場)을 감지하여 되돌아온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이 학설은 연어의 몸 속에 자기를 띤 물질이 발견되기 때문에 나온 학설이라고 합니다. 연어들이 이동한 경로 주변의 자기장의 세기가 연어들이 태어난 강의 자기장 세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연어들이 고향의 자기장 세기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이와 유사한 곳을 찾아 거슬러 간다는 것입니다. 

암컷 연어는 산란 시기인 9-11월이 되면 더 이상 먹이를 먹지 않고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旅程)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가는 도중에 온갖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고, 때로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면서 온갖 위험을 만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향의 강물로 돌아온 연어들은 오느라고 너무 힘들어서 살도 빠지고, 몸에는 상처투성이가 된다고 합니다. 한번 이 사진을 보시지요. 이런 위험을 뚫고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강으로 돌아온 암컷 연어는 알을 낳고, 수컷 연어는 수정을 합니다. 이렇게 산란을 마치면 연어는 일생을 마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2절)’라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흐름’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도 트래픽 ‘흐름’이 있습니다. 이 ‘흐름’을 따라 운전을 해야 안전합니다. 세상도 ‘흐름’을 따라 살면 안전합니다. 영어로 ‘flow’ ‘stream’ ‘current’라는 단어들이 모두 강물의 ‘흐름’과 관계된 단어들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customs(풍습)’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유행(fashion)’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유행의 트렌드가 있습니다. 이 트렌드를 따라하면 안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본문 말씀을 보면,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살지 말고 시대를 거슬러 살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강을 찾아 거슬러올라가듯이, 크리스천의 삶은 때로는 시대를 거슬러올라가는 용기 있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시대의 흐름이 항상 하나님께 원하시는 방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이후의 시대에,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입니다. ‘호모 데우스(Homo Deus)’가 된 인간이 잘못하면 ‘악마적인 힘’을 가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미 전문가들은 수많은 문제들이 나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실직(失職)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것입니다. 어떤 전문가는 걱정할 것 없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없어질 직업도 있겠지만 새로 생기는 직업도 있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는데요. 과연 걱정할 필요가 없을까요? 그리고, AI가 생활 속에 깊이 들어오게 되면 필연적으로 인간관계가 파괴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을 상대라는 대신 AI를 상대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올 비인간화(非人間化) 문제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누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복음 7:13-14)”고 말씀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다니는 넓고 쉬운 길이 무슨 길이겠습니까? 시대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 아닙니까? 시대가 흘러가는 대로 살지 말고 시대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시대를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라는 말씀 아닙니까?

제가 신학대학를 졸업하고, 앞으로의 생각도 정리할 겸 강원도 황지에 있는 예수원에 들어가서 20일 정도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같이 모여 중보기도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때 제가 공동번역 성경을 들고 들어갔었거든요? 그 때 읽었던 성경 말씀 중에 예레미야 15:19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낙심해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면 나는 너를 나의 대변자로 세우겠다. 백성이 너에게 돌아와야지 네가 백성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If you return to me, I will restore you so you can continue to serve me. If you speak good words rather than worthless ones, you will be my spokesman. You must influence them; do not let them influence you!).” 저는 그 때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개역성경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말씀의 명료함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서 앞으로 목회자로 살아갈 저의 삶에 대한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 책임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사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올라가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이런 시대적인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 말씀이 영감(靈感)을 줍니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받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요.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서 당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키시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과 같은 창조입니다. 시편 51편에 있는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Create in me a pure heart, O God, and renew a steadfast spirit within me.”(NIV) 이 말씀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대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듯이 내 안에 깨끗하고 순순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아무리 새롭게 되려고 해도 새로워질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고백을 한 시편 아닙니까?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꼭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2절) 구약 예레미야에 있는 말씀입니다. “만물보다 악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아무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다(The human heart is the most deceitful of all things, and desperately wicked. Who really knows how bad it is?).”(예레미야 17:9) 네 속에 있는 네 마음은 다른 무엇들보다 더 썩었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옛 사람(the old sinful nature)’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고 나와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옛 사람’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새 사람’이 되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신기한 것은 성경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인간의 선함을 믿을 수가 없기 됩니다. 인간의 선함 속에는 항상 악한 모습들이 감춰 있고, 이기적인 모습들이 숨겨 있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해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질 수 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영적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새 사람’이 사는 방식이 곧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예배’는 ‘새 사람’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동물을 잡아 피를 하나님께 바치거나, 동물을 불에 태워 그 연기를 하나님께 바치는 종교적인 행위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자가 자기의 진심을 드리지 않고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예배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offer) 예배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살아 있는 거룩한 제물(a living and holy sacrifice)’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이 모습 이대로 저를 받아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지금 있는 모습 그래도 우리를 받아 주지 않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가 아니라 변화된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변화된 우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흠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여져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로마서 15:16-17) NLT 성경에 이 말씀이 “I bring you the Good News so that I might present you as an acceptable offering to God, made holy by the Holy Spir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 그렇다면 ‘새 사람’이 되는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우리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생각하는 DNA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하나님은 모든 것이 그의 시간에 아름다워지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영원을 심어 놓았습니다).”(전도서 3:11) ‘영원을 심어 놓았다(has planted or has set eternity)’는 말씀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마치 연어가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강의 물맛과 냄새를 기억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오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면 우리는 잊어버렸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고,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어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 때로는 세상을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예배자’입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를 살아갈 크리스천은 ‘영적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곧 예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영적인 예배의 장소입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많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