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7-11

7 한 때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8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9 또한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믿음을 보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며 나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10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쉬운성경)

7 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8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discarded everything else, counting it all as garbage, so that I could gain Christ 9 and become one with him. I no longer count on my own righteousness through obeying the law; rather, I become righteous through faith in Christ①. For God's way of making us right with himself depends on faith. / ①Or through the faithfulness of Christ 10 I want to know Christ and experience the mighty power that raised him from the dead. I want to suffer with him, sharing in his death, 11 so that one way or another I will experience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New Living Translation)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갈 무렵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까지는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자기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2-4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내가 여러분에게 전파한 말씀을 굳게 붙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Amplified Bible에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By this faith you are saved [reborn from above—spiritually transformed, renewed, and set apart for His purpose], if you hold firmly to the word which I preached to you, unless you believed in vain [just superficially and without complete commitment]. 3For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what I also received,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at which] the Scriptures [foretold], 4and that He was buried, and that He was [bodily]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at which] the Scriptures [foretold].”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씀은 “For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what I also received”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누구로부터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해 받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 때 전도자들이 주고받았던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케리그마(κήρυγμα)’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 ‘케리그마’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설교의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부활’에 대한 주제를 피하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1세기의 전도자(사도들)은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1세기 크리스천들에게 ‘부활’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facts)’이었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수많은 증언자들이 있었습니다. 법정에서는 확실한 증인 두 세사람만 있어도 그들의 증언은 그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을 때요. 이 일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과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도 모두 멀리 서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함께 온 여자들이 요셉을 뒤따라 가서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어떻게 누워 있는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고 안식일에는 계명대로 쉬었습니다.” (누가복음 23:49, 55-56, 마태복음 27:55, 마가복음 15:47) 이 여자들이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무덤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아 놓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 걱정했습니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 주지요(Who will roll away the stone for us from the entrance to the tomb)?” (마가복음 16:3) 그런데, 막상 가 보니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서 있었고(마태복음 28:4),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은 옆으로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때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느냐?” (누가복음 24:5-7)

여러분, 그 때 이 여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 여자들이 받은 충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자들은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무서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The women fled from the tomb, trembling and bewildered, and they said nothing to anyone because they were too frightened).” (마가복음 16:8) 하지만,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여자들이 그 길로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렸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8).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세요? 누가는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요한은 여자들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무덤 속을 확인하기 위하여 달려갔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요한복음 20:3-4) 정말 여자들의 말 대로 무덤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 20:9)”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이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확실한 믿음으로 자리를 잡았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 때 당시에 유대사회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많은 루머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루머가 돌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8:11-15). 새벽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루머도 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는 소문도 그 때 나온 루머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루머들이 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강력한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진실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단순히 말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으로 보여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그들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고, 그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꼭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십자가에서 끝나면 안 됩니까?”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나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특별히 선택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 약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인간의 족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He was declared to be the Son of God when he was raised from the dea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is Jesus Christ our Lord).” (로마서 1:4)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부활한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주장하신 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니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들로 판명될 것입니다(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then all our preaching is useless, and your faith is useless, and then we are found to be false witnesses about God, 고린도전서 15:14-15)”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톰 라이트(N.T. Wright)의 말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의 말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을 목숨 아닌가?” 이런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삽니다(고린도전서 15:32). 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temporary residents(일시적인 체류자, 베드로전서 2:11)’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citizenship(시민권, 빌립보서 3:20)’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삶의 방식이 달라도 뭔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오늘 빌립보서 본문 말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한 후에 그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완전한 변화가 그의 삶 속에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의 삶이 가능할까요?

고린도전서 12:3에 “예수님은 주님이시다(Jesus is Lord)”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 말로 “Κυριος ΙΗΣΟΥΣ”라고 합니다. 이 말은 1세기 크리스천들이 사용하던 일상적인 말입니다. ‘Κυριος’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lord, master, chief, ruler, owner’라는 뜻입니다. 웹스터 사전에 ‘Κυριος’라는 말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arly Christians confessed Jesus Christ as their Kyrios instead of the emperor(초대 크리스천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Kyrios로 고백했다).” 그 당시에 황제를 ‘Kyrios’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Kyrios’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Kyrios’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사는데 어떻게 삶이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1세기의 크리스천들에게는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누구에게나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Kyrios)’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Kyrios’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주인이 되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변화의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10절) 

‘부활의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처럼,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삶의 문제들을 이기는 것입니다. 로버트 플래트(Robert Flat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resurrection gives my life meaning and direction and the opportunity to start over no matter what my circumstances(예수님의 부활은 내 삶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고, 어떤 상황에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여러분,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여러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이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I want to suffer with him, sharing in his death)” (10절)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힘들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9:23)”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나는 날마다 죽습니다(I face death daily in Christ Jesus)” (고린도전서 15:31) 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을까요? 날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