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5:14-19

14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선함이 가득하며 완전한 지식이 있으며, 서로 권면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15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 때문에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 일에 대해 담대하게 이렇게 글을 씁니다. 16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여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였습니다. 17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8 그리스도께서 내가 전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신 일 이 외에는 어떤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19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 것은 표적과 놀라운 일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파했습니다. (쉬운성경)

14 I am fully convinced,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that you are full of goodness. You know these things so well you can teach each other all about them. 15 Even so, I have been bold enough to write about some of these points, knowing that all you need is this reminder. For by God's grace, 16 I am a special messenger from Christ Jesus to you Gentiles. I bring you the Good News so that I might present you as an acceptable offering to God, made holy by the Holy Spirit. 17 So I have reason to be enthusiastic about all Christ Jesus has done through me in my service to God. 18 Yet I dare not boast about anything except what Christ has done through me, bringing the Gentiles to God by my message and by the way I worked among them. 19 They were convinced by the power of miraculous signs and wonders and by the power of God's Spirit. In this way, I have fully presented the Good News of Christ from Jerusalem all the way to Illyricum①. / ①Illyricum was a region northeast of Italy (New Living Translation)

사도 바울이 남긴 선교 업적(業績)은 정말 엄청납니다. 이 놀라운 업적은 그의 옆에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업적을 자랑하거나 업적을 부풀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동역자들과 함께 끝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실 하려고 했습니다. 

본문 19절에 “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파했습니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의 사역은 한마디로 ‘From Jerusalem to Illyricum(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번 그가 말하는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 지도를 보실까요? 직선 거리로 약 1,000마일(1,600km)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로마까지는 1,400 마일 정도 되고요. 요즘같이 교통 수단이 발달한 때에는 이 거리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배를 타고, 걸어서 가려고 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도로가 잘 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선교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과 강도들로부터 오는 위험, 내 동족들에게서 받는 위험, 이방인들에게서 받는 위험, 도시에서 당하는 위험, 황량한 광야에서 당하는 위험, 바다의 위험, 또한 거짓 신자들로부터 오는 위험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6-27)

“바울은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하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foundational question)’ 질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 그리고, 실수들이 생겨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일들이 모두 내가 누구인지 나 자신을 모르는 데서 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I am a special messenger from Christ Jesus to you Gentiles).” (16절) 우리는 단순히 “Who am I?”이렇게 묻지 말고 “Who am I in Christ Jesus?”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홀로 책상 앞에 앉아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 하고 질문해 보세요.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많은 문제들이 이 질문 앞에서 풀려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별것 아닙니다. 이 질문에 충실한 삶을 살면 거기에서 진정한 삶의 만족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둘째로,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8)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영국) 목사님이 쓴 역작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The Incomparable Christ, 2001)’라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처럼 위대하고 탁월한 분이 없었고, 그보다 더 깊은 영향력을 가졌던 분이 없으셨다. 그와 필적할 만한 상대는 영원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았기에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20)”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소중하게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에게 뭔가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을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에 대한 열정입니까? 전도에 대한 사명감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for his name’s sake)’입니다.” 

저는 바울의 마음 속에도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이 마음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리스인이든지 미개인이든지 지식인이든지 문맹인이든지 가리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4-15) 이 말씀이 그가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the name above all other names)’이 되게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9). 바울이 빌립교 교회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인생 전부를 바쳤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인생 전부를 바쳐도 아깝지 않는 이름인가요?

셋째로, 우리는 바울이 자기 사명을 위해 어떤 헌신을 했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이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믿어 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은 내게 맡기신 것을 세상 끝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12)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I am not ashamed of it)”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it’는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로마서 1:16에도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전도자로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잘 사는 사람들이 많고, 또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 볼 때, 부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전도자들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의 삶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 말씀 속에 ‘주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what I have entrusted to him or what I have committed to Him)’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주님이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준다(guard)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The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연은 어떤 일이 어려움이 있어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서커스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처음으로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서커스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변수가 많겠습니까? 녹화를 했다가 내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대 뒤에서 다음 순서를 준비하는 배우에게 갑자기 돌발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동물들에게도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소품을 챙기는 데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황이 어찌 되었든 막이 열리면 서커스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데 고난이 따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클리프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들어가서 그 부족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문자가 없는 부족들에게는 문자를 만들어 주고, 그 문자로 성경을 번역해야 합니다. 한 선교사가 그 일을 하다가 죽으면 그 일이 중단됩니다. 그러면, 다음 선교사가 그 일을 맡아 계속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부족의 문자로 성경 번역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중단되지 않고 계속됩니다.

넷째로,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동역자들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큰 감동이 밀려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디모데는 마치 아들과 아버지처럼, 나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But you know how Timothy has proved himself. Like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 (빌립보서 2:22)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 대하여 “He has helped me”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고 “He has served with me”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할 때 디모데도 나와 함께 수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렇게 빌립보서를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를 믿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과 지도자들과 집사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 1:1) 나도 디모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기와 디모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동일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동역자를 대하는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동역자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예루살렘서 일루리곤까지(From Jerusalem to Illyricum)’ 그 광활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디도(Titus)라는 바울의 동역자가 있습니다. 디도는 그리스 사람인데,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되었고,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디도는 바울에게 ‘친아들’과 같은 사람이었고(디도서 1:4), 동료(fellow worker, 고린도후서 8:23)였습니다. 디도는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도는 주로 바울의 편지를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그를 크레타(Crete) 섬의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서로 만난 후, 이 부부는 평생 신실한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부에 대하여 “이 두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로마서 16:4)”라고 인정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끝으로, 바울이 전도자로 섬긴 기간은 서기 47년에서 57년까지 약 10여년 간입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천성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자기가 한 때 교회를 박해했다는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트라우마가 그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바울의 과거였지만, 여기에도 주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바울이 끝까지 자기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전도자들과 경쟁하는 조급한 마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반짝하고 일꾼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겸손했고, 다른 전도자들과 경쟁심을 버렸기에 10여년 동안 롱런(long-run) 할 수 있었습니다. 아볼로(Apollos)라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전도자와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나 아볼로나 여러분을 믿도록 하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게 하신 일꾼에 불과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3:5-6) “나는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집을 세우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로마서 15: 20) 이런 마음과 태도가 바울이 끝까지 자기 사명을 다 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하여 최후의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내 삶을 바쳤고, 이제는 이 땅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6-8)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그 시대의 엘리트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의 이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일을 선택하라!” 참 멋진 말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고, 자신이 인생을 다 바쳐도 후회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 바울을 생각하면서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세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분인가?” “나는 지금 가슴이 뛰는 일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