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22-27

22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행하십시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앉아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23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도, 일어나면 금방 자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잊어 버립니다.  25 그러나 사람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살피는 사람은 들은 것을 잊어 버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27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십니다. (쉬운성경)

 

22 But don’t just listen to God’s word. You must do what it says. Otherwise, you are only fooling yourselves. 23 For if you listen to the word and don’t obey, it is like glancing at your face in a mirror. 24 You see yourself, walk away, and forget what you look like. 25 But if you look carefully into the perfect law that sets you free, and if you do what it says and don’t forget what you heard, then God will bless you for doing it. 26 If you claim to be religious but don’t control your tongue, you are fooling yourself, and your religion is worthless. 27 Pure and genuine religion in the sight of God the Father means caring for orphans and widows in their distress and refusing to let the world corrupt you. (New Living Translation)

 

 

C.S 루이스(1898-1963)가 쓴 헤아려 본 슬픔은 그가 59세에 결혼하고 4년 뒤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후 마주한 슬픔을 글로 풀어낸 책입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나서 개인의 실제적인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 이성적인 신앙은 가벼운 이론적인 혼란이 아니라 완전히 산산 조각이 나는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무게는 헤아릴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절망과 고통의 시간에 슬픈 마음의 틈 사이로 영원한 세계의 빛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구원의 의미를 더 자세히 깨닫게 됩니다. 고통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새로운 존재로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신비’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신비‘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이전에는 본질상 죄로 가득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떨어져 살다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한 실천적 변화의 첫 단계는 언어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세대 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MZ세대들은 줄임말을 사용합니다. ‘꾸안꾸가 무슨말인지 아시나요? ‘꾸민듯 안 꾸민듯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꾸꾸꾸는 어떤 뜻일까요? ‘꾸며도 꾸질 꾸질이랍니다. 한 단어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알잘딱깔센.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의 줄임말입니다. 이것 말고도 Z세대들이 쓰는 신조어가 많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감정을 전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 시대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신앙적 언어로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을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전공을 언어를 통해서 엿볼수 있게 됩니다. 공대생들과 대화할때 느껴지는 공학적 대화들이 있구요, 음대생들과 대화할때 느껴지는 예술적 감성적 언어의 표현이 있습니다. 언어는 그의 마음과 살아온 배경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프랑스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쟈크엘를(1912-1994)뒤틀려진 기독교란 책에서 실천이 빠진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것이 믿음생활인데, 우리에게 말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믿음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쓰여졌다고 추정합니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가 지상에 계실 때 그의 말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5절에 보면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야고보가 예수라는 형과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냈겠습니까? 그러나 야고보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난 이후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고 나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1)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자랑하지 않고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 더 영광됨을 알게 된것이지요. 이것이 믿음의 변화이고, 입술의 변화입니다.

 

야고보서는 부활하신 주님이 2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쓰여졌습니다. 당시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로 인해 유대 기독교인들은 흩어져 있었지요. 야고보는 당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가 주는 매력에 빠져 믿음의 실천이 상실되고 재물의 축적에만 관심을 쏟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이 있었기에 살아있는 믿음은 삶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상할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0년에 비해 더 빠른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사는 것은 물질과도 연결됩니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인생을 무한 질주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뚫고 오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22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행하십시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앉아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듣는 것은 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있어서 묵상이 중요합니다. 묵상의 원어적 의미는 곱씹는 것인데, 묵상을 통해 일상을 살아내고,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 갈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설교의 홍수 시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지요. 그러나 홍수가 나면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마실물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말씀의 지식은 풍부해지나 깊은 성찰이 없으면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많이 듣고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니까 성경적 지식은 많아졌습니다. 듣는 귀도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의 지식을 높이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씀이 내 삶으로 들어와 변화되는 삶을 만나야 합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지식은 아무리 쌓아도 내 마음에 온전한 기쁨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게 됩니다.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도록 말이지요.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너희의 마음이 썩고 부패해서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바리새파 사람들은  남의 얼굴은 잘보는데 자신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에 빠져 말씀이신 주님을 알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7:3-5)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의 히브리어 어근은파르쉬인데, “갈린 사람, 분리주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마음에 있는 죄를 먼저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묵상이 없으면 겉 사람과 속 사람이 멀어지는 이중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의 본성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나의 마음을 지켜낼 실력을 믿는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주께 올려드리고 주님의 마음을 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만을 절대 의존하는 존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3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고도, 일어나면 금방 자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잊어 버립니다.

 

성찰이 없는 세상은 무질서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자기를 속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내면에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은 더 깊어 질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심도 커지지만 불안감도 더 커져만 갈 것입니다. 더 큰 기대감이 주어질수록 더 큰 불안감이 찾아오는 것이죠. 사람들의 기대심리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인간의 연약함 아닙니까? 말씀의 거울 앞에 날마다 자신을 비춰보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실수하게 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데 자신을 고치고 일은 어렵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힐끗 비추기만 한다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 비난과 비판에는 능숙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비난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나의 마음이 고립되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5 그러나 사람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살피는 사람은 들은 것을 잊어 버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은 첫째가,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법예수의 복음입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1세기 유대 기독교인들이었기에 그들에게 익숙한 단어로 복음을 소개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흩어져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잊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환란과 핍박을 인간의 노력으로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천도 하나님의 구원에 의하여 감동을 주셔야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은 철저하게 죄악뿐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철저하게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행하고 인도해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완전한 법이신 그리스도만이 옛사람의 껍질을 벗고 속사람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해 보일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열심입니다. 선행과 공로로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은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이신 주님께서 그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26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개역개정으로 보면 126누구든지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재갈을 물린 말을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야생말들을 길들이게 되면 주인이 당기는 줄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아무리 빠르게 달리는 말이라 해도 재갈을 물린 말은 양손으로 줄을 당기면 멈추게 되고, 주인이 당기는 방향으로 뛰게 됩니다. 사진을 한번 보시지요. 말의 입에 2개의 금속막대를 연결해서 입속에 물리고 말을 컨트롤 하게 됩니다. 기수는 이렇게 잘 길들여진 말들과 교감을 이루며 말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몇해전 어느 선교사님이 자신의 책을 선물해주시면서 메세지 한줄을 써주셨는데, 그 글귀가 제 마음에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기쁨으로 안고 가는 부담이라는 글귀입니다.

참 어렵지요 기쁨은 가능한데 부담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함이 있었습니다. 보통 슬픔이라는 감정 뒤에 부담이라고 표현되어지는데, 기쁨과 부담이 어떻게 함께 갈수 있을까? 이 한줄이 저는 경건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기쁨으로 안고 가는 부담그 부담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내가 지켜야할 중요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는것은 주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람들의 삶의 무게, 외로움의 무게 아픔의 무게를 생각하며 기쁨을 나눠야 합니다.

 

이제 현대 기독교는 금욕주의의 위험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영향으로 구원을 위해 몸부림쳤지요. 웨슬리는 규칙주의자였습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며 열심을 다해 고행을 했지요. 이러한 모든 것은 종교적 열심인데, 열심으로 구원에 이를수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는 세속주의, 편리주의, 물질 만능주의로 인해 교회 안에도 편리주의 복음, 번영복음, 세속화 복음이 넘쳐납니다. 이러한 때에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경건의 원천이 누구신지?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7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안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돌보고 외면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태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믿음은 이 시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온유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 부터 떨어진 고아된 미성숙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릴 위해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시고 자녀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깨어진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져야 합니다.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안에 들어오면 이전에 느낄수 없었던 설레임과 기쁨이 나를 가득 채우는것입니다. 어떤 일을 만났을때 머리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삶은 때론 이론적으로 뚜렷하게 설명되지 않더라도  그 사랑 안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로마 제국의 가혹한 핍박으로 인하여 이미 참된 사랑과 교제를 상실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믿음을 실천하라고 교훈합니다. 개혁이 아니라 로마 사회의 폭력적 대항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랑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당시 어리석어 보였지만 이 사람들에 의해서 300년이 지난후 로마 제국이 기독교 복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지금도 복음을 듣고 삶의 변화된 자리에서 살아내는 삶은 작고 초라해 보일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속에서 느리고 답답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이 비록 작아 보이고 없어지는 것 같았지만 로마 제국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세속적인 것들은 중독성이 강합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에 중독이 되면 믿음이 파산하고 구원으로 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 잃어버린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래 사회는 보여지는 것들 가운데 자신을 속이는 일들이 더 빈번해 질것입니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구분도 어려워 질터이고,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하는 일도 더 어려워 질 것입니다. 이런 때 일수록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 눈이 열리는 복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깨달아지는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의 자아 그리고 나의 마음속 깊이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통제하지 못하는 생각과 마음은 언제든 위험이 따릅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인생의 주인으로 주님을 받아들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면 넘어져도 일어날 힘 회복할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한구절이라도 나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한주도 그 말씀 붙들고 살아 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전과 나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말씀의 나의 삶에 찾아 올 때에 분명 나의 마음이 이전과 다를것입니다. 삶의 실천과 함께 갈때 느끼는 그 온전한 기쁨이 우리의 삶속에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