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5

1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서 3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입니다 5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오직 은혜로 사도의 직분을 받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널리 전함으로써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그분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쉬운성경)

1 This letter is from Paul, a slave of Christ Jesus, chosen by God to be an apostle and sent out to preach his Good News. 2 God promised this Good News long ago through his prophets in the holy Scriptures. 3 The Good News is about his Son. In his earthly life he was born into King David's family line. 4 and he was shown to be the Son of God when he was raised from the dea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is Jesus Christ our Lord. 5 Through Christ, God has given us the privilege and authority as apostles to tell Gentiles everywhere what God has done for them, so that they will believe and obey him, bringing glory to his name. (New Living Translation)

거룩한 주일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시는 교우분들을 이 시간 축복하고 싶습니다. 또한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는 분들의 예배의 현장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해 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무너진 나의 마음이 회복되어지는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귀한 은혜를 경험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일어나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함으로 고백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이들이 로마서 복음을 통해 변화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로마서 복음을 통해서 삶의 근본을 바꾸었습니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150 A.D.- 215 A.D), 이그나티우스(Saint Ignatius of Antioch; 70 A.D – 107 A.D), 저스틴(Justin Martyr 100 A.D - 165 A.D), 폴리캅(Polycarp 69 A.D - 155 A.D) 등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입니다. 교회의 아버지이지요. 그들의 생애에 대한 자료들은 부족하지만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로마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완전한 진리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임을 강조하며 기독교 역사속에서 순교자의 반열과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도 로마서의 복음을 사랑했습니다. 신학의 아버지 성 어거스틴(St. Augustinus, 354-430)은 로마서 13장 말씀을 통해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회심하였으며, 감리교 창설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 - 1791)는 1738년 런던의 어느 집회에서 로마서 서두를 읽고 설교하는 것을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서는 성경 전체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새 언약(즉 복음)의 가장 완벽한 개요’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로마서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배들의 생애에 영향을 미친 로마서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계시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쓰여질 당시 로마는 도적적으로 매우 부패했고 죄가 가득했지요. 옳고 그른 것이 혼돈되어 버렸고, 수없이 많은 부정이 횡행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에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십니다. 역사적 보면 이 하나님의 계획은 놀라운 섭리입니다. 당시 로마가 제국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복음이 온세계에 증거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현실의 눈으로 볼때에는 하나님 나라의 순교자들이 죽어진 것 같지만 결국 로마제국은 역사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말씀이 더욱 흥왕해  졌습니다. 

오늘날도 거대한 세속의 물결이 기독교 복음을 위협합니다. 이 시대는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라 말합니다. 상대적 진리가 편만해진 시대이지요. 절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진리로 삼는 것이 오늘날 시대 이념에 맞지 않고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절대’ 라는 말을 외치기 참 어려운 시대이지요. 우리 사회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누룩처럼 퍼진 자유주의 사상이 미국 땅에 이미 오랜 전부터 상륙했습니다. 신앙인들 조차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재들을 보는 눈을 잃어 버렸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출발점이 전적인 인간의 무능함에 있다는 생각들도 깨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 복잡해 진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림을 찾아 보았는데, 첫번째 그림을 보십시요. 마치 저마다 옳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갖지 않습니까? 두번째 그림은 낭만주의 러시아 화가 카를 브룔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라는 그림입니다.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인데요. 저는 아마도 소모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그 성 안에 의인이 한사람도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 안에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도 성적인 가치관에 있어서 다수의 생각이 시대적 흐름이 되고 풍조가 되어지게 되면 진리를 말하기가 어려워 지는 것처럼 당시도 도덕적 타락이 편만해 져 있었을 테니 옳은 것이 그른 것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것도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상대적 진리입니다. 상대적 진리가 편만해지면 예수님의 진리도 인간의 이념 안에 갇혀 버리게 되지요. 이것이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 다양한 복음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번영신학으로 시작된 탐욕과 욕망의 복음, 수많은 이단 사상들이 전하는 거짓 복음, 상대적 진리의 이념으로 인간과 신을 동등하게 여기는 이념적 복음, 진리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는 다원주의 복음 등 세속화 되어가는 물결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학을 무너뜨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대중적 복음일까요? 아니면 순수적 복음일까요?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수많은 군중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르심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 13 – 14) 좁은 길로 가는 이가 적은 이유는 분명 버려 할 것들이 많고, 낮은 자의 모습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예수의 종이라 소개 합니다.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주인과 종의 관계가 있어서, 종들은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무시당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종들은 스스로 신분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천한 노예의 신분이 세습이 되어지니 평생 살아가며 희망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종이라 하면 이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사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붙드십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스스로 하나님의 종 된 나 바울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의 은혜와 복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와 복을 경험한 바울은 당시 주인이던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대해 주라고 편지합니다.(빌레몬서 1:16) 이것이 빌레몬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종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형제 된 관계가 되었으니 너의 종 오네시모를 기독교인으로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종의 제도가 통용되던 사회였을 텐데 그 당시 바울은 주안에서 형제됨이 무엇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복음으로 변화 된 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도 보이지 않는 계층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공평한 사회를 외치는 것도 현실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더 깊어질수록 낮은 자의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 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리 예수님을 마음으로 닮아가는 장소이지요. 예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신격화 시키려는 내 마음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며,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려는 내 마음의 깨뜨림입니다. 

한주간도 세상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다가 주님의 날 예배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믿음 앞에 온전히 바로 섰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문제 앞에서도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성숙함으로 기도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들을 외면하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포장과 자기과시의 가면을 쓰고 살며, 신비와 거룩함이 가려진 우리의 모습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깨달은 한 사람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 보면 에티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고 있는 여왕의 내시가 예루살렘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는데 복음의 눈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큰소리로 읽어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오늘날이야 성경이 저렴하고 누구나 구입할 수 있다고 하지만 당시는 큰 파피루스나 양피지 재질에 기록된 성경이기에 값비싼 것이었지요. 왕실의 재무부 장관 정도의 직책이니까, 오늘날로 보면 몇 천만원 가치의 주석 성경을 구매해서 읽고 또 읽고 있지만 깨달음이 없고 없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돈으로 깨닫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성령님께서 빌립에게 나타나 ‘너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이 거리는 대략 44마일 정도의 거리인데, 빌립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 길에서 에티오피아 내시와 만남을 갖게 됩니다. 시간과 방향이 완벽한 타이밍이었기에 이 둘은 만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오차가 없는 것이지요.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치면 마음이 불안한 것처럼 평안함으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붙드는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현장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완전한 진리이신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에티오피아 내시가 복음을 깨닫고 길을 가다가 세례를 받게 되지요. 그리고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게 됩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아마도 자신의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겠습니까? 

행 8:29-31 _29 성령이 빌립에게 “저 마차로 가까이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31 그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마차에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부탁했습니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성경 구절로부터 시작해서 그 사람에게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쉬운성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복음에 대한  진리로 꽉 차 있기에, 온세상을 압도하는 진리는 역사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흘러갑니다. 순종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작은 순종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시는 분입니다. 루터에게 순종은 수도원을 떠나 종교개혁의 깃발을 드는 것이었고, 헨리 나우웬에게 순종은 하버드 대학 교수의 자리를 떠나서 토론토 장애인 공동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고 나니 이전에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자신이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었습니다. 

우리도 불완전한 세상이라는 도성과 천국의 도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죄와 시험을 이기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눈이 떠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의 마음은 외적으로, 내적으로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가지요. 하나님의 존재를 닮은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서 오염된 물을 마시는 것을 그치고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될 때에 비로소 새로운 여정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칭의’는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인생의 주인이 달리지는 변화의 사건입니다. 로마서를 쓴 바울은 이것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 말합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교우 여러분, 복음을 만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분열과 분쟁이 그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교우들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의 ‘복’은 히브리어로 ‘아쉬레’인데 이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인해 이미 복된 존재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소유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계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인식한 것이 삶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르심 받은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선택 받아 세워진 자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삶에 어떤 위기가 찾아오고 고난이 와도 흔들림 가운데에 종의 손을 잡아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새로운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푯대를 향해,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이 한 사람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미국 부흥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던 믿음의 거장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Jonathan Edwards 1703~1758) 그는 성령 체험이후 미국 교회의 회심의 불을 붙인 청교도 목사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회의를 품다가 확신을 갖게 된 말씀이 있는데, 바로 디모데 전서 1장 17절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 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확신을 품은 에드워즈는 스물 살 때 “나는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갖게 된 사람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위험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평탄할 길을 걷고 있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춰야 합니다. 하지만 순탄치 않는 길을 걷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우리는 갈급함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의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이지요.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미지근해진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시작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