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2:12-17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 주님께서 내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13 그러나 나는 그 곳에서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여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곳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났습니다. 14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우리를 이끌어 승리의 행진을 하게 하시며, 어디서나 우리로 그분을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5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나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16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향기이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17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말합니다.

12 When I came to the city of Troas to preach the Good News of Christ, the Lord opened a door of opportunity for me. 13 But I had no peace of mind because my dear brother Titus hadn’t yet arrived with a report from you. So I said good-bye and went on to Macedonia to find him. 14 But thank God! He has made us his captives and continues to lead us along in Christ’s triumphal procession. Now he uses us to spread the knowledge of Christ everywhere, like a sweet perfume. 15 Our lives are a Christ-like fragrance rising up to God. But this fragrance is perceived differently by those who are being saved and by those who are perishing. 16 To those who are perishing, we are a dreadful smell of death and doom. But to those who are being saved, we are a life-giving perfume. And who is adequate for such a task as this? 17 You see, we are not like the many hucksters① who preach for personal profit. We preach the word of God with sincerity and with Christ’s authority, knowing that God is watching us. / ①Some manuscripts read the rest of the hucksters (New Living Translation)

제가 클레아몬트(Claremont) 신학교에 다닐 때, 그 때가 1984-1986년경이었습니다. 그 때 목회학 클래스를 한 과목 들었습니다. 그 클래스에서 사용했던 책이 ‘The Reformed Pastor(1656)’라는 책이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영국)라는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목사가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에 ‘reformed’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이 ‘reformed’라는 말은 ‘Reformed Theology(개혁주의 신학)’라는 의미입니다. 목사는 누구인가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목사의 사명과 역할은 무엇인지 정말 잘 쓴,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책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사를 하면서 그동안 소장했던 책을 거의 대부분 버렸습니다. 엄청난 양의 책을 직접 쓰레기 하차장에 가져가서 버렸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리차드 백스터의 책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아이쿠, 버렸나 보다” 하고 실망했었는데, 다시 찬찬히 찾아보니 책꽂이 한쪽에 잘 꽂혀 있더라고요. 그만큼 이 책은 평생 소장하고 싶은 책입니다.

누가 언제 붙였는지 모르지만,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를 ‘pastor’라고 합니다. ‘pastor’는 목장에서 ‘양을 치는 목자(shepherd)’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pastor’라는 말에는 ‘a person who leads to pasture(초장으로 인도하는 사람)’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인들을 ‘목사와 평신도’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양(牧羊)’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자연히 목사 사무실을 ‘목양실’이라고 하는 것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인들을 목사와 평신도로 구별하는 것은 목사들에게 엄청난 특권의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양들이 아무 생각 없이 앞에 가는 목자를 따라가듯이, 목사는 교인들을 앞에서 이끌어가는 사람이고, 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 생각은 새 시대가 요구하는 크리스천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둘째로, 참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선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herd, 요한복음 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는 목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목사들에게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리차드 백스터 역시 ‘pastor’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람 같으면 ‘pastor’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책상에 앉아 책만 쓴 사람이 아니라 교인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시간을 교인들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200여권의 책을 쓴 경이로운 인물입니다.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쓴 “Knowing God(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저자 J.I. Packer는 리차드 백스터를 진정한 성자이며 존경스러운 인물이라고 칭송했습니다.

현재 카톨릭 교황은 266대 ‘프랜시스(Francis, 1936-현재, 아르헨티나)’ 교황입니다. 이 분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입니다. 교황으로 부임하면 이름을 바꾸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 분은 평소에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살았던 ‘프랜시스(Francis of Assis, 1181-1226, 이탈리아)’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프랜시스’로 바꾼 것입니다. 이 분은 부임 초기부터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녔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말과 행동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프랜시스 교황이 2014년 8월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도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교황이 한국 방문을 거의 마칠 무렵에 카톨릭 성직자들이 모인 자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Be shepherds with the smell of your sheep).”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황이 여전히 목자와 양이라는 전통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은 유감이지만, 사역자들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말을 사역자들이 양들과 대화하고, 양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양들과 공감하면서 양들의 삶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사역자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의 몸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야 할까?” 당연히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야 할까요? 다행하게도 오늘 성경 본문 말씀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15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Our lives are a Christ-like fragrance rising up to God(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올라가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또 14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Now he uses us to spread the knowledge of Christ everywhere, like a sweet perfume(하나님은 향기로운 향수와 같이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파하도록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편지를 어떤 상황에서 쓰고 있는지 아시나요? 한번 오늘 말씀을 찬찬히 읽어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 주님께서 내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나는 그곳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났습니다.” (12-13절) 이 말씀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3차 전도여행은 2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다시 따라가면서 교회들을 방문하는 식이었습니다. 드로아(Troas)는 바울이 꿈에 마케도니아 땅에 대한 환상을 보았던 곳입니다. 그는 이 환상을 따라 에게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별 감동 없이 읽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럽이 기독교 국가들이 된 데에는 2,000년 전에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에게 바다를 건너갔던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에서 볼 때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A Christian historian said that the ship that carried the Apostle Paul carried the history of the world in it. Arnold Toynbee said in his ‘A Study of History’ that, when a wooden boat carried the Apostle Paul from Troas of Asia Minor to Macedonia, it moved the center of the world from the birthplace of civilization to Mediterranean and to the European Continent (한 기독교 역사가는 사도 바울을 태웠던 그 배는 그 배 안에 세계 역사를 태우고 있었다고 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작은 목선이 소아시아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을 태웠을 때, 세계의 중심은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지중해와 유럽 대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Our Daily Bread, 9/11/2011)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기분이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뭔가 알 수 없는 우주적인 기운을 이 말씀에서 느꼈습니다.

지금 바울은 두 번째로 빌립보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도시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을 걸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벌써 2,000년 전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는지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에 교회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전도훈련을 받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지구촌교회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폭발 훈련 마지막 날, 전도폭발이라는 전도법을 만든 제임스 케네디(D. James Kennedy, 1930-2007) 목사님의 설교를 영상으로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 마지막에 이런 감동적인 예화가 나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전투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도망병이 잡혀오면 가차 없이 공개 처형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한 병사가 도망치다가 붙잡혀 알렉산더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 병사를 보니 파란 눈에 너무 앳되고 불쌍해 보여 죽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어린 병사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병사에게 “애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알렉산더는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라고?” 겁에 질린 병사는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병사의 이름이 자기와 이름이 똑 같았던 것입니다. 화가 난 알렉산더가 다시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라고?” 놀란 병사가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자 알렉산더는 그 병사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이 놈아,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의 태도를 바꿔라!”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를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이름이 무엇이냐?’ 그 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 이름은 무엇이냐?’ ‘크리스천입니다.’ ‘너희 이름은 무엇이냐?’ ‘예, 크리스천입니다.’ 우리의 대답에 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그의 아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희 삶을 바꿔라!’” 이렇게 소리지르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세상의 냄새’가 더 많이 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고 세상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적고 세상과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세상의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양들과 함께 지내야 우리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Merriam Webster 사전에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말에 대한 이런 정의가 나옵니다. ‘one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 of Jesus(예수의 교훈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 간결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믿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송하지만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전을 찾아보다가 놀란 것은 ‘Christian’이라는 말이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treating people in a kind or generous way(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하는)’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전을 찾아봤더니, 형용사로 사용될 때 ‘decent(품위 있는)’ ‘respectable(존경할 만한)’ 이런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세요? 사도행전 11:26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속에 조롱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일년동안 열심히 섬긴 결과 안디옥 시민들의 눈에 비친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관대하고 품위가 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성서학자들 중에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유래를 그리스어 ‘카리스(χάρις)’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리스’라는 말은 ‘호의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매력(attractiveness)’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My old self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갈라디아서 2:20)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결단의 시간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버리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올바로 살든지 결단해야 할 시간입니다. 

뉴잉글랜드의 4월은 바람이 많이 불고 춥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불수록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 멀리 퍼져 나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황을 핑계대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에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풍성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 이 말씀에서 ‘보화’는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질그릇(clay jar)이 깨지면 오히려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이 더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 강렬하게, 더 멀리 전파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