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0:22-23

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개역 개정 성경)

22 "Consider this, you who forget God, or I will tear you to pieces, with none to rescue: 23 He who sacrifices thank offerings honors me, and he prepares the way so that I may show him the salvation of God." (New International Version)

세월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어느덧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맞는 추수감사절, 좀 특별한 의미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감사의 이유도 더 많을 것 같고요.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감사할 때보다는 불평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바로 그 옆에는 얼음 물과 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여자들이 빨랫감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군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외국 관광객이 안내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곳 부인들은 찬물과 더운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참 좋겠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천만에요. 불평이 더 많답니다.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답니다.”

감사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할까요? 일곱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간 어떤 엄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집의 아줌마가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는데 아이는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습니다. “얘야!” 엄마가 이 아이를 불렀습니다. “어른이 사과를 주면 뭐라고 말해야 되지?”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아줌마, 사과 깎아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이 아이처럼, 오늘 우리도 다른 사람의 호의에 대하여 감사를 모르고 살고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시편 50편은 아삽(Asaph)이라는 사람이 쓴 시편입니다. 아삽이 쓴 시편은 모두 열 두 편입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을 다윗이 썼는데요. 성서학자들은 다윗이 쓴 시편은 모두 일흔 세 편이라고 합니다. 아삽이 쓴 시편들은 모두 상당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쓴 시편들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 73편은 “왜 악한 사람이 떵떵거리며 부자로 사는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쓴 시편입니다. 시편 77편은 “아직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이런 문제를 다룬 시편입니다. 시편 79편은 “어떻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힐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다룬 시편입니다. 아삽은 레위지파 사람으로, 성가대 대장으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금(提金)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역대상 16:4-5). 제금은 오늘날 심벌즈(cymbals)’입니다. 그리고 아삽은 ‘선견자(the seer, 역대하 29:30)’라고 불릴 만큼 영적인 통찰력과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다윗이 옆에 두고 썼던 그 시대의 인재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을 잊은 너희여(You who forget God)”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대체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이길래 아삽은 이런 시편을 쓰게 되었을까요? 아삽은 그 시대의 예배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삽의 눈에 비친 예배는 형식화된 예배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배자들의 마음에 감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삽은 예배의 핵심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라고 보았습니다. 감사 없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삽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예배,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삽이 말하는 올바른 행위는 감사입니다.

아삽은 형식적인 예배에 대해 무서운 경고를 합니다. “지금 이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찢으실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행위는 감사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형식적인 예배가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 속에 분노를 가지고 교회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를 가지고 교회 일을 하는 것보다는 교회 일을 잠시 쉬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노를 가지고 직분을 감당하기 보다는 그 직분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행위는 감사의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마음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그 땅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오. 그 땅에는 여러분이 짓지 않은 크고 훌륭한 성들이 있소. 또 여러분이 채워 놓지 않은 훌륭한 물건들로 가득 찬 집들이 있고, 여러분이 파지 않은 우물들이 있으며, 여러분이 심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들이 있소. 여러분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것이오. 그 때에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했던 여러분을 인도해 내신 분이 하나님임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하나님 존경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시오(When you eat and are full, then take care lest you forget the LORD, who brought you out of the land of Egypt, out of the house of slavery).” (신명기 6:10-13) 

여러분, 성경에 왜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그들이 짓지도 않은 성을 주시고, 온갖 값진 물건들도 가득 찬 집을 주시고, 그들이 파지도 않은 우물들을 준비해주셨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려고(lest you forget the Lord)’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읽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성을 건축했고, 집을 짓고, 고생고생해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자기 힘으로 무엇을 얻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에 도취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Nebukadnessar)의 불행을 기억하시지요? 느부갓네살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유다 왕국을 포위하고 무너뜨린 장본인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18개월 간 포위했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국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를 공격하여 영토를 늘리고, 시리아, 모압, 암몬 등을 공격하여 영토를 늘리고, 포로들을 시켜 대대적으로 토목 공사를 했던, 막강한 힘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이 느부갓네살이 어느 날,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 바빌론 시내를 보면서 자신이 이룬 업적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위대한 바빌로니아 제국! 내가 내 힘과 권력으로 이 모든 것을 세우지 않았는가? 내 영광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닌가(By my own mighty power, I have built this beautiful city as my royal residence to display my majestic splendor)?” (다니엘 4:30) 이렇게 자만했던 느부갓네살은 어느 날 왕위에서 쫓겨나고, 정신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감사는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런 말씀들을 그냥 흘려듣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높은 지위에 있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만큼 교만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맞습니까? 우리 힘이 약하고, 되는 일이 없는 것도 괜찮아요. 자기 힘이 약할 때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되거든요? 

한국으로 귀국한 정은혜 자매가 이런 기도를 페이스북에 올렸더라고요. 이 기도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 Prayer By An American Confederate Soldier Seriously Disabled In The Civil War(남북 전쟁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은 한 남부 군인의 기도)’ “나는 하나님께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 나는 하나님께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허약함을 주셨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 나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 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했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생명을 선물해주었다.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하나님은 내 무언(無言)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다(I got nothing that I asked for-- but everything I had hoped for. Almost despite myself, my unspoken prayers were answered. I am, among all men, most richly blessed).”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사야가 너희와 같은 위선자들에 대하여 한 말이 맞다.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사람의 전통만 지키는구나.” (마가복음 7:6-8) 인간이 만든 생각(man-made ide-as), 아이디어, 지혜, 교훈 이런 것들을 마치 하나님의 것인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합니까? 거짓 예언자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주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하나님께 받은 말씀인 것처럼 자기들의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에스겔 13:1-8). 율법주의자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밀하게 지키려고 매뉴얼을 만듭니다. 세부 규정과 규칙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규정을 어기는 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또 인본주의자들(humanists)이 그런 일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면을 한번 보세요. “One of satan’s greatest lies is that if we apply enough human effort, wisdom and experience, we can take enough control of our lives to avoid pain, uncertainty, and disappointment(사탄의 가장 큰 거짓말 중의 하나는 만일 인간의 노력과 지혜와 경험을 충분히 적용한다면 고통과 불확실성과 실망 등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삽은 감사가 없는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있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도록 하십시오. 예수님도 감사의 예배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누가복음 17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의 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의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열 사람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치유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누가복음 17:17-19)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자기 몸이 나은 것을 보고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는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감사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허울 좋은 믿음입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껍데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그 사람의 믿음생활에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감사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목사님에게도 감사하고, 간사님들에게도 감사하고, 친구들에게도 감사하고, 또 부모님에게 감사하고, 또 학교에서는 교수님들에게 감사해야 하지만, 우리가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환경에 어떻게 변해도, 우리가 어떤 고난의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 하박국에 유명한 감사의 말씀이 있잖아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I will rejoice because of the Lord.” “I will rejoice in the God of my salvation.” 이 고백이 우리 크리스천의 감사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했던 말을 아시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사도행전 17:28) 맞습니까? 이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팬데믹 시대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