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5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쉬운성경)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15 No one lights a lamp and then puts it under a basket. Instead, a lamp is placed on a 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16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New Living Translation)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는 엄청난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지금은 밤이 깊고 ‘새 시대’의 새벽이 동터오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때입니다(로마서 13:12). 바울은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말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로마서 13:14).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세상을 ‘새 시대’라고 보았습니다. 이 ‘새 시대’를 살아야 할 사람들은 ‘새 시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빛의 갑옷을 입는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잘못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마치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듯이, ‘새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어둠의 생활을 청산하고 빛으로 걸어 나오는 삶이고, 질서 없고 문란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단정하고 규모 있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하는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5장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이 제자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금과 빛을 일종의 ‘수사적(修辭的)인 표현(a figure of speech)’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을 제자들의 삶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알려진 대로 예수님은 언어의 천재라고 할 만큼 뛰어난 수사법을 구사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신 ‘비유(比喩, parables)’는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르로 알려져 있습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영국)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We should not ask ‘What is wrong with the world?’ for that diagnosis has already given. Rather we should ask, ‘What has happened to salt and light(우리는 이미 진단이 내려진 ‘이 세상이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신 우리는 ‘소금과 빛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유체이탈식(幽體離脫式) 화법을 사용해서, 나는 쏙 빼놓고 세상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분석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은 그것이 아니잖습니까? 세상에 대한 분석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진단이 이미 내려진 마당에,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분석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석해야 할 것은 왜 크리스천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하는지, 도대체 크리스천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분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크리스천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소금으로서, 빛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일까요? 이 엄청난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두마디로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우리 자신들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 이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파악하는 노력과 반성이 부족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를 나가는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된 교회와 선교 단체들을 보십시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할 때 그 중심에 신천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중국에서 감염균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역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무너뜨린 중심에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에 대한 경고가 내려진 상태에서도 광화문 광장에 수십만이 모여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집회를 법원에서 허가를 내준 것입니다. 많은 감염자가 나오고 방역 당국의 지시를 거부했던 사랑제일교회는 교회가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BTJ’라는 선교 센터가 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몰래 대규모 모임을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1,000명이 모여 1박 2일동안 선교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도시락도 나누어 먹고요. 하지만 여기서 감염자가 무더기로 나와 방역 시스템을 무너뜨리더니, 또 다시 ‘TCS 국제학교’ ‘IEM 국제학교’ 등에서 무더기로 감염자들이 나왔습니다. 모두 개신교 선교 단체들이 운영하는 비인가 학교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선교 훈련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왜 이런 시국에 선교 훈련을 받습니까?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은 것 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주장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종교적인 도그마(religious dogma)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자신들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쉽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소금과 빛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감염자들이 속출하는데도 행선지를 감추고, 전화를 받지 않고, 방역 당국과 연락을 끊고, 방역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정부가 교회를 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들의 그런 행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기독교 단체들이 사과 성명을 냈습니다. “이웃 생명의 안전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신앙 양태만 고집하는 교회를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섬처럼 떠도는 교회는 선교적 존재 가치를 상실한 교회로 더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과연 기독교 단체들이 낸 사과 성명서 하나로 일부 잘못된 교회들의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 도표를 한번 보십시오. 왼쪽 파란 원에는 ‘소금’이라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 갈색으로 칠한 원에는 ‘빛’이라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두 원이 겹쳐지는 곳에 “이와 같이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16절)”는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서 소금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선한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Salt and light speak of the influence Christians can exercise for good in society(소금과 빛은 크리스천이 사회에서 선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일은 우리의 의도와 생각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의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9:50 말씀을 한번 보세요.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서로가 소금을 지니고 화목하게 지내라.”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for seasoning. But if it loses its flavor, how do you make it salty again? You must have the qualities of salt among yourselves and live in peace with each other(소금은 맛을 내는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그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서로 소금의 질을 유지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또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and useful; but if salt has lost its saltiness (purpose), how will you make it salty? Have salt within yourselves continually, and be at peace with one another(소금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소금이 그의 짠맛,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계속해서 소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Amplified Bible)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계속해서 소금의 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소금의 질을 유지하지 않으면 제자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소금에 대한 구약성경의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배경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8:19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예물로 드리는 것을 나 여호와가 너와 네 아들들과 딸들에게 주리니, 그것은 영원히 너희의 몫이다. 이것은 너와 네 자손을 위해 여호와 앞에서 대대로 지켜야 할 변치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It is a covenant of salt forever before the LORD with you).”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라는 것은 소금이 변질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변하지 않는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 하신 약속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세상 속에서 나의 제자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에 대한 충성심(allegiance)을 계속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너희들의 정체성이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소금을 제자직과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다시 짠맛을 내겠느냐?” (누가복음 13:34-35)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은 곧 소금으로서 맛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좀 전에 보았던 도표 왼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Covenant obedience to the whole law as Jesus preached it(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체 율법에 대한 언약적인 순종)’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약적인 순종. 이것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실패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실패한 것은 내가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과 반성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도 ‘BTJ’라는 선교 단체를 통해 선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어둠 속에서는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어둠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빛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좀 전에 보았던 도표 오른쪽 원에 ‘The personal character of the beatitudes shaped in the light of the cross(십자가의 빛에서 형성된 축복에 대한 개인적인 성격)’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축복된 삶을 크리스천 각자 각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세상에 동화(同化)되어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말았는데 이에 대한 반성 없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매달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해 온 선교사역을 보면 모두 그렇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일부 성과를 거둔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밟고 다닌다(13절)고 하셨는데, 지금의 상황이 꼭 그렇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시대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문명사적 대전환을 가져오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큰 교회, 많은 교인수가 중요한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은 선교를 하고 있는지, 교회의 예산이 얼마나 많은지가 중요한 시대가 아닙니다. 교회들이 정말 정신을 차려서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양육해야 하고,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성급하게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썩지 않도록, 타락하지 않도록,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소금으로서 맛을 내는 사람이 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크리스천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들을 성찰해야 하는 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는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세상에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를 올바로 보여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are not called to shine our own light, we are called to reflect His(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빛을 비추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