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자비로써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쉬운성경)

1 And so, dear brothers and sisters①, I plead with you to give your bodies to God because of all he has done for you.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 - the kind he will find acceptable. This is truly the way to worship him. ① / ①Or This is your spiritual worship; or This is your reasonable service 2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New Living Translation)

202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 범(호랑이) 띠라고 하지요? 범 중에서도 ‘흑호(검은 호랑이)’ 띠라고 합니다. 호랑이는 용맹과 사나움과 힘으로 상징되는 동물입니다. ‘팬데믹’ 3년째로 접어드는 2022년 새해는 부디 독수리가 힘차게 날개를 치며 하늘로 비상(飛上)하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비상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팬데믹’에 대해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시각(視角)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을 인류를 향한 재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희망적인 사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는 새해가 되어도 절망적인 일들만 보일 뿐입니다. 반대로, ‘팬데믹’을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볼 때 현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긍정적인 사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통하여 엄청난 일들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훌륭한 건물에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모두 교회에 대한 이런 꿈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몇 개월 전에 저희 교회를 방문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대뜸 서울에 있는 자기 교회에 대한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를 건축 중에 있는데, 건축 예산이 얼마라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큰 교회를 짓느냐고 물었더니, 제 질문이 이상했는지 “교회를 크게 잘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많이 모이지 않겠습니까?” 하고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이 성경적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돌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가복음 13:2). 아무도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중심의 예배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건물 중심의 교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 건물, 많은 교인 수, 그리고 많은 교회 예산을 훌륭한 교회, 성공적인 교회의 지표(指標)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더 좋은 건물, 더 좋은 시설을 갖추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이런 교회들이 생각하는 목회에 대한 개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찾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식의 목회입니다. 

문제는 교회에 대한 이런 개념이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자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마가복음 1:37-38) 예수님의 전도 방식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고, 숙소를 구해야 했습니다. 여간 힘들고 피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온 것입니다.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한 두 세 달 전에 이 지역 목사님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마침 제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 앞에서 무슨 설교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팬데믹 시대’에 대해 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교회에 대한 기존 개념이 바뀌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팬데믹 시대’를 통하여 도저히 바뀌지 않는 교회에 대한 고정된 개념을 바꾸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팬데믹 시대’가 끝나면, 그 때 교회는 현재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서 빨리 ‘팬데믹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하겠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형태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교회형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교회를 바꾸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섬기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라고, 건물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기동성(機動性, mobility)을 갖춘 교회의 모습일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니까 꽤 많은 목사님들이 제 설교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섬기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했고, 어떤 목사님은 케임브리지교회부터 한번 확 바꿔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무슨 특별한 목사도 아니고, 무슨 주목받는 목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학식이 많고 존경받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이 계시는데, 그런 목사님들이 ‘코로나 시대’ 혹은 ‘코로나 시대 이후’에 대한 대안을 마땅히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근에 우연히 한국에서 매우 주목받고 있는 한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교를 잘 하신다고 알려진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설교 내내 하시는 말씀이 교회 출석이 예전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목사님이 ‘팬데믹 시대’에 대한 대안(代案)을 가지고 있겠지 하면서 설교를 끝까지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코로나 시대에 교회들이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이런 현상을 그대로 보고만 있으면 결국 교회는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변회되어야 합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교회는 죽습니다. 교회 예배가 역동적(力動的)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도저히 교회에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역동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팬데믹 시대’에 대한 그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대안이었습니다. 예배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역동적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역동적인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목사님의 결론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보는 사람들을 모두 교회에 나오게 해서 교회당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목사님이기에 상당히 기대를 가지고 설교를 들었는데, 좀 실망했습니다. 그 목사님뿐만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이 어서 빨리 ‘팬데믹’ 이전으로 교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서 교회를 힘들게 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사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의 교회가 너무 좋았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의 설교에 열광하고, 여기 저기서 은혜 받았다고 하고, 목사님은 방송국에 나가서 영상 설교를 내보내고, 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하지만,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이 교회가 살 길이라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교회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까?

‘팬데믹’ 시간을 벌써 2년째 겪고 있고, 3월이면 3년째로 들어갑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까? 사람들의 의식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까? 사람들의 근무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일하는 형태가 바뀌니까 그 전에 그렇게 바꾸고 싶어도 바꾸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재택 근무를 많이 하게 되니까 출퇴근 때 교통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도시 집중의 인구를 교외로 분산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섬기는 교회’는 제가 처음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가복음 10:45 말씀을 보세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도(even the Son of Man)’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배소서 1:23, 4:12, 5:30, 고린도전서 12:27)’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에베소서 1:22, 5:23, 골로새서 1:18)’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서 섬기는 삶을 사셨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당연히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교회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동네 동네를 찾아다니셨던 것처럼, 교회도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기동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사람들을 찾아가는데 알맞은 구조가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도록 하는데 최적화된 구조입니다.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 스위스)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는 카톨릭 신학자이지만, 교황의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을 비판하는 등 카톨릭 신학의 개혁을 주장했던 학자입니다. 결국 한스 큉은 1979년에 그가 몸 담고 있던 튀빙겐(Tübingen) 대학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합니다. 한스 큉은 천재적인 신학자였습니다. 한스 큉 외에도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헨리 나누엔(Henri Nouwen, 1932-1966, 네덜란드)같은 학자들이 모두 신학적인 상상력이 뛰어난 천재 신학자들입니다. 

한스 큉이 남긴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의 본질(本質)을 연구한 ‘The Church, 1967)’라는 책은 그의 업적 중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교회는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세상 속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사람들을 받들어 섬기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있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교회의 제도와 교리가 목적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본연의 사명에서 벗어나게 되면, 결국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위기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하나님을 섬겨 인간을 섬기며, 인간을 섬겨 동시에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The church should serve God and serve man, and serve man and serve God at the same time)”고 했습니다. 지금 그의 말 대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지 않습니까?

네덜란드의 선교 신학자 요하네스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 1912-1975)가 ‘The Church Inside Out(흩어지는 교회)’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은 1966년이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보다 활발한 ‘기동성(mobility)’과 ‘다양성(diversity)’을 갖추어야 하며, 평신도가 선교가 주체가 되어야 하며, 소집단들의 활용과 상호 협동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다고 하면서 기존의 하나님-교회-세상 대신 하나님-세상-교회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교회는 더 이상 선교의 주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샬롬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 안에 안주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 세상 속으로 흩어져야 한다는 것이 호켄다이크의 주장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에 두 사람의 신학자가 거의 같은 시기에 예언자적인 책을 냈지만, 그 때는 아무도 귀 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주장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듣기에 교회는 비대해 졌고, 교회는 세상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원로인 홍정길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거대한 공룡에 비유했습니다. 지금 50여년 전의 케케묵은 두 신학자의 주장을 꺼내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팬데믹 시대’에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의 주장을 통하여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 말씀은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이 시대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겉모습만 보지 말고, 이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께 일하시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바꾸고 계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이 ‘팬데믹 시대’를 통해서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교회를 바꾸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깨시민’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깨어 있는 시민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갈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이 되어서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