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12-16

12 그 때,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지새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13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열 두 명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14 이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빌립과 바돌로매, 15 그리고 마태와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파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였습니다. (쉬운성경)

12 One day soon afterward Jesus went up on a mountain to pray, and he prayed to God all night. 13 At daybreak he called together all of his disciples and chose twelve of them to be apostles. Here are their names. 14 Simon (whom he named Peter), Andrew (Peter's brother), James, John, Philip, Bartholomew, 15 Matthew, Thomas, James (son of Alphaeus), Simon (who was called the zealot), 16 Judas (son of James), Judas Iscariot (who later betrayed him). (New Living Translation)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팬데믹을 이유로 새벽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새벽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니까, 이 시간이 너무나 귀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분들의 이름이 컴퓨터에 올라올 때,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의 ‘사순절의 기도’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주님, 사순절입니다. 지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요, 금식하는 시간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골고다로, 죽음을 이긴 최후 승리의 자리로, 주님을 따라 주님의 길로 가는 시간입니다.

저는 아직도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고 싶으면서도 저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명성과 성공과 인간의 존경과 쾌락과 위세와 권력을 속삭이는 음성들에 귀를 내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주님, 이런 음성들에 귀머거리가 되고, 주님의 음성에 더 귀 기울이게 하소서. 생명의 좁은 길을 택하도록 저를 부르시는 그 음성에 말입니다.

사순절이 저에게 아주 힘든 시간임을 압니다. 주님의 길을 선택하는 일은 삶의 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생각도 주님의 생각을 선택하고, 말도 주님의 말을 선택하고, 행동도 주님의 행동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이 필요 없는 시간이나 장소는 없습니다. 주님을 선택할 때면 제 속에 얼마나 힘든 저항이 있는지 잘 압니다.

주님, 가는 곳마다 순간마다 저와 함께 하소서. 사순절을 신실하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하여 부활절이 올 때, 주님이 예비하신 새 생명을 기쁨으로 맛볼 수 있게 하소서.

사순절의 의미와 사순절을 보내는 마음이 잘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은 기도와 금식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It is a time to be with you, Lord, in a special way, a time to pray, to fast)” 이 구절입니다. 사순절은 몸과 마음을 온통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때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금식을 했습니다.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This kind can be cast out only by prayer①).” ① Some manuscripts read by prayer and fasting.” (마가복음 9:29) 어떤 사람에게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더러운 귀신(unclean or evil spirit)’이 들어가 말을 못하게 했습니다. 증상이 심할 때는 이 아이의 몸이 뻣뻣해지기도 하고, 입에 거품을 물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이에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쳐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어째서 우리는 내쫓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런 악한 영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쫓아낼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 무슨 이유인지 이 말씀에서 금식이라는 말이 빠졌습니다. 

사순절에 듣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속에도 ‘악한 영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악한 영들’은 오직 기도와 금식에 의해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너무 많은 불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컴퓨터에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으면 속도가 느려지고,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간혹 컴퓨터를 깨끗하게 청소해 줘야 합니다. 제 컴퓨터도 너무 느려져서 지난 주에 ‘clean install’을 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도 한 번씩 깨끗하게 청소를 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순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누가복음 6장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누가복음을 특별한 복음서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누가복음을 ‘여성들을 위한 복음서’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에 여성들이 많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자는 누가복음을 ‘이방인들 위한 복음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방인들이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누가복음을 ‘기도의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누가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들을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를 선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제자가 똑똑해야 힘이 덜 듭니다. 교수 밑에 똑똑한 학생들이나 또 똑똑한 연구원들이 있으면 연구의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연구비가 없으면 똑똑한 연구원들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도 당연히 똑똑한 제자들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말씀에서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주의해서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기 전 날 밤에 밤을 새워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제자들을 선정하는 일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선정하기 전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여러분, 성경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을 읽지만 마시고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제자를 선정해야 한 시간입니다. 저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이 기도에 적용해 본다면, 예수님은 기도 끝에 이렇게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제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원하는 사람들이 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 선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큰 그림’ 속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정하시는 일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십니다. 이것을 ‘divine intervention(신적인 개입)’이라고 합니다.

아니, 그렇게 기도하면서 제자들을 선정했는데, 왜 예수님을 팔아 넘길 ‘가룟 유다’같은 사람이 선정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고 계시는 ‘큰 그림’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잖아요?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Christ on the cross is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고린도전서 1:18, 24)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가룟 유다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룟 유다가 포함된 것은, 전혀 잘못된 선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완벽한 선정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은 ‘기도의 복음서’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더욱더 멀리 퍼져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홀로 광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15-16) 그 때는, 예수님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였습니다. 사람에게 ‘명성’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학자들에게도 명성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명성을 얻어서 어느 정도 유명해지면 반드시 교만해집니다. 말과 행동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제가 유명한 사람이 아닌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도 만약 명성을 얻어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더라면, 틀림없이 교만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성을 얻었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교만한 사람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생의 목적과 사명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더 읽어내려 가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토론을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누가복음 5:17-26). 예수님께서 대적자들과 토론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늘 지혜롭게 말씀하시고 지혜롭게 대처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자는 요점은, 예수님은 늘 큰 일을 앞에 놓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세요. 예수님은 일 다 벌어진 다음에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큰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백신과 같은 일종의 예방의 의미가 있습니다. 독감(flu)이 유행할 조짐을 보이면, 예방 주사를 맞습니다. 그러면 예방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플루가 일단 유행하고 나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맞고 있잖아요?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잡힌 후에도 플루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해마다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맞아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We tend to use prayer as a last resort, but God wants it to be our first line of defense. We pray when there’s nothing else we can do, but God wants us to pray before we do anything at all (우리는 기도를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가 우리의 최전방 방어선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기도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도가 우리들의 ‘first line of defense(최전방 방어선)’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미리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실은 신기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지만) 그 기도의 결과가 늘 좋았습니다. 삶의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예수님은 기도하셨고, 예수님은 그 때마다 지혜롭게 말씀하시고 지혜롭게 대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말문이 막히는 장면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는 장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 선택이 그렇게 잘 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에서 보면, 이보다 더 완벽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완벽한 선택이었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Prayer is not a way of making use of God; prayer is a way of offering ourselves to God in order that He should be able to make use of us(기도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윌리엄 버클리(William Barclay, 1907-1978, 영국)의 한 말입니다. 우리 중에 자기 생각을 관철하기 위하여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시도록 나를 드리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이 벌어진 후에 기도하게 되면 꼭 하나님을 이용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