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5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쉬운성경)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15 No one lights a lamp and then puts it under a basket. Instead, a lamp is placed on a 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16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New Living Translation)

요즘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선한 영향력’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7절).” 그리고 이 말씀 앞에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예전에 최일도 목사님이 리뉴에 강사로 오셔서 이런 일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최 목사님이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을 듣던 중에 하용조 목사님이 자꾸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귀에 거슬려서 손을 들고 “목사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크리스천 잡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일도 목사님의 지적 때문인지 잡지 이름이 1999년 4월 호부터 ‘소금과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 ‘빛과 소금’이든지 ‘소금과 빛’이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Travis Scot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You will never influence the world by trying to be like it(세상을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결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 인사이트를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과 트렌드를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서 12:2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더 이상 세상의 유행을 본받지 말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하나님이 여러분을 변화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하여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진들을 보십시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처에 많은 위험들이 있습니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면서 힘들게 뛰어오르는데, 곰들이 입을 벌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연어들이 자기들이 태어난 강 상류로 가서 알을 낳는 것은 타고난 본능(本能, instinct)이라고 합니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평균 1,000마일(1600km)을 여행한다. 온갖 상처를 입으며 강물을 역류해 올라가는 고난을 감수한다. 연어는 알을 낳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알을 낳으면 그 생을 마감한다.” 연어의 이런 본능이 마치 이 시대의 사상과 유행을 본받지 않고 거슬러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크리스천들의 운명과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둘째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지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교제(fellowship)’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혼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같이 드리는 예배가 필요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 옆에 앉은 형제와 자매와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제의 필요성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제를 통하여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연대의식(連帶意識, solidarity)’을 갖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을 배우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입니다. 교회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다른 이유를 가지고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면 크리스천으로 가져야 할 바른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2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과 평안을 추구하기 바랍니다(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쁜 친구를 사귀면 좋은 습관도 나쁘게 됩니다.” 두 말씀 모두 교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어떤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세상의 소금(salt of the earth)’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에 대해서도 똑 같이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of’라는 전치사에 ‘~에 속한’이라는 뜻이 있지만 이 경우는 ‘~에 속한’이라는 뜻보다는 ‘specific identity within a category’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유지하고 있을 때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유지할 때 맛을 낼 수도 있고, 썩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또 소금의 ‘짠 맛’을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소금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 땀을 많이 흘리면 우리 몸이 짠 음료수나 짠 음식을 원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 산양들이 왜 이렇게 위험한 절벽에 붙어 있을까요? 놀라지 마세요. 바위에 붙어 있는 소금기를 빨아먹기 위해서 이 산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소금의 ‘짠 맛’이 소금의 정체성이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Danie & Jessi 두 사람이 공동으로 “How to Be a Christian Influencer(크리스천으로 영향력을 갖는 비결)”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선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먼저 “건전한 신학을 가져야 한다(Make sure you have good theology)”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완전히 공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건전하지 않으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건전한 신학(good theology)’은 마치 인정받는 회사에서 나온 제품과 같습니다. 저는 신학서적이나 신앙 서적을 살 때 제일 먼저 이 책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 출판사를 봅니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면 믿을 수 있는 그런 출판사들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그럴듯해 보여도 사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온라인에서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와, 이런 좋은 글이 있다니!” 하면서 저자가 누구인지 봤는데 누군지 이름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력을 봤더니 굉장한 이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가는 교회를 봤더니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일명 몰몬교)’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 교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이단 종교에 깊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의 글을 설교 시간에 인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믿음이 건전한 신학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희생(sacrifice) 정신’입니다. ‘희생’에 대하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ransom)’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내 준 대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고린도전서 6:20, 7:23) 이 은혜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희생’이라는 말이 갖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희생’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희생’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희생은 다른 말로 하면,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Kenneth Blanchard라는 사람의 말인데요. “The key to successful leadership today is influ-ence. not authority(오늘날 성공적인 리더십을 위한 핵심 단어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다).” 참 신기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한순간에 ‘권위주의’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어디에서도 ‘권위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권위주의 리더십’ 대신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말합니다. 구성원들을 내 몸같이 돌보고,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선한 행동(good deeds)’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16절)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선한 행동’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전통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베드로후서 1:9, 현대어 성경) ‘근시(近視, shortsighted)’는 가까운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먼 데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큰 그림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베드로는 ‘근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선한 행동’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구원의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모나리자’ ‘최후의 심판’ ‘메시야’ ‘천지창조’ 같은 작품들을 ‘걸작품(masterpiece)’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건전한 신학과 희생, 그리고 선한 행동, 이런 것들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나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교회를 지을 때 예수님 말씀 대로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지었습니다. 교회에서 종을 치면 온 동네에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비 콕스(Harvey Cox)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1965년부터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44년 간 하바드 신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1965)’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세속화되는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논의한 책입니다. 그가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그 책에서 다루었던 교권 세습 문제, 성장제일주의, 교회의 대형화 경쟁 등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오늘날 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Harvey Cox는 세속화된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 ‘익명성(anonymity)’을 들었습니다. Harvey Cox 말이 맞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군중 속에, 대중 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큰 대형 교회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산 위의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익명성’이라는 시대 정신과 싸워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