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4-17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쉬운성경)

14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nake in the desert,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New International Version)

요한복음 3:16을 가리켜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보다 더 간단하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하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보다 더 알기 쉽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의 중심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獨生子, God’s only begotten son)’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말문이 막힙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코스모스(κόσμος)’입니다. 우주(universe)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코스모스’는 ‘whole creation(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길래 자기 아들을 세상을 보내셨을까? 아니,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셨길래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할 정도로 사랑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다가 100살이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90세였습니다. 이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2-3)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가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이 이해가 되시나요? 다른 것이면 몰라도 어떻게 100살이 되어서 낳은 그의 ‘독생자(his only begotten son)’를 바칠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아들인데, 다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for us)’ 희생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설령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우리 대신 죽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Very rarely will anyone die for a righteous man, though for a good man someone might possibly dare to die.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로마서 5:7-8)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다분히 ‘조건적인 사랑(conditional love)’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unconditional). 죄인들을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조건을 따져서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concrete).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 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친히 증명하셨습니다. 위에서 말한 로마서 5장 말씀에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8절)”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Christian Standard Bible에는 “But God proves his own love for us(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personal).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whoever believes in Him)’ 구원을 얻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 민족 단위로 심판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나라 전체를 심판하셨습니다. BC 720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BC 586년에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The New Covenant)’을 선포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예화를 들어 쉽게 ‘새로운 언약’을 설명했습니다.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아들의 입에서도 신물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예레미야는 (예수님 이전의) ‘옛 언약(The Old Covenant)’이 바로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이후의) ‘새 언약(The New Covenant)’에서는 신 포도를 먹은 사람의 이만 시게 된다는 것입니다(예레미야 31:29-30).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처럼 아버지가 믿으니까 아들은 믿지 않아도 구원을 얻는 일이 ‘새 언약’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파스 호 피스테우온 에이스 아우톤(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Everyone who believes in Him”입니다. "I believe in Jesus"라고 하면 예수님의 존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교훈과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나의 삶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I believe in Jesus”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기독교 변증가였던 C.S. Lewis가 한 말인데요. “I believe in Christianity as I believe that the Sun has risen, not only because I see it but because by it, I see everything else (나는 해가 뜬 것을 믿는다. 꼭 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해의 밝은 빛을 통해 다른 것들 것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독교를 믿는다).” —“Is Theology Poetry?” The Weight of Glory 정말 명언 아닙니까? C.S. Lewis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기독교 변증론자(apologist)였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꼭 해를 눈으로 보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해를 눈으로 보지 않아도) 해에서 나오는 빛을 통하여 다른 모든 사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어서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루이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는다면 반드시 변화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반드시 그 믿음이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맞습니까? 삶이 변하지 않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쓴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But That was no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에베소서 4:20, Good News Translation) 예수님을 올바로 배우고 믿는다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하나 더 볼까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보이겠습니다(I will show you my faith by my good deeds).” (야고보서 2:18)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Faith by itself isn't enough. Unless it produces good deeds, it is dead and useless,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믿음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에 선한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죽은 믿음이고 아무 소용없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17, 26)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많이 배운 지식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아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놓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전파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불러 절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도행전 4:18)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말씀이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공의회(the Sanhedrin)에 출석했던 제자들은 공회원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There is salvation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by which we must be saved).” (사도행전 4:12, Christian Standard Bible)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복음’을 전파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번역 성경들을 보면 ‘다른 복음’을 ‘a different gospel’ 혹은 ‘another gospel(KJB)’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과 다른 변질된 복음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4, 갈라디아서 1:6에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a different gospel that pretends to be the Good News(복음인 것처럼 보이는 다른 복음, New Living Translation)’이라고 설명을 붙인 성경도 있습니다. 

왜 이런 ‘다른 복음’이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복음이 너무 간단하고 쉽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다른 복음’은 그런 이유로 생긴 일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구원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줄 아세요?”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주장을 가르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교리가 쉬우면 우리가 얻는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교리가 어려우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나의 힘으로 얻는 구원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본성 속에 구원은 어렵게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과정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구원의 문이 좁아 극소수의 사람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라는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The Postmodernism)’에서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상대적인 가치만을 인정하는 시대적인 경향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시대적인 경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과거와 달리 영웅이 나오지 않습니다. 목사님들도 그렇습니다. 과거와 달리 성인으로 추앙받는 목사님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교리를 시대 착오적이라고 비판합니다. 기독교만 절대적이라는 주장은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하고, 서로 공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자들(pluralists)’의 주장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복음’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폴 니터(Paul Knitter)가 쓴 책 중에 “No Other Name(다른 이름은 없다고)?”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1985년에 출판된 책인데요. 이 책에 ‘A Critical Survey of Christian Attitudes Toward The World Religion(세계 종교에 대한 크리스천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조사)’ 이런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책 한 권만 읽으면 쉽게 다원주의자들이 되고 맙니다. 그만큼 설득력 있게 잘 쓴 책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올바로 알고 있습니까?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4-15절) 예수님께서 구태여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광야시대에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민수기 21:4-9).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자신도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십자가에 매달리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쉽고 간단합니까? 복음에는 인간의 노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다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노력으로 대치시키려는 인간적인 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