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4-5, 12-17

4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5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기 시작하셨습니다.......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뒤에, 옷을 입고 다시 자리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행한 일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이해하겠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14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16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쉬운성경)

4 So he got up from the table, took off his robe, wrapped a towel around his waist, 5 and poured water into a basin. Then he began to wash the disciples' feet, drying them with the towel he had around him...... 12 After washing their feet, he put on his robe again and sat down and asked, "Do you understand what I was doing? 13 You call me `Teacher' and `Lord,' and you are right, because that's what I am. 14 And since I,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ought to wash each other's feet. 15 I have given you an example to follow. Do as I have done to you. 16 I tell you the truth, slaves are not greater than their master. Nor is the messenger more important than the one who sends the message. 17 Now that you know these things, God will bless you for doing them. (New Living Translation)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란 말이 있습니다. 환자에게 급격한 충격을 줌으로써 치료 효과를 얻는 방법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는 말씀을 읽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충격요법’을 쓰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이 그냥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공관복음(共觀福音, the Synoptic Gospel)’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실 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이 말씀이 나옵니다.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예수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것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한 종(servant)의 모습이었습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닦아주실 때까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발을 씻기도록 내 맡겼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주님, (어찌)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려고 하십니까?.....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6, 8절)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7, 8절) 이 말씀을 NIV 성경에서는 “Unless I wash you, you have no part with me”라고 번역했습니다. NLT 성경에는 “Unless I wash you, you won't belong to me”라고 번역했습니다. 둘 다 훌륭한 번역입니다.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f I don't wash you, you don't really belong to me(내가 너의 말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정말 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Good News Translation은 이 말씀을 “If I do not wash your feet, you will no longer be my disciple(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저는 더 이상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이 일이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an example of service)’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의 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주신 본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섬김’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그만큼 중요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10:45 말씀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기 위하여 왔다(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섬김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김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성 대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이 본성을 이기고 ‘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의 삶에는 5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섬김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의 삶은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섬기는 사람과 식탁에 앉은 사람 중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이냐? 당연히 식탁에 앉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사람으로 있다).” (누가복음 22:27) 식당의 종업원이 손님들에게 응대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바로 이 모습이 우리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은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Robert K. Greenleaf, 1904-1990)가 처음으로 주장한 리더십 스타일입니다. 그가 1977년에 ‘Servant Leadership’(종의 리더십)’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 ‘A Journey Into the Nature of Legitimate Power and Greatness(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의 본질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servant-leader is servant first, it begins with a natural feeling that one wants to serve, to serve first, as opposed to, wanting power, influence, fame, or wealth(섬기는 리더십은 섬기는 사람(servant)이 먼저인 리더십이다. 섬기는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자연스러운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힘과 영향력, 명성과 부를 원하는 리더십과는 정 반대이다).” 그린리프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게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견하고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 속에 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의 길이 들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리더십을 닮고 싶은 사람은 먼저 섬기는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꾸준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섬김에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말로만, 입으로만 말하는 섬김이 아니라 자신의 귀한 생명을 내 놓을 만큼 진정성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기 위하여 왔다(마가복음 10:45)”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주신 것은 섬김의 삶의 연장선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섬김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섬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4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선생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발을 씻겨줘야 해!” “나는 너희의 주님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발을 닦아줘야 해!” 예수님은 당연히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했면 어떻게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He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used to his own advantage,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그는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지 않고 종의 본성을 가지셨고 인간과 같이 되어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 (NIV, 빌립보서 2:6-7) 이 구절을 신학자들은 ‘The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겸손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43-44)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진정으로 높아지는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맞다는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오히려 반대로 그렇게 출세하려고 애쓰더니 마침내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리더십은 ‘self-seeking(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이기적인)’, ‘self-serving(자신을 섬기는)’, and ‘domineering(지배하는)’ 스타일의 리더십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깐 동안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참 인간의 길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길과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힘으로,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길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 길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Elisabeth Johanna Shepping(1880-1934, 독일계 미국인)을 아시지요? 우리 말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입니다. 미혼모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9살이 되어서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옵니다. 어머니로부터 냉대를 받은 쉐핑은 가까스로 간호학교에 들어가 간호사가 됩니다. 그리고 간호사로 일하는 틈틈이 뉴욕에 있는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1912년 32살의 나이에 간호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됩니다. 외국인이면서도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치마,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검정 고무신을 신으며, 쉐핑은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조선에서 쉐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조금 알려진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쉐핑에 대하여 이런 글을 썼습니다. “쉐핑은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사람들을 유익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쉐핑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한국에게 주었습니다. 그녀의 침대 머리 맡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 1930년경에 미국 장로교회는 전 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쉐핑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쉐핑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성공(SUCCESS)’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섬김(SETVICE)’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쉐핑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참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섯째로, 섬김의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17절) 이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축복입니다. 섬김의 삶은 누가 알아주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충격 요법’은 효과가 있었을까요? 여러분, 베드로가 쓴 편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기쁨으로 그들을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며, 돈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며, 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십시오(but being examples to the flock).” (베드로전서 5:2-3) 예수님 말씀 그대로 아닙니까?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절대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지도자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때마다 베드로를 바로잡아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충격요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의 ‘본(an example)’을 보여 주시면서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는데, 주님의 종인 우리가 당연히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섬김의 삶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면 여러분은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니까!”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지?” “왜 나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하지?”