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42-45

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44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쉬운성경)

42 So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in this world lord it over their people, and officials flaunt their authority over those under them. 43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44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5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Living Translation)

신약성경의 핵심적인 말씀 시리즈 두 번째 설교는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이런 제목의 설교입니다.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10:42-45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to serve others)’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에게 ‘섬김의 삶’은 단순히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H. Maslow, 1908-1970)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Maslow's Hierarchy of Needs(매슬로의 욕구 단계설)’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위스콘신 대학을 졸업한후 콜롬비아 대학의 연구원을 거쳐 위스콘신, 브루클린, 보스턴에 있는 브랜다이스 등의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가 ‘Maslow's Hierarchy of Needs’를 처음 내 놓은 것이 1943년입니다. 그리고 1954년에 자기 주장을 약간 수정하여 지금의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론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가 ‘단계설’이란 말을 쓴 것은 욕구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단계적으로 생겨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제일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입니다. 먹을 음식이 있어야 하고, 옷이 있어야 하고, 잘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단계의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Needs)’입니다. 그 다음이 ‘애정과 소속의 욕구(Love and Belongingness Needs)’입니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자기가 소속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 다음이 ‘자기 존중의 욕구(Self-esteem Needs)’ 단계입니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성공하고 싶어하고, 지위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권력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단계입니다. 맨 위에 있는 단계는 ‘자아 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명예에 대한 욕구가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매슬로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로 본 것입니다. 

성경에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민수기 16장). 그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고라’에게 모세와 그의 형 아론에 대하여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세와 아론과 같은 레위지파 사람인데, 왜 이 두 사람만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지도자로 군림하는가?” 이것이 ‘고라’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지내던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고라’의 행위를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고라의 반란으로 무려 14,950명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라’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하고, 힘을 가지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 다르고 힘을 행사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1978)라는 미국의 인류학자가 있습니다. 인류학(anthropology)의 초석을 놓은 분으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는 ‘The Theory of Imprinting(각인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Children must be taught how to think, not what to think(어린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지를 배워서는 안 되고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지를 배운다면 그 아이는 개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지만, 어떻게 생각해야는 지를 배운다면 그 아이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가렛 미드의 이 말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적인 관점(the biblical point of view)’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 55:8-9) 하나님의 생각은 성경적인 관점을 배우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처음 들은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또 누가는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은 아테네 시민들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었습니다(When they heard Paul speak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laughed in contempt, 사도행전 17:32”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세상적인 관점(a worldly point of view)’에서 보면 십자가는 ‘foolish thing(어리석은 것)’에 불과합니다. 논리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을 이해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the power of God)’입니다. 

삶의 모든 이슈에 대하여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제가 다윗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강한 인상을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9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항상 함께 있었고, 너를 위해 네 원수들을 물리쳐 주었다. 나는 너를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만큼 유명하게 해 줄 것이다(Now I will make your name as famous as anyone who has ever lived on the earth).” 사람에게는 유명하게 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도 유명하게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하게 되는 과정과 방법이 다릅니다. 경쟁자를 이기고 그 자리에 앉음으로써 유명해지는 것은 크리스천의 방식이 아닙니다. 보스턴 지역에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대통령 상을 비롯해서 상이란 상은 다 받았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저 사람이 상을 다 받느냐고 보스턴 한인사회를 잘 아는 어떤 분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분이 하는 말이 “말도 마십시오. 그 사람은 자기와 경쟁 대상이 있으면 청와대에 그 사람을 모함하는 투서를 합니다.” 정말 이런 식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너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사무엘하 7:9)”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은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정말 우연히 일어났던 사건 하나가 다윗의 생애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다윗은 단숨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대리석을 찾아 다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는 우연히 밭에 뒹굴고 있던 커다란 대리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리석은 너무 커서 쓸모가 없다고 거들떠보지 않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발견한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을 가지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고 있는 ‘다윗 상’을 조각했습니다. 지금 이 ‘다윗 상’이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미술관에 있다고 하는데요. 사람들은 그 뛰어난 조각상을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다윗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윗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은 세월이 가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도 크리스천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42절)”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야 하고, 훌륭한 정치인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크리스천에게는 지도자가 되는 방법도 달라야 하고, 지도자에게 주어진 힘을 행사하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3-44절) 여러분, 정말 이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servant)’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실까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섬김을 받으려고만 했지 ‘종’이 되어 섬겨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시는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섬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섬김의 삶’에 대한 어떤 것도 좋은 예(example)가 될 수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이런 것이라고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삶’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의 단계설’에서 본 것처럼, 누구나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선언(宣言)하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새해가 되어 교회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집사님 부부를 1월 한 달 동안 안내위원으로 주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 부부가 안내위원을 하면서 내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남편 집사님이 저에게 와서 막 따졌습니다. “이 교회에는 우리 말고 집사가 없습니까? 어떻게 나이 많은 우리 부부를 1월 달에 안내위원을 시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아니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섬기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삶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섬김의 삶’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발을 닦아주고,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Dieter F. Uchtdorf(1940, 독일)란 사람의 말인데요. “As we lose ourselves in the service of others, we discover our own lives and our own happiness(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때, 우리 자신의 삶과 행복을 발견한다).” 맞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내가 이 사람들의 스승인데?” 이런 생각을 하셨다면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을까요? ‘섬김의 삶’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누가복음 22:27) 섬김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셋째로, ‘섬기는 삶’에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I came to give my life as a ransom for many(45절)”고 하셨습니다. 자기 희생 없이 자기가 ‘섬기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때 기독교로 개종하려고까지 했던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Service without humiliation is selfishness and egotism(굴욕이 없는 섬김은 이기주의이고 자기 아집에 불과하다).” 진정한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에는 굴욕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ransom(대속물, 몸값)’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에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섬김의 삶’의 ‘화룡점정(火龍點睛)’은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섬김의 삶’은 온전한 섬김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3-44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정말 이 말씀대로 살면 누구든지 리더가 될 수 있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이제 우리의 ‘섬김의 삶’을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