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34-39

34 예수님께서는 온갖 환자들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5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36 시몬과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37 그들은 예수님을 찾자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39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모든 곳을 다니셨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쉬운성경)

So Jesus healed many people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he cast out many demons. But because the demons knew who he was, he did not allow them to speak. 35 Before daybreak the next morning, Jesus got up and went out to an isolated place to pray. 36 Later Simon and the others went out to find him. 37 When they found him, they said, "Everyone is looking for you." 38 But Jesus replied, "We must go on to other towns as well, and I will preach to them, too. That is why I came." 39 So he traveled throughout the region of Galilee, preaching in the synagogues and casting out demons. (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번 주 월요일부터 매일 아침 6시에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사순절’을 지킵니다. ‘사순(四旬)’이라는 말은 40이라는 말입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40일 동안의 절기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렌트(Lent)’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은 기도(prayer)와 회개(penitence) 와 금식(fasting)의 기간으로 지켜왔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기간으로 삼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이 기간에 금식(fasting)을 했습니다. 금식이라는 말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제 이런 ‘사순절’의 의미를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마가복음 말씀을 보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길지 않은 말씀인데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복음서에는 병자들에 대한 말씀이 그렇게 많이 나올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2,000년 예수님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고생했습니다. 그 때는 의술(醫術)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거의 민간요법에 의존했던 때입니다. 그 때도 나병환자들이 있었고, 소아마비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병을 잘 고치는 예수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근처 사방에 퍼졌습니다. 시리아에까지 예수님의 소문이 퍼졌습니다(마태복음 4:24). 이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시리아,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갈릴리 건너편에서 온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갈릴리 건너편’이라는 말은 ‘요단강 동편(the east of the Jordan River)’ 이방 사람들의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해가 질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손을 얹고 고쳐 주셨습니다.”(누가복음 4:40) 심지어 해가 진 후에도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퇴근 시간 조금만 지나도 가게 문에 “Sorry, we are CLOSED(미안합니다. 문 닫았습니다)” 라는 사인판을 내걸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세요. 온 세상이 저 사람을 따르고 있습니다(Look how the whole world has gone after him).” (요한복음 12:19, NIV) 정말 온 세상이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말씀으로 넘어갑니다. 그 다음 날, 예수님은 새벽 일찍 일어나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좀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전 날 그렇게 늦게까지 일을 했으면, 다음 날은 보통 늦잠을 자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음 날 일어나신 시간까지 나와 있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before daybreak)’ ‘very early in the morning(NIV)’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는 기도가 짐(부담)이 아니었구나!” “예수님께는 기도가 즐거운 시간이었구나!” “예수님께는 기도하는 시간이 오히려 몸과 마음이 쉼을 얻는 시간이었구나!”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친 조용한 시간이 하나님과 대면하기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떨어진 곳, 심지어 자기 제자들과도 떨어진 곳에서,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물질적인 가치가 영적인 가치보다 위에 있다고 믿는 때입니다. 이런 경향이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지금 청년들은 기도나, 성경읽기나, 성경공부에 얼마나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별로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넌크리스천 청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청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기도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얘기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하는 시간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 기도는 힘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기도가 힘이 드는 이유는 처음부터 기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communication)’이거든요? 소통도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쌍방 소통(two way communication)’이거든요? ‘쌍방 소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방적으로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잖아요? 친구들과의 대화가 재미있고, 힘이 들지 않는 이유는 서로 얘기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나님과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또 하나 기도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힘들고, 왜 기도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계실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히브리서 5:7-8)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계실 때’라는 말은 우리와 똑 같은 상황 속에 있을 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말씀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가 무슨 이유를 대면서 기도를 거부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기도하셨는지 모르지만, 난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모든 일이 가능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무슨 일인지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그 일들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보통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이라고 말하잖아요? 누가복음 1:37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차 범퍼에 이렇게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Impossible is nothing with God(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를 정확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큰 소리와 눈물로’라는 말씀은 그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늘 이런 식으로 간절하고 절박했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옵션이 없었습니다. 기도 외에도 다른 옵션이 없어야 그 사람의 기도가 간절해집니다. 

또 하나, 이 히브리서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심으로 응답을 받으셨습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일방적인 기도가 아니었고, 쌍방적인 기도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answer)’을 들으신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 말씀을 잘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장면이 생각납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가복음 14:36)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22:44). 이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지만, 기도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심으로 기도하셨을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본(example)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기도는 힘든 일이 아니라 즐겁게 하나님과 소통하는 일이라는 것,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므로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기도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옵니다.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경우도 있고, 내적인 확신과 평안으로 주어지는 때도 있고, 예배를 통해서 주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지각(understanding)을 초월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온다고 했습니다(빌립보서 4:7). 앞으로 기도의 응답에 대해 더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38절 말씀,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이 말씀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알고 계시나요?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다른 마을로 가지 말고 이 마을에 계속 머물러 달라고요. 제자들은 이 소식을 예수님께 전해주려고 이른 새벽부터 찾았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을 발견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마을 사람들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38절 말씀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아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누가복음 4:42-43).

왜 이 말씀이 중요할까요? 또 이 말씀이 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여러분, 정해진 곳이 없이 떠도는 것은 참 고달픈 삶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떠돌아다니는 생활에 불만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예수님 일행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할 테니 이 마을을 떠나지 말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부탁을 단번에 거절하시면서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모든 마을,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I must preach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cities also, for I was sent for this purpose., NASB, 누가복음 4:43)”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마을을 떠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省察)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이 목적이 충실하고 있는가?” “내 사역의 방향은 올바로 설정되어 있는가?”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에 충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이 나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내일부터 사순절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벌써 20년이 넘게 사순절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올해는 좀 특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순절 새벽기도라니?” 좀 고리타분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순절 기도는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순절 기도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지켜 온 전통의 한 부분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을 우리 시대에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순절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