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1-4

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들을 빼고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묻어 주고 그를 생각하며 통곡하였습니다. 3 한편,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4 흩어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쉬운성경)

1 Saul was one of the witnesses, and he agreed completely with the killing of Stephen. A great wave of persecution began that day, sweeping over the church in Jerusalem; and all the believers except the apostles were scattered through the regions of Judea and Samaria. 2 (Some devout men came and buried Stephen with great mourning.) 3 But Saul was going everywhere to destroy the church. He went from house to house, dragging out both men and women to throw them into prison. 4 But the believers who were scattered preached the Good News about Jesus wherever they went. (New Living Translation)

성령 강림 후 이 땅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기고, 신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은 일은 예루살렘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9:31) 교회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하심이 있었고, 누구나 성령께서 이 공동체 안에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도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평안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안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폭풍전야(暴風前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청난 폭풍이 불기 전 날 밤이라는 뜻입니다. 그 전날 밤까지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엄청난 폭풍이 불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폭풍전야’를 영어로 ‘the calm before the storm’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아주 적절한 말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A great wave of persecution began that day, sweeping over the church in Jerusalem)(1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이란 스데반(Stephen)이 돌에 맞아 죽은 날을 말합니다. 유대인들, 특히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호시탐탐 교회를 박해할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스데반의 설교가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교회를 박해할 명분(名分)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의 무모함을 탓해야 할까요? 스데반은 자기가 맡은 구제 사역이나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밖에 나가서 설교를 하다가 화를 자초하게 되었을까요? 한 사람의 무모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습니다.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들 외에는 모두 박해를 피해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겨우 만들어진 신앙공공체가 이렇게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울(Saul)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Saul was one of the witnesses, and he agreed completely with the killing of Stephen). 사울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똑 같은 시각(視角)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스데반은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요. 사울은 그 때 그가 교회를 박해했던 일들을 두고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간증합니다. “한때는 저 역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습니다.” (사도행전 26:9-10)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울의 인생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사도행전 9:15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울은 이방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도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분의 삶을 반성해 보십시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다시 순교자 스데반에 대하여 생각해 볼까요? 얼핏 보기에는 스데반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박해의 명분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스데반의 설교가 아니었더라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또 다른 박해의 명분을 찾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교회를 운영하고 계시다면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고 평안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교회를 흩으려고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언제까지 평안을 누리며 한데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흩을 수 있는 방법이 박해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교회를 파괴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흩으신 것입니다.

몇 주 전에 ‘합킨톤 공원’에서 야외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설교 본문 말씀이 시편 95편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위대한 왕이십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도 그분의 것이며, 가장 높은 산들도 그분의 것입니다. 바다도 그분의 것입니다. 이는 주가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손으로 마른 땅도 지으셨습니다. 다 와서 엎드려 주를 경배합시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3-6절)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바다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마른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셨구나!” ‘마른 땅’은 ‘dry land’를 말합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황무지(the wastelands)’라고 나와 있습니다. 떨기나무(bush) 같은 것만 겨우 살 수 있는 황폐한 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마른 땅’을 만드셨을까요? ‘마른 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쓸 데 없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어보셨지요? “내가 빛을 만들고 어둠을 창조하였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이사야 45:7).” 빛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어둠이 있어야 합니까? 평화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재앙이 있어야 합니까? 좋은 일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절망이 있어야 하고 불행이 있어야 합니까? 그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application과 implication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을 읽고 application(적용)을 잘 해야 하지만, implication을 잘 찾아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와 원리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45장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함축적인 의미(implication)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 관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무의미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힘든 일이 있습니까? 절망적인 일이 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가 받은 박해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당시에는 아무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안디옥(Antioch in Syria)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으로 피신했습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교회를 흩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끝까지 나가 복음의 증인들로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의 연대감(solidarity)이 강했기 때문에 박해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신자들을 흩어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크리스천들을 찾아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충실했지만, 그가 했던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자들 사이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은 악명(惡名)이 높았습니다. 다메섹(Damascus)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Ananias)라는 주님의 제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9:13) 워낙 신자들 사이에 사울의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나중에 사울이 회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9:21). 

여러분, 이런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는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습니다(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ward me did not prove vain).” (고린도전서 15:9-10)

마지막으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흩어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But the believers who were scattered preached the Good News about Jesus wherever they went).” 교회는 언제까지 평안을 누리면서 함께 공동체의 삶을 누리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 공동체를 흩어지게 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The Gathered and Scattered Church(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선교 신학자 호켄다이크(Johannes Christiaan Hoekendijk, 1912-1975)가 ‘The Church Inside Out’이라는 그의 책에서 처음 쓴 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하면 ‘뒤집어지는 교회’입니다. 이 책이 1966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교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이 1979년에 우리나라에 ‘흩어지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호켄다이크가 이 책을 출판된 지 13년이 지난 후에 출판된 것입니다. 호켄다이크는 이 책에서 기존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뒤집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gathered church(모이는 교회)’에 있지 않고 ‘scattered church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연대감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말씀을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켄다이크가 말하는 ‘사도적인 교회(the apostolic church)’ 다시 말하면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Ite, missa est(이테, 미사 에스트).” 카톨릭 교회에서 미사를 마친 후에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Go, you have been dismissed”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미사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Go, it is the sending [dismissal]!”이라는 뜻입니다. 미사는 끝이 났지만, 이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내보낸다는 말입니다. 사제가 이렇게 말하면 신자들은 “Deo gratias (Thanks be to God)!”라고 화답합니다. 나를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주심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교회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드라마틱합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똑 같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이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 드리는 이유는 흩어져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