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6-11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새변억)

6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7 Instead, he gave up his divine privileges①;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When he appeared in human form③, / ①Greek he emptied himself 8 he humbled himself in obedience to God and died a criminal's death on a cross. 9 Therefore, God elevated him to the place of highest honor and gave him the name above all other names, 10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11 and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New Living Translation)

‘사랑 그 좁은 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종려주일 예배의 자리에 오신 여러분의 발걸음을 축복합니다. 일상에서 무너졌던 우리의 감정과 마음이 예배 안에서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2019년 12월 1일에 바로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의 성가대 찬양이 ‘날 새롭게 하소서’라는 찬양이었습니다. “나 세상 살아갈 때에 한치 앞길도 보이지 않고 주저 앉은 채 눈물 흘릴 때 주님 날 만져 주시네” “내 십자가 지고 주 따릅니다 날 새롭게 하소서” 그날의 성가대의 아름다운 선율과 은혜의 가사가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 같아서 뭉클했던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6절로 8절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진정한 집을 떠나서 우리를 위해 성육신 하셨지요. 땅에서는 부모의 집으로부터 떨어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애를 보면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셨지요 (눅 9:58) 그리고 마침내 성문 바깥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9절로 11절에 보면 낮아지심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본문의 구조는 낮아짐과 높아짐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본문의 구절에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순종하심과 하나님의 행하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독교 용어로 케노시스 (헬라어: κενοσις; 영어: kenosis) 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케노시스의 삶은 참으로 좁은 길입니다. 인간 편에서 도무지 오를 수 없는 높은 길입니다. 지구상의 가장 돈이 많은 사람도 유명한 사람도 이것을 살 수 없으며, 권력을 지닌 사람도 오를 수 없는 길입니다.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 이루신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머물 때에 우리를 영광의 길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저에게는 소중한 기도의 흔적이 담긴 물건 하나가 있습니다. 장인 어른께서 수술실로 들어 가시기 전에 손에 쥐고 계셨던 십자가입니다. 믿음으로 사셨던 아버님이 남겨주신 기도의 선물인데 이 십자가는 저를 진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삶에는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까? 본문 6절로 8절은 예수님의 믿음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의 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모두가 높아지려고 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낮은 자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더 좋은 것을 이야기하고 더 풍요로운 것을 따르는 삶이 성공적인 삶이라 하는데 주님께서는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안에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위대하심을 겸손한 자들을 통해 드러내시지요.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내려놓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주님께 하듯 하는 믿음의 태도가 주님 안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며 위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기꺼이 감당해내고 싶은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부인하고 외면하며 그리스도의 지식을 채워갈 수는 없지요. 복음을 위한 고난을 외면한 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 내야 하는 이 십자가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함으로 이겨낸 성도들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게 되면 피어나는 꽃들이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핍박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하심 너머의 소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10)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만나고 세상의 파도에 밀릴 때마다 구주의 십자가를 돛대 삼아야 합니다. 그 파도를 예수님의 물과 피로 한번 여겨 보십시오. 복음을 위한 영광된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에 거룩함을 향한 무뎌진 감각이 회복되고 허망한 기대와 텅 빈 영광은 하늘의 소망으로 채워지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은 힘들고 버거운 고난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고난 중에도 우리가 믿음 안에 머무를 때에 십자가가 삶의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머리로 믿어지는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A.D. 2022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의 분기점을 B.C.와 A.D.나눕니다.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A.D.는 '안노 도미나이 (Anno Domini)인데요. 이는 라틴어입니다. 안노 (Anno)라고 하는 말은 '한 해 : year'라는 의미입니다. 도미나이 (Domini)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님 : of our Lord' 라고 하는 뜻입니다. 즉, in the year of our Lord, ‘주님이 다스리는 해’ 이것이 A.D.입니다. 그러니까 A.D 2022년은 주가 다스리는 해가 1세기부터 21세기로 확장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걷는 이들에게 주님의 통치하는 나라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삶의 모든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에 대한 두 죄수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처형하는데 가담한 군인들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강제한 유대 지도자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이때 한 죄수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의 기도를 들으며 더욱 비방하며 포악해졌습니다. 죄수의 입장에선 스스로 원망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향해서 너와 나를 구원해 보라고 했겠지요. 이 죄수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에 반응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편 죄수의 고백은 달랐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과 그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이때 평생 자신을 붙들고 있던 원망과 쓴 뿌리가 녹고 그 순간에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이 죄수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자기 곁에서 죽어 가며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뜬 이 사람에게 주님은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절대 소수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무심히 어제와 같은 일상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알아본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가장 깊은 절망의 상황에도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과거의 인식과 상처로부터 새날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삶과 이별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매일의 새로운 삶을 허락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십자가 사랑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생명의 힘이기에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지요. 다시 일어서는 힘이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위기라고 하지요.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도 손을 놓지 않고 서로를 지탱해 주는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면 우리가 잡은 손이 위기를 이겨낼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풍조를 볼 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도전이 있을까요? 첫째는 다원주의의 도전입니다. 진리의 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니 서로의 길을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것인데, 이는 기독교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지극히 겸손해야 합니다.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어떤 종교에도 없는 유일한 것이며, 그분의 속죄하심도 유일한 것이며, 그분의 부활하심도 유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세상에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이 예수님을 깊이 알고 겸손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두번째 도전은 물질주의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물질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 보아도 물질 세계의 질서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인간의 탐심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아닙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물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관대하게 사용하고 검소하게 자족하는 방식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욥1:21) 우리는 모두가 태어나고 돌아가는 두 사이의 짧은 순례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번째 도전은 윤리적 상대주의입니다. 이 시대는 상대주의가 문화를 잠식했고 교회 안에도 침투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 기준에 대해서 이제 혼란스러워합니다. 이러한 시대 풍조에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경적인 원리를 삶에 적용하고, 우리의 행동의 토대가 예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백하지만 순종하지 않는 삶은 인생을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이지요. 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 외에도 그리스도인에게 참 많은 도전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세상 풍조에 맞서기 위해서 성도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 4:13) 아멘! 본문의 말씀 9절로 11절에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나타납니다. 낮아지심으로 순종한 그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마음을 모른 채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허망한 기대에 차 있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나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인(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중심 없는 마음과 갈증을 잃어버린 예배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갈망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고 예배 드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와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머문 자리에는 예수님의 이름만이 남아야 하겠지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그것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일일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에 나의 선택과 말과 행동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도시는 수도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작은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로마를 위해 싸웠던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관습과 법을 따르며 로마의 특권을 누렸고,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이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당시에 빌립보 교회에는 다툼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를 섬기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저희 둘째가 뱃속에 있었을 때 아내가 하혈이 심해져서 몇차례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의사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할 수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권하더군요. 모든 결정은 저희 부부의 몫이었지만 생명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지켜 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비록 과정이 힘들기는 했지만 둘째는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6개월때 갑자기 열이 오르면서 모유도 이유식도 입에 대지 못하고 계속 힘들어하더라구요.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외국에서 출산을 하고 모든 게 낯설었던 그때 아내와 저는 너무 무섭고 두려웠지요. 여러 명의 의사가 차례대로 와서 아이의 상태를 점검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지친 아이는 점점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고 의사들은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한다며 수술 동의서를 가지고 오더군요. 마음이 참 어려웠습니다. 담당 의사가 지금까지 응급환자 중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순간 아이가 고개를 떨구고 숨이 멈추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는데 처음 경험한 그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발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내는 마지막까지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며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삶을 전부 희생하게 되는 것 같아 무서워서 마지막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내어드리겠다는 기도를 망설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나의 고백이고 순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무거운 짐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고 의료진들이 급박하게 상황을 대면하는 것을 보니까 바로 무릎이 꿇어지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이 살려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면서도 깨어나지 못할까 봐서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세상의 것 구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 구하며 살아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부부의 동일한 기도가 간절히 드려지고 나니 차가워진 아이의 손과 하얗던 얼굴과 몸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하며 목에 있던 피고름이 터져 나오고 아이가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희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부부의 온전한 고백을 기다리신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소중한 생명의 무게 앞에 서 보니 세상의 성공도 부함도 명예도 모래 위에 쌓아 올려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의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은 유익없이 슬픔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일하십니다. 그 둘째 아이는 지금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고 가끔 저에게 어떤 목사가 되어야하는지 가감 없는 조언을 해주기도 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 앞에서 나의 순종을 기다리셨던 주님은 기댈 곳 없던 캐나다에서의 삶에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4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초기 기독 교회는 세례 받을 사람이 성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을 하고, 토요일 저녁에는 철야 기도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주일날에는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처럼 생명의 물이 되신 주님과 함께 세례를 통해 마음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는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씨가 심겨 지는 것이고, 부활의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구원을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대표적인 지도자 카프리안(Cyprian)은 ‘거듭남의 물로 이전 삶의 얼룩이 씻겨져 나갔다. 그리고 위로부터 임하는 고요하고 순결한 빛이 하나님과 화해한 나의 마음 가운데 스며들었다.’ Cyprian, Ad Donatum4 라고 고백합니다. 세례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고백하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보여지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늘 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여지는 것 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형편과 생활이 나아지면 편해질 수는 있지요. 그러나 인간의 실존은 나그네이기에 행복할 때도 불안해하는 불완전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지요.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옥중에서 기쁨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부활하심이 그의 공허했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영혼의 뜨거운 울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매년 고난주간에만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십자가 지고 주 따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우리의 삶에서 깨닫게 되면 고난의 그 끝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 내야 하는 외로움. 희망이 사라지고 소망이 사라졌을 때의 곤고함. 실패한 것 같아서 무너지고 깨어지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고백하셨던 주님의 그 음성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어둔 터널을 만나게 될 때 그 때에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감당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훈련이 없으면 단단한 믿음의 근육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연단이 없으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변함없이 기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 땅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내 영혼이 안전하기 원합니다. 좁은 길을 모두가 피해갈 때에 예수님이 걸어가신 좁을 길을 따라갑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믿음으로 통과합시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교회와 믿음의 공동체가 ‘사랑, 그 좁은 길’을 함께 걷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