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9-15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10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품삯을 받고 양을 돌보는 사람은 사실 목자가 아니며,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다. 그 사람은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만 남겨 두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공격하여 양들을 흩트린다. 13 그 사람은 단지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양을 돌보지 않는다.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쉬운성경)

9 "Yes, I am the gate. Those who come in through me will be saved①. They will come and go freely and will find good pastures. / ①Or will find safety 10 The thief's purpose is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 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sacrifices his life for the sheep. 12 A hired hand will run when he sees a wolf coming. He will abandon the sheep because they don't belong to him and he isn't their shepherd. And so the wolf attacks them and scatters the flock. 13 The hired hand runs away because he's working only for the money and doesn't really care about the sheep. 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own sheep, and they know me, 15 just as my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So I sacrifice my life for the sheep." (New Living Translation)

‘Seven I AM Statements in the Gospel of John(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I AM)’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I AM’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셨습니다. BC 3세가 중엽에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을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 역)’라고 합니다. 이 때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말을 ‘εγώ εἰμί(ego eimi)’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 AM’이 됩니다.

‘I AM’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I AM’이라고 말씀하신 일곱 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복음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8:12).” “나는 문이다(요한복음 10:9).” “나는 선한 목자다(요한복음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나는 포도나무다(요한복음 15:1, 5) 요한복음에만 ‘I AM’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4:27에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Jesus spoke to them at once. "Don't be afraid," he said. "Take courage. I am here!①" / ①Or The `I AM' is here; Greek reads I am. See Exod 3:14 “I am here”라는 말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주(note) ①에 있는 대로 “I AM is here(I Am이 여기 있다)” 이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I AM’이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낸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고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13:33)”라고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때 경험했던 예수님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났던 ‘스스로 있는 자’ 그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제가 ‘I AM’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나는 선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herd, 11절)” 이 말씀이 ‘I AM’ 구절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I AM is the good shepherd”라고 해야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바로 ‘I AM’, ‘스스로 계시는 분’ 오늘 우리가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부르는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스스로 계시는 분’을 발음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네 개의 자음으로만 되어 있거든요. 나중에 모음을 붙여서 ‘여호와(Jehovah)’ 혹은 ‘야훼(Yahweh)’라고 발음을 했습니다. 발음을 할 수 없으니까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아도나이(Adonai)’라는 말에서 모음 네 개를 빌려와 발음을 했습니다. 그렇게 발음한 것이 ‘여호와’ 혹은 ‘야훼’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 말보다 더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윗이 쓴 시편 23편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시편 23:1-2)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He makes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the still waters.” (NKJV) 위대한 시인이었던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만족(滿足, satisfaction)’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한자 ‘만족’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만(滿)’자는 ‘가득차다’는 뜻인데, 왜 여기에 ‘발(足)’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아무튼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가득하다’는 말에 ‘발’이라는 말을 붙여 ‘만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도 그 설명을 들을 때는 왜 ‘발’을 뜻하는 ‘足’자를 썼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발(足)’자를 붙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발은 우리 몸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만족하다'는 말은 위로 머리에서부터 우리 몸 맨 끝에 있는 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에도 부족한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는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만족’을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 “Contentment should be the hallmark of my life, as I put me affairs in the hands of God(나의 일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반드시 만족이 주어진다).” 필립 켈러(W. Phillip Keller, 1920-1997, 케냐)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선교사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직접 8년 동안 목자의 삶을 경험하면서 발견한 것들을 책으로 썼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A Shepherd Looks at Psalm 23(한 목자가 본 시편 23편, 우리 말로 ‘양과 목자’로 번역됨)’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양들이 목자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배불리 먹고, 물을 마시고, 만족을 얻는 것처럼, 우리도 목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Yahweh).” (시편 144:15) 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하는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과 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참 복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아시나요? 왜냐하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시편 95편에 있는 말씀인데요. “다 와서 엎드려 주를 경배합시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이 기르는 양 떼들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6-7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장에서 사는 하나님의 양떼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the people of His pasture)이기 때문입니다.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 미국)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best and most beautiful things in the world cannot be seen or even touched-they must be felt with the heart(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헬렌 켈러는 볼 수 없는 ‘시각장애자’였고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자’였습니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해가 넘어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껴 알고 있었고,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장관을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마음으로 느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95편 말씀도 마음으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7절, 개역성경) 이 말씀이 가슴으로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이 기르시는 그 손의 양이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갓난 아기들이 엄마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자랍니다. 이 하나님이 누구인가요? 스스로 계시는 분,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났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제 그 야훼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자신을 ‘삯꾼(a hired hand)’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삯꾼’은 돈을 받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 주인은 양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마리 수를 세어서 모자라는 것은 목자가 물어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아 양이 잡혀 먹히거나 할 때는 목자가 그 양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0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나의 목적은 양들에게 풍요롭고 만족한 삶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나와 있고, Amplified Bible에는 “I ca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in abundance [to the full, till it overflows]”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차고 넘치도록 풍성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풍성한 생명’은 삶의 의미와 목적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조금 전에 소개했던 필립 켈러의 말인데요. “No pastor, no spiritual leader, is ever able to take his people any further than he himself has gone with God(어떤 목사나 영적 지도자도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 그의 말을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목사나 영적인 리더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가 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어떤 목사도, 영적인 리더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온전하게 하나님께로 인도할 ‘선한 목자’는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로마서 5:8)”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다윗은 나이가 어리고 전투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골리앗과의 싸움이 허락되지 않자 사울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던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을 물어 가면, 저는 그 놈들을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 냈습니다.” (사무엘상 17:34-35) 다윗은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선한 목자(a good shepherd)’였습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이신 예수님의 ‘모형(a copy)’ 혹은 ‘그림자(a shadow)’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잘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양들에 대한(about sheep)’ 정보를 안다는 말이 아니라, 양들의 특징을 알고, 그들의 버릇을 알고, 그들의 건강 상태를 알고, 심지어 양들의 이름까지 안다는 뜻입니다. 양들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t takes some of us a lifetime to learn that Christ, our Good Shepherd, knows exactly what He is doing with us. He understands us perfectly(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아신다는 것을 배우는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계신다).”

이 시간, 여러분의 관심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 돌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나를 알아본다(They know me).” (14절)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because they know his voice) 그의 뒤를 따른다.” (4절) 양들이 목자를 인격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도 우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음성을 모르면 그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다가 정말 우연히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습니다. 나이가 젊은 목자인데, 양 5-60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목자가 피곤했는지 잠깐 자리에 앉는 사이에 양들은 금방 여기 저기 흩어져 풀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양들이 멀리 가면 안 되니까 목자가 조약돌을 하나 집어 저만큼 던졌습니다. 그 이상은 가지 말라는 신호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목자가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니까 양들이 금방 목자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신기한 광경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선한 양’이 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선한 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다른 사람을 위한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목사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Life’s most persistent and urgent question is ‘What are you doing for others(삶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